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음성은 여전히 고압적이었고, 기름진 탐욕이 뚝뚝 묻어났다. 에드워드 스톤. 메이저리그를 쥐고 흔드는 에이펙스 스포츠의 수장이 건넨 제안은 200만 달러였다.

"200만 달러라."

준우는 책상 모서리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규칙적인 마찰음이 서늘한 사무실 공기를 갈랐다. 현재 준우의 가용 자본금은 단돈 42,500달러. 고척돔 쇼케이스 대관료와 트랙맨 데이터 송출 장비 임대료, 강도윤의 전담 물리치료사 고용비까지 합치면 당장 다음 주에 부도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액수였다. 목을 죄어오는 재정적 압박 속에서 에드워드의 제안은 거부할 수 없는 밧줄처럼 보였다.

에드워드는 준우의 침묵을 오해한 듯, 수화기 너머로 뱀이 기어가는 듯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생각할 시간은 그리 길지 않네, 준우. 내일 아침이면 보스턴의 체링턴이 유타주로 스카우터를 보낼 테니까. 그전에 그 애송이의 계약권을 내 밑으로 넘겨라. 푼돈 만지면서 에이전트 놀이하는 것도 슬슬 지겨울 때가 되지 않았나?]

"좋습니다."

준우의 입술이 가볍게 열렸다. 망설임은 단 1초도 없었다.

"내일 오전 10시, 포시즌스 호텔 비즈니스 센터에서 뵙죠. 양수도 계약서는 제가 직접 작성해서 가겠습니다."

[하하! 역시 영리해. 돈 냄새는 잘 맡는군. 내일 보자고.]

툭, 전화가 끊겼다. 준우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허공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의 눈앞에 반투명한 푸른빛의 스카우팅 원장(Scouting Ledger)이 펼쳐졌다.

[스카우팅 원장 Lv.2] ▶ 보유 자본금: $42,500 ▶ 활성화 기능: 대상의 '계약 독소 조항 분석' (해금 완료) ▶ 타겟 분석: 타일러 크루즈 (외야수, 21세) - 현재 신체 내구도: 12% (선천적 무릎 연골 연화증 진행 중) - 잔여 선수 수명: 최대 18개월 (고강도 훈련 노출 시 급격히 단축) - 예상 누적 WAR: 0.2 (부상 파열 시 -1.5) - 현재 적정 몸값: $50,000

준우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타일러 크루즈는 시한폭탄이다. 준우가 가르쳐 준 골반 회전 중심의 속성 트레이닝 루틴은 무릎에 걸리는 하중을 임시방편으로 분산시켜 타구 속도를 시속 110마일까지 끌어올리는 사기극에 불과했다. 기초 체력이 얕은 크루즈가 에이펙스의 혹독한 메디컬 테스트와 쇼케이스 훈련을 소화하는 순간, 그의 무릎 연골은 순식간에 마모되어 뼈와 뼈가 부딪치게 된다.

"구원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준우는 원장의 하단에 떠오른 '등가교환 기회비용' 탭을 바라보았다. 타일러 크루즈의 무릎을 완전히 치료하고 메이저리그 주전급 외야수로 성장시키기 위해 필요한 포인트는 에이전시 자본금 150만 달러 혹은 소속 선수인 강도윤의 어깨 건강 지표 30% 하락이었다.

준우는 가차 없이 고개를 저었다.

"내게 그럴 자선사업가 정신은 없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다른 괴물을 희생시킬 순 없다. 그리고 4만 달러의 자금으로 메이저리그 카르텔과 싸우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타일러 크루즈는 더 큰 판을 짜기 위한 가장 비싸고 화려한 불꽃놀이 제물로 쓰여야 했다.

* * *

"미쳤어요? 지금 제정신이에요, 한준우 씨?!"

회의실 유리문이 깨질 듯이 열리며 레이첼 민이 들이닥쳤다. 그녀의 손에는 준우가 인쇄해 둔 계약 양도 합의서 초안이 들려 있었다. 평소의 차분하고 지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하버드 로스쿨 출신의 차가운 변호사는 분노로 뺨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타일러는 당신을 전적으로 믿고 있어요! 가난한 고향의 가족들을 먹여 살리겠다고, 당신이 시킨 그 무지막지한 골반 회전 훈련을 군소리 없이 소화한 애라니까요? 그런데 그 아이를 에드워드 스톤한테 팔아넘겨요? 그것도 겨우 200만 달러에?"

레이첼은 서류를 준우의 책상 위로 거칠게 내던졌다. 준우는 서류가 흐트러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만년필의 뚜껑을 닫았다. 딱, 소리가 정적을 깼다.

"민 변호사."

"말해 봐요. 내가 당신의 그 소름 끼치는 계산법을 어느 정도는 묵인해 왔지만, 이건 명백한 배신이에요. 에이펙스로 넘어가면 타일러는 그들의 살인적인 쇼케이스 일정에 내몰려 몸이 망가질 게 뻔해요!"

"정확히 보셨군요."

준우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감정이 소거된 그의 눈동자가 레이첼의 격앙된 시선과 부딪쳤다.

"타일러의 무릎은 곧 방전됩니다. 선천적 연골 연화증이죠. 내가 손을 쓰지 않았다면 이미 반년 전에 야구를 그만두었을 상태입니다."

"그럼 치료를 해줘야죠! 에이전트라면 선수의 몸을 관리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치료비와 재활에 드는 비용, 그리고 그동안 날아갈 기회비용을 계산해 봤습니까? 최소 100만 달러 이상이 깨집니다. 게다가 재활에 성공할 확률은 20% 미만이죠. 반면, 지금 에이펙스에 넘기면 당장 현금 200만 달러가 우리 통장으로 들어옵니다."

준우는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이 200만 달러는 타일러 크루즈라는 부실 자산이 창출할 수 있는 역사상 최고점의 가치입니다. 그리고 이 돈은 고스란히 강도윤의 완벽한 3억 달러 계약을 위한 전액 안전 담보금으로 쓰일 겁니다. 고척돔 쇼케이스를 성공시키고, 미국 전역의 스카우터들을 불러 모으기 위한 실탄이죠."

"당신은 정말…… 악마군요."

레이첼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그녀는 준우를 마치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을 보듯 바라보았다.

"타일러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면서도 이러는 거예요?"

"그는 나를 믿은 게 아니라, 내가 제시한 메이저리그라는 달콤한 환상을 믿은 겁니다."

준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장 재킷의 단추를 채우는 그의 손길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과거, 자신이 믿었던 동료와 선수들에게 뒤통수를 맞고 차가운 바닥에 버려졌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인간의 의리 따위는 통장 잔고가 바닥나는 순간 가장 먼저 썩어 문드러지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오직 양수도 계약서에 찍힌 붉은 인장과 통장에 찍히는 수자만이 배신하지 않는다.

"민 변호사, 감정은 퇴근하고 집에서 소비하십시오. 지금은 일할 시간입니다. 이 계약서 하단에 내가 지시한 특수 조항들을 법적으로 한 치의 빈틈도 없게 다듬어 오세요."

준우가 건넨 메모지에는 스카우팅 원장 Lv.2의 분석을 통해 도출해 낸 극약 같은 조항들이 적혀 있었다.

['부상 발견 시의 즉각 면책 및 구단 드래프트 보상권에 연계되는 이적 소유권 문구.']

이 문구는 훗날 에드워드 스톤이 크루즈의 부상을 이유로 계약 무효 소송을 제기할 때, 그의 목줄을 완벽하게 조여버릴 단두대가 될 터였다. 레이첼은 메모를 받아들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이성은 준우의 잔혹함에 치를 떨고 있었지만, 머릿속의 법률가적 본능은 이 조항이 가져올 완벽한 파괴력을 이미 계산해 내고 있었다.

"……준비하죠. 하지만 기억해요, 한준우 씨. 언젠가 당신도 그 계산기 속에서 스스로가 지워지는 날이 올 겁니다."

"그전에 제국을 세우면 그만입니다."

준우는 차갑게 대꾸하며 회의실을 나섰다.

* * *

다음 날 오전 10시, 포시즌스 호텔 VIP 비즈니스 센터.

가죽 소파에 깊숙이 묻혀 앉은 에드워드 스톤의 대리인이자 에이펙스 스포츠의 수석 부사장, 마크 잭슨은 거만한 태도로 턱을 치켜들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두 명의 비서가 거대한 서류 가방을 든 채 서 있었다.

"한준우 에이전트. 에드워드 회장님의 관대함에 감사해야 할 겁니다. 이런 듣도 보도 못한 라틴계 애송이 하나에 200만 달러라니. 우리 에이펙스가 아니면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돈이 아닌가?"

마크가 던지듯 내민 계약서에는 에이펙스 스포츠의 화려한 로고가 박혀 있었다.

준우는 대답 대신 자신이 준비해 온 계약서를 밀어 보냈다.

"이 조항으로 계약을 진행합니다."

마크는 콧방귀를 뀌며 준우의 계약서를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이 하단의 특수 면책 조항에 머물렀다.

"이게 뭐지? '양도 시점 이후 발생하는 선수의 신체적 결함 및 부상에 대해 양도인은 일체의 책임을 지지 않으며, 향후 구단 드래프트 보상권 등의 소유권은 에이펙스에 귀속된다'라…… 무서워서 비즈니스 하겠나? 우리를 못 믿는 건가?"

"거대 에이전시와의 거래일수록 확실히 해두는 게 서로의 예의 아닙니까. 에이펙스의 자금력과 메디컬 시스템이라면 이 정도 리스크는 아무것도 아닐 텐데요."

준우의 나직한 도발에 마크의 자존심이 꿈틀했다. 에이펙스는 메이저리그 구단 수뇌부들과 밀착되어 있어, 선수가 다치더라도 드래프트 픽이나 보상권을 통해 손쉽게 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카르텔을 쥐고 있었다. 그들에게 이 정도 면책 조항은 하찮은 꼬투리에 불과해 보였다.

"좋아. 어차피 이 타일러 크루즈라는 녀석은 우리가 보스턴과의 빅딜에서 칩으로 쓸 생각이니까. 계약서에 서명하지."

마크가 거침없이 만년필을 휘둘렀다.

스각, 사각.

서명이 끝나는 순간, 준우의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다.

[신한은행: 2,600,000,000원(USD 2,000,000 상당) 입금 완료.]

그 동시에 준우의 눈앞에 스카우팅 원장의 메시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계약 성립: 타일러 크루즈 이적 완료.] [에이전시 자본금 갱신: $42,500 ➔ $2,042,500] [경고: 타일러 크루즈의 신체 내구도가 위험 수준 이하로 급락하고 있습니다.] [등가교환 법칙에 의거, 양도 대금 $2,000,000 전액이 에이전시의 안전 자산으로 확정되었습니다.]

"거래는 끝났군."

마크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이제 그 잘난 강도윤인지 뭔지 하는 한국산 투수 껍데기나 잘 지키고 있어. 조만간 그것도 우리 손에 들어올 테니까."

"글쎄요. 그 껍데기가 얼마나 단단한지 조만간 보게 될 겁니다."

준우는 서류철을 챙겨 들고 일어섰다. 마크의 오만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입꼬리가 마침내 비틀려 올라갔다. 고점 대비 1000% 이상의 현금 유입. 부실 자산을 가장 비싼 값에 매각하고, 상대에게는 치명적인 독약이 든 성배를 안겨준 완벽한 거래였다.

* * *

이틀 뒤.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준우의 임시 사무실은 고척돔 쇼케이스 준비로 폭풍 전야 같은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미국 전역에서 날아올 메이저리그 30개 구단의 스카우터들과 단장들을 위한 VIP 초청장 발송이 완료되었고, 실시간 트랙맨 장비 세팅도 끝마쳤다. 200만 달러라는 거대 자본의 유입은 준우의 움직임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강도윤은 마운드 위에서 시속 100마일의 광속구를 뿌리기 위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때, 레이첼 민이 다급한 걸음으로 준우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외신 스포츠 뉴스의 실시간 속보 화면이 띄워진 태블릿 PC가 들려 있었다.

"한준우 씨, 이것 봐요! 미국에서 방금 소식이 떴어요!"

레이첼의 목소리는 경악과 충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준우는 천천히 태블릿을 받아들었다. 화면 가장 높은 곳에 붉은색 글씨로 긴급 속보(BREAKING NEWS)가 박혀 있었다.

[ESPN: 에이펙스 스포츠 소속 초특급 외야 유망주 타일러 크루즈,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쇼케이스 직전 메디컬 테스트 도중 왼쪽 무릎 십자인대 완파.] - 에이펙스 측의 고강도 훈련 강요가 원인으로 추정. - 최소 1년 이상의 장기 재활 불가피, 선수 생명에 치명적 타격. - 에이펙스 스포츠, 보스턴과의 1,500만 달러 규모 트레이드 협상 전면 결렬.

준우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예상보다 더 빨랐군."

"당신…… 다 알고 있었던 거죠? 이틀 만에 무릎이 터질 거라는 걸 알고서 에이펙스에 팔아넘긴 거냐고요!"

레이첼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준우는 태연하게 태블릿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내가 안 것은 그의 무릎이 시한폭탄이라는 사실뿐입니다. 그 폭탄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건, 보스턴에 비싸게 팔아먹으려고 무리하게 쇼케이스 일정을 앞당긴 에드워드 스톤 자신이죠."

준우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에드워드 스톤은 지금쯤 분노로 미쳐 날뛰고 있을 것이다. 200만 달러라는 거금을 주고 사 온 유망주가 단 이틀 만에 쓸모없는 고철덩어리가 되었으니까. 게다가 준우가 심어둔 완벽한 특수 면책 조항 때문에 에이펙스는 준우에게 단 1달러의 소송조차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준우의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미친 듯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화면에 뜬 이름은 예상대로였다.

[에드워드 스톤]

준우는 전화기를 들어 올려 액정을 가만히 응시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뿜어져 나올 피비린내 나는 분노가 벌써부터 전해지는 듯했다. 카르텔의 왕이 격노했다. 그리고 이제, 진짜 전쟁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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