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회장님! 정신 차리십시오, 회장님!"

귓가를 찢는 보좌관들의 비명이 아득한 수면 아래의 소음처럼 멀어졌다. 아드리안 본 발렌타인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가, 이내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심장이 흉벽을 뚫고 나올 것처럼 요동쳤다. 가슴을 쥐어짜는 압박감 속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제2밀무대의 사령 보루 벽면에 붙어 있던 검은 휘장이었다.

[원탁의 해석자는 항상 지켜본다.]

그 피처럼 붉은 글씨가 아드리안의 무결한 질서 세계를 처참하게 조각내고 있었다.

***

사흘 뒤.

학생회장 개인 집무실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마에 흰 붕대를 감은 아드리안은 집무 책상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의 눈밑에는 거뭇한 음영이 짙게 깔려 있었고, 서류를 쥔 손가락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다시 한번 보고해라."

갈라진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비서가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서류를 넘겼다.

"그, 그러니까…… 제2밀무대를 포함한 학생회 비밀 초참호 기지 세 곳이 완전히 궤멸되었습니다. 상대는 침투 경로의 감시 결계가 지닌 미세한 오차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돌파했습니다. 마치 처음부터 설계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드리안의 어금니가 으스러질 듯 맞물렸다.

"누가 설계도를 유출했단 말이냐? 내부의 배신자라도 있다는 건가?"

"그게 아닙니다. 습격자들의 동선을 역추적해 본 결과…… 그들이 움직인 완벽한 침투 좌표는, 며칠 전 엘리엇 드 벨레로폰이 도서관 지리지에 흘린 침 자국 자국이었습니다."

"뭐?"

"엘리엇이 잠결에 침을 흘려 젖게 만든 페이지 번호가 정확히 '7, 42, 109'였습니다. 실비아 라인하르트를 필두로 한 '원탁의 해석자들'이 이 세 숫자를 위도, 경도, 그리고 고도 법칙으로 변환해 해독해 낸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괴주의 위대한 묵시록이라 부르며……."

아드리안은 실소를 터뜨렸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왔다.

고작 도서관에서 처자빠져 자다가 흘린 타액 자국 세 개라고? 그것이 학생회가 자랑하는 절대 보안 기지의 좌표와 소수점 아래 단위까지 일치했다는 말인가?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연이라는 단어로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정교하고 잔인한 수학적 도발이었다.

'엘리엇 드 벨레로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척, 가장 무기력한 표정으로 의자에 눕다시피 앉아 있던 그 신입생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침을 흘리는 행위조차 고도의 계산 하에 실행한 것이다. 학생회의 오만함을 비웃고, 자신들의 안방을 안방처럼 드나들 수 있다는 경고를 날리기 위해.

"괴물 같은 놈. 나를 완전히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굴리고 있었군."

아드리안의 손가락이 책상 유리를 강하게 두드렸다. 결벽증에 가까운 그의 질서 본능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적의 정체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그 기만적인 무기력함의 껍데기를 벗겨내야만 했다.

"오늘 오후에 예정된 정화 야외 훈련 일정을 가져와라."

"예? 하지만 회장님,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으셨……."

"시끄럽다. '아비시니아 지옥 유적 실습'의 특별 현장 감독관으로 내가 직접 참가하겠다. 그리고……."

아드리안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엘리엇 드 벨레로폰. 그자를 내 직속 감시 조로 강제 편입시켜라. 내 눈앞에서 단 일 인치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

"아…… 집에 가고 싶다."

엘리엇은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전신에서 무기력한 오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지금 아비시니아 지옥 유적의 입구에 서 있었다. 사방에서 풍기는 퀴퀴한 흙 냄새와 축축한 마력의 기운이 그의 극심한 마력 과민증을 자극했다. 피부가 간지러웠다. 만사가 귀찮아 눈을 깜빡이는 시간조차 아까워하는 그에게, 이런 강제 야외 실습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엘리엇 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런 험난한 유적 실습조차 개의치 않으시고 오직 우주의 흐름을 관조하고 계시는군요!"

옆에서 실비아가 수첩과 깃펜을 든 채 눈을 반짝이며 서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괴주의 묵시록을 해독해 낸 신도의 맹목적인 감격이 서려 있었다.

"……시끄러워."

엘리엇은 대답하기도 귀찮아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목에는 여전히 반짝임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싸구려 구리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마력 전도를 저하시켜 폭주를 막아주는 유일한 생명줄이자, 제국의 경제 파탄을 막아주는 안전장치였다.

'내 16시간 수면 계획이 고작 저 학생회장의 분풀이 때문에 망가지다니.'

엘리엇은 저 멀리서 매서운 눈초리로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아드리안을 힐끗 보았다.

최근 베르너 녀석이 자신이 잠결에 흘린 빈정거림을 듣고 하급 마나 광산들을 헐값에 쓸어 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덕에 제국의 마나스톤 시장이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엘리엇 본인은 그저 기숙사 구석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고 싶을 뿐이었다.

실제로 그의 오른쪽 겨드랑이 사이에는 기숙사에서 고이 챙겨온 하늘색 오리털 미니 이불이 소중하게 끼워져 있었다. 피곤하면 언제 어디서든 누워 자기 위한 그의 은퇴 필수품이었다.

"훈련을 시작한다. 대열을 유지해라."

아드리안의 냉정한 목소리와 함께 학생회 수색대원들이 유적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엘리엇은 목뼈가 부러진 인형처럼 흐느적거리며 맨 뒤에서 쫓아갔다.

유적 내부는 음산했다. 붉은색 마나가 고인 웅덩이들이 발밑에서 출렁였고, 벽면에는 고대의 기괴한 문양들이 가득했다. 아드리안은 걸어가면서도 끊임없이 엘리엇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한 걸음 내딛는 각도, 이불을 쥐고 있는 손가락의 미세한 떨림…… 모두 인과율을 계산한 움직임인가? 내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혼돈 전술일지도 모른다. 속지 않겠다.'

아드리안의 뇌내 망상이 풀가동되는 사이, 일행은 유적의 가장 깊숙한 중심부에 도달했다.

그때였다.

구오오오오-!

대지가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유적 천장에서 거대한 돌가루와 흙더미가 비 오듯 쏟아졌다.

"적습! 방어 대형을 갖춰라!"

아드리안이 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수색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마법 장벽을 전개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마법은 채 형태를 갖추기도 전에 허공에서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콰아아앙!

유적 중심부의 마력 노드가 붉은 빛을 뿜으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 왜곡된 차원의 틈새를 찢고, 거대한 그림자가 강림했다.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날개, 붉은 서치라이트처럼 번뜩이는 안광, 주변의 물리 법칙을 뒤흔드는 무자비한 마나 폭풍.

"고대 돌연변이…… 가고일 보스다!"

한 대원이 절망적인 비명을 질렀다.

가고일이 포효할 때마다 사방으로 무시무시한 '마나 반전 장벽'이 휘몰아쳤다. 대원들이 시전한 마법 공식이 역류하여 시전자들의 가슴을 타격했다.

"윽……! 마법 수식이…… 통하지 않아!"

아드리안 역시 자신의 '질서' 마법이 가고일의 장벽에 부딪혀 무력하게 산화하는 것을 보며 이가 갈렸다. 가고일이 날개를 크게 휘두르자, 엄청난 충격파와 함께 유적의 출입구가 거대한 돌벽 아래 완전히 갇혀버렸다. 완벽한 고립이었다.

"모두 물러서라! 물리적인 타격으로 장벽의 빈틈을 만든다!"

아드리안이 검기를 끌어올리며 소리쳤지만, 가고일의 압도적인 질량과 속도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거대한 석재 발톱이 지면을 내리칠 때마다 대원들이 피를 흘리며 나가떨어졌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엘리엇은 오직 한 가지 문제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먼지.'

가고일이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자욱한 흙먼지와 시커먼 검댕이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그리고 그 더러운 먼지 바람이, 엘리엇이 그토록 아끼는 하늘색 오리털 미니 이불을 향해 무섭게 돌진하고 있었다.

이불에 먼지가 묻으면 빨아야 한다. 빨래는 귀찮다. 건조는 더 귀찮다. 그것은 완벽한 은퇴 생활의 평화를 깨뜨리는 치명적인 재앙이었다.

"귀찮게 시리……."

엘리엇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성가신 날파리 하나를 쫓아버리듯, 그는 겨드랑이에 이불을 꽉 낀 채 오른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대단한 마법을 쓸 필요도 없었다. 마력을 단 0.0001g이라도 대량으로 소모했다간 제국의 마나스톤 유통망이 마비되어 베르너가 사들인 광산들이 폭락하고, 결국 자신의 연금마저 날아갈 터였다.

그는 오직 인과율의 아주 사소한 균형만을 비틀기로 했다.

가고일이 다음 도약을 위해 왼발에 힘을 주는 그 찰나의 타이밍.

팅-.

맑고 가벼운 핑거 스냅 소리가 마나 폭풍의 굉음 사이로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그 순간, 가고일의 거대한 몸체를 지탱하던 물리 법칙이 송두리째 뒤틀렸다.

가고일이 날개를 펼쳐 도약하려던 순간, 지면과 발바닥 사이의 마찰계수가 완벽한 제로(0)로 수렴했다. 동시에 가고일 내부의 중력 중심축이 인과율 조율에 의해 반대 방향으로 전도되었다.

"크르르……? 어, 윽?!"

가고일의 안광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서렸다. 도약하려던 다리는 미끄러졌고, 날개의 추진력은 엉뚱한 방향으로 작용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거인의 손이 가고일의 발목을 붙잡고 허공에서 한 바퀴 돌려버린 것 같았다. 거대한 고대 보스는 공중에서 기괴하게 제비넘기를 하더니, 지면을 향해 수직으로 추락했다.

그것도 가장 취약한 부위인 머리부터.

콰아아아앙!

소름 끼치는 파열음과 함께 먼지가 사방으로 튀었다. 가고일의 거대한 무게를 고스란히 지탱한 목뼈가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완벽하게 바스러졌다.

고대 돌연변이 가고일 보스는 단 한 번의 공격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제 무게와 중력의 모순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대가리를 깨뜨려 자멸해 버렸다.

유적 내부에는 들이쉬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이 감돌았다.

"……어?"

아드리안은 검을 쥔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정교한 두뇌가 눈앞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회전했지만, 어떠한 마법적 공식으로도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다.

어떠한 마력 파동도 없었다. 대단한 주문의 영창도 없었다.

그저 저 나른한 신입생이 손가락을 단 한 번 '팅' 하고 튕겼을 뿐이다. 그 가벼운 울림 한 번에 고대의 대재앙이 알아서 목뼈를 부러뜨리고 자폭했다.

"이것이…… 괴주의 힘인가……."

아드리안의 전신에 소름이 돋아났다. 마나 반전 장벽조차 엘리엇의 '인과율 비틀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일구어놓은 질서가 얼마나 하찮은 먼지 같은 것인지 다시 한번 뼈저리게 깨달았다.

실비아는 이미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아…… 괴주님……! 손가락 끝의 파동 하나로 우주의 중력 법칙을 재정의하시다니……! 이 어찌나 은혜롭고 무자비한 심판이신지……!"

엘리엇은 사람들의 시선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오리털 미니 이불을 꼬옥 껴안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다행히 이불은 한 톨의 먼지도 묻지 않고 무사했다.

"피곤해……."

엘리엇은 바닥에 누워 잠들 준비를 하려 했다.

스스스스-.

목뼈가 깨진 가고일의 거대한 석재 몸체가 붉은색 재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가고일의 마핵이 있던 자판 영지의 중심에서, 기이한 빛이 번쩍였다.

황금빛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진 고대 '수호자의 열쇠'였다. 유적의 모든 비밀 통로와 숨겨진 보물고를 열 수 있는 전설의 아티팩트.

그 열쇠가 허공으로 팅, 하고 튕겨 올랐다.

아드리안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열쇠를 확보해야 했다. 하지만 그가 발을 내딛기도 전에, 열쇠는 기이한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날아갔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혹은 그 주인을 알아본 것처럼.

황금빛 열쇠는 바닥에 누우려던 엘리엇의 느슨한 건조 바지 주머니 속으로 슥 미끄러지듯 빨려 들어갔다.

찰랑-.

주머니 속에서 무거운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

엘리엇은 주머니가 갑자기 묵직해지자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것을 꺼내어 확인하는 것조차 귀찮아 그저 눈을 감아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드리안의 호흡이 완전히 멎었다.

'유적의 수호자마저 스스로 목숨을 바쳐 열쇠를 상납하게 만들다니……! 이 모든 것이 그의 계획대로였단 말인가?!'

전율과 공포, 그리고 경외감이 아드리안의 뇌리를 세차게 강타했다. 완벽한 질서의 지배자가, 마침내 보이지 않는 괴주의 심연 앞에 무릎을 꿇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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