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단순한 경고장이 아닙니다. 사실상의 선전포고이자, 업계 매장령이에요.”
레이첼 민의 얇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내민 태블릿 PC 화면에는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단장단에게 일제히 발송된 에이펙스 스포츠의 극비 이메일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에드워드 스톤. 메이저리그를 지배하는 카르텔의 왕이 마침내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꺼내 들었다. 한준우라는 이름 석 자를 야구계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겠다는 전방위 블랙리스트 선포였다.
준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태블릿 화면을 응시하는 그의 가라앉은 눈동자에는 차가운 이성만이 번득이고 있었다.
“질서를 파괴하는 교란자라. 늙은 뱀다운 수사법이군요.”
“웃음이 나와요? 지금 보스턴은 물론이고 다저스, 양키스까지 우리 연락을 완전히 무시하기 시작했어요. 조금 전까지 쇼케이스 참석을 확답했던 샌프란시스코 스카우트 팀장도 전화를 받지 않아요. 메신저의 읽음 표시만 사라질 뿐이죠.”
레이첼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말대로 사무실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책상 너머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에이전시 스태프들의 손길에는 극심한 불안감이 묻어났다. 그들의 어깨는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에 짓눌린 것처럼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전체를 상대로 한 보이콧.
강도윤의 고척돔 쇼케이스를 불과 일주일 앞둔 시점이었다. 에드워드 스톤이 구축한 카르텔의 벽은 생각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거대했다. 구단 단장들에게 에이펙스와의 거래 단절은 곧 전력 보강의 실패이자 경질을 의미했다. 무명 에이전트 한준우의 괴물 신인을 보기 위해 자신의 목을 걸 단장은 아무도 없었다.
“다저스 네드 단장 비서에게서 방금 이메일이 왔습니다.”
스태프 한 명이 사색이 된 얼굴로 보고했다.
“쇼케이스 참석 일정을 전면 취소하겠다고 합니다. 내부 사정이라는 핑계를 대고 있지만, 에드워드의 압박 때문이 분명합니다. 대표님, 이대로 가다간 고척돔 쇼케이스에 관중보다 스카우터가 적은 참사가 벌어질 겁니다.”
사무실 내부의 패배주의가 준우의 발끝까지 잠식해 들어오는 듯했다.
하지만 준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은 창밖의 어두운 서울 도심 광경을 지나, 보이지 않는 저 너머의 거대한 미국 야구 시장을 향해 있었다.
“에드워드가 판을 엎으려 한다면, 우리는 판의 규칙 자체를 바꿔야 합니다.”
준우가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앞에 푸른빛을 띤 반투명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오직 준우의 시야에만 존재하는 절대적인 장부, ‘스카우팅 원장’이었다.
[스카우팅 원장 (Scouting Ledger) - Lv. 1] * 보유 자본금: 2,050,000 USD (약 26억 6,000만 원) * 소속 선수: 강도윤 (WAR 기대치: 8.5, 부상 리스크: 4%), 타일러 크루즈 (매각 완료) * 다음 레벨 업그레이드 가능 조건: 가용 자본금 1,000,000 USD 지출
타일러 크루즈를 에드워드 스톤에게 200만 달러에 매각하면서 확보한 막대한 현금이 장부의 자본금 란에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이 돈은 강도윤의 대규모 쇼케이스를 치르고 에이전시의 뼈대를 다지기 위한 핵심 자산이었다.
하지만 준우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장부의 레벨 업그레이드 버튼을 눌렀다.
‘등가교환의 법칙.’
힘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지금 당장 100만 달러라는 거금을 시스템에 쏟아붓는 것은 뼈를 깎는 출혈이었다. 그러나 정보가 통제된 상황에서 적들의 아킬레스건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200만 달러는커녕 단 1달러의 가치도 증명하지 못하고 고사할 터였다.
[경고: 업그레이드를 진행하려면 소유 자본금 중 1,000,000 USD가 즉각 삭감됩니다. 진행하시겠습니까?]
‘진행해.’
속으로 읊조리는 순간, 준우의 머릿속을 강타하는 날카로운 기계음과 함께 푸른빛이 안구 전체를 가득 채웠다. 눈물이 찔끔 고일 정도의 강한 자극이었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며 압력이 차올랐다. 준우는 책상 모서리를 꽉 움켜쥐며 밀려드는 통증을 견뎌냈다.
[지출 완료. 보유 자본금이 1,050,000 USD로 변경됩니다.] [스카우팅 원장이 Lv. 2로 전격 진화합니다!] [새로운 기능 해금: '계약 독소 조항 분석 (Contract Toxic Clause Analysis)' 및 '타깃 단장 취약점 실시간 분석 (GM Vulnerability Tracker)']
머릿속을 짓누르던 통증이 사라지며 시야가 극도로 선명해졌다. 준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새롭게 갱신된 장부의 텍스트들을 읽어 내려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붉은색 경고등과 함께 점멸하는 타일러 크루즈의 계약서 잔상이었다.
[분석 완료: 타일러 크루즈 양도 계약서 (에드워드 스톤 서명본)] - 특이 조항: 제7조 4항 (부상 발생 시 예외 면책 및 드래프트 보상권 귀속 조항) - 분석 결과: 타일러 크루즈의 선천적 무릎 연골 연화증 재발 시, 매수인(에이펙스 스포츠)은 매도인(한준우)에게 구상권 및 계약 무효를 청구할 수 없음. 또한, 부상으로 인한 선수 등록 말소 시 보스턴 레드삭스의 차기 시즌 신인 드래프트 2라운드 보상권의 50% 지분 권리가 한준우 에이전시로 강제 이전됨. (독소 강도: 극상 98%)
준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5화에서 에드워드가 크루즈의 쇼케이스 영상을 보고 눈이 뒤집혀 200만 달러를 던졌을 때, 준우가 계약서 구석에 아주 미세한 폰트로 숨겨두었던 덫이었다. 법률적 용어의 복잡한 틈새에 교묘하게 배치된 ‘예외 면책 및 드래프트 보상권 귀속’ 조항.
에드워드는 크루즈라는 유망주를 빼앗아 준우의 싹을 자르는 데만 혈안이 되어, 이 치명적인 올가미를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서명했다.
그리고 지금, 크루즈의 무릎은 준우의 예측대로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자신이 안고 있는 폭탄이 언제 터질지도 모른 채, 준우를 향해 블랙리스트라는 유치한 칼날을 휘두르고 있는 셈이었다.
“에드워드 스톤. 넌 이미 내 손바닥 안에서 춤을 추고 있어.”
준우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레이첼이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준우 씨?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지금 30개 구단 단장들이 전부 우리 전화를 스팸 처리하고 있다니까요?”
준우는 대답 대신 장부의 두 번째 신기능을 활성화했다.
‘타깃 단장 취약점 실시간 분석.’
눈앞의 공간에 홀로그램처럼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단장들의 이름과 사진, 그리고 그들의 목을 죄고 있는 현실적인 통계 수치들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LA 다저스 GM, 네드 콜레티] - 구단주 압박 지수: 92% (사치세 한도 초과로 인한 경질 위기 극상) - 취약점: 오프시즌 내에 연봉 총액을 1,500만 달러 이상 감축하지 못할 경우, 구단주 그룹으로부터 즉각적인 해고 통보 예정. 내부 단장의 불법 세무 회피 장부 시트가 구단주실에 전달되기 직전 상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GM, 브라이언 세이빈] - 구단주 압박 지수: 85% (좌완 불펜 잔혹사 및 지구 최하위 추락 위기) - 취약점: 좌타자 상대 피안타율 .312를 기록 중인 불펜진의 붕괴. 즉각적인 100마일급 강속구 투수 수급이 없을 시 포스트시즌 진출 좌절 확정.
단장들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붉은색 수치들은 그들이 처한 지옥의 깊이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에드워드 스톤의 블랙리스트 압박이 아무리 거세다 한들, 당장 내일 아침 목이 날아갈 위기에 처한 단장들에게는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들의 생명줄은 오직 성적, 그리고 구단주의 지갑이었다.
“레이첼.”
준우가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네, 네? 왜 그렇게 무섭게 봐요?”
“에드워드가 우리를 가두려 한 감옥의 열쇠가 방금 제 손에 들어왔습니다.”
“열쇠라니요? 단장들이 전화를 안 받는다니까요?”
레이첼이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녀는 하버드 로스쿨 출신의 정예 변호사였지만, 메이저리그 단장들의 은밀한 내부 사정이나 장부가 보여주는 미래의 파국까지 읽어낼 수는 없었다.
그녀의 눈에는 지금의 상황이 사방이 막힌 절벽처럼 보일 것이 당연했다.
레이첼은 패닉에 빠져 우왕좌왕하는 사무실 스태프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음이 흔들리는 직원들을 그대로 방치해 둘 수는 없었다. 그녀는 특유의 시니컬한 미소를 지으며 손뼉을 짝 쳤다.
“자자, 다들 상조회사 직원 같은 표정 치우세요. 에드워드 스톤 그 노인네가 우리한테 무료로 메이저리그 전 구단 타깃 광고를 해준 거나 다름없잖아요? 에이펙스 소속 변호사들이 이 이메일 쓰는 데만 수천 달러는 썼을 텐데, 우린 공짜로 이름값 올린 겁니다. 연예인병 걸리기 딱 좋은 타이밍인데 왜들 그래요?”
레이첼의 촌철살인 같은 농담에 팽팽하게 얼어붙어 있던 사무실의 긴장감이 미세하게 누그러졌다. 스태프들의 얼굴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레이첼 변호사님 말씀이 맞긴 하네요. 에이펙스가 이렇게까지 견제한다는 건, 역설적으로 강도윤 선수가 진짜 괴물이라는 걸 지들이 증명해 준 거니까요.”
한 스태프가 안경을 닦으며 조심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그렇죠. 그러니까 다들 울상 짓지 말고 서류나 정리해요. 우리 대표님은 악마라서, 절대 자기 돈 손해 보고 죽을 사람이 아니니까.”
레이첼이 준우를 힐끗 보며 윙크를 던졌다.
준우는 그녀의 위트 있는 대처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녀는 영리했다. 위기 상황에서 조직의 멘탈을 통제할 줄 아는 동반자였다. 비록 철저한 비즈니스 파트너 관계일 뿐이지만, 그녀의 존재는 준우의 계산에 큰 힘이 되었다.
준우가 책상 위의 펜을 가볍게 돌리며 입을 열었다.
“레이첼, 당장 비행기 티켓을 끊으십시오.”
“서울행인가요? 고척돔 쇼케이스 리허설 때문에요?”
“아닙니다.”
준우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라스베이거스로 갑니다.”
“라스베이거스요? 갑자기 거긴 왜 가요? 카지노라도 가시게요?”
레이첼이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준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면에 걸린 메이저리그 오프시즌 일정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12월 초에 예정된 거대한 이벤트였다.
“라스베이거스 윈터 미팅(Winter Meetings).”
메이저리그 30개 구단의 단장들, 감독들, 그리고 수많은 에이전트와 미디어가 한자리에 모여 수십억 달러의 거래를 성사시키는 오프시즌 최대의 전장.
“단장들이 에드워드의 눈치를 보며 전화를 피한다면, 우리가 직접 그들의 코앞으로 찾아가면 됩니다. 윈터 미팅이 열리는 호텔 베네시안의 밀실, ‘백룸’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거긴 철저하게 통제되는 구역이에요. 에이펙스를 비롯한 카르텔이 입구부터 막아설 텐데요?”
레이첼의 우려 섞인 질문에 준우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에는 이미 다저스 단장의 개인 비서 연락처가 띄워져 있었다.
“그들이 문을 잠근다면, 우리는 열쇠가 아니라 도끼를 들고 문을 부수면 됩니다. 다저스의 네드 단장은 지금 사치세 한도 초과와 불법 세무 회피 장부 유출 위기로 목이 달아나기 직전입니다. 샌프란시스코의 세이빈 단장은 100마일짜리 불펜 투수가 없어서 밤마다 위장약을 삼키고 있죠.”
준우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들이 에드워드의 눈치를 보는 건, 자신들의 밥그릇이 안전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장 내일 해고당할 위기에 처한 인간들에게 에이펙스의 보이콧 따위가 눈에 들어올 것 같습니까?”
레이첼은 준우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차가운 두 눈에는 광기마저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성을 잃은 미치광이의 광기가 아니었다. 철저한 통계와 수치, 그리고 상대의 가장 아픈 약점을 정확히 찌르겠다는 확신에서 우러나오는 포식자의 안광이었다.
“당신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네요.”
레이첼이 나지막하게 탄식을 뱉었다.
“비즈니스에 피와 눈물은 불필요한 노이즈일 뿐입니다. 필요한 건 오직 확실한 기회비용과 계약서뿐이죠.”
준우가 냉정하게 대답했다.
“준비하십시오. 에드워드 스톤이 쳐놓은 블랙리스트라는 그 얄팍한 그물을, 그의 심장부인 라스베이거스에서 갈기갈기 찢어놓을 테니까.”
* * *
사상 유례없는 칼바람이 불어닥치던 12월의 어느 날.
네온사인이 사막의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은 도시, 라스베이거스 맥캐런 국제공항의 입국 게이트가 열렸다.
두꺼운 코트 깃을 세운 준우가 가장 먼저 걸어 나왔다. 그의 뒤로 단정한 정장 차림 위에 머플러를 두른 레이첼 민과, 긴장된 표정으로 가방끈을 움켜쥔 괴물 신인 강도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항 로비의 대형 전광판에는 마침 윈터 미팅의 개막을 알리는 스포츠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오만하게 미소 짓고 있는 에이펙스의 수장, 에드워드 스톤의 얼굴이 크게 잡혔다.
“대표님, 정말 괜찮은 건가요? 저기 있는 사람들 전부 우리 적이라면서요.”
강도윤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녀석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100마일의 광속구를 던지는 천재 투수라 할지라도, 미국 메이저리그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는 한낱 스무 살 청년에 불과했다.
준우는 도윤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손가락끝에 단단한 힘을 실었다.
“도윤아.”
“예, 대표님.”
“야구장 마운드 위에서 네가 믿을 수 있는 건 네 손끝을 떠난 실밥의 감각뿐이지?”
“……예.”
“비즈니스도 똑같다. 네가 던질 공은 이미 준비되었고, 내가 쥐고 있는 패는 그들의 목줄을 끊기에 충분하다. 넌 흔들리지 말고 마운드만 바라봐라. 네 가치를 3억 달러로 만드는 건 내가 한다.”
준우의 건조하면서도 확신에 찬 목소리에 도윤의 눈빛이 서서히 제빛을 찾아갔다. 녀석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우는 공항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밤거리를 쏘아보았다.
찬바람이 그의 뺨을 차갑게 때렸다. 거대 카르텔의 심장부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길. 모두가 그들의 몰락을 예견하고 있을 이 시간, 준우의 손에는 이미 적들의 목숨줄을 쥔 ‘스카우팅 원장 Lv.2’가 시퍼런 칼날처럼 빛나고 있었다.
“가자. 뱀들의 목을 치러.”
준우가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사막의 차가운 어둠 속으로, 세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며 화려한 카지노의 불빛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