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황태자의 서슬 퍼런 선전포고가 거울의 방을 휩쓸고 지나간 이튿날 밤.

살롱 드 루미에르의 가장 은밀한 별채인 ‘거울의 서재’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샹들리에의 촛불들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사방을 둘러싼 베네치아산 거울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드리웠다.

엘리시아 드 아르젠트는 벨벳으로 감싼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하얀 실크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볍게 훔쳐냈다. 수선화 향유를 뿌린 천 위로 점점이 번지는 붉은 혈흔. 황태자가 씌운 반역 프레임과 사교계의 웅성거림이 더해질 때마다, 그녀의 눈앞에 명멸하는 ‘평판 장부’의 경고창이 붉게 타올랐다.

[경고: 오명(사회적 악명) 수치 72% 돌파.] [신체 과부하 가중. 마법적 각혈 반응이 심화됩니다.]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호흡을 가로막았지만, 엘리시아의 안색은 상아로 조각한 듯 차갑고 평온했다. 고통조차 그녀에게는 숫자로 환산되는 비용에 불과했다.

“겨우 이 정도의 무게로 나를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 믿다니. 테오도르, 당신의 상상력은 여전히 천박하기 짝이 없군요.”

엘리시아는 혼잣말을 읊조리며 손수건을 은밀히 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의 맞은편, 어둠 속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레이반 폰 헤이즐넛이 소리 없이 다가왔다. 그의 칠흑 같은 눈동자가 엘리시아의 창백한 입술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굳게 다물린 그의 입술 사이로 낮고 거친 숨결이 흘러나왔다.

“공녀. 몸을 더 보살피셔야 합니다. 당신이 쓰러진다면, 제 복수도, 이 제국의 심판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걱정할 시간조차 사치예요, 레이반.”

엘리시아는 부드러운 타프타 실크 소매를 걷어 올리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황태자가 사흘 뒤 대심판정을 열겠다고 선언한 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벼랑 끝에 몰렸다는 증거입니다. 황태후의 가짜 보석 폭로로 황실의 도덕성은 이미 바닥을 쳤으니까요.”

사흘 전, 엘리시아는 황태후 헬레나가 그토록 자랑하던 고대 보석 ‘푸른 눈물’의 치명적인 결함을 사교계 전체의 눈앞에서 폭로했다. 보석 내부의 미세한 크랙과 마법적 위조 흔적을 대낮의 햇빛 아래 발가벗겨 버린 것이다. 황실의 가장 강력한 권위이자 가치 저장 수단이었던 보석의 신뢰도가 박살 나면서, 황태후의 사교계 내 지분율은 단 하루 만에 폭락했다.

이제 남은 것은 황태자가 쥐고 흔드는 마지막 무기, ‘황실 평판 통제국’과 그들이 휘두르는 단두대 사법뿐이었다.

문이 열리고, 샤를로트 드 로랑이 숨을 헐떡이며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늙은 자작과의 강제 정략결혼식장에서 극적으로 구출된 그녀는, 이제 엘리시아의 가장 충직한 정보 수장이자 동맹 주주로서 완전히 거듭나 있었다.

“공녀님, 말씀하신 대로 원로단 귀족들과 살롱의 핵심 주주 영애들을 모두 이곳 비밀 통로로 모셨습니다. 황실 통제국의 눈을 완벽히 피했습니다.”

“수고했어요, 샤를로트. 이제 우리의 ‘자산’을 그들에게 보여줄 차례군요.”

엘리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걸칠 때마다 사락거리는 감청색 드레스의 은빛 자수가 촛불을 받아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반짝였다.

비밀의 방 문이 열리자, 그곳에는 제국 사교계의 경제적, 정치적 실권을 쥔 고위 귀족 영애들과 보수적인 귀족 원로단 의원 다섯 명이 긴장한 얼굴로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의구심이 뒤섞여 있었다. 황태자의 기소 선언 이후, 아르젠트 공작가와 엮이는 것은 곧 파멸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아르젠트 공녀, 우리를 이 음침한 곳으로 부른 이유가 무엇인가? 황태자 전하의 공판 선언으로 제국 전체가 흉흉하네. 우리가 자칫 자네의 반역 혐의에 휘말리기라도 한다면…….”

원로단의 최고참인 브란트 백작이 헛기침을 하며 엄하게 물었다.

엘리시아는 우아하게 고개를 가누며, 테이블 중앙에 두꺼운 가죽 장부 한 권을 툭 던졌다. 황실 평판 통제국이 여태껏 귀족들의 약점을 잡아 영지를 몰수하고 재산을 편취해 온 상세 내역서였다.

“휘말리는 것을 걱정하실 때가 아닙니다, 백작님. 이미 당신들의 목줄은 황실의 사기꾼들에게 단단히 쥐여 있었으니까요.”

엘리시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방 안의 모든 소음을 단숨에 압도했다.

“이것은 황실 평판 통제국이 지난 5년간 가공해 온 ‘평판 조작 명부’입니다. 몬태규 가문의 광산 지분을 빼앗기 위해 영애의 사생활 추문을 날조한 자가 누구인지, 베르몽드 자작가의 밀무역 혐의를 기획하고 기소장을 작성한 배후가 누구인지, 이 장부에 고스란히 적혀 있습니다.”

귀족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엘리시아는 장부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그녀의 눈앞에만 보이는 평판 장부의 인터페이스가 실시간으로 각 귀족 가문의 신뢰도와 황실에 대한 적대 수치를 차트로 그려냈다.

“여기 브란트 백작님의 가문도 있군요. 3년 전, 백작님의 장남이 사교계에서 도박 채무 스캔들로 매장당했던 일 기억하십니까? 덕분에 백작가는 황실 통제국에 제국 남부의 곡창지대 지분 30%를 ‘자발적 기부’라는 명목으로 넘겨야 했지요. 그것, 도박장 딜러부터 소문 유포자까지 모두 황태자 테오도르가 직접 고용한 통제국 요원들이었습니다.”

“이, 이게 무슨……!”

브란트 백작의 노쇠한 손이 부르르 떨렸다. 사방에서 영애들과 원로들의 경악 섞인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교계의 단순한 실수나 운명의 장난으로 몰락했다고 믿었으나, 그것은 철저하게 기획된 황실의 ‘스캔들 비즈니스’였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황실이 던져준 미끼를 물어뜯기 바빴습니다. 하지만 본질은 다릅니다.”

엘리시아는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장내를 둘러보았다.

“사교계는 감정의 배설구가 아니라, 우리의 지분과 생존이 걸린 거대한 시장입니다. 그리고 황실은 그 시장을 독점하기 위해 독약을 뿌려온 포식자일 뿐이지요. 제가 제안하는 ‘살롱 드 루미에르’의 동맹은 단순한 친목이 아닙니다. 황실의 불법적인 평판 조작에 맞서, 서로의 정보와 자산을 지키는 공동 방어 체계입니다.”

귀족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두려움은 분노로, 분노는 황실에 대한 거대한 적개심으로 빠르게 치환되고 있었다. 사교계를 공포로 지배하던 황실 평판 통제국의 정체가 허울 좋은 사기 패거리임이 만천하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그때, 묵묵히 서 있던 레이반이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무인의 기세에 원로들이 침을 삼켰다.

레이반은 천천히 자신의 상의 깃을 풀어 헤쳤다. 그의 단단한 쇄골과 가슴팍에는 뒤틀리고 찢어진 흉터들이 가득했다. 적국의 검날이 아닌, 황실의 고문실에서 낙인찍힌 더러운 흔적들이었다.

“헤이즐넛 대공가가 전쟁광의 더러운 피라는 낙인을 안고 멸문당했을 때, 제국은 저를 괴물이라 불렀습니다.”

레이반의 목소리는 낮고 가라앉아 있었으나, 방 안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하지만 진실은 다릅니다. 황태자 테오도르는 헤이즐넛 가문의 군사권을 찬탈하기 위해, 3년 전 전속 마법사단 ‘로엔그린’을 동원해 가문의 전속 인장을 위조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조된 직인으로 반역 모의 서류를 조작해 제 아버님과 가신들을 단두대로 보냈습니다.”

레이반의 눈동자가 분노로 붉게 타올랐다. 그는 허리춤에서 묵직한 강철 상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상자가 열리자, 황태자가 직접 제작 지시를 내렸던 ‘헤이즐넛 가문 반역 무고용 위조 직인’의 실물이 정체를 드러냈다.

원로단 의원 중 한 명이 돋보기를 꺼내 들고 위조 인장을 면밀히 살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 이것은…… 황실 전속 마법 공방의 특수 합금 공법이 분명하네! 황태자가 직접 가공하도록 명령한 인장이 맞군!”

명백한 물증이었다. 황실이 제국의 영웅 가문을 파멸시키기 위해 사법 시스템을 완전히 유린했다는 증거가 그들의 눈앞에 놓인 것이다.

레이반은 고개를 돌려 엘리시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맹목적이고도 처절한 충성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귀족 원로단과 영애들 앞에서, 엘리시아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검을 쥔 그의 손이 그녀의 구두 끝에 닿았다.

“저는 이 위조 인장을 찾아내고도 황실의 권력 앞에 숨죽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시아 공녀께서 제게 진실을 밝힐 검과 평판을 쥐여 주셨습니다. 저는 제 목숨과 헤이즐넛의 남은 모든 영광을 걸고, 공녀님과 생사를 함께할 것입니다. 법정에서 황태자의 목을 벨 자는 바로 저입니다.”

제국 최고의 무력을 지닌 소공작의 피 끓는 맹세는 장내의 귀족들에게 형용할 수 없는 전율을 선사했다. 아르젠트 공작가의 지략과 헤이즐넛의 무력, 그리고 황실의 추악한 진실을 쥐고 있는 이 동맹이야말로 황실의 폭정에 대항할 유일한 구원줄이었다.

“좋소, 공녀.”

브란트 백작이 마침내 결연한 표정으로 잔을 들어 올렸다.

“황실이 법을 무기로 귀족들을 축출해 왔다면, 우리 역시 법으로 응수하겠네. 사흘 뒤 대심판정에서 원로단 전원은 공녀의 편에 서서 황태자의 죄상을 심문할 것을 약속하지.”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백작님.”

엘리시아는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잔을 마주했다.

귀족들이 서재를 빠져나간 후, 방 안에는 오직 엘리시아와 레이반만이 남았다. 긴장이 풀리자마자, 엘리시아의 목구멍으로 다시 한번 뜨거운 피비린내가 치솟았다.

“우읍……!”

그녀는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으나, 손가락 틈새로 붉은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몸이 크게 휘청이는 순간, 레이반이 번개처럼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받쳐 안았다.

“공녀님!”

레이반의 강인한 팔이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얼굴은 세상을 잃은 것처럼 절박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제발…… 더는 무리하지 마십시오. 제 평판을 깎아서라도 공녀님의 오명을 나누어 가질 수만 있다면…….”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레이반.”

엘리시아는 그의 뺨에 묻은 자신의 피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내렸다. 그녀의 손길은 차가웠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났다.

“이 오명은 나를 죽이는 독약이 아니에요. 오히려 황태자의 목을 칠 가장 치명적인 무기가 될 겁니다.”

엘리시아는 자신의 시야에 떠 있는 평판 장부의 붉은 수치를 응시했다.

[오명 수치 72%] [특수 기능 활성화: ‘악명의 역치(Threshold of Infamy)’] [자신의 사회적 악명을 사법적 기소 가중치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기소 대상: 황태자 테오도르. 전환율 1:1.]

황실이 그녀를 악녀로 몰아세울수록, 그녀가 가진 법적 반격의 파괴력은 배가된다. 상대가 가한 타격을 그대로 반사하는 반사경이자, 적의 독을 가두어 더 큰 독으로 돌려주는 가마솥. 그것이 바로 엘리시아가 설계한 사법 기소용 독소였다.

“테오도르가 나를 단두대에 세우려 한다면, 나는 그 단두대를 황실 통째로 무너뜨릴 지렛대로 삼을 것입니다. 두고 보세요. 사흘 뒤, 황궁 대심판정은 황실의 무덤이 될 테니.”

그녀의 입술에 걸린 냉소적인 미소는 잔혹하리만치 아름다웠다. 레이반은 그녀의 냉철한 집착과 지배력에 압도당한 채, 그저 그녀를 더 깊이 품에 안을 뿐이었다.

***

사흘 뒤. 제국의 운명을 결정할 황궁 대심판의 날이 밝았다.

황궁 법원으로 향하는 거대한 대리석 복도는 삼엄한 경비병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제국법상 3대 공작가는 황제의 친필 서명이 담긴 영장 없이는 신체적 구속을 당하지 않기에, 엘리시아는 호송차 대신 아르젠트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화려한 마차를 타고 당당히 법원 입구에 도착했다.

마차 문이 열리고, 엘리시아가 모습을 드러내자 사방을 메우고 있던 기자들과 귀족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그녀는 단두대로 향하는 죄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깨를 가로지르는 은빛 여우털 모피, 황실의 권위에 대항하듯 도도하게 치켜 올린 턱, 그리고 그녀의 뒤를 보디가드처럼 든든하게 지키고 선 소공작 레이반의 위압적인 풍채. 그것은 흡사 새로운 여왕의 행차와도 같았다.

법정의 거대한 놋쇠 문을 향해 걸어가던 그때, 군중 속에서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쓴 영애 하나가 엘리시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황실 친위대의 제지가 있기 직전, 후드가 벗겨지며 샤를로트 드 로랑의 다급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고, 눈동자는 극도의 공포와 초조함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공녀님……! 잠시만요, 제발 제 말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샤를로트가 엘리시아의 소매를 붙잡고 다급하게 속삭였다.

엘리시아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응시했다.

“샤를로트, 공판 직전에 무슨 무례입니까?”

샤를로트는 주위를 극도로 경계하며, 엘리시아의 귀가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댔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가늘어 바람 소리처럼 들렸다.

“황태후 헬레나가…… 사전에 황궁 약제실에서 무색무취의 치명적인 독약인 ‘침묵의 밤’을 극비리에 사입했습니다. 그리고 공판 도중 피고인석에 제공될 음료에 그것을 타도록, 공녀님의 전담 비서 시녀에게 은밀히 명령을 내렸다는 첩보를 방금 입수했습니다.”

샤를로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기소 여부와 상관없이, 공녀님을 오늘 법정에서 반드시 독살해 시신으로 내보내겠다는 속셈입니다. 법정 안의 물은 절대 마셔서는 안 됩니다!”

엘리시아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황태후는 법적인 패배를 직감하고, 결국 가장 야만적이고 비열한 수단을 선택한 것이다.

웅장한 법정의 문이 천천히 열리며, 저 멀리 단상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황태자 테오도르와 황태후 헬레나의 가학적인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엘리시아는 흘러내리는 모피 깃을 우아하게 정리하며, 입가에 서늘한 조소를 머금었다.

“독약이라…….”

그녀의 발걸음이 마침내 법정 안으로 향했다. 뒤돌아보지 않는 그녀의 등 뒤로, 거대한 놋쇠 문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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