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리안은 가슴이 터질 듯한 압박감 속에서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대리석 벽에 부딪혀 찢어진 제복 사이로 붉은 선혈이 배어 나왔지만, 그 고통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미동도 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엘리엇의 칠흑 같은 눈동자. 그 냉혹한 시선이 닿는 순간, 아드리안은 심장이 그대로 멎어 버릴 것 같은 기묘한 마비감에 휩싸였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수학적 공식이, 일생을 바쳐 쌓아 올린 완벽한 질서의 세계가 단 한 줌의 먼지처럼 흩어지는 절망이었다.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가슴이 수치심과 공포로 잘게 떨렸다. 아드리안은 바닥을 짚은 손끝바닥에 힘을 주려 했으나,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결계가 파괴되며 역류한 마나가 그의 마나 회로를 완전히 뒤엉켜 놓은 탓이었다.
자욱한 먼지 안개 너머, 우뚝 선 엘리엇은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한 손은 여전히 주머니에 꼽힌 채였고, 다른 한 손은 가볍게 허공을 긁적이고 있었다. 그 무심하고도 태연자약한 태도가 아드리안의 숨통을 더욱 조여 왔다.
'이 자는 대체 어디까지 내다본 기인가.'
아드리안은 떨리는 눈동자로 엘리엇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엘리엇의 머릿속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아, 진짜 망했다.'
엘리엇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기숙사 매점의 우유 가판대가 닫히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6분. 이 귀찮은 인간들이 길을 막고 웅성거리는 바람에 평화로운 숙면을 위한 필수 아이템, '따뜻한 우유 한 잔'의 꿈이 산산조각 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극심한 마력 과민증 때문에 밤마다 뇌가 타들어 가는 통증에 시달리는 그에게, 취침 전 우유 한 잔은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밤새 발작을 일으키지 않고 단 4시간이라도 눈을 붙이게 해 줄 유일한 구원줄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이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겼던(지금은 엉망이 된) 학생회장이라는 녀석은 쓰러진 채로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귀찮음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말을 거는 것조차 에너지가 아까웠다.
엘리엇은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며, 깊고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 한숨은 정원의 고요한 공기를 가르고 아드리안의 귓가에 무겁게 내리앉았다. 엘리엇은 이마를 짚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목소리에는 깊은 피로와 짜증이 서려 있었다.
"나오지도 않는 우유 때문에 잠을 또 설쳤군."
매점 가판대에 우유가 다 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이 소란 때문에 수면 흐름이 깨져 오늘 밤도 불면증에 시달려야 한다는 절망감이 섞인 지극히 개인적인 한탄이었다.
그러나 이 말을 받아들인 아드리안의 뇌는 즉각 통제 불능의 과부하에 걸려들었다.
'나오지도 않는…… 우유?'
아드리안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는 엘리엇이 뱉은 단어 하나하나를 자신의 '수학적 질서'라는 필터에 통과시켜 정밀하게 연산하기 시작했다.
'우유는 순수한 마나의 정수를 뜻하는 은어인가? 아니면…… 내가 펼친 수학적 감옥을 가리키는 비유인가! 나오지 않는 우유를 굳이 짜내려 하듯, 나의 결계가 아무런 실효성도 없는 껍데기에 불과했다는 뜻이로군. 자신이 펼쳐 보인 인과의 그물망 앞에서는 나의 모든 치밀한 계획이 그저 잠을 설치게 만드는 사소하고 귀찮은 모기 날갯짓에 불과했다는 선언이다!'
아드리안의 이마에 굵은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엘리엇은 그저 졸려서 눈가에 고인 눈물을 훔치며 크게 하품을 한 번 했을 뿐이었다. 입을 크게 벌렸다가 닫는 그 사소한 동작마저도, 아드리안에게는 하늘에 군림하는 절대자가 하찮은 피조물을 내려다보며 짓는 마지막 자비의 미소처럼 보였다.
'이토록 완벽한 심안을 가진 자가 존재한단 말인가. 나의 패배를 비웃지도 않고, 그저 자신의 수면 시간을 방해받은 것만이 유일한 손실이라는 듯 행동하다니. 이 격차는…… 메울 수 없다.'
아드리안은 마침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설계한 헬리오스 아카데미의 그 어떤 공식으로도, 눈앞의 이 나른한 괴물의 인과를 계산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러진 자존심의 뼈대를 억지로 맞추듯, 아드리안은 찢어진 제복 깃을 여미며 가쁜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엘리엇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패기를 인정한다만."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젖은 흙바닥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질서는 영원하다. 이번엔 내가 물러서지."
그는 더 이상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았다. 결계를 유지하던 마나 파편들이 사방에서 먼지처럼 바스러지는 가운데, 아드리안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등을 돌렸다. 그를 매복해 감시하던 학생회 특임대원들도 사색이 된 얼굴로 아드리안의 뒤를 따라 어둠 속으로 황급히 사라졌다.
엘리엇은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라는 거야, 진짜. 질서고 나발이고 내 우유는 어쩌라고.'
결국 시계 바늘은 9시 5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엘리엇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구겨 신은 구두를 끌며 매점 방향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고독을 짊어진 듯한 그 뒷모습 위로 차가운 달빛이 쓸쓸하게 내려앉았다.
***
정원의 어두운 수풀 뒤편.
실비아 라인하르트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그녀의 뺨은 상기되어 붉게 물들었고, 눈가에는 감격에 겨운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오오…… 괴주님……!"
실비아는 떨리는 손으로 가방에서 마도 기록 펜을 꺼내 들었다. 방금 전 엘리엇이 보여준 몸짓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법의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신화적 권능의 현현이었다.
"마력의 파동을 거의 발산하지 않으면서도, 적이 가해온 마력의 인과를 그대로 비틀어 역류시키셨어. 저 오만한 학생회장이 단 한 걸음조차 딛지 못하고 무릎을 꿇다니!"
그녀는 아드리안이 떠난 자리에 흩어진 결계의 잔해들을 바라보았다. 본래라면 대기 중으로 흩어져 소멸했어야 할 아드리안의 수학적 결계 파편들이, 엘리엇의 극소 인과 제어의 영향으로 인해 기묘하게 결정화되어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는 미세한 유리 조각 같은 파편들이었다.
실비아는 잽싸게 기어 나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온 정성을 다해 그 파편들을 하나하나 주워 담기 시작했다.
"이건 단순한 잔해가 아니야. 괴주님의 권능이 직접 닿아 물질화된 성물(聖物)이야! 학생회의 오만한 정밀 연산 공식이 어떻게 무력화되었는지 증명해 줄 위대한 단서라고!"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파편들을 가방에 쓸어 담으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우유 때문에 잠을 설쳤다는 말씀…… 그것은 명백한 계시야. 하얀 마나의 흐름, 즉 아카데미의 숨겨진 용맥을 학생회가 독점하려 하니, 그 흐름을 정화하라는 묵시록의 장령(將令)!"
실비아는 품속에서 자신이 해독하던 지리지 사본을 꺼냈다. 이전에 엘리엇이 도서관에서 잠을 자며 흘린 침 자국이 묻어 있던 바로 그 책이었다. 젖어 들어간 무작위 페이지 번호는 '7, 42, 109'.
그녀의 뇌리에 번개 같은 깨달음이 스쳤다.
"그래, 7, 42, 109번 좌표! 이것은 학생회가 아카데미 지하에 은밀히 구축해 둔 마나 통제 기지의 위치였어! 괴주님은 이미 아드리안의 음모를 간파하시고, 우리에게 그들의 목줄을 끊어버릴 열쇠를 쥐여주신 거야!"
실비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전율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찌르르하게 퍼져 나갔다. 그녀는 즉시 자신의 마법 통신석을 꺼내 들었다.
[원탁의 해석자들이여, 들으라. 괴주님의 묵시록 장령이 방금 정원에서 실현되었다. 우리는 그분의 지혜를 따라, 가증스러운 질서의 하수인들을 정벌할 준비를 시작한다.]
통신석 너머로 숨죽인 천재들의 격앙된 대답들이 나직하게 메아리쳤다.
***
그 시각, 아카데미의 또 다른 구석에 위치한 황실 정보원 이벨린의 개인 대기실.
이벨린은 따뜻한 홍차를 잔에 따르고 있었다. 평화로운 밤이었다. 방금 전 정원에서 일어난 미세한 마력 충돌을 감지하긴 했으나, 단순한 학생들의 사소한 다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찻잔을 입가에 가져가려던 바로 그 순간.
쿠구구구궁……!
대지가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대단히 묵직하게 요동쳤다. 지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깊고 기묘한 진동이었다. 찻잔의 수면이 어지럽게 출렁이며 붉은 찻물이 테이블 위로 몇 방울 튀었다.
"……지진인가?"
이벨린이 미간을 찌푸린 순간, 그녀의 품 안에서 황실 정보부 비밀 전용 통신 단말기가 요란하게 붉은 빛을 뿜으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 단말기가 이 정도로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은 제국 규모의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뿐이었다.
그녀는 급히 단말기를 활성화했다. 단말기 위로 붉은색 마법 홀로그램 마법 문자들이 어지럽게 떠올랐다.
[긴급 보고: 금일 21시 55분경, 제국 남부 변방 '오크헤이븐' 영지에 위치한 황실 소유 구리 광산 중 하나가 예고 없이 붕괴 및 소멸.] [원인 분석: 지각 변동 없음. 인위적 마법 타격 흔적 없음. 단, 광산 내부의 물리적 구조를 유지하던 인과율의 축이 통째로 뒤틀려 소실된 흔적 감지. 마력 제어 반작용에 의한 공간적 전이 현상으로 추정됨. 제국 경제에 미치는 타격은 미미하나, 발생한 인과 왜곡의 등급은 '신화급(S-Class)'.]
"구리 광산이…… 소멸했다고?"
이벨린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찻잔을 쥔 그녀의 손끝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조금 전 정원 방향에서 감지되었던 극도의 미세한 마력 반응을 떠올렸다. 마력의 파동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세상의 법칙이 아주 미세하게 비틀리는 듯한 기묘한 위화감이 있었다.
"설마…… 엘리엇 드 벨레로폰?"
머릿속에서 파편들이 무서운 속도로 맞춰지기 시작했다.
황실 연구소의 극비 문서에 따르면, 신화급 권능인 '인과율 조율'은 우주의 등가교환 법칙을 따른다. 아카데미 내부에서 거대한 마법적 충돌을 완벽하게 무음(無音)으로 상쇄시키려면, 그 반작용에 해당하는 거대한 에너지를 다른 어딘가로 방출해야만 한다.
"아카데미의 붕괴를 막기 위해…… 그 충격을 제국 변방의 쓸모없는 구리 광산으로 전이시킨 거야? 단 한 번의 손가락 튕기기로?!"
이벨린의 등줄기를 타고 오싹한 소름이 돋아났다.
그녀는 엘리엇이 입학식 날부터 목에 걸고 다니던 싸구려 구리 목걸이를 기억해 냈다. 누구나 길거리에서 몇 동전이면 살 수 있는 조잡한 물건.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다.
"그 구리 목걸이는…… 남부 구리 광산과 인과를 연결해 두는 매개체였던 거야! 자신이 마력을 쓸 때마다 일어나는 세상의 왜곡을 그 싸구려 목걸이를 통해 남부 광산으로 흘려보내 소멸시키는 거였어……!"
그녀는 입을 틀어막았다. 경악을 넘어선 공포가 그녀의 영혼을 잠식했다.
완벽한 힘의 은폐. 그리고 제국의 경제와 영토를 체스판 위의 말처럼 부리며, 자신에게 가해지는 미세한 감시조차 가차 없이 분쇄하는 냉혹한 지략.
"이 자는 성자가 아니야…… 제국 전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지고 노는 괴물이다."
이벨린은 떨리는 손으로 리포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경고 등급은 '최고 단계'. 엘리엇 드 벨레로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되, 절대로 그의 신경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붉은색 낙인이 통신문 위로 새겨졌다.
***
깊은 밤, 아카데미 지하에 버려진 고대 연금술 실험실.
어스름한 마나 램프 불빛만이 주위를 어둡게 밝히는 가운데, 검은 로브를 깊게 눌러쓴 학생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범상치 않은 천재의 광기와 무거운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실비아가 연단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의 손에는 아드리안의 결계 잔해인 푸른 결정들이 들려 있었다.
탁!
그녀가 결정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자, 차가운 푸른 빛이 어둠 상자를 채웠다.
"모두 보아라."
실비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공간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밤, 괴주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승리의 전리품이자 새로운 계시다."
모여든 원탁의 해석자들이 침을 삼켰다. 한 학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비아 님, 정말 괴주님께서 홀로 학생회장의 결계를 무너뜨리셨단 말입니까? 마력의 파동이 거의 감지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만……."
"어리석은 질문이군."
실비아가 차갑게 대꾸했다.
"그분께서는 마력을 낭비하지 않으신다. 단지 세상의 인과를 한 눈에 꿰뚫어 보시고, 아드리안의 공식이 지닌 아주 미세한 허점을 손가락 하나로 건드렸을 뿐이지. 그 결과가 바로 이 결정체다. 그분의 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경지를 아득히 초월해 계신다."
그녀는 품속에서 오래된 지리지 사본을 펼쳐 보였다. 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그러나 그들에게는 우주의 진리가 담긴 성서와 다름없는 페이지였다.
"7페이지, 42페이지, 그리고 109페이지."
실비아의 손가락이 지도 위의 세 지점을 차례로 가리켰다.
"이곳들은 학생회가 아카데미의 눈을 피해 구축해 둔 비밀 초참호 기지들의 좌표다. 괴주님께서는 이미 아드리안의 숨통을 끊어놓을 완벽한 지도를 우리에게 하사하셨다. 이것은 명백한 명령이다. 우리 원탁의 해석자들이 직접 움직여, 괴주님의 안식을 방해하는 질서의 잔당들을 모조리 궤멸시켜야 한다."
어둠 속에서 천재 학도들의 눈이 번뜩였다. 그들의 가슴속에서 괴주를 향한 광적인 충성심과, 오만한 학생회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해방감이 거세게 불타올랐다.
"우리는 괴주님의 그림자다."
실비아가 엄숙하게 선언했다.
"그분께서 조용히 은퇴 생활을 즐기실 수 있도록, 방해되는 모든 쓰레기를 우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운다. 오늘 밤, 제1기지부터 시작한다. 준비해라."
"괴주님의 뜻대로."
어둠 속에서 나직한 맹세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자신의 개인 기숙사 방에 간신히 도착한 엘리엇은 침대 위로 시체처럼 쓰러졌다. 결국 매점 문은 닫혔고, 우유는 구하지 못했다.
"아…… 배고프고 잠 안 와…… 인생 진짜 귀찮다……."
그는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웅얼거렸다. 자신이 던진 사소한 한숨과 잠꼬대가 아카데미 지하에서 어떤 거대한 폭풍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그리고 제국 남부의 광산 하나가 통째로 날아갔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로. 엘리엇은 그저 내일 아침 식사에는 제발 맛있는 소시지가 나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