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기숙사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엘리엇은 깊은 한숨을 삼켰다.

마력 과민증으로 인해 피부 전체가 깃털로 긁히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차가운 밤공기가 창문을 통해 스며들며 겨우 가려움을 식혀 주던 참이었다. 마침내 찾아온 황홀한 침묵, 그리고 달콤한 수면의 입구.

그 완벽한 조각을 깨뜨린 것은 규칙적으로 정원을 밟아 오는 금속제 구두 굽 소리였다.

사각, 사각.

아주 미세하지만, 훈련된 군인들이 오차 없이 보폭을 맞출 때나 나는 소름 끼치는 규칙성이었다. 엘리엇은 눈꺼풀을 무겁게 들어 올렸다. 창문 너머로 푸르스름한 밤안개를 뚫고 다가오는 실루엣들이 보였다.

그들의 선두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꼿꼿한 자세의 사내, 학생회장 아드리안 본 발렌타인이 서 있었다. 그의 검은 마방 장갑이 밤하늘 아래에서 차갑게 번뜩였다. 그 손끝이 허공을 가볍게 긋자, 기숙사 정원 전체를 뒤덮는 정교한 청백색 마법 수식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떠올랐다.

‘……진짜로 귀찮게 구네.’

엘리엇은 이마를 짚었다. 슬슬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세상의 눈을 피해 그저 하루에 16시간씩 이불 속에서 게으르게 뒹굴고 싶을 뿐인데, 왜 이 아카데미의 천재들은 자꾸만 밤잠을 방해하는 것일까.

그냥 잠을 자는 것도 좋았지만, 지금 이 순간 엘리엇의 발목을 잡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극심한 마력 과민증의 부작용으로 목구멍이 타들어 갈 듯이 말라붙어 있었다. 혀끝이 바짝 말라 마찰음이 날 지경이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엘리엇은 비척비척 냉장고로 걸어갔다. 문을 열었으나, 안에는 텅 빈 종이 우유 팩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우유……."

그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무미건조하고 지극히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아카데미 정문 옆에 있는 간이 매점은 밤 10시까지 운영된다. 시계를 보니 9시 45분이었다. 지금 당장 나가지 않으면 오늘 밤은 갈증으로 밤새 뒤척여야 할 판이었다.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은 엘리엇에게 세상 그 어떤 재앙보다 끔찍한 일이었다.

엘리엇은 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헌 구두를 발에 꿰었다. 제대로 구겨 신은 뒤, 삐걱거리는 기숙사 문을 열고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기숙사 현관 앞 대리석 바닥이 일제히 푸른빛으로 진동했다.

웅웅웅―!

"정지하라, 혼돈의 주동자여."

정원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아드리안이 엄숙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의 좌우로 검은 제복을 입은 학생회 특임대원 수십 명이 일제히 마법 지팡이를 치켜세웠다.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은 단순한 결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카데미가 수백억 크로네의 예산을 투입해 구축한 최상위 통제 진식, 이른바 ‘수학적 인과 감옥(Mathematical Causality Prison)’이었다.

"네가 한 걸음이라도 내딛는 순간, 네 몸을 감싼 미세한 마력 파동을 역추적해 온몸의 마력 흐름을 역류시킬 것이다. 단 0.001초의 미래조차 우리 학생회의 연산 시스템 하에 통제된다는 뜻이지."

아드리안의 눈동자가 안경 너머로 차갑게 빛났다. 그의 이마에는 잔뜩 핏대가 서 있었다. 엘리엇의 게으른 태도와 예측 불가능한 무반응을 고도의 혼돈 전술로 규정한 그의 집념이 만들어 낸 결계였다.

엘리엇은 그저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현란하게 빛나는 청백색의 기하학적 수식들이 그의 발끝에 닿아 있었다. 확실히 정교한 마법진이었다. 한 걸음만 잘못 디디면 마나 공명이 폭발해 주변의 모든 생명체를 마비시키는 구조였다.

하지만 엘리엇의 머릿속은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우유 문 닫기 전에 사야 하는데.'

만사가 귀찮았다. 이 거추장스러운 수식들을 일일이 해제하는 것도, 그렇다고 저 시끄러운 녀석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전부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었다.

바로 그 시간, 정원 한편의 울창한 수풀 뒤편.

"앗……!"

실비아 라인하르트는 입을 조그맣게 벌리며 수풀 속으로 몸을 더 깊이 숨겼다. 그녀는 엘리엇이 도서관에 무심히 남겼던 지리지의 젖은 페이지 번호, '7, 42, 109'의 비밀을 해독하기 위해 밤낮으로 연구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이 좌표의 중심축이 기숙사 정원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달려온 참이었다.

'과연, 괴주님이셨어! 이미 이 모든 학생회의 음모를 예견하시고, 나를 이 자리에 불러 배움을 주시려는 거야!'

실비아는 가슴이 터질 듯한 설렘을 느끼며 품에서 작은 수첩과 깃펜을 꺼내 들었다.

'아드리안 회장이 전개한 수학적 인과 감옥은 완벽한 대칭성을 지닌 신화적 수준의 통제 결계. 괴주님은 대체 어떤 위대하고 장엄한 고대 마법으로 저 수식의 사슬을 끊어내실까? 아니면 한 손가락으로 공간을 찢어버리실까?'

실비아의 눈동자가 학구적인 광기로 번뜩였다. 그녀에게 엘리엇은 우주의 모든 법칙을 손안에 쥐고 흔드는 절대적인 지배자였다. 그의 다음 한 손짓이 어떤 인과를 불러올지, 손가락 끝마디의 미세한 떨림 하나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엘리엇의 시선은 엉뚱한 곳에 닿아 있었다.

오른발 구두 뒤축이었다.

낮에 정원을 가로지르다 밟은 모양인지, 물기 머금은 끈적한 갈대 잎과 흙더미가 구두 굽 쪽에 단단히 달라붙어 있었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찌적거리는 불쾌한 감촉이 마력 과민증으로 예민해진 그의 신경을 사정없이 긁어댔다.

'……짜증 나네.'

엘리엇은 미간을 아주 미세하게 찌푸렸다.

그 작은 표정 변화를 포착한 아드리안의 척추에 소름이 돋았다.

"경고했을 텐데. 무의미한 저항은 네 마력을 자멸시킬 뿐이다."

아드리안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검은 마방 장갑을 꽉 쥐었다. 하지만 그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엘리엇의 저 무표정한 눈동자 속에는 어떠한 동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폭풍 전야의 고요함처럼, 상대를 압도하는 기이한 위압감이 흘러넘쳤다.

엘리엇은 그저 이 기분 나쁜 갈대 잎을 털어내고 싶었다. 손을 뻗어 만지는 것은 손가락에 흙이 묻으니 싫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는 슬그머니 오른발 끝을 들어 올려, 왼쪽 구두 안쪽 복사뼈 부근에 가볍게 문질렀다.

스윽.

그저 구두 굽에 낀 이물질을 털어내기 위한, 지극히 게으르고 일상적인 발털기 동작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엘리엇의 몸속에 내재된 권능 외에는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았다. '인과율 조율'.

엘리엇은 구두 가죽과 갈대 잎 사이에 작용하는 물리적 마찰력과 분자 간 인력을 소수점 아래 열여섯 자리 수준으로 미세하게 뒤틀었다. 마찰계수를 순간적으로 제로(0)에 가깝게 조율하여, 흙먼지와 갈대 잎이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매끄럽게 떨어져 나가도록 만든 것이다.

그것은 마법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단지 물리 법칙의 미세한 흐름을 비튼 것에 불과했다. 소모된 마력은 0.0001도 되지 않았다. 제국의 마나스톤 가치에는 털끝만 한 영향도 주지 않을 극미세한 조율이었다.

툭.

갈대 잎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하지만 그 사소한 발털기 동작으로 인해 발생한 미세한 공기의 물리적 진동, 그리고 인과율의 파동은 고요한 정원의 마나 흐름을 타고 번져 나갔다.

그 파동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바닥에 빽빽하게 깔린 '수학적 인과 감옥'의 중심 연산 축이었다.

아드리안이 설계한 결계는 우주의 수학적 대칭성을 극한으로 활용한 시스템이었다. 완벽한 대칭과 균형이야말로 이 결계의 최대 장점이자, 동시에 유일무이한 약점이었다.

엘리엇의 발끝에서 시작된 초미세 인과율의 뒤틀림은, 결계를 지탱하는 수만 개의 수식 중 단 하나의 소숫점 자리를 건드렸다.

틱.

아주 작은 모래알 하나가 거대한 톱니바퀴 사이에 끼인 격이었다.

"어……?"

아드리안의 안경 너머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그의 손끝에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던 청백색의 마법 장벽들이 갑자기 이상한 주파수를 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웅웅거리던 소리는 점차 날카로운 기계 마찰음 같은 비명으로 변해갔다.

"회, 회장님! 결계의 연산 수치가 이상합니다! 대칭 축이…… 뒤틀리고 있습니다!"

특임대원의 다급한 외침이 정적을 깨뜨렸다.

"그럴 리가 없다! 완벽한 대칭 연산식이다! 오차가 발생할 확률은 영에 가깝……!"

아드리안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바닥의 마법 수식들이 역방향으로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엘리엇이 비틀어버린 단 하나의 물리적 마찰 진동이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결계 전체의 마나 흐름을 역방향으로 꼬아버린 것이다. 수학적 인과 감옥의 제어 시스템이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폭주하기 시작했다.

"안 돼! 제어권을 되찾아야……!"

아드리안이 급히 마방 장갑을 뻗어 마나를 주입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쿠구구구궁―!

기숙사 정원 바닥에 깔려 있던 푸른 마법진들이 일제히 붉게 충혈되며 거대한 스파크를 일으켰다. 수백억 크로네의 예산이 들어간 최고급 마나 제어석들이 과부하로 인해 차례차례 폭발하기 시작했다.

콰앙! 콰콰쾅!

"꺄악!"

수풀 속에서 귀를 막고 엎드린 실비아의 시야 가득히 붉은 섬광이 휘몰아쳤다.

그 눈부신 폭발의 광풍 속에서, 실비아는 똑똑히 보았다.

기숙사 현관 계단 위, 자욱한 먼지 구덩이 속에서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채 서 있는 엘리엇의 뒷모습을.

그는 그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폭발하는 마법진의 잔해를 지극히 지루하다는 눈빛으로 방관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실비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 깃펜을 떨어뜨릴 뻔했다.

'대마법을 시전하신 게 아니야. 마력의 파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어. 그저…… 아주 가벼운 발끝의 침묵만으로, 아드리안이 평생을 걸쳐 연마한 수학적 결계를 스스로 자멸하게 만드신 거야! 인과를 조율해 적의 힘을 고스란히 되돌려주다니…… 이게 바로 괴주님의 진정한 경지인가!'

그녀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압도적인 격차에서 오는 경외감이었다.

한편, 폭발의 중심에 서 있던 아드리안은 비참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갔다.

"크아아악!"

엄청난 충격파와 역류한 마나가 그의 가슴을 사정없이 타격했다. 아드리안의 몸은 그대로 공중을 날아 기숙사 정원의 두꺼운 대리석 벽에 거칠게 충돌했다.

쿠웅!

대리석 벽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가며 먼지가 내려앉았다.

아드리안은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단정하게 빗어 넘겼던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흐트러졌고,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던 학생회 제복은 여기저기 찢겨 나가 붉은 속살을 드러냈다. 입가에는 역류한 마나로 인해 피어오른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하아, 하아……."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욱한 먼지 안개 너머로, 엘리엇이 한 걸음 걸어 나왔다. 여전히 구겨 신은 구두를 신은 채,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나른한 자세였다.

엘리엇의 시선이 아드리안에게 닿았다.

그 눈빛에는 분노도, 비웃음도 없었다. 그저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를 바라보는 듯한, 철저한 무관심과 냉혹함만이 서려 있었다.

아드리안은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이 자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준비한 수학적 감옥도, 특임대의 매복도, 심지어 결계의 아주 미세한 연산적 허점까지도. 단지 발끝을 가볍게 터는 시늉 한 번으로 수백억짜리 결계를 폭사시키고 자신을 이토록 철저하게 무력화한 괴물.

"너는…… 대체……."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찢어진 제복 사이로 드러난 그의 가슴이 공포로 가쁘게 들썩였다.

그 처절한 몰골을 내려다보며, 엘리엇은 그저 머리를 긁적였다.

'아, 진짜 귀찮게 다들 누워 있네. 우유 사러 가야 하는데 길을 다 막고 난리야.'

엘리엇은 아드리안을 지나쳐 정원 밖으로 터덜터덜 걸어가기 시작했다. 시계 바늘은 이미 9시 5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단 8분. 그의 발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아주 깊고 무거운 침묵을 정원에 남겨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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