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사흘 뒤, 서울 강남의 한 특급 호텔 중소연회장에 마련된 임시 심문실.

두꺼운 마호가니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팽팽한 대치가 이어졌다. 테이블 상석에는 KBO-MLB 공동 특별 대책 위원회라는 거창한 명패를 앞세운 다섯 명의 심문위원이 버티고 앉아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 선 황창식 위원장이 돋보기안경을 고쳐 쓰며 서류 뭉치를 거칠게 소리 나게 넘겼다.

“에이전트 한준우 씨. 당신이 에이펙스 스포츠 재직 시절 획득한 기밀 자료를 무단 유출하고, 이를 이용해 고교 유망주 강도윤 선수에게 불법적인 사전 접촉, 즉 탬퍼링을 시도했다는 구체적인 제보가 접수되었습니다. 인정합니까?”

황창식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적의가 묻어났다. 그의 뒤에는 메이저리그 거대 카르텔 ‘빅 3’의 수장, 에드워드 스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강도윤이라는 100마일짜리 괴물 신인을 빼앗긴 카르텔이 준우의 목줄을 죄기 위해 KBO와 MLB 사무국의 권위를 빌려 판을 짜놓은 것이다.

준우는 대답 대신 손목시계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가죽 스트랩이 손목을 가볍게 조이는 감각을 느끼며, 그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의 표정은 한겨울의 서리처럼 차갑고 고요했다.

“질문에 답하세요, 한준우 씨. 이 자리는 가벼운 해명 청문회가 아닙니다. 당신의 에이전트 자격 영구 박탈은 물론이고, 에이펙스 스포츠 측에서의 형사 고발까지 검토되고 있는 엄중한 자리입니다.”

오른편에 앉은 메이저리그 사무국 파견 위원, 로버트 밀러가 서툰 한국어로 거들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아시아의 일개 개인 에이전트를 가볍게 짓밟겠다는 오만함이 가득했다.

“규정집 제14조 2항을 아십니까?”

준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낮고 건조한 음성이 심문실의 무거운 공기를 갈랐다.

“공동 조사위원회가 에이전트의 자격 심의를 개시하려면, 단순 제보가 아닌 명확한 물증이나 계약 당사자의 이의 제기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강도윤 선수가 위원회에 불만 접수증이라도 제출했습니까? 아니면 제가 에이펙스의 기밀을 훔쳤다는 디지털 포렌식 결과라도 들고 오셨습니까?”

“이봐요, 한준우 씨!”

황창식이 테이블을 탁 쳤다. 찻잔이 잘게 흔들리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우리가 바보로 보입니까? 연봉 3천만 원도 안 되던 무명 에이전트가 갑자기 에이펙스를 퇴사하자마자 강도윤과 독점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이게 정상적인 비즈니스 경로로 보입니까? 에이펙스가 수년간 공들여 분석한 강도윤의 신체 데이터와 멘탈 분석 리포트를 빼돌려 선수 측을 협박하고 회유한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번 계약을 원천 무효로 규정할 권한이 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명확했다. 준우의 자격을 정지시켜 강도윤과의 계약을 강제로 찢어발기는 것. 그리고 무주공산이 된 강도윤을 다시 에이펙스 스포츠의 품으로 밀어 넣는 시나리오였다. 거대 카르텔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법이고 규정이고 아전인수로 해석하는 자들이었다.

“원천 무효라.”

준우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그 대단한 법적 해석, 저희 변호사 앞에서도 똑같이 하실 수 있는지 궁금하군요.”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기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한 여성이 서류 가방을 챙겨 들고 테이블 앞으로 걸어 나왔. 타이트한 네이비 정장에 날 선 안경을 쓴 레이첼 민이었다. 그녀의 구두 굽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신경질적으로 때렸다.

“안녕하세요, 위원님들. 한준우 에이전트의 전속 법률 대리인, 레이첼 민 변호사입니다.”

그녀는 황창식과 로버트 밀러의 앞에 각각 두툼한 서류철과 검은색 USB 메모리를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어머, 표정들이 왜 그러시죠? 에이펙스 스포츠의 법무팀에서 보낸 가이드라인대로만 움직이려니, 예상치 못한 변호사 배석에 당황하셨나 봐요?”

“레이첼 민……? 당신, 하버드 출신에 뉴욕 로펌에 있던 사람이 왜 이런 무면허 야바위꾼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겁니까?”

황창식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명함을 밀쳐냈다. 레이첼은 턱을 치켜들며 특유의 빈정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야바위꾼이라뇨. 제 의뢰인은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강도윤 선수의 독점 대리권을 취득했습니다. 오히려 야바위는 그쪽이 하고 계시죠. 던져드린 USB 한번 열어보시겠어요? 아니, 바쁘실 테니 제가 요약해 드리죠.”

레이첼이 빔프로젝터 리모컨을 눌렀다. 회의실 스크린 위로 수십 장의 이메일 캡처본과 해외 은행 송금 내역서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에이펙스 스포츠가 지난 3년간 KBO 소속 미성년 유망주 12명에게 부모를 통해 불법 사전 계약금(Under-table Money)을 지급한 내역입니다. 여기 로버트 밀러 위원님이 서명하신 승인 문서도 포함되어 있네요. 아, 그리고 황창식 위원장님 명의의 차명 계좌로 ‘컨설팅 피’라는 명목 하에 매달 5천 달러씩 송금된 기록도 아주 예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심문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황창식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 로버트 밀러 역시 들고 있던 펜을 떨어뜨렸다. 펜이 바닥에 부딪히며 내는 둔탁한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이것은 레이첼 민이 에이펙스 내부 자료를 분석하며 확보해 두었던, 거대 카르텔 ‘빅 3’의 불법 탬퍼링 및 로비 증거 파일이었다. 준우가 그녀와의 계약 과정에서 입수한 가장 강력한 비장의 카드이기도 했다.

“이, 이것은 악의적인 조작입니다! 당장 화면 내려요!”

황창식이 소리를 질렀지만, 그의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조작인지 아닌지는 금융감독원과 미국 연방검찰이 판단할 문제겠죠.”

레이첼이 서류 가방을 닫으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이 자료가 언론에 배포되는 순간, KBO는 물론이고 메이저리그 사무국 전체가 탬퍼링 스캔들로 뒤집어질 겁니다. 특히 에드워드 스톤 씨가 주도한 아시아 유망주 불법 수급 카르텔의 실체가 공개되면, 미 의회 청문회까지 열릴 텐데요. 감당 가능하시겠습니까?”

“너, 너희들 감히……!”

로버트 밀러가 벌떡 일어나 준우를 가리켰다. 하지만 그의 손끝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준우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의 시야 너머로 푸른빛의 스카우팅 원장이 황창식의 머리 위에 투사되었다.

[대상: 황창식 (KBO 특별대책위원장)] [개인 리스크: 차명 부동산 실소유 의혹 및 아들 해외 유학 자금 뇌물 수수 100%] [현재 심리 상태: 극도의 공포, 파멸 회피 욕구 98%] [원장 개입 비용: 자본금 15,000달러 소모]

‘겨우 이 정도 인간에게 내 소중한 자본금을 쓸 가치도 없지.’

준우는 원장의 개입을 비활성화했다. 굳이 포인트를 쓰지 않아도, 이미 판세는 완벽하게 기울어 있었다. 준우는 천천히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테이블을 짚었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황창식의 눈동자를 꿰뚫었다.

“황 위원장님.”

“…….”

“아드님이 보스턴에서 유학 중이시더군요. 학비와 체류비가 만만치 않을 텐데, 에이펙스에서 보내준 ‘컨설팅 피’가 참 유용하게 쓰였겠습니다. 국세청에 신고는 제대로 하셨는지 모르겠군요.”

황창식의 목덜미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준우의 눈을 피했다. 준우의 목소리는 너무나 낮아서 오직 황창식에게만 가닿는 뱀의 속삭임 같았다.

“선택지를 드리죠. 오늘 이 심문회는 ‘제보의 신빙성 부족 및 오인으로 인한 기각’으로 종결 처리됩니다. 그리고 귀하들은 제 의뢰인인 강도윤 선수의 에이저리 권한에 대해 향후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겠다는 공식 확인서를 지금 작성합니다.”

“우리가 왜 그런 요구에……!”

로버트 밀러가 씩씩거렸지만, 황창식이 그의 옷소락을 다급하게 잡아끌었다. 황창식은 생명의 위협을 느낀 짐승처럼 파르르 떨고 있었다.

“만약 거부하신다면.”

준우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화면에는 이미 전송 대기 상태인 이메일 창이 띄워져 있었다. 수신인은 메이저리그 전문 기자인 켄 로젠탈을 비롯한 국내외 유력 언론사 데스크들이었다.

“지금 이 순간부로 이 자료들은 전 세계 야구계에 전송됩니다. 에이펙스의 탬퍼링 스캔들과 함께, 그것을 묵인하고 뇌물을 받은 공동 조사위원회의 명단도 함께 말이죠. 은퇴 후의 삶을 차가운 감방에서 보내고 싶으시다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심문실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황창식은 숨을 쉴 때마다 어깨를 들썩였다. 로버트 밀러 역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입을 다물었다.

오베이(Obey).

강자들의 규칙에 순종하길 강요하던 자들이,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 비명을 지르기 일보 직전이었다.

“……확인서, 가져오게.”

황창식이 마침내 항복을 선언했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레이첼 민이 기다렸다는 듯이 미리 준비해 온 법적 확인서를 테이블 위에 밀어두었다. 황창식과 로버트 밀러는 유령에게 홀린 듯한 표정으로 펜을 들어 서명했다. 손이 떨려 잉크가 번졌지만, 준우는 개의치 않았다.

서류를 회수한 레이첼이 준우를 향해 윙크를 해 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위원님들. 공정한 심의 감사드립니다.”

준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단 한 번의 뒤돌아봄도 없이 심문실 문을 열고 나갔. 뒤이어 따라 나온 레이첼이 흥분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소름 돋았어요, 준우 씨. 황창식 그 영감탱이 얼굴 보셨어요? 완전히 흙빛이 되던데.”

“이제 겨우 첫걸음입니다. 에드워드 스톤이 보낸 사냥개들을 쳐낸 것뿐이죠.”

준우의 목소리에는 승리의 도취감 따위는 없었다. 그의 냉혹한 머리는 이미 다음 단계의 손익계산서를 두드리고 있었다.

“타일러 크루즈 쪽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준우의 질문에 레이첼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알아보신 대로 유타 출신의 그 라틴계 타격 천재 말이죠? 보스턴 레드삭스의 스카우트 팀이 벌써 크루즈의 주변을 맴돌고 있더군요. 당장 10만 달러가 급한 극빈층 가정이라, 에이펙스 측에서 접근하면 바로 계약을 맺을 기세예요.”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먼저 물어가게 해야 하니까요.”

준우는 차갑게 읊조렸다. 2화에서 스카우팅 원장을 통해 확인했던 타일러 크루즈의 치명적인 결함—좌측 무릎 연골 연화증. 발병 확률 78%의 시한폭탄.

준우는 크루즈의 성실함과 재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그를 에이펙스와 에드워드 스톤을 파멸로 이끌 ‘독이 든 성배’로 매각할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동정심이나 의리 따위는 비즈니스에 방해만 될 뿐이다. 타일러 크루즈를 희생시켜서라도, 강도윤을 메이저리그의 정점에 세우고 에이전시 자본금을 폭발적으로 늘려야 했다.

호텔 로비로 내려온 준우는 스마트폰을 꺼내 강도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기도 전에 도윤이 전화를 받았다.

[형! 어떻게 됐어요? 그 영감탱이들이 계약 무효 어쩌고 했다면서요!]

수화기 너머로 도윤의 잔뜩 날 선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녀석의 멘탈 수치가 흔들리는 것이 목소리만으로도 느껴졌다. 준우는 감정을 배제한 채 차분하게 대꾸했다.

“정리됐다. 이제 네 계약에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진짜요? 와, 대박…… 역시 형 하나는 믿을 만하다니까.]

“도윤아.”

준우가 녀석의 말을 끊었다.

“넌 날 믿을 필요 없다. 내가 널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비싼 투수로 만들어줄 거라는 사실, 그 수치적인 이익만 믿어라. 그리고 약속한 대로 몸 상태는 100%로 끌어올려 놨겠지?”

[당연하죠. 지금 당장 마운드에 서도 100마일 꽂아 넣을 수 있어요.]

도윤의 목소리에 다시 자신감이 차올랐다. 준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에이전트의 구원 따위는 필요 없다. 철저한 이익과 통제 하에 움직이는 괴물 투수. 그것이 준우가 설계한 완벽한 비즈니스 파트너의 모습이었다.

준우는 레이첼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명령했다.

“레이첼, 지금 즉시 보도자료 배포하세요.”

“보도자료요? 어떤 건데요?”

준우의 눈동자가 야망으로 타올랐다.

“KBO 최초, 아니 아시아 고교 야구 역사상 최대 규모의 메이저리그 쇼케이스 개최 선언입니다. 장소는 고척 스카이돔. 대상은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전체 스카우트.”

그는 숨을 들이쉬며 말을 이었다.

“강도윤의 시속 100마일 라이브 피칭 쇼케이스 일정을 확정해 언론에 뿌리세요. 에드워드 스톤이 어떤 방해 공작을 펼치기도 전에, 전 세계의 이목을 이곳으로 집중시키는 겁니다.”

메이저리그를 뒤흔들 괴물 투수의 등장을 알리는 서막. 준우가 던진 거대한 승부수가 전 세계 야구판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