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레이첼 민의 손가락이 노트북의 엔터키를 누르는 순간, 서울 강남의 임시 에이전시 사무실을 감돌던 무거운 침묵이 깨졌다.

디지털 네트워크를 타고 전송된 PDF 파일은 태평양을 건너 메이저리그(MLB) 30개 구단의 아시아 담당 스카우트 디렉터들과 단장(GM)들의 이메일 수신함에 동시에 내리꽂혔다.

[공식] 강도윤 쇼케이스(Showcase) 개최의 건. - 일시: 10일 뒤. - 장소: 대한민국 서울 고척 스카이돔. - 대상: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단장 및 스카우트 팀 전체. - 프로그램: 60구 라이브 피칭 및 트랙맨(Trackman) 데이터 실시간 공개.

보도자료가 배포된 지 불과 10분 만에 준우의 개인 스마트폰이 발작하듯 진동하기 시작했다. 화면에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LA 다저스, 뉴욕 양키스 등 메이저리그 명문 구단들의 아시아 총괄 스카우트들의 이름이 번갈아 가며 떠올랐다.

“한준우 씨! 이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고척돔 대관이라니요? 에이펙스 스포츠 측에서는 강도윤의 독점 협상권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소송을 준비 중이라던데!” “쇼케이스 일정이 너무 촉박합니다. 비행기 표 예매도 안 끝났어요. 진짜 100마일을 던지는 게 확실합니까?”

쏟아지는 질문 세례 속에서도 준우는 단 한 번도 호흡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는 스피커폰을 켠 채, 책상 위에 띄워진 태블릿 PC의 가상 장부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에이펙스와의 분쟁은 이미 법적으로 종결되었습니다. 쇼케이스 참석 여부는 오직 단장님들의 선택입니다. 다만, 고척돔의 백스톱 뒤편 명당자리는 선착순으로 배정된다는 점만 말씀드리지요. 트랙맨에 찍힐 시속 101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을 가장 가까이서 볼 기회니까요.”

전화를 끊은 준우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에드워드 스톤이 언론을 통제하고 구단들을 압박하기 전에, 판 자체를 전 세계가 주목하는 메가 이벤트로 격상시켰다. 이제 메이저리그의 그 어떤 구단도 에이펙스의 눈치를 보느라 이 괴물 신인의 쇼케이스를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30개 구단의 스카우트들이 고척돔 관중석을 가득 채우는 순간, 강도윤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장벽은 여전히 준우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준우 씨, 고척돔 대관료와 구단 관계자들의 의전 비용, 그리고 미국 현지 미디어 송출을 위한 위선 중계차 섭외 비용까지 합치면 당장 필요한 현금만 최소 30만 달러예요.”

레이첼이 노트북 화면을 준우 쪽으로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붉은색으로 표시된 에이전시 자본금 잔액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게다가 강도윤의 어깨와 하체 밸런스를 100%로 보존하려면 고압산소 치료기(Hyperbaric Chamber) 임대와 전담 카이로프랙터 고용 비용이 추가로 들어갑니다. 매일 5,000달러씩 깨지는 돈이에요. 지금 우리 통장 잔고로는 사흘도 못 버텨요.”

준우는 묵묵히 허공에 손을 뻗었다. 오직 그의 눈에만 보이는 투명한 인터페이스, ‘스카우팅 원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 [에이전시 보유 자산 및 포인트 현황] - 가용 자본금: $42,500 (한화 약 5,500만 원) - 스카우팅 원장 레벨: Lv.1 (경험치 85/100) - 등가교환 기회비용 포인트: 15포인트 * 경고: 현재 자본금 잔액이 임계점 이하로 떨어질 경우, 신인 선수들의 육성 보조 프로그램 및 건강 보존 기술의 작동이 강제 중단됩니다. ==================================

자금이 고갈되면 강도윤의 어깨를 보호해 주던 원장의 미세 부상 방지 버프마저 꺼져버린다. 그렇게 되면 100마일의 광속구는 도윤의 팔꿈치 인대를 찢어발기는 흉기로 돌변할 터였다.

쇼케이스의 성공을 위해서는 반드시 막대한 현찰, 즉 ‘캐시’가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합법적인 경로로 수백만 달러를 융통해야만 했다.

준우는 원장의 페이지를 넘겼다. 그의 타깃 리스트 중 두 번째 탭이 붉은색 빛을 뿜어내며 명멸하고 있었다.

[타일러 크루즈 (Tyler Cruz)] - 나이: 19세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 유타 주 독립리그 소속) - 포지션: 외야수 (우투우타) - 현재 WAR: 0.1 / 미래 기대 누적 WAR: 12.4 - 리스크 지표: 좌측 무릎 슬개골 연골 연화증 (발병 확률 78% - 시한폭탄) - 적정 가치: $100,000 -> 단기 쇼케이스 퍼포먼스 가치: $2,500,000

준우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타일러 크루즈. 190cm, 105kg의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공할 만한 배트 스피드. 임팩트 순간의 힙 로테이션과 지면 반발력을 활용하는 능력만큼은 메이저리그 올스타급 거포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원석이었다.

하지만 그의 무릎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선천적인 무릎 연골 연화증으로 인해, 풀타임 메이저리거로서 활약할 수 있는 수명은 길어야 2년. 그 이후에는 연골이 완전히 마모되어 주력은 물론이고 타격 시 지지대 역할을 하는 하체 밸런스마저 무너질 운명이었다.

‘2년짜리 시한폭탄. 하지만 당장 1~2년 동안은 리그를 초토화할 수 있는 라틴 파워 히터.’

동시에 준우는 메이저리그 30개 구단의 단장 동향을 투사했다. 스카우팅 원장의 붉은 선들이 텍사스, 뉴욕, 그리고 보스턴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그중 유독 짙은 붉은색으로 타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보스턴 레드삭스 GM - 벤 체링턴] - 현재 목표: 우타 거포 라틴 파워 히터 영입 (구단주 및 팬들의 압박 지수: 92%) - 취약점: 최근 거액을 들여 영입한 좌타 외야수의 부진으로 인한 극심한 조바심. - 원장 예측: 48시간 이내에 마이너리그 뎁스를 채울 파워 히터 영입을 위해 무리한 오버페이를 단행할 확률 89%.

“레이첼, 비행기 표 끊으세요. 목적지는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입니다.”

준우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서늘했다.

“타일러 크루즈를 데려옵니다. 그리고 그를 가장 비싼 가격에 에드워드 스톤에게 매각할 겁니다.”

레이첼이 경악한 표정으로 준우를 바라보았다.

“매각이라니요? 크루즈는 아직 정식 에이전트 계약도 안 한 유망주잖아요! 게다가 무릎 부상 리스크가 그렇게 높은 선수를 속여서 팔겠다는 건가요?”

“속이는 게 아닙니다.”

준우는 가방을 챙기며 차갑게 대꾸했다.

“그가 가진 2년의 전성기를 가장 화려하고 비싸게 팔아넘겨 주는 겁니다. 가난한 도미니카의 가족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만들어주는 거지요. 비즈니스에서 가장 멍청한 짓이 뭔지 압니까? 쓰지도 못할 패를 쥐고 있다가 썩혀 버리는 겁니다.”

***

사흘 뒤.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의 외곽에 위치한 허름한 실내 연습장.

한겨울의 칼바람이 들이치는 연습장 안에는 콘크리트 바닥에 낡은 인조 잔디 매트 한 장만이 덩그러니 깔려 있었다. 피칭 머신에서 흘러나오는 먼지 섞인 공을 향해, 한 거구의 청년이 쉴 새 없이 배트를 휘두르고 있었다.

깡! 깡!

타구음이 연습장 천장을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배트 중심에 맞은 야구공들이 그물망을 뚫어버릴 기세로 날아가 박혔다. 하지만 배트를 휘두를 때마다 청년의 왼쪽 무릎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준우는 놓치지 않았다.

타일러 크루즈. 그는 타격을 마친 뒤 땀 범벅이 된 얼굴로 무릎을 움켜쥐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낡은 글러브와 헤진 스파이크화가 그의 가난한 처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타격 폼이 무너지고 있군. 축이 되는 왼쪽 무릎이 버티지 못하니까 상체가 앞으로 쏠려. 발사각이 낮아질 수밖에 없지.”

적막한 연습장에 준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루즈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누구…… 신가요?”

스페인 억양이 강하게 섞인 영어. 크루즈의 눈동자에는 경계심과 함께 깊은 피로감이 서려 있었다.

준우는 크루즈의 앞에 다가가 멈춰 섰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스카우팅 원장의 홀로그램을 투사했다. 크루즈의 상세한 신체 데이터가 준우의 망막 위에 흐르기 시작했다.

[타일러 크루즈 - 실시간 신체 분석] - 좌측 무릎 슬개골 하단 연골 두께: 1.2mm (정상 범주의 30% 수준) - 타격 시 왼쪽 무릎에 가해지는 하중: 850kg (임계점 초과) - 현재 통증 지수: 7/10 (진통제 복용 중)

“네 무릎, 이미 한계다. 매일 밤 진통제를 세 알씩 삼키지 않으면 잠도 못 자겠지. 고향에 있는 어머니의 척추 수술비와 동생들의 학비 때문에 독립리그에서 나오는 푼돈으로 버티고 있는 것도 알고 있다.”

크루즈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었다. 무릎 부상이 알려지는 순간,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관심은 완전히 끊길 것이고, 그의 가족들은 길거리로 나앉아야 했다.

“당신…… 스파이인가요? 설마 구단에 고발하려는 겁니까?”

크루즈가 주먹을 꽉 쥐며 일어섰다. 거대한 덩치에서 나오는 위압감이 상당했지만, 준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난 널 파멸시키러 온 게 아니다. 구원하러 왔지.”

준우는 품에서 두꺼운 계약서 한 부와 함께 현금 5만 달러가 담긴 돈다발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내 에이전시의 이름으로 지급하는 즉시 대출금 보증서와 현금이다. 이 돈이면 네 어머니의 수술을 당장 진행할 수 있고, 동생들의 1년 치 학비도 해결된다.”

크루즈의 시선이 돈다발에 고정되었다. 그의 목젖이 크게 출렁였다.

“조건이…… 뭡니까? 나 같은 부상자에게 이런 큰돈을 줄 리가 없잖아요.”

“간단하다.”

준우가 계약서의 특정 조항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나와 2년짜리 독점 에이전트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내가 지시하는 ‘속성 트레이닝 루틴’을 군말 없이 따른다. 지면 반발력을 무릎이 아닌 골반의 회전력으로 분산시키는 타격 메커니즘이다. 무릎의 통증을 일시적으로 지우고, 타구 속도를 극대화하는 방법이지.”

준우는 에이전시 자본금에서 10포인트를 지출하여 원장의 ‘일시적 신체 교정 프로파일’을 작동시켰다. 크루즈의 뇌신경계에 새로운 타격 메커니즘의 궤적이 실시간으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이 루틴을 가동하면, 넌 앞으로 한 달 동안 메이저리그 그 어떤 타자보다 빠른 타구 속도를 기록할 수 있다. 쇼케이스에서 네 가치를 증명하는 거다.”

“그 후에는요? 한 달이 지나면 제 무릎은 어떻게 됩니까?”

크루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준우는 피도 눈물도 없는 비즈니스맨의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무릎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난 널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돈이 많은 구단, 혹은 그들의 유망주 수집 카르텔에 가장 비싼 값으로 매각할 거다. 네 몸값으로 최소 200만 달러의 계약금을 받아내 주지. 그 돈이면 네 가족들은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다. 2년 동안 모든 불꽃을 태우고 은퇴할지, 아니면 지금 당장 무릎이 터져서 독립리그의 먼지구덩이 속에서 사라질지. 선택해라.”

크루즈는 준우의 차가운 눈빛 속에서 압도적인 현실을 보았다. 이 남자는 자신을 동정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상품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믿을 수 있었다. 자신의 가치를 가장 비싸게 팔아줄 유일한 장사꾼이었으니까.

크루즈는 떨리는 손으로 펜을 쥐었다.

서명란 위에 그의 이름이 적히는 순간, 스카우팅 원장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띠링!] [괴물 유망주 ‘타일러 크루즈’와의 지배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계약 조건: 수익의 15% 에이전트 수수료, 계약권 양도 시 우선 거부권 확보.] [스카우팅 원장 경험치 +15 상승! 레벨 업 달성!] [Lv.2 스카우팅 원장: 대상의 ‘계약 독소 조항 분석’ 기능이 해금되었습니다.]

준우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그는 즉시 스마트폰을 꺼내 보스턴 레드삭스의 스카우트 디렉터에게 크루즈의 수정된 타격 메커니즘 훈련 영상을 전송했다.

영상 속 크루즈가 때려낸 타구는 시속 118마일(약 190km)의 속도로 날아가 실내 연습장의 벽을 박살 낼 듯이 강타했다. 현대 야구에서 타구 속도 118마일은 메이저리그 전체에서도 상위 1%에 해당하는 초인적인 수치였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단장 벤 체링턴은 영상을 확인하자마자 준우에게 연락을 취해왔다.

“한준우 씨! 이 도미니카 친구 대체 정체가 뭡니까? 이 정도 타구 속도를 내는 유망주가 왜 아직 무명인 겁니까? 당장 우리 구단과 독점 협상을 진행합시다!”

체링턴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뚝뚝 묻어났다. 준우는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며 대답했다.

“체링턴 단장님, 크루즈의 재능을 알아본 건 보스턴뿐만이 아닙니다. 이미 타 구단에서도 연락이 폭주하고 있어요. 특히 에이펙스 스포츠의 에드워드 스톤 회장 측에서 아주 흥미로운 제안을 해왔거든요.”

물론 에드워드에게는 아직 연락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준우는 시장의 경쟁 심리를 자극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레드삭스의 조바심을 극도로 끌어올리는 순간, 에드워드 스톤 역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 오만한 거물은 준우가 새로운 유망주를 발굴해 자금을 확보하는 꼴을 결코 두고 보지 못할 성격이기 때문이다.

준우는 크루즈의 계약서 이면에 조용히 한 가지 독소 조항을 삽입했다.

‘유망주 계약 이전 시, 부상 리스크 및 신체 검사 결과에 대한 최종 책임은 양수도 구단 및 대행 에이전시 측에 귀속되며, 원 계약 대리인은 모든 법적 의무로부터 면책된다.’

에드워드 스톤을 완벽하게 파묻어버릴 독이 든 성배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3시간 뒤.

준우의 스마트폰 화면에 발신자 제한 번호와 함께, 잊을 수 없는 익숙한 이름이 떠올랐다.

[에드워드 스톤]

준우는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로, 뱀이 기어가는 듯한 은밀하고 끈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준우. 제법 영리한 짓을 하고 다니더군. 강도윤의 쇼케이스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더니, 이제는 유타주에서 썩어가던 똥말 한 마리를 데려다가 명마처럼 포장해?]

에드워드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넘쳤지만, 그 이면에는 준우의 숨통을 끊어놓겠다는 서슬 퍼런 독기가 서려 있었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그 타일러 크루즈라는 라틴 애송이의 계약권, 나한테 넘겨라. 지금 당장 네 통장으로 현금 200만 달러를 쏴주지. 네가 질질 짜면서 준비하고 있는 그 잘난 고척돔 쇼케이스 비용을 대고도 남을 돈이다. 어때, 꽤 괜찮은 거래 아닌가?]

준우는 어두운 조명 아래서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사냥감이 제 발로 덫을 향해 대가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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