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웅장한 놋쇠 문이 둔중한 금속음을 토해내며 닫히는 순간, 법정 내부의 공기는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사방을 에워싼 높은 고딕식 대리석 기둥 사이로, 오직 피고인석을 비추는 가느다란 채광창의 빛만이 날카롭게 내리쬐고 있었다.

황태후 헬레나가 사입했다는 무색무취의 독약, ‘침묵의 밤’.

귀가에 스친 샤를로트의 경고는 차라리 유쾌한 유희의 서막에 가까웠다. 엘리시아는 우아하게 턱을 치켜세운 채, 짙은 남색 브로케이드 드레스의 자락을 정돈하며 피고인석의 가죽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스커트 자락이 흘러내리며 은실로 수놓인 무아레 문양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공녀님, 밤새 고초가 심하셨을 텐데 우선 목을 축이시지요.”

낮고 유순한 목소리. 엘리시아의 전담 비서 시녀인 마리안이 떨리는 손으로 은반반을 받쳐 들고 다가왔다. 반반 위에는 투명한 크리스탈 잔에 담긴 물과, 정교한 벨기에식 레이스로 가장자리를 장식한 하얀 손수건이 놓여 있었다.

마리안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엘리시아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눈앞에 반투명한 푸른빛의 ‘평판 장부’ 인터페이스가 조용히 떠올랐다.

[대상: 마리안 펠트] [충성도: 12% (황실 평판 통제국의 협박 및 뇌물로 인한 오염 상태)] [소지품: ‘침묵의 밤’이 도포된 레이스 손수건]

시녀는 부지중에 손수건을 집어 엘리시아의 손에 쥐여주려 했다. 비단 가벼운 땀을 닦아내는 척만 해도, 피부를 통해 치명적인 지용성 독소가 체내로 침투할 터였다.

그 찰나, 엘리시아의 등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샤를로트가 번개처럼 움직였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샤를로트가 마리안의 가느다란 팔목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등 뒤로 꺾어 내렸다.

“아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은반반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크리스탈 잔이 깨지며 물이 사방으로 튀었고, 문제의 손수건이 대리석 바닥에 툭 떨어졌다. 법정 내부에 모여 있던 귀족들과 배심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웅성거렸다.

“이, 이게 무슨 무례인가! 감히 성스러운 법정에서 폭행이라니!”

단상 높은 곳에 앉아 있던 황태자 테오도르가 가죽 의자의 손잡이를 움켜쥐며 호통을 쳤다. 그의 수려한 얼굴에 일순 당혹감과 살기가 교차했다.

샤를로트는 숨을 헉헉거리며 마리안의 팔목을 더욱 강하게 비틀어 제압한 채, 목소리를 높였다.

“재판장님! 그리고 신성한 법정의 배심원 여러분! 이 시녀의 손가락 끝을 보십시오. 황실 약제실에서 극비리에 유출된 독약 ‘침묵의 밤’의 미세한 보랏빛 흔적이 손톱 밑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황태후 폐하의 사주를 받아 공녀님을 독살하려 한 현행범입니다!”

“망발을!”

황태후 헬레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목에 걸린 커다란 고대 보석 ‘푸른 눈물’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 더러운 입으로 내 이름을 올리느냐! 아르젠트가 드디어 미쳐서 법정 전체를 모독하기로 작정한 모양이구나!”

엘리시아는 그 소란 속에서도 단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차갑게 식은 눈을 들어 헬레나를 응시했다. 은유적인 조소가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황태후 폐하, 고결함이란 목소리의 높낮이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짜를 진짜라 우기는 조급함에서 그 천박함이 드러나기 마련이지요.”

“뭐라?”

“귀족의 명예를 운운하시는 폐하의 목덜미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그 ‘푸른 눈물’처럼 말입니다.”

엘리시아는 검지손가락으로 헬레나의 목걸이를 가리켰다.

“3년 전, 황실 재정이 파탄에 이르렀을 때 폐하께서 사적으로 처분하신 진품 ‘푸른 눈물’은 이미 동대륙의 거상 손에 넘어가 있지요. 지금 폐하의 목에 걸린 것은 위조 장인 루카스가 황실의 묵인 하에 빚어낸, 내부에 미세한 크랙이 가득한 유리 모조품에 불과합니다. 제 말이 거짓말 같다면, 지금 당장 법정의 보석 감정관을 불러 햇빛에 비추어 보시지요. 내부의 조잡한 균열이 마치 폐하의 가문이 품은 도덕적 균열처럼 선명히 드러날 테니.”

그 순간, 헬레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목걸이를 감싸 쥐었다.

과거 2화에서 장부에 기록해 두었던 황태후의 치명적인 비밀. 황실의 자존심이자 정통성의 상징인 ‘푸른 눈물’이 위조품이라는 사실이 폭로되자, 방청석의 고위 귀족들 사이에서 겉잡을 수 없는 수군거림이 터져 나왔다.

[황태후 헬레나의 평판 지수: 82 -> 45 (급락)] [귀족들의 신뢰도 차트가 폭락합니다.]

“이, 이 무례한 년이……!”

헬레나가 부르르 떨며 중심을 잃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구시대의 독재자가 자랑하던 도덕적 권위가 단 한 문장으로 처참하게 박살 난 순간이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여전히 이가 갈리는 미소를 지으며 판결봉을 두드렸다.

“사소한 보석 이야기로 본질을 흐리지 마라, 엘리시아 드 아르젠트! 네까짓 입담으로 황실의 기소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네 곁에 선 저 전쟁광의 사냥개, 레이반 폰 헤이즐넛이 가문의 반역 인장을 찍어 보낸 서신이 이미 우리 손에 있다!”

테오도르가 호기롭게 가죽 양장본으로 제본된 기소장을 흔들었다.

바로 그 순간, 엘리시아의 뒤에 묵묵히 서 있던 레이반이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위압감에 단상 위의 서기들이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철컥.

레이반이 품 안에서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꺼내 판사석의 거대한 대리석 테이블 위로 사정없이 내던졌다. 주머니가 터지며 그 안에서 둔탁한 금속 인장과, 누렇게 바랜 종이 뭉치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위조품을 아직도 진짜라 믿고 계시다니, 황태자 전하의 안목이 심히 우려스럽군요.”

레이반의 낮고 거친 목소리가 법정의 천장을 울렸다.

“그것은 3년 전, 전하의 직속 마법사단 ‘로엔그린’이 내 가문을 반역으로 몰기 위해 정교하게 도용한 위조 인장 실물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서류들은, 전하께서 직접 서명하신 ‘헤이즐넛 가문 몰락 입증 서류’ 및 위조 작업에 참여한 마법사들에게 지급된 황실 비자금 영수증 일체이지요.”

법정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테오도르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저, 저것이 어째서 여기에…….”

“어째서냐고요?”

엘리시아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레이반의 곁으로 다가갔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대리석 바닥 위에서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겹쳐졌다.

“황태자 전하께서 아무리 철저하게 숨기려 하셨어도, 사교계의 모든 흐름은 결국 장부로 기록되는 법입니다. 전하가 가스라이팅을 통해 귀족들의 목을 죄던 그 조잡한 법적 명분들이, 실상은 가장 추악한 권력 사기극이었다는 증거가 바로 저것입니다.”

그때, 배심원석에 앉아 있던 노백작 하나가 안경을 고쳐 쓰며 서류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는 엘리시아가 미리 ‘살롱 드 루미에르’의 지분 거래를 통해 완벽한 동맹으로 포섭해 둔 법관 계열의 귀족이었다.

“이, 이건…… 황태자 전하의 친필 서명과 황실 전속 마법사단의 마나가 각인된 진짜 인보이스가 맞습니다! 헤이즐넛 대공가는 반역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황실의 조직적인 무고에 의해 도륙당한 것입니다!”

백작의 선언을 시작으로, 법정 내의 동맹 법관들이 연쇄적으로 소리를 높였다.

“황실 평판 통제국이 무고한 대귀족을 말살하기 위해 증거를 조작했다니! 이것은 제국 헌법 제4조를 정면으로 위반한 중죄입니다!”

“황태자 전하! 이 서류들에 대해 직접 해명하십시오!”

“대심판정의 기소 권한 자체를 박탈해야 합니다!”

노도와 같은 추궁이 단상을 향해 쏟아졌다. 황실 기소의 본래 근간이 허술한 조작 사기극이었음이 만천하에 폭로되는 순간이었다. 법정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귀족들은 더 이상 황실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엘리시아가 구축한 ‘지분 교환식 플랫폼’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받은 그들은, 이제 황실이라는 거대한 기득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진정한 사교계의 여왕이 누구인지, 법정 안의 모두가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평판 장부 시스템 작동] [황태자 테오도르의 무고죄 입증 완료.] [헤이즐넛 가문의 명예 세탁 성공.] [평판 지수 거래 성공에 따른 리스크 계산 중……]

그 순간, 엘리시아의 시야가 붉게 물들며 가슴 안쪽에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치밀었다.

‘……윽.’

숨이 턱 막혔다. 목구멍 끝으로 비릿하고 뜨거운 액체가 울컥 솟구쳤다. 지나치게 거대한 평판의 흐름을 뒤흔든 대가로, 그녀의 개인 ‘오명 수치’가 임계점을 향해 요동치고 있었다.

[경고: 오명 수치 72% 돌파. 육체적 거부 반응이 가중됩니다.]

엘리시아는 입술을 꽉 깨물어 신음을 삼켰다. 손수건으로 입가를 훔치자, 하얀 비단 위에 붉은 선혈이 점점이 배어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피로 물든 입술을 밀어 올려 더욱 잔혹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이 고통조차도, 황태후와 황태자를 완벽하게 파멸시킬 최고의 무기로 삼으리라.

“공녀.”

레이반이 그녀의 미세한 떨림을 알아채고,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은밀히 받쳐 지탱해 주었다. 그의 뜨거운 체온이 닿자, 기묘하게도 가슴의 통증이 아주 조금 가라앉았다.

단상 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테오도르는 이성을 완벽하게 상실했다. 자신의 치밀했던 판짜기가 일개 영애의 손짓 한 번에 먼지처럼 바스러지고, 평생을 경멸해 온 레이반이 승리자의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닥쳐라! 모두 닥치란 말이다!”

테오도르가 단상의 대리석 난간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광기로 번들거렸다.

“저년은 마녀다! 감히 요사스러운 간계로 황실의 문서를 위조하고, 온 사교계의 평판을 제멋대로 주물러 귀족들을 선동하는 위선 마녀란 말이다!”

테오도르는 숨을 헐떡이며 손가락으로 엘리시아를 가리켰다. 그의 손끝이 분노로 사정없이 떨렸다.

“저 사악한 아르젠트의 마녀를 당장 체포해라! 황실의 권능으로 명하노니, 기소 여부 따위는 필요 없다! 지금 즉시 단두대를 준비해 저 마녀의 목을 쳐라!”

황태자의 미친 듯한 처형 선언이 법정의 돔 천장을 사납게 할퀴었다. 극에 달한 갈등의 불씨가 마침내 기름 더미 위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황태자의 폭압적인 고함이 돔형 천장에 부딪쳐 뇌성처럼 울려 퍼졌다.

사방에 포진해 있던 황실 친위대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서슬 퍼런 검날들이 촛대 불빛을 받아 차갑게 번뜩였다. 그들의 가죽 군화가 대리석 바닥을 짓밟으며 피고인석을 향해 좁혀오는 순간, 법정의 온도는 영하로 조율되었다.

“멈춰라.”

그 한마디는 비단바람처럼 부드러웠으나, 검날보다 예리하게 청중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레이반이 대검의 자루를 거머쥐며 엘리시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단단한 어깨가 그녀에게 드리워진 황태자의 살기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흑철색 검신이 칼집을 빠져나오며 마찰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법정을 침묵으로 채웠다. 그의 적색 눈동자가 사냥감을 포착한 맹수처럼 친위대를 훑었다.

“내 주군의 몸에 손을 대는 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이 자리에서 목과 몸이 분리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전장을 피로 물들였던 ‘헤이즐넛의 괴물’이 뿜어내는 실질적인 살풍경에, 전진하던 친위대원들이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고 걸음을 멈췄다.

“레이반! 반역자의 가신 놈이 감히 황궁에서 검을 뽑하다니, 기어이 멸문의 길을 자초하는구나!”

테오도르가 이성을 잃고 날뛰었으나, 엘리시아는 그 추태를 비웃듯 손수건으로 입가에 묻은 붉은 한 방울을 우아하게 닦아냈다.

가슴을 찌르는 통증은 한층 더 격렬해졌다. 평판 장부의 붉은 경고등이 시야 구석에서 점멸하고 있었다.

[오명 수치: 75%] [경고: 과도한 평판 조작으로 인한 인과율의 역류가 심화됩니다. 즉각적인 휴식을 권장합니다.]

그녀는 차오르는 피비린내를 목구멍 너머로 강제로 밀어 넣었다.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교계의 지배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는 레이반의 단단한 어깨 너머로 황태자를 응시했다.

“전하, 이성을 잃으신 모습이 흡사 덫에 걸린 들개 같아 눈 뜨고 보아주기가 힘들군요.”

엘리시아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조차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며, 피고인석의 난간을 짚었다. 레이스가 달린 소맷자락이 허공에서 우아한 궤적을 그렸다.

“제국 헌법 제4조 2항을 잊으셨습니까? 3대 공작가는 황제의 친필 서명과 옥새가 날인된 정식 영장 없이는 하위 관서나 통제국, 심지어 황태자 전하라 할지라도 신체적 구속을 가할 수 없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내리신 초법적인 처형 명령은 그 자체로 명백한 ‘황제령 모독’이자 대역죄입니다.”

“황제령 모독이라니! 내가 곧 황실이고 법이다!”

“과연 그럴까요?”

엘리시아가 조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까딱하자, 방청석의 분위기가 기묘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전하의 독재에 지분을 양도한 적이 없습니다.”

가장 먼저 일어선 것은 로랑 자작가의 대리인이자, 샤를로트의 동맹원들이었다. 뒤이어 살롱 드 루미에르의 지분을 나누어 가졌던 고위 귀족 영애들의 가문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명, 두 명, 그리고 수십 명.

그들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었다. 엘리시아가 구축한 ‘사교계 금융 플랫폼’의 주주들이자, 황실의 가스라이팅으로부터 자신들의 자산을 지키기 위해 결속한 카르텔이었다.

“법과 원칙을 무시하는 황태자에게 제국의 명예를 맡길 수 없다!”

“황태자 전하의 독단적인 기소를 즉각 철회하라!”

법정은 이제 황실이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동맹의 요새가 되어 있었다. 귀족들의 연대된 목소리가 테오도르의 권위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테오도르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자신이 구축한 평판의 왕국이, 엘리시아가 만든 새로운 금융적 질서 아래 완전히 침식당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때, 황태후 헬레나가 핏발 선 눈으로 테오도르의 팔을 붙잡았다.

“테오도르, 더 이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저 마녀를 심판할 수는 없다. 저년은 사교계의 뿌리를 뒤흔드는 악성 종양이야. 지금 당장 ‘그것’을 꺼내거라!”

황태후의 독촉에 테오도르의 눈에 잔혹한 결연함이 서렸다. 그는 품 안에서 붉은 마력이 요동치는 검은 벨벳 상자를 꺼내 들었다.

엘리시아의 평판 장부가 격렬하게 경고음을 울렸다.

[위험! 고대 금기 아티팩트 ‘칠흑의 낙인’ 감지!] [효과: 대상의 영혼에 강제적인 ‘반역자’의 낙인을 새겨, 제국 법률상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즉각 처형 가능한 상태로 만듦. 대가로 사용자의 생명력을 소모함.]

테오도르가 상자를 열자, 밤하늘보다 어두운 검은 안개가 법정 중앙으로 뿜어져 나와 엘리시아를 향해 뱀처럼 뻗어 나갔다. 그 안개 속에서 고대의 부정한 문양이 서서히 형상화되고 있었다.

“이것이 있으면 헌법 따위는 무용지물이다! 엘리시아 드 아르젠트, 네 영혼에 반역의 낙인을 새겨 단두대 위에서 개처럼 울부짖게 만들어 주마!”

검은 안개가 엘리시아의 발목을 휘감으려던 찰나, 레이반이 그녀의 앞을 완전히 막아서며 자신의 검으로 안개를 베어냈다. 하지만 물리적인 검격은 영혼을 잠식하는 저주를 막을 수 없었다. 레이반의 팔뚝에 검은 반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레이반!”

엘리시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인간 불신증으로 가득 찬 그녀의 마음속에서, 오직 ‘장부상의 거래처’로만 여겼던 그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모습이 기묘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오명 수치가 파멸적인 임계점에 도달하더라도, 저 비열한 황태자의 목줄을 끊어버려야 했다.

엘리시아는 평판 장부의 제어판을 강제로 움켜잡았다.

[황태자 테오도르의 사적 생명력 및 황실 아티팩트 도용 정보 강제 개방] [대가: 자신의 오명 수치 15% 상승 (현재 90% - 임계점 도달 직전)] [경고: 영혼의 붕괴 위험!]

“전하, 그 더러운 가짜 낙인은 저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엘리시아가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내며, 마침내 테오도르를 향해 최후의 선언을 던졌다. 그녀의 목소리는 법정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킬 만큼 차갑고 거대했다.

그리고 그 순간, 법정의 거대한 후방 유리창이 파괴적인 소음과 함께 완전히 박살 나며, 예상치 못한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 난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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