릴로

“전하! 군기시 판관 이진은 미천한 기술적 재주를 믿고 임금의 총명을 가렸으며, 사적으로 국경의 병기를 기방에 유출하여 장난감처럼 다루었으니, 이는 백성들을 현혹하고 국가의 근간을 해치는 사술이옵니다! 당장 이진을 참형에 처하시고 가마터를 국유화하여 사대부들의 감시하에 두소서!”

한 자락의 바람도 통하지 않는 편전 앞뜰, 백색의 소복을 입은 사헌부와 사간원 대간들이 거적때기 위에 엎드려 울부짖는 소리가 대궐의 기와를 흔들었다. 맨 앞줄에 선 대북의 영수이자 원상(院相) 정인홍은 뼈만 남은 손으로 상소문을 높이 쳐들고 있었다. 그의 노기 어린 눈빛은 어좌에 앉은 광해군의 안색을 살피는 동시에, 계단 아래 서 있는 이진의 목덜미를 꿰뚫을 듯 매서웠다.

어전의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기방과 매향지에 신형 강강 조총을 유출하여 사술을 부렸다는 날조된 소문은 이미 도성 전체를 피비린내 나는 정쟁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뒤였다.

광해군의 번뜩이는 눈동자가 천천히 이진을 향했다. 왕의 안색에는 신경증적인 피로와 함께, 언제든 쓸모가 다한 사냥개를 처단할 준비가 되어 있는 냉혹함이 서려 있었다.

“이진.”

낮게 가라앉은 광해군의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대간들이 올린 연명 상소의 내용이 참으로 정연하구나. 군기시의 화기를 사사로이 유출하여 기녀들과 광대들에게 시험하였다는 조항은 국법으로 다스려도 삼족을 멸할 대죄다. 네 어찌 대답하겠느냐?”

이진은 셔츠 소매 끝에 묻은 붉은 흔적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젯밤 가마터에서 이이첨의 자객들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흘러내린 이혈(耳血)의 흔적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미래 무기 설계 데이터베이스’의 가상 시뮬레이터가 84%의 과부하 상태를 유지하며 뇌신경을 짓누르고 있었다. 관자놀이가 터질 듯한 고열이 밀려왔으나, 이진의 얼굴에는 단 한 줌의 감정적 동요도 일지 않았다. 그에게 정인홍의 분노나 대간들의 도덕적 규탄은 극복해야 할 공학적 불량 요소이자 제거해야 할 불순물에 불과했다.

이진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먼지 가득한 야철 가마터에서 단련된 듯 무겁고도 단단했다.

“전하, 대간들이 주장하는 바는 기술의 본질과 경제의 흐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맹목적인 기만일 뿐이옵니다.”

“무엇이라?”

정인홍이 고개를 치켜들며 사납게 눈을 부릅떴다.

“이 미천한 기술자가 감히 어전에서 사대부의 공론을 기만이라 칭하는가! 전하, 저 자의 오만함이 이미 조정을 능멸하고 있사옵니다!”

이진은 정인홍의 포효를 무시한 채, 품 안에서 두껍게 접힌 장부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 붉은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사적인 유통 기록이었다.

“원상대감께서는 신이 기방에서 사술을 부렸다고 하셨으나, 신이 그곳에서 행한 것은 사술이 아니라 평안도 영변 철광의 정련법을 완성하기 위한 극비의 화학적 실증 실험이었습니다.”

이진의 목소리는 편전에 모인 백관들의 귀에 송곳처럼 박혔다.

“평안도 영변에서 채굴되는 자철광은 황(S)과 인(P)의 성분이 지나치게 높아, 일반적인 조선의 토법 가마로는 제련할 수 없는 ‘똥철’에 불과했습니다.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조선의 모든 조총은 격발 시 폭발하여 아군의 목숨을 앗아가는 흉기가 될 뿐입니다. 신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서태린의 부친이 남긴 야철 일지를 분석하였고, 마침내 해법을 찾아내었습니다.”

이진은 광해군을 똑바로 응시했다.

“철광석 내부의 고농도 황 성분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이산화황을 가스로 기화시켜 분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신은 석회석을 구워 만든 소석회(CaO)를 슬래그제로 가마에 투입하는 열화학적 공정을 고안해 냈습니다. 기방의 고온 화로와 대형 석회가마는 도성 내에서 사대부들의 이권망을 피해 가장 은밀하고 신속하게 고온 반응을 시험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신이 기방에서 행한 것은 국경의 병기를 녹여내어 완벽한 강철로 거듭나게 하기 위한 제련 실험이었을 뿐이옵니다.” (복선 1 회수)

광해군의 눈썹이 꿈틀했다. 실리를 숭상하는 왕의 뇌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불량 철광석을 완벽한 연철로 정화하는 기술. 그것이 사실이라면 국경의 군사력을 단숨에 배가시킬 수 있는 신의 한 수였다.

그러나 정인홍은 물러서지 않았다.

“궤변이다! 아무리 기술적 실증이라 한들, 사사로이 무기를 다루고 조정을 기만하는 자를 살려둘 수는 없다. 대명률에 이르기를, 군기시의 화기를 사사로이 유출하는 자는 예외 없이 참형에 처한다 하였느니라!”

이진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철저한 기술관료적 공리주의자인 그에게, 율법은 정적의 목을 조르기 위해 정교하게 설계된 기계 장치와 다름없었다.

“대명률을 논하셨습니까, 원상대감?”

이진은 들고 있던 장부를 바닥에 내던졌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장부가 펼쳐지며 수많은 보부상과 서리들의 이름이 적힌 장부가 실체를 드러냈다.

“대명률을 그리도 잘 아시는 분께서, 대감의 자금줄이자 이이첨 대감의 수하인 도접장 길준이 군기시에 기준 미달의 불량 동철을 납품하며 장부를 조작해 온 사실은 어찌 묵인하셨습니까?” (복선 2 회수)

편전 안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이이첨의 낯빛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갔다.

“이 장부는 도접장 길준이 사적으로 군기시의 물자를 횡령하고 역관들과 결탁하여 사리사욕을 채운 명백한 물증입니다. 대명률 ‘장오죄(뇌물 및 장물죄)’에 따르면, 관청의 물자를 사사로이 편취하고 불량 무기를 납품하여 군율을 어지럽힌 자는 그 배후에 있는 자까지 연좌하여 참형에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원상대감께서는 도대체 어떤 대의명분으로 이 거대한 부정부패를 가려오신 것입니까?”

이진의 폭로에 김상헌을 비롯한 척화파 대신들조차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도덕적 순수성을 목숨처럼 여기던 사대부들의 이권망이 조정 한복판에서 문자 그대로 발가벗겨진 순간이었다.

정인홍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이진을 가리켰다.

“네, 네 이놈...! 감히 사사로운 장부 쪼가리로 조정의 중신을 모함하려 드느냐! 이것은 역모다! 주상전하, 저 간사한 자의 목을 당장 베어 기둥에 걸으소서!”

“역모라 하셨습니까?”

이진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낮아졌다. 그것은 사냥감의 숨통을 끊기 직전의 맹수가 내는 서늘한 울음소리였다.

“진짜 역모가 무엇인지 보여드리지요.”

이진은 소매 안에서 또 다른 서판과 수십 명의 도감 장인들이 연서명한 문서를 꺼내 광해군의 어전 앞으로 높이 쳐들었다.

“대명률 병률 군기 조에 이르기를, ‘천자국 이외의 국가에서 사사로이 무기를 주해(鑄解)하고 주조하는 자는 역모에 참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조선의 국법인 경국대전 역시 사가의 무기 밀조를 엄격히 금하고 있지요.”

이진은 정인홍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원상대감의 가신들이 한양 도성 외곽, 춘천의 숨겨진 가마터에서 사적으로 야철 장인들을 고용해 사철을 야장하고 조총과 환도를 밀조해 온 사실을 아십니까? 서태린과 군기시 소속 장인들이 목숨을 걸고 확보한 이 연서명과 물증들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복선 3 회수)

정인홍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의 가신들이 몰래 사적인 가마를 짓고 무기를 밀조해 온 것은 사실이었다. 사대부들의 사적 무력을 유지하고 야철 이권을 독점하기 위한 은밀한 행위였으나, 대명률의 잣대를 들이대는 순간 그것은 가차 없는 ‘사무기 주조 죄’, 즉 역모로 둔갑하는 칼날이었다.

조정을 가득 채웠던 수백 장의 사간원 상소문이 허무하게 백지가 되는 순간이었다. 최고 도덕 권위자임을 천명하며 이진을 패륜아로 몰아가던 정인홍 본인이, 실상은 법령의 가장 엄중한 금기인 역모를 획책해 왔음이 명백히 드러난 것이다.

“이... 이것은 날조다! 가신들의 독단일 뿐, 나는 아는 바가 없다!”

정인홍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으나, 이미 늦었다.

어좌에 앉은 광해군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의 친위 군권을 위협하던 대북 세력의 거두를 합법적으로 쳐낼 수 있는 완벽한 명분이 이진의 손에 의해 쥐어진 것이다.

“원상.”

광해군의 목소리에는 이제 한 줌의 자비도 남아있지 않았다.

“네 가신들이 사사로이 가마를 짓고 무기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과인의 목을 겨눈 칼날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사헌부는 당장 정인홍의 가신들을 압송하고, 이 사건에 연루된 대북 세력 모두를 역모 죄로 국문하라!”

“전하! 전하! 억울하옵니다! 저 기술자의 사술에 놀아나시는 것이옵니다!”

의금부 금군들이 편전으로 들이닥쳐 정인홍의 관대를 벗기고 그를 거칠게 끌고 나갔다. 그를 따르던 수십 명의 대간들 역시 비명을 지르며 질질 끌려갔다. 뜰에 가득했던 백색의 소복들이 순식간에 붉은 피빛의 옥사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이진은 그 광경을 아무런 감흥 없이 지켜보았다. 사람을 부품과 재료로만 여기는 그의 냉혹한 기술관료적 공리주의 관점에서, 정인홍 일파의 몰락은 단지 가마터의 온도를 올리기 위해 불순물을 걸러내는 정화 작업에 불과했다.

편전 한편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서태린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품 안에서 아비의 바랜 야철 일지를 꼭 쥐었다.

‘아버지... 마침내 가문의 역모 누명을 벗겼습니다. 저들이 사사로이 무기를 만들며 우리 가문을 짓밟았던 그 법리로, 도리어 저들이 파멸하였습니다.’

서태린은 이진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차가운 기계 같은 사내였으나, 그가 설계한 서늘한 법리의 덫은 아비의 영전에 바칠 가장 완벽한 씻김굿이 되어 주었다. 그녀는 이진에게 깊은 경외와 함께, 거부할 수 없는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국문장의 비명 소리가 대궐을 가득 채우던 바로 그때였다.

편전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흙먼지와 피로 범벅이 된 파발마의 군관이 어전 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주, 주상전하! 급보옵니다!”

군관의 목소리는 공포로 찢겨 있었다.

“정인홍 일파의 압송 과정에서 발생한 혼란을 틈타, 도성 내에 은거해 있던 후금의 정포 세작단이 군기시 야철 공방을 급습하였사옵니다! 저들이 판관 나리가 작성하신 가마터 제련 설계 금책도와 고압 강선 조총의 핵심 주조 비기를 탈취하여 평안도 국경 북벽으로 도주하였사옵니다!”

순간, 이진의 눈동자가 차갑게 굳어졌다.

머릿속 시뮬레이터의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후금의 손에 미래 병기의 청사진이 들어간다면, 조선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세력도가 파천황의 파국으로 치달을 터였다.

조정을 뒤흔든 정쟁의 승리가 채 가시기 전에, 북방의 거대한 전쟁 본능이 이진의 목덜미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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