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아가 엘리엇의 옷자락을 부여잡으며 "당신의 냉정한 걸음 속에 감추어진 참된 인과를 배울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소리쳤다.
시험장의 높은 천장 아래로 그녀의 맑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쟁쟁하게 울려 퍼졌다.
사방을 메우고 있던 수험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아카데미 역사상 유례없는 마력 친화력으로 입학 수석을 거머쥔 라인하르트 가문의 천재녀가,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한미한 차림새의 남학생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려 있는 광경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정작 그 시선의 중심에 선 엘리엇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아래를 향해 있었으나, 실비아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 참을 수 없이 졸리다.'
머릿속이 지끈거렸다. 극심한 마력 과민증은 시험장에 가득 찬 수많은 인파의 마나 파동을 감지하고 끊임없이 뇌를 찔러대고 있었다. 지금 엘리엇의 눈에 비친 세상은 온통 지독한 편두통을 유발하는 빛의 찌꺼기들에 불과했다. 잠을 자야 했다. 최소한 열여섯 시간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푹신한 이불더미 속에 파묻혀 있고 싶었다.
그런데 눈앞의 이 금발 소녀는 왜 자기 옷자락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걸까.
엘리엇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하는 것조차 불필요한 마나의 낭비이자 신체적 피로를 가중시키는 행위였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은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갑고 고요했다. 그저 지독한 피로와 귀찮음이 뒤섞인 깊고 어두운 눈동자로 실비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을 뿐이다.
그 어둠 속에는 어떠한 감정도, 어떠한 자비도 담겨 있지 않았다.
실비아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엘리엇의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검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한 찰나, 온몸의 털끝이 곤두서는 듯한 오한이 그녀의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 눈빛은…… 대체 뭐지?'
마치 우주의 끝자락에 존재하는 거대한 심연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만 같았다. 그 눈빛 속에는 분노도, 경멸도 없었다. 오직 거대한 무(無)가 존재할 뿐이었다. 실비아는 자신이 평생 쌓아 올린 마법적 성취와 가문의 자부심이, 그의 그 무심한 시선 한 자락에 먼지처럼 바스러지는 기분을 느꼈다.
엘리엇은 천천히, 아주 최소한의 궤적만을 그리며 다리를 움직였다.
스스슥.
그의 바짓가랑이를 쥐고 있던 실비아의 손가락끝에서 옷감이 매끄럽게 빠져나갔다. 엘리엇은 그녀의 손길을 거칠게 쳐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어떠한 훈계의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 말 없이, 그녀라는 존재가 그곳에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심하게 스쳐 지나갔다.
"……아."
실비아의 입술 사이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그녀는 멀어져 가는 엘리엇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걸음걸이는 기이할 정도로 흔들림이 없었고, 발소리조차 지극히 미미했다. 그것은 마력을 전혀 낭비하지 않는, 인과의 법칙을 완벽히 이해한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극치(極致)의 보법이었다.
'그렇구나.'
실비아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깨달음의 불꽃이 그녀의 뇌리를 강타했다.
'배움을 구한다고 입을 놀린 내 태도 자체가 가볍기 짝이 없었던 거야. 마법의 진리는 말이나 글로 전수되는 조잡한 것이 아니거늘. 나는 고작 수석 입학이라는 사소한 결과에 취해, 그분의 깊고 심오한 인과를 말 몇 마디로 거저 얻으려 했다.'
그녀는 자신의 오만함을 뼈저리게 반성했다. 엘리엇의 그 매정한 침묵은 거절이 아니었다. 그것은 '말의 유희에 현혹되지 말고, 세계의 흐름을 몸소 체득하라'는 가장 위대하고도 침묵적인 가르침이었다.
"참된 가르침은 소리가 없다……."
실비아는 떨리는 손을 가슴에 얹었다. 감격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카데미 역사상 가장 자존심 강하고 오만하다던 천재녀는, 이제 엘리엇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며 마음 깊이 복종하는 충직한 제자로 완전히 거듭나 있었다.
* * *
간신히 시험장을 빠져나온 엘리엇은 곧장 기숙사 배정 사무처로 향했다.
학기 초의 사무처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화려한 실크 로브를 걸친 명문 귀족 영애들과 거만한 태도의 공작가 자제들이 서로 좋은 방을 차지하기 위해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우리 가문이 아카데미에 기부한 마나스톤이 몇 개인데 이런 구석진 방을 준다는 건가!" "중앙 타워 4층은 마나의 흐름이 가장 윤택한 명당이오! 거긴 당연히 우리 영지가 차지해야지!"
귀를 찌르는 고함과 사방에서 뿜어 나오는 조잡한 마력 파동들. 엘리엇은 미간을 찌푸렸다. 마력 과민증이 발작을 일으키기 직전이었다. 이 시끄럽고 마력이 끓어 넘치는 기숙사 중앙 타워에 들어갔다간 하루에 세 시간도 제대로 자지 못할 게 뻔했다.
'조용하고, 마나가 전혀 흐르지 않는 곳.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외진 곳이어야 해.'
엘리엇은 느릿한 걸음으로 신청 데스크로 다가갔다.
책상 뒤에 앉아 있던 늙은 사무처 직원은 서류 더미에 파묻혀 연신 한숨을 쉬고 있었다. 엘리엇은 품속에서 깃펜을 꺼내 배정 신청서의 빈칸에 거침없이 깃촉을 대고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북동쪽 4구역, 107호 독실.]
사무처 직원은 신청서를 건네받고 안경을 고쳐 쓰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학생, 정말 이 방을 원하는 건가? 북동쪽 4구역은 기숙사 단지에서도 가장 외진 끝자락인 데다, 고대 결계의 마나 파동이 서로 상쇄되어 마나가 거의 흐르지 않는 불모지야. 게다가 독실이라고는 하지만 옛날에 창고로 쓰던 곳이라 난방도 제대로 안 될 텐데?"
"상관없습니다."
엘리엇은 건조하게 답했다.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
"방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곳으로 지정해 주십시오."
"……허어, 참 특이한 학생이군. 다른 녀석들은 마나 한 줌이라도 더 마시겠다고 난리를 치는데."
직원은 쯧쯧 혀를 차며 엘리엇의 서류에 붉은색 승인 도장을 쾅 찍었다.
방쇠를 손에 쥔 엘리엇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드디어 완벽한 안식을 취할 수 있다. 소음도 없고, 졸음을 방해하는 마나 파동도 없는 완벽한 폐허. 그곳이야말로 그가 꿈꾸던 조용한 은퇴 생활의 요람이었다.
하지만 엘리엇이 방쇠를 챙겨 사무실을 나간 지 채 10분도 되지 않아, 이 사소한 신청서 한 장은 아카데미 총학생회장실의 책상 위에 놓이게 되었다.
탁!
기하학적으로 완벽하게 정렬된 가구들 사이에서, 학생회장 아드리안 본 발렌타인이 서류를 신경질적으로 내리쳤다.
"북동쪽 4구역 107호라고?"
그의 날카로운 안경테 너머로 차가운 이채가 서렸다. 아드리안은 아카데미의 모든 것을 수학적으로 계산하고 통제하려는 극단적 질서 벽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에게 엘리엇이라는 존재는 도무지 공식에 대입되지 않는 거슬리는 미지수였다.
"예, 회장님. 엘리엇 드 벨레로폰이라는 신입생이 자진해서 그 방을 신청했습니다. 다른 귀족 학생들과는 달리 중앙 타워의 이권을 완전히 포기하고 말입니다."
보고를 올린 집행관이 마른침을 삼켰다.
아드리안은 즉시 집무실 벽면에 걸린 아카데미 전체의 고대 마법 결계 지도를 펼쳤다. 그의 손가락이 지도의 북동쪽 구석, 아주 좁고 어두운 지점을 짚었다.
"어리석은 놈들. 그곳이 그냥 버려진 창고인 줄 아는가?"
아드리안의 이마에 푸른 핏대가 돋아났다.
"북동쪽 4구역 107호는 아카데미를 감싸고 있는 종공간 결계의 마나 순환선이 교차하는 극점이다. 마나가 소멸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두 개의 거대한 마나 흐름이 정밀하게 부딪쳐 서로를 상쇄하고 있기 때문이지. 즉, 그곳은 아카데미 내부에서 유일하게 황실의 감시망과 학생회의 탐지 마법이 완벽하게 우회되는 '마나 흐름 차단지(Dead Zone)'다!"
"예, 예?! 그렇다면……."
집행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엘리엇이라는 자는 처음부터 그곳을 노리고 입학했다는 뜻이다. 겉으로는 게으르고 나태한 척하며 다른 학생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아무도 감시할 수 없는 그 사각지대에서 아카데미 전체를 쥐고 흔들 모종의 거대 음모를 꾸미겠다는 거지. 고도의 무질서 교란 전술…… 과연 내 예상이 맞았어."
아드리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감시를 강화하라. 그가 그 방에서 단 한 걸음이라도 움직이거나, 사소한 의식이라도 치르려 한다면 즉시 나에게 보고하란 말이다!"
* * *
정작 '거대 음모의 주동자'로 낙인찍힌 엘리엇은, 마침내 도착한 자신만의 안식처에서 깊은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북동쪽 4구역 107호.
낡은 목조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매캐한 먼지 냄새와 함께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아늑한 공간이 나타났다. 좁은 창문 틈새로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비쳐 들고 있었고, 방 한구석에는 다소 낡았지만 푹신해 보이는 침대가 놓여 있었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마력 과민증을 자극하는 그 어떤 마나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머리를 찌르던 통증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최고군."
엘리엇은 가방을 바닥에 대충 던져두고,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쳤다. 그리고 침대로 다가가 낡은 매트리스 위로 몸을 던졌다.
스프링이 삐걱거리는 포근한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이 순간을 위해 그 끔찍한 입학시험을 치르고, 귀찮은 천재들의 시선을 견뎌낸 것이다. 엘리엇은 눈을 감으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의식이 빠르게 흐려지며 기분 좋은 어둠이 그를 감싸 안으려 했다.
침대에 누운 지 정확히 2초가 지났을 때였다.
콰아앙—!
"벨레로폰 경! 안에 계십니까?!"
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흔들리며, 고요한 방안을 찢어발기는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엘리엇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 깊고 어두운 분노가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들었다.
'……죽이고 싶다.'
평화로운 은퇴 생활의 첫 수면을 방해한 불청객은 누구인가. 엘리엇은 목뼈가 부러진 사람처럼 좀비처럼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지독한 피로와 살초(殺招)에 가까운 한기가 서렸다.
문 쪽으로 걸어가는 그의 걸음걸이는 이미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철컥.
문을 열자, 그곳에는 화려한 비단 옷을 입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뚱뚱한 체구의 남학생이 서 있었다. 남작 상가의 자제이자 돈 냄새를 맡는 데 귀신같다는 베르너 로젠버그였다.
베르너는 엘리엇이 문을 열자마자,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위압감에 숨을 들이켰다. 무표정하지만 온몸을 얼려버릴 듯한 차가운 눈빛. 그것은 사소한 장사꾼 따위는 한 손가락으로 뭉개버릴 수 있는 절대자의 기색이었다.
'역시…… 소문이 맞았어!'
베르너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엘리엇이 기숙사 북동쪽의 마나 차단지를 차지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베르너는 직감했다. 이것은 조만간 제국의 경제와 마나스톤 시장을 통째로 뒤흔들 거대한 음모의 시작이라고. 이 비범한 인물의 줄을 잡지 못한다면 로젠버그 상단은 도태될 뿐이었다.
"벨레로폰 경! 결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베르너는 품 안에서 붉은색 마법 인장으로 꽁꽁 밀봉된 두꺼운 가죽 장부를 다급하게 꺼내 들었다.
"이것은 저희 로젠버그 상단이 목숨을 걸고 입수한, 제국 동부 마나스톤 광산들의 실제 비축량과 황실 재정처의 비밀 거래 장부입니다! 괴주께서 이 방을 선택하신 진짜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제발…… 저희 상단을 당신의 위대한 계획의 동반자로 삼아 주십시오!"
제국의 심장을 쥐고 흔들 수 있는 특급 상업 기밀이 담긴 장부가, 단잠을 방해받아 극도로 신경질적인 대마도사의 눈앞에 들이밀어 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