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괴주님의 뜻대로."

지하 회담장을 채운 나직한 맹세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촛불조차 숨을 죽인 어둠 속에서 실비아 라인하르트의 눈동자가 기이한 열기로 타올랐다. 그녀의 가녀린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오래된 지리지 사본의 세 페이지였다. 젖었다가 말라붙어 쭈글쭈글해진 종이 표면 위로, 정교하게 복사된 마법 기하학의 선들이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원탁의 해석자들은 숨을 들이켰다. 아카데미의 내로라하는 천재 마법학도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그들의 시선은 오직 실비아의 손끝에 집중되었다.

"실비아 님."

구석에 앉아 있던 천재 기하학도 로안이 안경을 지켜올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것이 정말…… 괴주님께서 도서관에 남기고 가신 암호란 말입니까? 아무리 보아도 단순한 얼룩처럼 보입니다만."

"단순한 얼룩?"

실비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질문한 자의 무지를 가엽게 여기는 차가운 자비심이 묻어났다.

"로안, 네 좁은 시야로는 그렇게 보이겠지. 하지만 괴주님의 모든 거동에는 우주의 인과가 깃들어 있다. 그분께서 침을 흘리며 주무신 이 세 페이지의 번호를 봐라. 7, 42, 110이 아닌 109다. 왜 하필 이 불규칙한 숫자의 나열일까?"

그녀가 허공에 손짓을 하자, 마력으로 빚어진 푸른색 입체 지도가 허공에 떠올랐다. 헬리오스 황립 마법 아카데미의 전체 전경을 축소해 놓은 완벽한 홀로그램이었다.

"7페이지는 아카데미 서쪽의 고대 지층을 다루고 있지. 42페이지는 남부의 행정 구역, 109페이지는 북부의 버려진 광산 지대다. 이 세 지점을 단순한 평면이 아닌, 입체적인 마나 흐름의 파동으로 치환하여 삼각 격자로 연결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아나?"

실비아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세 줄기의 마력 선이 허공의 지도 위에서 교차했다. 세 선이 만나는 순간, 지도 상의 특정 구역 세 군데가 붉은색 빛을 발하며 선명하게 드러났다.

"아……!"

좌중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베르너 로젠버그가 마른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금빛 가득한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곳들은…… 학생회가 아카데미 전체를 감시하기 위해 은밀히 구축해 둔 소형 마나 제어 거점들이 아닙니까? 아드리안이 철통같이 숨겨두었다던 그 밀무대들의 위치입니다!"

"그렇다."

실비아의 목소리가 확신에 차 울려 퍼졌다.

"아드리안 본 발렌타인은 아카데미를 완벽한 통제하에 두기 위해 이 세 곳에 감시 장벽의 중추를 심어두었다. 자신이 설계한 수학적 공식이 무결하다고 믿으면서 말이지. 하지만 괴주님께서는 도서관에서 단 한 번의 낮잠을 주무시는 동안, 그 오만한 질서의 틈새를 완전히 간파하셨다. 이 세 좌표는 아드리안의 감시망이 서로의 마력을 간섭하여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는 '인과의 맹점'이다."

"믿을 수가 없군……."

한 마도사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베고 주무신 것만으로, 학생회장이 수년에 걸쳐 완성한 감시 결계의 치명적인 구멍을 찾아내셨단 말인가? 그것도 완벽한 좌표로?"

실비아가 지리지 사본을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마치 신이 내린 성궤를 다루듯 극진한 태도였다.

"괴주님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세상을 조율하신다. 일전에 입학식 때 그분께서 차고 계시던 그 조잡한 구리 목걸이를 기억하나? 아무런 마력도 흐르지 않는 쓰레기처럼 보였겠지만, 그 목걸이의 미세한 구리 고리 틈새는 아카데미 대결계의 마핵 주파수를 정확히 차단하도록 뒤틀려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지."

실비아는 베르너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베르너, 네가 괴주님의 무심한 잠꼬대를 듣고 하급 마나 광산들을 사들였을 때, 우리는 그것이 단순한 투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보아라. 그 하급 광산들이야말로 제국의 마나 흐름을 떠받치는 숨은 기둥이었다. 괴주님의 모든 안배는 이토록 정교하고 거대하다. 우리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정밀한 공식으로 세상을 움직이고 계신 거다."

베르너는 깊은 감동에 젖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괴주 엘리엇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에 제국의 경제와 아카데미의 권력 지도가 뒤바뀌고 있었다. 이 위대한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전율이 일었다.

"그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군요."

베르너가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괴주님의 안식을 방해하는 아드리안의 눈과 귀를 멀게 만드는 것."

"정확하다."

실비아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식었다.

"오늘 밤, 우리는 이 세 좌표를 타격한다. 괴주님께서 친히 길을 열어주셨으니, 우리는 그저 발걸음을 옮기기만 하면 된다. 단, 괴주님의 성품을 잊지 마라. 그분께서는 불필요한 마력의 낭비와 소란을 극도로 싫어하신다. 최소한의 힘으로, 가장 조용하게, 적들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진압한다."

"넷!"

해석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어둠 속에서 그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며 소리 없이 흩어졌다.

***

같은 시각, 아카데미 서쪽 숲속에 은밀하게 숨겨진 학생회 제1 감시 초참호.

차가운 철제 벽으로 둘러싸인 내부에서 세 명의 학생회 엘리트 마도사들이 마법 스크린을 주시하고 있었다. 스크린 위에는 아카데미 기숙사 구역의 마나 흐름이 실시간으로 도식화되어 흐르고 있었다.

"이상 무. 결계의 마나 밀도는 99.8%를 유지 중이다."

한 마도사가 하품을 삼키며 기록판에 수치를 적어 내려갔다.

"회장님의 공식은 정말이지 빈틈이 없어. 이 정도 감시망이면 쥐새끼 한 마리가 낙엽을 밟는 파동까지 감지할 수 있지."

"그러게 말이야. 특히 최근에 입학한 그 수상한 신입생, 엘리엇 드 벨레로폰인가 하는 놈을 집중 감시하라고 하셨는데…… 그 녀석은 하루 종일 누워만 있더군. 도대체 회장님은 왜 그런 게으름뱅이를 경계하시는 걸까?"

"쉿, 회장님의 깊은 뜻을 우리가 어찌 알겠나. 그 흐트러진 태도 자체가 우리 학생회의 질서를 뒤흔들려는 고도의 무질서 교란 작전일 수도 있지. 긴장 늦추지 마라."

그들이 대화를 나누던 바로 그 순간.

아무런 경고음도 울리지 않았다. 마법 스크린의 경보 장치도 침묵을 지켰다.

다만, 초참호 내부의 공기가 갑자기 무겁게 내려앉았다. 촛불의 불꽃이 파란색으로 변하더니, 이내 연기도 남기지 않고 스르륵 꺼져 버렸다.

"어……? 마나가……?"

기록판을 들고 있던 마도사의 손에서 펜이 툭 떨어졌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 끝을 움직이려 했으나, 몸의 마나가 완전히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체내의 마나 순환이 완벽하게 정지해 버린 것이다. 숨을 쉬는 것조차 무거운 돌을 가슴에 얹은 것처럼 답답해졌다.

"이, 이게 무슨……."

경악한 마도사가 동료들을 바라보았으나, 그들 역시 공포에 질린 눈으로 허공을 응시한 채 굳어 있었다.

초참호의 굳게 닫힌 철문이 소리도 없이 안쪽으로 녹아내리듯 열렸다. 어둠을 헤치고 걸어 들어온 것은 검은 로브를 깊게 눌러쓴 무리들이었다. 그들의 중심에 선 실비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주문을 읊조렸다.

"『침묵의 성역(Silent Sanctuary)』."

괴주님이 흘리신 7페이지의 좌표에서 유도해 낸 완벽한 마나 역전 주파수. 그것은 아드리안이 설계한 감시 결계의 마나를 스스로 상쇄시켜 소멸하게 만드는 청소기 같은 권능이었다.

웅웅거리던 마법 장치들이 일제히 빛을 잃고 꺼졌다. 단 한 번의 폭발음도, 단 한 줄기의 비명도 없었다. 학생회의 정예 마도사들은 자신들이 어떤 마법에 당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마나 결핍으로 인한 가벼운 현기증과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제1기지, 확보 완료."

실비아의 뒤에 서 있던 급진주의 마도사가 나직하게 보고했다.

"사상자는 없습니다. 괴주님의 침묵의 미학에 어긋나지 않도록,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완벽하게 무력화했습니다."

"훌륭하다."

실비아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 42페이지의 제2기지다. 아드리안이 가장 아끼는 밀무대가 있는 곳이지. 그곳 역시 괴주님의 공식 앞에서는 무력한 모래성에 불과하다. 지체 없이 이동한다."

그들의 움직임은 바람보다 빨랐고, 그림자보다 은밀했다.

그 시각, 제2기지와 제3기지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었다. 아드리안이 아카데미의 절대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투입해 구축한 비밀 감지 보루들은, 괴주가 던진 세 개의 숫자 앞바다에서 힘없이 침몰해 갔다.

마법적인 충돌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완벽한 인과의 조율에 의한 정교한 해체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

동시간, 아카데미 기숙사의 가장 구석진 방.

"후아암……."

엘리엇은 시원하고 부드러운 실크 베개에 뺨바닥을 비비며 길게 하품을 했다.

최근 며칠 동안 그를 괴롭히던 지독한 두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극심한 마력 과민증을 앓고 있는 그에게 아카데미 전체를 촘촘하게 뒤덮고 있던 아드리안의 미세한 감시 결계는 신경을 긁어대는 칠판 낙서 소리와 다름없었다. 자려고 누울 때마다 이마가 지끈거려 베개를 몇 번이나 뒤집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오늘 밤은 이상하리만치 사방이 고요했다.

공기 중에 떠돌던 불쾌한 마력의 파동들이 썰물처럼 씻겨 내려간 느낌이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 깊숙이 맑고 시원한 공기가 스며들었다.

"음…… 공기 정화 마법이라도 돌렸나…… 아주 좋네……."

엘리엇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인과율을 조율하는 신화급 패시브 권능을 가졌음에도, 그 대가로 세상의 마나스톤 가치를 폭락시키는 민폐를 끼치기 싫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어하는 그였다. 그저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으며 완벽하게 잠드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비원이었다.

"우유는 못 마셨지만…… 이 정도면 훌륭한 취침 환경이야……."

그는 완전히 이완된 몸으로 깊은 수면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자신이 낮잠을 자며 남긴 침 자국 세 개가 학생회의 핵심 군사 기지 세 군데를 완벽하게 파괴하고, 아카데미의 권력 구도를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로. 엘리엇은 그저 내일 아침에는 부디 시끄러운 새들이 창가에 앉지 않기를 바라며 행복한 꿈나라로 향했다.

***

다음 날 새벽, 황립 마법 아카데미 학생회장실.

탁-!

아드리안 본 발렌타인의 손에 들려 있던 깃펜이 반으로 부러졌다. 그의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 위로, 이마의 핏대가 터질 듯이 솟아올랐다.

"……다시 말해 봐라."

그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얼음판처럼 차가웠고, 동시에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보고를 올리던 학생회 부회장은 고개를 감히 들지 못한 채 벌벌 떨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러니까…… 어젯밤 사이에 서쪽 숲의 제1초참호, 남동쪽 지하의 제2밀무대, 그리고 북부 폐광의 제3보루가…… 전부 무력화되었습니다.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었지만, 기지 내부의 모든 마법 장치가 영구적으로 정지되었고, 상주하던 정예 대원들은 마나 결핍으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아드리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손이 책상을 거칠게 내리쳤다.

쿵-!

"그 세 곳의 좌표는 나와 너, 그리고 황실 마법 성의 극비 문서 외에는 제국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완전한 맹점이다!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분산되어 있어, 외부에서는 결코 감지할 수 없는 구조란 말이다! 그런데 소리 소문 없이 세 곳이 동시에 뚫렸다고?!"

"그, 그것이…… 침입의 흔적을 분석해 본 결과, 적들은 우리의 감시 결계가 서로의 마력을 상쇄하는 극미한 '인과의 빈틈'을 정확히 꿰뚫고 들어왔습니다. 마치 처음부터 우리의 설계도를 손에 쥐고 비웃기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아드리안의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완벽한 질서. 오차가 없는 공식. 자신이 일구어놓은 무결한 지배 체제가 누군가의 손가락 장난질에 의해 너무나도 손쉽게 해체당했다.

이것은 단순한 습격이 아니었다.

자신의 지성과 오만함을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비웃고 짓밟는 고도의 정신적 폭력이다.

'엘리엇 드 벨레로폰……!'

아드리안의 뇌리에 그 나른하고 무기력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늘 목뼈가 부러진 것처럼 의자에 기댄 채, 자신을 텅 빈 눈으로 응시하던 그 신입생.

"그자가 움직인 거다……."

아드리안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위장하면서, 배후에서 온 아카데미의 무질서 분자들을 수동형 톱니바퀴처럼 부려 내 목을 조여 오고 있어. 이 완벽한 타이밍, 완벽한 좌표 해독…… 인간의 지능으로는 불가능해. 괴물 같은 놈."

그는 참을 수 없는 굴욕감과 공포에 몸을 떨며, 어젯밤 가장 참혹하게 무너진 제2밀무대의 현장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보고서의 마지막 장에는 수색 대원들이 현장에서 발견하고 동결 보존 처리해 온 정체불명의 물건이 찍혀 있었다.

"이건…… 뭐지?"

아드리안의 눈이 크게 떠졌다.

보고서 사진 속에는 제2밀무대의 가장 높은 사령 보루 벽면, 아드리안의 친필 서명이 담긴 질서 헌장 바로 위에 은밀하게 부착되어 있던 검은색 휘장이 찍혀 있었다.

그 휘장의 전면에는 기이한 문양과 함께, 정교하게 새겨진 붉은색 글씨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원탁의 해석자는 항상 지켜본다.]

그 휘장을 바라보던 아드리안의 호흡이 가빠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며 시야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승전 선언이 아니었다.

네가 어디서 무슨 짓을 하든, 우리는 괴주님의 손바닥 위에서 너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잔인한 경고이자 심판이었다.

"으, 윽……!"

극도의 정신적 충격과 뇌리를 스치는 패배감에 아드리안은 가슴을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그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흐려지기 시작했다. 완벽함을 추구하던 천재 학생회장의 세계가, 단 세 개의 숫자와 정체불명의 조롱 섞인 휘장 하나에 완전히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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