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독을 뿌린 당사자인 이벨린은 젖은 드레스 자락을 쥔 채 비틀거렸다. 그녀의 손가락끝이 잘게 떨렸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은 단순한 땀방울이 아니었다. 죽음의 문턱을 밟았다가 간신히 돌아온 자가 흘리는 식은땀이었다.
눈앞의 남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돌벤치에 기대어 누운 엘리엇의 감겨진 눈꺼풀은 마치 대리석 조각상처럼 단단히 닫혀 있었다. 자신들의 목숨을 위협하던 치명적인 청람의 가루가 한순간에 기화되어 사라진 초자연적인 현상 앞에서도, 그는 깃털 하나만큼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 무정한 감정의 결여. 어떠한 살의도, 어떠한 자비도 담겨 있지 않은 눈부신 무관심. 그것이야말로 제국 전체를 장난감처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굴리는 괴수의 위엄 그 자체였다.
‘이 자의 심기를 더 건드렸다간…… 흔적도 없이 증발한다.’
이벨린은 가슴팍을 세차게 압박하는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수풀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녀가 도망치듯 자취를 감추는 소리가 바스락거리며 멀어졌다.
그녀의 비참한 퇴장을 지켜보던 실비아는 뺨을 붉게 붉힌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아…… 방금 보셨나요? 대기의 흐름을 미세하게 비틀어 독기를 역류시키다니. 마력의 파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도 말이에요. 이것은 분명 인과의 고리를 직접 쥐고 흔드신 거예요!"
"과연 괴주님이십니다. 황실의 일급 정보원마저 단 한 마디의 경고도 없이 쫓아내시다니……."
베르너 역시 마른침을 삼키며 손에 쥔 수첩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이마에는 흥분과 전율이 뒤섞인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상인의 감각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방금 엘리엇이 보여준 기적은 단순한 호신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주변의 모든 물리 법칙과 마력의 흐름을 지배하는 절대자의 권능이었다. 만약 이 거대한 힘의 물결에 편승할 수만 있다면, 로젠버그 상단은 제국을 넘어 대륙 전체의 부를 거머쥘 수 있으리라.
베르너는 조심스럽게 돌벤치 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잔디가 밟히는 미세한 소리에도 엘리엇의 미간이 아주 살짝 찌푸려졌다.
실비아가 급히 베르너의 앞을 가로막으며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쉿! 괴주님의 안식을 방해하지 마세요, 베르너 님. 방금 전의 위대한 조율로 인해 극심한 피로를 느끼고 계신 것이 분명해요. 천재의 뇌는 범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법이니까요."
"아, 실비아 양. 내 어찌 그것을 모르겠소. 하지만 지금 제국 마나스톤 시장의 상황이 심상치 않소. 괴주님의 혜안이 없다면, 우리 로젠버그 상단뿐만 아니라 아카데미의 수많은 세력들이 한꺼번에 파멸의 구렁텅이로 떨어질지도 모른단 말이오."
베르너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최근 제국 전역의 마나스톤 광산은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귀족들과 거대 상단들은 너나할것없이 '최상급 마나스톤'의 채굴권과 주식을 사들이기 위해 미친 듯이 돈을 쏟아붓고 있었다. 하지만 시장의 열기가 뜨거워질수록, 베르너의 직감은 위험 신호를 보내왔다. 무언가 거대한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투기 자본이 몰릴 대로 몰린 이 비정상적인 버블이 터지는 순간, 제국 경제는 대공황에 빠질 것이 자명했다.
베르너는 무릎을 꿇듯 다리를 굽혀 돌벤치 옆에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최대한 정중하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괴주님. 무례를 무릅쓰고 고견을 여쭙고자 합니다. 현재 제국의 마나스톤 시장은 최상급 광산들을 중심으로 비정상적인 투기가 과열되고 있습니다. 황실 귀족 상단들은 물론이고, 학생회의 배후 세력들까지 모두 이 미친 레이스에 뛰어들었지요. 이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저희 로젠버그 상단이 살아남고, 나아가 시장의 정점에 서기 위해선 어떤 길을 택해야 하옵니까?"
"……."
엘리엇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좀 꺼져라…….'
그의 머릿속은 오직 하나, '어떻게 해야 이 시끄러운 날파리들을 떼어놓고 완벽한 16시간 수면을 취할 것인가'라는 생각뿐이었다.
게다가 지금 그의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극심한 마력 과민증 때문에 주변의 미세한 마나 흐름 하나하나가 온몸의 신경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으로 다가왔다. 아까 전 이벨린이 뿌린 독가스를 기화시킨 것도 거창한 마법이 아니었다. 그저 독소의 마력 파동이 너무 자극적이어서, 마나가 소모되지 않는 극소의 '인과율 조율' 패시브를 무의식적으로 발동해 대기의 산소 결합을 아주 미세하게 비틀어버린 것뿐이었다.
만약 그가 여기서 대마법이라도 썼다간, 등가교환 법칙에 의해 제국 광산들의 마나스톤 가치가 폭락해 경제 대공황이 오고, 그의 은퇴 자금 또한 휴지조각이 되었을 터였다.
귀찮다. 만사가 귀찮았다. 베르너의 장황한 경제 브리핑은 졸음이 쏟아지는 그의 귀에 그저 윙윙거리는 모기 소리처럼 들릴 뿐이었다.
엘리엇은 눈도 뜨지 않은 채, 무거운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목소리는 잠에 취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급 마나 광산이나 사둬라."
"……예?"
베르너가 눈을 크게 떴다.
하급 마나 광산이라니? 그것은 마력 함유량이 극히 낮아 채굴 비용도 건지기 힘든, 제국에서 가장 가치 없고 버려진 쓰레기 광산들이 아닌가. 투자가들이 눈길조차 주지 않는 진흙 구덩이를 사들이라니, 상식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조언이었다.
하지만 엘리엇의 목소리는 너무나 무심하고, 동시에 거역할 수 없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게 가장 안전해. 기둥이 될 거다."
'그러니까 제발 좀 가라. 나 졸리다.'
엘리엇은 말을 마치자마자 이불을 뒤집어쓰듯 양손으로 귀를 꽉 막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완전히 대화를 차단하겠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그러나 베르너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천, 수만 가지의 계산 회로가 폭발적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기둥……?! 가장 가치 낮은 하급 마나 광산이 기둥이 된다고……?"
베르너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는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엘리엇의 말을 곱씹었다. 마법 공학적 관점과 경제적 관점이 그의 머릿속에서 융합되며 하나의 거대한 그림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렇다! 최상급 마나스톤은 마력의 밀도가 높은 만큼 불안정하다. 만약 어떠한 계기로 인해 제국의 거대 결계나 마나 노드에 과부하가 걸린다면, 가장 먼저 폭발하고 가치가 급락할 것은 최상급 광산들이다! 반면 하급 마나 광산은 마력 밀도가 낮아 외부의 충격에 지극히 안정적이지. 게다가 가공 기술이 조금만 발전한다면, 하급 마나스톤을 대량으로 정제해 기초 마법 소모품의 대체재로 쓸 수 있어! 그것은 투기가 아니라, 제국 경제의 보이지 않는 진짜 '기둥'이 되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베르너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 살죽이 부르르 떨렸다.
"아아…… 괴주님께서는 이미 시장의 붕괴를 예견하고 계셨던 거군! 귀족들이 최상급 광산에 눈이 멀어 전 재산을 탕진할 때, 가장 저렴한 값에 하급 광산들을 전부 독점해 두었다가 버블이 터지는 순간 제국 지하자원의 지배권을 통째로 쥐겠다는 고도의 전략이야!"
실비아 역시 감탄을 금치 못하며 손뼉을 소리 나지 않게 마주쳤다.
"역시 괴주님이세요. 세상의 모든 흐름이 이미 괴주님의 손바닥 안에서 춤을 추고 있군요. 베르너 님, 당장 움직이셔야 해요. 이것은 괴주님께서 내리신 최초의 경제적 신탁이자, 우리 원탁의 해석자들에게 주신 위대한 기회예요!"
"알겠소! 당장 가문의 모든 비자금과 상단의 신용을 끌어모아 제국 내의 버려진 하급 마나 광산들을 헐값에 매집하겠소! 귀족들이 우리를 비웃든 말든, 괴주님의 말씀은 곧 우주의 진리이니까!"
베르너는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엘리엇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이 베르너, 괴주님의 깊으신 뜻을 받들어 기필코 제국의 경제적 기둥을 선점하겠나이다. 이 은혜는 훗날 감히 상상치도 못할 무제한의 은퇴 자금과 헌신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그들은 엘리엇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최대한 죽이며 신속하게 정원을 빠져나갔다.
정작 돌벤치에 누워 있던 엘리엇은 그들의 속닥거림을 들으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은퇴 자금 같은 건 필요 없고…… 그냥 조용히 자게 해줘…….'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세상의 톱니바퀴는 이미 그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의해 미친 듯이 굴러가기 시작했다.
***
그날 오후, 로젠버그 상단은 제국 상업계를 뒤흔들 전대미문의 결정을 내렸다.
베르너는 즉각 가용 가능한 모든 자금을 동원해 제국 동부와 남부에 방치되어 있던 하급 마나 광산 수십 군데를 통째로 매입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광산 주식 시장에 매물로 나온 하급 광산 주식들을 헐값에 쓸어 담았다.
이 무모한 행보는 즉각 아카데미와 제국 사교계의 비웃음을 샀다.
"로젠버그 상단이 드디어 미쳤군. 최상급 광산 주식이 하루가 다르게 폭등하고 있는데, 저런 쓸모없는 돌덩이 구덩이에 돈을 쏟아붓다니."
"상단주가 젊은 나이에 자리를 맡더니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야. 이번 일로 로젠버그 가문은 완전히 파산하겠어."
황실 귀족 상단들과 학생회의 배후 세력들은 코방귀를 끼며 최상급 마나스톤 주식을 더욱 광적으로 사들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승리자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들이 비웃는 하급 마나 광산의 매입 계약서 뒤에는, 세상을 뒤바꿀 대마도사의 보이지 않는 인과율 조율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 어리석어 보이는 선택이 조만간 제국 전체의 경제망을 독식하는 상상 초월의 신의 한 수가 될 것임을.
***
같은 시각, 아카데미 학생회실.
사방이 기하학적인 마법 수식과 정교한 기계 장치로 가득 찬 방 안에서, 학생회장 아드리안 본 발렌타인은 차가운 눈빛으로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미간에 깊은 고랑이 파였다.
"이벨린이 실패했다고?"
"예, 회장님."
무릎을 꿇은 학생회 정보원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청람의 가루를 이용한 마력 감시망이 단숨에 무력화되었습니다. 이벨린 경은 독소의 역류로 인해 극심한 내상을 입고 현재 치료실에 격리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엘리엇 드 벨레로폰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오직 대기의 인과율을 조율하는 것만으로 감시단을 궤멸시켰다고 합니다."
쾅!
아드리안이 책상을 내리쳤다. 정교하게 배열되어 있던 마법 펜과 서류들이 단 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이 제자리에서 튀어 올랐다가 떨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력의 파동도 없이 인과율을 비튼다고? 그것은 존재할 수 없는 수학적 오류다! 시스템을 벗어난 초자연적 현상 따위는 있을 수 없어!"
아드리안의 눈동자에 광적인 집착의 불꽃이 일렁였다.
그에게 있어서 엘리엇의 존재는 아카데미의 완벽한 질서와 통제 체제를 위협하는 최악의 '시스템 버그'이자 '혼돈의 파괴자'였다. 어떠한 통계로도 예측할 수 없고, 어떠한 마법 공식으로도 연역할 수 없는 존재. 그런 자를 방치해 둔다면, 자신이 공들여 쌓아 올린 완벽한 아카데미의 질서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것이 분명했다.
"엘리엇 드 벨레로폰…… 고도의 무질서 교란 전략으로 내 통제력을 시험하겠다는 건가."
아드리안은 차갑게 중얼거리며 서랍에서 붉은색 인장이 찍힌 양피지 서류를 꺼내 들었다.
그 서류의 상단에는 금박으로 정교하게 새겨진 글자가 빛나고 있었다.
[특별 격리 영장: 수학적 인과 감옥(Mathematical Causality Prison)]
그것은 아카데미 교정 내의 마나 흐름을 완벽하게 수학적으로 제어하고, 대상이 숨 쉬는 공기의 흐름조차 고조파 덫 마법으로 묶어버리는 초고위 통제 마법의 시전 허가서였다. 이 감옥 안에 갇힌 자는 단 0.001초의 미래조차 학생회의 계산 시스템에 의해 통제되며, 아주 사소한 마력의 움직임조차 즉각적인 마법적 피드백으로 이어져 스스로를 파괴하게 만든다.
"질서를 거스르는 혼돈은 격리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 아카데미의, 그리고 제국의 규칙이다."
아드리안은 검은색 마방 장갑을 손에 끼워 넣었다. 장갑의 가죽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가죽 마찰음이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학생회 특임대를 소집해라. 오늘 밤, 직접 움직인다."
"회장님, 친히 가시겠습니까?"
"그 버그를 처리하기 위해선, 일말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다."
아드리안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
깊은 밤.
헬리오스 아카데미의 가장 외곽,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구석진 기숙사 정원.
엘리엇은 마침내 찾아온 고요함 속에서 침대에 누워 단잠에 빠져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력 과민증으로 가려웠던 피부도 밤공기가 차가워지자 조금은 진정되는 듯했다.
'드디어…… 잘 수 있겠군.'
그가 눈을 감고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린 바로 그 순간.
스스스슥.
잔디밭을 은밀하게 밟고 지나가는 차가운 금속음이 들려왔다. 아주 미세하지만, 고도로 훈련된 암살자나 군인들이 내는 특유의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였다.
엘리엇의 하품이 도중에 뚝 끊겼다.
그의 방 창문 너머, 어두운 정원의 나무 그림자 사이로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마방 장갑을 낀 형체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중심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완벽한 자세로 걸어오는 학생회장 아드리안 본 발렌타인이 서 있었다.
아드리안은 기숙사 정원의 돌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밟으며 엘리엇의 방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손끝에서 청백색의 정교한 수학적 마법진이 무수히 얽히며 기숙사 전체를 투명한 장벽으로 가두기 시작했다.
국소 고조파 덫 마법, '수학적 인과 감옥'이 침묵 속에서 작동하는 순간이었다.
엘리엇은 침대 위에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진짜로 죽여버릴까.'
완벽한 은퇴를 꿈꾸는 대마도사의 이마에, 생전 처음으로 아주 미세한 핏대가 돋아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