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라면 내 목숨이라도 원하시는 겁니까, 공녀?"
레이반의 목소리는 낮게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의 거대한 체구가 드리운 그림자가 엘리시아의 뮈제 드 라 세종 스타일 페일 핑크 실크 타프타 드레스 위로 짙게 내려앉았다. 은색 자수가 정교하게 놓인 에포렛이 그의 넓은 어깨 위에서 기괴할 정도로 차가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주변의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 살롱 드 루미에르의 화려한 크리스탈 샹들리에 아래 서 있던 영애들이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숨을 죽였다. 전쟁광이라 불리는 사내의 서늘한 살기는 그 자체로 가냘픈 귀족들에게 공포였다.
그러나 엘리시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브뤼셀 레이스로 화려하게 장식된 소맷단을 우아하게 정리하며, 들고 있던 타조 깃털 부채를 가볍게 접었다. 톡, 하고 부채 끝이 대리석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기묘할 정도로 선명하게 울렸다.
"목숨이라니요, 레이반 경. 제국에서 가장 값싼 것이 패군의 목숨이거늘, 제가 왜 그런 무가치한 것을 탐하겠습니까?"
엘리시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봄바람처럼 부드러웠으나, 그 안에는 벼려진 비수 같은 조소가 담겨 있었다.
"저는 지독한 현실주의자랍니다. 당신의 그 고결한 심장 따위는 제 장부에 한 줄짜리 자산으로도 기록될 수 없어요."
레이반의 짙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분노가 아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당혹감과 기묘한 갈망이 그의 단단한 턱끝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누구도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이토록 오만하게 대가를 논한 적은 없었다. 황실의 가스라이팅에 갇혀 괴물이라 손가락질받던 그에게, 이 여자의 냉혹함은 도리어 구원의 밧줄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눈앞에 반투명한 푸른빛의 스크린이 매끄럽게 떠올랐다. 오직 엘리시아의 시야에만 존재하는 '사교계 평판 장부'였다.
[대상: 레이반 폰 헤이즐넛 (대공)] * 현재 사교계 평판: 8% (최악, 파멸 직전) * 보유 악명 수치: 92% (황실의 '전쟁광' 프레임 낙인) * 계약 매력도: 최고조 (구원을 향한 갈망 95%)
'완벽한 사냥개야. 아직 길들여지지 않았을 뿐.'
엘리시아는 속으로 차갑게 미소 지었다. 인간을 믿지 않는 그녀에게 레이반은 감정을 나눌 상대가 아니었다. 오직 아르젠트 공작가의 파멸을 막고, 황실의 목줄을 쥘 가장 날카로운 검이자 고수익을 보장하는 우량 거래처일 뿐이었다.
"경의 가문을 뒤덮은 그 추잡한 스캔들. 황실이 조작한 반역 문서의 실체를 밝혀 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제 제안은 단순한 정보 제공이 아닙니다."
엘리시아는 상체를 슬며시 앞으로 기울였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다마스크 장미 향이 레이반의 코끝을 스쳤다.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가 그의 시선을 단단히 구속했다.
"계
약서에 서명하라는 뜻이지요. 피의 맹세보다 훨씬 구속력 있는, 지분 교환식 동맹 계약에 말입니다."
레이반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단단한 수입산 가죽 장갑을 낀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제국의 영웅에서 하루아침에 반역자로 전락한 사내의 눈빛에는, 낭떠러지 끝에서 마주한 유일한 동반자를 향한 기묘한 열망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동맹 계약이라……."
"저는 경의 가문을 덮친 그 더러운 오명을 완벽하게 세탁해 드릴 겁니다. 그 대가로 경은 제 개인 가신이자, 이 사교계라는 전장에서 제 명령에만 움직이는 가장 날카로운 검이 되어 주셔야겠습니다."
"나를 아르젠트의 사냥개로 부리겠다는 소리로군, 공녀."
"개라니요, 품격 없게. '수석 집행관'이라는 우아한 명칭이 있지 않습니까."
엘리시아는 세브르 도자기 찻잔을 들어 입술에 살짝 대었다가 내려놓았다. 차가운 찻물이 목줄기를 타고 흐르는 동안, 그녀의 뇌리는 오직 손익계산서로만 가득 차 있었다. 레이반의 무력과 군사적 가치는 황실의 목을 조를 가장 확실한 패다. 인간 불신증에 걸린 그녀에게 이보다 완벽한 거래처는 없었다.
그녀는 눈앞에 띄워진 '사교계 평판 장부'의 인터페이스를 빠르게 조작했다.
먼저 황실이 조작한 레이반의 반역 혐의를 뒤흔들 카드가 필요했다. 엘리시아는 살롱 한구석에서 수군거리며 자신들을 훔쳐보고 있던 영애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중 황실 평판 통제국의 끄나풀이자, 최근 가짜 스캔들을 적극적으로 유포하던 가브리엘라 영애가 타깃이었다.
엘리시아는 부채를 소리 나지 않게 접으며 가브리엘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레이디 가브리엘라. 황실 통제국이 배포한 격문에는 헤이즐넛 대공이 북부 보급로를 차단하고 군량을 은닉했다고 되어 있더군요. 참으로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갑작스러운 지목에 가브리엘라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엘리시아는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귀 가문의 상단 장부를 보면, 해당 시기에 대공의 보급대는 오히려 황실 수송대보다 사흘 먼저 국경에 도착해 구휼미를 방출했더군요. 가브리엘라 영애, 귀 상단의 장부가 거짓입니까, 아니면 황실의 격문이 사기극입니까?"
"그, 그것이……!"
가브리엘라가 들고 있던 찻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사교계의 정보망을 쥐고 흔드는 아르젠트 공녀의 직격타에 주변 영애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논리적이고도 구체적인 수치 제시 앞에서는 황실이 쌓아 올린 가스라이팅도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뿐이었다.
그 순간, 평판 장부의 수치가 실시간으로 요동쳤다.
[레이반 폰 헤이즐넛의 평판 지수: 8% -> 17% 상승] [경고: 고위 귀족의 평판 정보 개방 및 조작 감지.] [대가 지불: 엘리시아 드 아르젠트의 사회적 오명(악명) 수치: 30% -> 38%로 상승!] [※ 오명 수치가 100%에 달하면 황실의 '황제령 모독죄' 기소 명분이 완성되어 단두대 처형 엔딩이 강제 실행됩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한기가 올라왔다. 숨이 막히는 압박감에 엘리시아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통증을 참아냈다. 제 목숨을 갉아먹는 대가였으나, 황실의 숨통을 끊을 수만 있다면 이 정도 리스크는 기꺼이 감수할 용의가 있었다.
그녀는 기세를 몰아 장부의 검색창을 활성화했다. 황실을 완벽하게 무너뜨릴 또 다른 비장의 카드를 미리 확보해 두어야 했다. 그녀의 타깃은 황실 사교계의 독재자, 헬레나 황태후였다.
[조회 대상: 헬레나 로엔그린 황태후의 핵심 사치 자산 '푸른 눈물' (블루 다이아몬드)] * 상태: 진품 신뢰도 98% (숨겨진 결함: 내부 미세 크랙 및 황태자의 사적 위조 정황 포착) * 가치: 50,000 골드 및 사교계 상징성 극상.
'크랙이라…… 겉보기엔 완벽한 진품이지만 내부가 완전히 깨져 있군. 황태자의 위조 흔적까지.'
엘리시아는 입꼬리를 은밀하게 올렸다. 조만간 열릴 황태후의 보석 가치 증명전에서 황실의 권위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릴 완벽한 폭탄을 손에 넣은 셈이었다. 정보의 가치를 기록한 그녀는 장부를 닫고 레이반을 똑바로 응시했다.
"보셨습니까, 대공? 제 장부가 가진 힘을. 제 손을 잡으신다면, 경을 옭아맨 그 더러운 낙인은 눈 녹듯 사라질 것입니다."
레이반은 넋을 잃은 듯 엘리시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만하고 차가우며, 지독할 정도로 계산적인 이 악녀가 그의 심장을 기묘하게 고동치게 만들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히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쾅—!
살롱 드 루미에르의 화려한 오르몰루 장식 유리문이 굉음과 함께 박살 났다. 날카로운 유리 파편들이 크리스탈 샹들리에 빛을 받아 은하수처럼 허공에 흩뿌려졌다.
"악! 무슨 일이야!" "꺄악!"
대리석 바닥을 거칠게 짓밟는 군화 소리가 살롱 내부를 메웠다. 황태후의 사병 호위 기사단, 흑철 갑주를 입은 백여 명의 무장 군인들이 무자비하게 난입해 사교계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그들의 최전선에 선 기사단장이 시퍼렇게 날이 선 대검을 뽑아 들며 레이반을 가리켰다.
"황태후 폐하의 명이다! 반역 혐의자 레이반 폰 헤이즐넛을 즉시 체포 구금한다! 저항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반역 동조자로 처단하겠다!"
순식간에 백여 자루의 검끝이 레이반과, 그 앞에 선 엘리시아를 향해 겨누어졌다. 사교계의 우아한 평화가 단숨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차가운 금속의 기운이 살롱의 온기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바닥에 뒹굴며 산산조각 난 베네치아산 거울 파편 위로, 시퍼런 검날의 실루엣이 어지럽게 반사되었다.
영애들의 비명과 흩날리는 실크 자락 사이에서, 오직 레이반만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 어린 기운이 주위의 공기를 무겁게 압박했다. 그의 손이 본능적으로 허리춤의 검자루로 향했다. 제국의 영웅을 억누르던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부서지고, 피에 굶주린 맹수가 깨어나기 직전의 팽팽한 긴장감이 살롱 내부를 채웠다.
그의 검이 칼집에서 단 1인치라도 빠져나오는 순간, 이곳은 황실 사병들의 피로 물든 도살장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황실이 파놓은 가장 완벽한 함정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었다.
"평정심을 유지하세요, 경."
엘리시아의 목소리는 얼음물처럼 차갑고 차분했다. 그녀는 브뤼셀 레이스 장갑을 낀 가냘픈 손을 뻗어, 레이반의 단단한 손등 위를 가볍게 얹었다. 가볍고 섬세한 접촉이었으나, 그 안치된 무게감은 레이반의 움직임을 완전히 묶어버리기에 충분했다.
레이반의 고개가 느리게 돌아갔다. 검붉은 눈동자 속에는 당장이라도 눈앞의 기사들을 찢어발기겠다는 야성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으나, 엘리시아의 흔들림 없는 푸른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그 사나운 기세가 기묘할 정도로 가라앉았다.
"제 허락 없이 이빨을 드러내는 사냥개는 매력 없답니다."
그녀는 레이반을 향해 속삭인 뒤, 천천히 몸을 돌려 기사단장 케일런을 응시했다.
"황태후 폐하의 개들이 사교계의 가장 고결한 유리 정원을 짓밟는 법을 언제부터 배웠는지 모르겠군요, 바론 케일런 경."
엘리시아는 부서진 유리 조각을 가볍게 즈려밟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페일 핑크 드레스 자락이 우아하게 찰랑였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마치 자신의 정원을 거니는 여왕과도 같은 태도에, 오히려 백여 명의 무장 기사들이 압도당한 듯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케일런 기사단장의 얼굴이 수치심과 분노로 일그러졌다.
"아르젠트 공녀! 지금 황태후 폐하의 칙령을 모독하는 것인가! 반역자와 함께 단두대에 서고 싶지 않다면 당장 물러서라!"
"모독이라니요. 저는 그저 제국의 품격을 논하는 것뿐입니다."
엘리시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머릿속으로 '사교계 평판 장부'를 빠르게 호출했다. 반투명한 푸른빛 스크린이 그녀의 안구에 투영되며 케일런의 상세 정보가 나열되었다.
[대상: 케일런 폰 브란트 (황태후 직속 기사단장)] * 현재 사교계 평판: 62% (보통) * 숨겨진 진실: [황실 군수품 횡령 및 불법 도박으로 인한 아르젠트 지조 상단에의 막대한 채무 빚] * 치명적 약점: 횡령 장부의 사본이 아르젠트 공작가 비밀 금고에 보관 중임.
'미련한 고기방패 같으니라고.'
엘리시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잔인하게 올라갔다. 그녀는 들고 있던 타조 깃털 부채로 자신의 입가를 우아하게 가린 채, 오직 케일런만이 들을 수 있는 낮고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케일런 경. 경이 입고 있는 그 화려한 흑철 갑주와 허리에 찬 명검의 대금이 누구의 주머니에서 나왔는지 잊으신 모양이군요."
케일런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확장되었다.
"그, 그것이 무슨……."
"아르젠트 지조 상단에 저질러 놓으신 그 막대한 채무와, 군수품 명세를 조작해 도박 자금으로 탕진한 기록이 적힌 장부 말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낭독해 드릴까요? 경의 그 고결한 기사단장 작위가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박탈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으시다면 기꺼이 그리해 드리지요."
케일런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그의 검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엘리시아 드 아르젠트가 제국의 모든 정보와 스캔들을 쥐고 흔드는 마녀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으나, 설마 자신의 가장 치명적인 목줄까지 쥐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사교계 평판 장부의 수치가 경고음과 함께 붉게 점멸했다.
[케일런 폰 브란트의 평판 제어 시도 성공.] [대가 지불: 엘리시아 드 아르젠트의 사회적 오명(악명) 수치: 38% -> 44%로 상승!] [※ 주의: 오명 수치가 위험 수준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물리적 충돌 위기를 회피하되, 평판 세탁을 통한 오명 수치 관리가 시급합니다.]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호흡이 잠시 가빠졌으나, 엘리시아는 단 한 번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더욱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선택하세요, 케일런 경. 황실의 충견이 되어 명예롭게 파멸할 것인지, 아니면 잠시 눈을 감고 현명한 은퇴를 준비할 것인지."
케일런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등 뒤에 선 백여 명의 기사들이 단장의 명령만을 기다리며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으나, 정작 단장 본인은 공포에 질려 검을 내릴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엘리시아의 완벽한 심리적 판짜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황실의 가스라이팅 기구인 '평판 통제국'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케일런이 주저하는 그 찰나, 기사들의 대열 사이를 헤치고 화려한 비단 로브를 입은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태자 테오도르의 심복이자 사법 통제국의 고위 관료인 펠릭스 남작이었다. 그의 입가에는 비열하고도 승리감에 도취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역시 아르젠트 공녀의 세치 혀는 제국의 그 어떤 검보다 날카롭군요. 하지만 무의미한 저항은 거기까지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펠릭스는 품 안에서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황금빛 양장 문서를 꺼내 들었다. 그 문서의 표지에는 황실을 상징하는 쌍두독수리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황태자 전하의 특별 사법 명령서다! 헤이즐넛 대공의 체포는 물론이거니와, 그와 결탁하여 황실의 명예를 훼손하고 반역 음모를 꾸민 아르젠트 공녀 엘리시아 역시 공범으로 체포한다!"
살롱 안이 다시 한번 거대한 충격과 경악으로 뒤흔들렸다.
엘리시아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황태자 테오도르가 이토록 빠르게, 그리고 전면적으로 자신을 기소하려 들 줄은 예상 밖이었다. 평판 장부의 경고등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경고! 황태자 테오도르의 '반역 공모 및 국기 문란' 프레임 발동!] [엘리시아 드 아르젠트의 사회적 오명 수치 폭등 개시: 44% -> 68%] [단두대 처형 엔딩 발생 확률: 70% 돌파!]
숨이 턱 막히는 고통과 함께 눈앞이 순간적으로 흐려졌다. 오명 수치의 폭등으로 인한 반동이 그녀의 육체를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엘리시아는 쓰러질지언정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어 피 맛을 보며 정신을 집중했다.
"저를 체포하시겠다고요? 무슨 명분으로 말입니까, 펠릭스 남작."
"반역자와의 내통, 그리고 황실의 절대적 권위인 황태후 폐하의 유산 '푸른 눈물'에 대한 허위 사실 유포죄다!"
펠릭스가 사납게 외치며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무기를 버리지 않는다면 즉시 사살해도 좋다! 반역자들을 압송하라!"
백여 명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고쳐 잡으며 엘리시아와 레이반을 향해 좁혀 들어왔다. 레이반의 눈동자가 붉게 타오르며, 그는 마침내 검을 완전히 뽑아 들었다. 그의 거대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살롱의 유리창들을 추가로 깨뜨리며 폭발 직전의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완벽한 고립무원의 위기.
엘리시아는 거칠게 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자신의 평판 장부에 기록된 '푸른 눈물'의 치명적인 결함 정보와, 레이반을 구원할 마지막 카드를 떠올렸다. 그리고 기사들의 검끝이 그녀의 턱밑에 닿기 직전,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