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목구멍을 가르고 들어오는 것은 비단 바람이 아니었다. 서슬 퍼런 강철의 파동, 단두대의 칼날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의 소름 끼치는 감각.

쿵, 하고 무거운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져 내리는 환청과 함께 엘리시아 드 아르젠트는 눈을 떴다.

"하아, 하……."

목덜미를 감싸 쥔 손가락 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피비린내 나는 처형장이 아니었다. 최고급 오리엔탈 실크로 짜인 캐노피 천장과 금박을 입힌 로코코 양식의 가구들, 그리고 창밖으로 비쳐 드는 평화로운 아침 햇살.

공작 영애, 엘리시아의 침실이었다.

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확히 한 달 뒤, 황실 평판 통제국의 정교한 덫에 걸려 가문이 몰락하고 그녀가 맞이하게 될 확실한 미래의 편린이었다. 목숨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경고.

그때, 허공에 기묘한 황금빛 안개가 일렁이더니 투명한 유리판 같은 형태의 인터페이스가 눈앞에 떠올랐다.

[사교계 평판 장부 (Social Ledger) 활성화] * 소유주: 엘리시아 드 아르젠트 * 현재 사회적 악명 수치(오명): 45% (※ 100% 도달 시 '황제령 모독죄' 적용, 단두대 처형 엔딩 강제 집행) * 보유 영향력 포인트: 1,000 LP * 특이사항: 타인의 평판을 조작 및 폭로할 수 있으나, 대상의 지위가 높을수록 소유주의 '악명 수치'가 동조 상승함.

눈동자를 천천히 굴려 텍스트를 읽어 내린 엘리시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냉소적인 실소가 하얀 뺨 위로 번졌다.

"평판 장부라."

인간이란 결국 가죽을 뒤집어쓴 짐승에 불과하며, 사교계라는 거대한 연극무대 위에서 각자의 위선을 주식처럼 거래하는 존재들이다. 지독한 인간 불신증에 시도 때도 없이 냉소벽이 도지는 그녀에게, 이 장부는 신의 장난이라기보다는 가장 어울리는 무기였다.

"한 달짜리 시한부 목숨줄을 쥐고 흔들기엔, 제법 쓸만하겠어."

그녀는 침대 위로 길게 늘어진 비단 가운의 자락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교계의 왕좌가 어울리는 여왕의 걸음걸이로.

***

유리 궁전이라 불리는 '살롱 드 루미에르'의 온실은 오레올 제국에서 가장 탐욕스럽고 화려한 정보가 교환되는 중심지였다. 천장을 메운 크리스털 유리가 햇빛을 받아 무지갯빛 파편을 쏟아내고 있었고, 바닥에는 이국적인 향기를 풍기는 장미들이 만발해 있었다.

엘리시아는 부풀린 크리놀린 스커트 위에 최고급 아랑송 레이스를 덧댄 짙은 자줏빛 드레스를 입고 부채를 천천히 흔들었다. 목덜미를 장식한 것은 물방울 모양의 진주 파우치와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초커였다.

그녀가 찻잔을 들어 올리는 순간, 사방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어머, 저기 좀 봐. 아르젠트 공녀잖아?" "황실 통제국에서 흘러나오는 소문 들었어? 아르젠트 공작가가 황실의 비자금을 횡령해서 군비를 사적으로 유용했다던데……." "사교계의 수치지. 저렇게 꼿꼿한 척 앉아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거야."

황실 평판 통제국이 퍼뜨린 교묘한 가스라이팅의 결과물이었다. 귀족들은 이미 아르젠트 공작가를 '침몰하는 배'로 규정하고, 엘리시아를 사교계의 악녀로 낙인찍어 무리에서 격리하려 들고 있었다.

그때, 은색 실크 드레스를 과시하듯 부풀린 영애 하나가 엘리시아의 테이블 앞으로 걸어왔다. 자작 가문의 영애이자, 황태자 파벌의 말단에서 나팔수 역할을 자처하는 클로에 베인 영애였다.

"여전히 우아하신 척을 하고 계시네요, 엘리시아 영애."

클로에는 레이스가 달린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리며 가증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온실 안의 모든 귀족이 들을 수 있을 만큼 낭랑했다.

"하지만 아르젠트 가문의 그 더러운 스캔들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그 고고한 고개도 더는 들지 못하시겠지요? 일각에서는 벌써 공녀 전하의 단두대행을 점치는 이들도 있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에요."

주변의 귀족 영애들이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동정어린 척을 가장한 잔인한 도발. 황실 통제국이 설계한 평판 깎아내리기 공작의 일환이었다.

엘리시아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찻잔을 테이블 위에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도자기가 대리석 테이블과 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냈다.

그녀의 눈앞에 클로에의 머리 위로 붉은색과 황금색의 차트가 떠올랐다.

[대상: 클로에 베인 (자작 영애)] * 현재 사교계 평판: 65% (준수함) * 숨겨진 비밀 스캔들: [시동생인 마크 베인과의 야간 밀회 및 불륜 관계] (치명도: 극상) * 폭로 시 예상 평판 하락치: -50% * 폭로 시 엘리시아의 악명 수치 변동: +3%

엘리시아는 부채를 접어 손바닥에 툭, 툭 가볍게 쳤다. 그녀의 입술이 아주 느리게 호선을 그렸다.

"클로에 영애." "네, 말씀하세요. 마지막 자비로 들어드릴 용의는 있답니다." "자비라니, 가당치도 않아라. 저는 그저 영애의 그 눈부신 은색 드레스가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의외의 칭찬에 클로에가 어깨를 으쓱하며 턱을 치켜올렸다.

"제 안목이 워낙 뛰어난 편이긴 하지요." "그렇지요. 특히…… 지난주 수요일 밤, 베인 자작가의 교외 별장 뒷문으로 몰래 들어갈 때 입으셨던 그 수수한 회색 망토에 비하면, 오늘 드레스가 확실히 기품이 있군요."

순간, 클로에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부채를 쥐고 있던 그녀의 손가락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그게 무슨……." "아, 제 기억이 나쁜 편은 아닌데 말입니다. 베인 자작께서 황도 의회 의장직 때문에 남부로 출장을 가셨던 바로 그날 밤이었지요? 영애의 마차는 분명 저택에 마구간에 입고되어 있었는데, 별장 안에서는 아주 다정한 남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고 하더군요."

온실 안의 소란스러움이 찬물을 끼얹은 듯 단숨에 가라앉았다. 수군거리던 영애들의 시선이 이제는 엘리시아가 아닌 클로에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무슨 터무니없는 모함을……! 지금 증거도 없이 나를 모욕하는 건가요? 황실 통제국에 고발해서—" "증거요?"

엘리시아는 찻잔의 손잡이를 가볍게 쓸어내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녀의 음성은 낮았지만, 온실 전체를 지배하는 기묘한 압도감이 있었다.

"영애의 품속에 있는 그 실크 손수건, 참으로 곱군요. 모서리에 수놓아진 이니셜이 'M.B'던가요? 베인 자작의 이니셜은 분명 'H.B'일 텐데 말입니다. 시동생이신 마크 베인 경의 이니셜이 마침 'M.B'였던가요?"

클로에는 차마 부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품을 손으로 다급히 가렸다. 그 본능적인 방어 행동 자체가 이미 모든 것을 자백하는 꼴이었다.

"어머, 어머 세상에……." "시동생과? 정말로?" "베인 자작이 그렇게 아내를 아꼈는데, 세상에 어쩜 저런 음탕한 짓을……."

귀족들의 시선이 경멸과 조소로 가득 찬 화살이 되어 클로에의 온몸에 박혔다.

[클로에 베인의 스캔들 폭로 성공!] * 클로에 베인 평판: 65% -> 15% (사교계 영구 퇴출 위기) * 엘리시아의 악명 수치: 45% -> 48% * 영향력 포인트 500 LP 획득!

눈앞에 떠오른 황금빛 장부의 수치가 요동치며 클로에의 평판 그래프가 수직으로 낙하했다. 단 한 번의 은근한 폭로로, 황태자 파벌의 나팔수 하나가 완전히 사회적 매장을 당하는 순간이었다.

"아, 아아……!"

클로에는 수치심과 경악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비명을 지르며 온실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녀가 도망치듯 빠져나간 자리에 남은 귀족들은 이제 엘리시아를 두려움이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황실 통제국의 날카로운 압박 속에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오히려 상대의 가장 치명적인 명줄을 끊어버리는 잔혹함. 그것이 진정한 아르젠트의 악녀가 가진 힘이었다.

엘리시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찻잔을 들어 품위 있게 한 모금 머금었다. 얼어붙은 온실 안에서 오직 그녀만이 여유롭게 봄날의 차를 즐기고 있었다.

***

그 살풍경한 사교계의 처형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음지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인물이 있었다.

온실의 가장 어두운 구석, 덩굴식물들이 우거진 기둥 뒤에 기대어 서 있던 사내.

거대한 체구와 굳게 다문 입술, 그리고 전쟁터의 화약 냄새를 완전히 지우지 못한 듯한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였다.

그는 바로 '괴물 가문', '전쟁광의 더러운 피'라는 황실의 조직적인 가스라이팅에 갇혀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황실의 영웅, 레이반 폰 헤이즐넛 경이었다.

검은 제복의 깃을 높이 세운 레이반의 푸른 눈동자가 엘리시아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눈빛은 맹수가 사냥감을 발견했을 때의 그것처럼 예리하면서도, 어딘가 깊은 갈망을 담고 있었다.

황실이 조작한 거짓 추문으로 인해 가문이 공중분해 될 위기에 처한 무인. 사교계의 그 어떤 화려한 말장난도 그를 구원해주지 못했기에, 그는 이 눈부신 무덤 같은 온실에서 홀로 썩어가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그의 눈앞에서, 엘리시아는 황실의 끄나풀을 단 몇 마디의 독설과 보이지 않는 정보의 칼날로 완벽하게 도려냈다. 그것은 무력이 아닌, 사교계라는 전장에서 펼쳐진 가장 우아하고도 처절한 참수 작전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화전(火戰)을 치르듯 강렬하게 부딪쳤다.

엘리시아는 부채 너머로 레이반을 바라보았다.

[대상: 레이반 폰 헤이즐넛 (대공)] * 현재 사교계 평판: 8% (최악, 파멸 직전) * 숨겨진 진실: [황실의 무고용 위조 직인 및 조작된 반역 문서 누명] * 잠재적 가치: 측정 불가 (최고의 검이자 군사적 동맹원)

'쓸만한 사냥개군.'

엘리시아는 속으로 차갑게 읊조렸다. 인간을 믿지 않는 그녀에게 레이반은 훌륭한 '거래처'이자, 이 진흙탕 싸움에서 황실의 목을 벨 가장 날카로운 검이 될 자격이 있었다.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였다.

기둥 뒤에 서 있던 레이반이 성큼성큼 걸어 나와 그녀의 테이블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엘리시아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주변의 영애들이 숨을 들이켜며 뒤로 물러섰다. 전쟁광의 기운에 압도당한 탓이었다.

그러나 엘리시아는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채,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레이반 경. 제 테이블의 진로를 방해하시는군요." "공녀 전하."

레이반의 목소리는 낮고 가라앉아 있었으며, 쇠사슬을 끄는 듯한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는 엘리시아를 내려다보며, 오직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의 은밀하고도 서늘한 어조로 말했다.

"방금 전의 그 솜씨를 보았습니다. 상대의 숨통을 가장 확실하게 끊어놓는 법을 아주 잘 알고 계시더군." "칭찬으로 받아들이지요. 그래서 제게 하실 말씀은 그것뿐입니까?"

레이반의 턱끝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그의 짙은 눈동자 속에 억눌린 분노와, 동시에 절박한 갈망의 불꽃이 튀었다.

"제 가문을 옭아매고 있는 그 더러운 스캔들…… 황실이 위조한 가짜 문서의 실체를 밝혀낼 수 있는 정보가, 당신의 그 기묘한 장부 안에 들어 있습니까?"

사교계 전체를 뒤흔들 전쟁 영웅의 거친 고백이자, 구원을 바라는 맹수의 첫 으르렁거림이었다. 엘리시아는 부채를 가볍게 펴서 자신의 입가를 가렸다. 부채 너머로 번지는 그녀의 미소는 잔혹하리만큼 아름다웠다.

"글쎄요. 그 질문에 답을 얻으려면, 경이 내놓아야 할 대가가 아주 비쌀 텐데 말입니다."

그녀의 눈동자가 탐욕스럽고 차갑게 빛나며, 사교계의 진정한 여왕으로서 가질 새로운 가신(가신)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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