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꺼져, 김만수. 이 방에 네가 앉을 자리는 없어.”

준우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좁은 방안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김만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번들거리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거칠게 쓸어올리며 준우를 쏘아보았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싸구려 스킨 냄새와 매캐한 담배 찌든 내가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허, 이것 봐라? 한준우, 너 지금 눈에 뵈는 게 없지? 에이펙스에서 개처럼 쫓겨나고 전과자 딱지 붙기 직전이니까 아주 미쳐 날뛰는구나.”

김만수가 가죽 가방을 소파 위로 툭 던지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눈빛에는 밑바닥 인생을 내려다보는 특유의 오만함이 가득했다.

“도윤아, 이 새끼 말 믿지 마라. 얘 지금 사기 치는 거야. 업계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갈 데 없으니까 너 같은 부상자 붙잡고 마지막 한탕 해 먹으려는 수작이라고. 수술도 없이 4주 만에 어깨가 나아?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김만수의 거친 목소리가 강도윤의 귓가를 때렸다. 강도윤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소년의 눈동자가 준우와 김만수 사이를 격렬하게 오갔다. 부상이라는 절망의 늪에서 겨우 붙잡은 동아줄이, 실은 썩은 밧줄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그의 눈빛을 흐려놓고 있었다.

준우는 대꾸 대신 시선을 강도윤의 하체로 내렸다.

스카우팅 원장이 준우의 안구 너머에서 푸른빛을 발하며 구동되었다. 반투명한 장부의 텍스트가 실시간으로 갱신되며 강도윤의 신체 분석 데이터를 쏟아냈다.

[대상: 강도윤 (우투우타, 투수)] [현재 상태: 우측 어깨 관절와순(SLAP) 미세 손상 및 통증 증후군] [근본 원인: 좌측 거골하 관절(Subtalar Joint)의 가동성 가동 범위 15도 제한 (만성 염증 및 섬유화)] [투구 메커니즘 왜곡도: 34.2%]

준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김만수 부장님. 에이펙스에서 받아먹는 정보가 고작 그 수준입니까? 아니면 도윤이 몸 상태를 제대로 볼 줄도 모르는 맹인이라 그런 겁니까?”

“뭐, 뭐야?”

“도윤이 어깨 통증의 시작점은 어깨가 아닙니다.”

준우가 강도윤의 왼쪽 발목을 가리켰다.

“왼쪽 거골하 관절. 디딤발이 나갈 때 발목이 안쪽으로 충분히 꺾여주지 못해. 가동 범위가 정상인보다 15도 이상 제한되어 있지. 발목이 안 꺾이니까 디딤발이 지면을 지탱할 때 골반 회전이 부자연스럽게 일찍 열려버리는 겁니다.”

김만수의 얼굴에서 비웃음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골반이 일찍 열리면 상체는 뒤에 남고, 팔은 억지로 따라오게 마련이지. 그때 생기는 회전 궤도의 오차를 메우기 위해 어깨와 팔꿈치 힘으로만 공을 때려왔던 거야. 도윤이가 던지는 시속 150킬로미터의 광속구는 온전히 어깨를 갉아먹으며 짜낸 피눈물이었던 거지.”

준우의 목소리는 마치 정밀한 메스를 든 외과의사처럼 차갑고 정확했다.

“병원에서 찍은 MRI? 당연히 깨끗하게 나오겠지. 어깨 관절 자체는 미세한 염증 외에 구조적 파열이 없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다시 마운드에 서서 공을 던지는 순간, 3개월 안에 관절와순은 완전히 찢어지고 투수 생명은 끝난다. 수술을 권한 의사들은 발목의 원인은 보지도 않고, 그저 아프니까 수술하자는 돌팔이들에 불과해.”

강도윤의 거친 숨소리가 좁은 방안의 적막을 깨뜨렸다. 소년은 자신의 왼쪽 발목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어…… 어떻게 알았어?”

도윤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사실이었다. 2년 전, 고교 주말리그 경기 중 도루를 저지하다가 왼쪽 발목을 접질린 적이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그 통증이 생긴 이후부터 투구 폼이 미세하게 무너지기 시작했고, 결국 올해 초부터 어깨에 원인 모를 극심한 통증이 찾아왔다. 이 인과관계를 알아챈 사람은 국내 그 어떤 대학 병원의 전문의도, 고교 감독도 없었다.

오직 눈앞의 한준우, 이 남자뿐이었다.

“구속이 떨어진 진짜 이유를 알고도 김만수 당신은 헐값에 계약서를 들이밀었지.”

준우가 김만수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압도적인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김만수가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거렸다.

“에이펙스 코리아가 이 아이를 대학에 진학시킨 뒤, 부상이 재발하면 계약금을 후려쳐서 버릴 카드론으로 쓰려 했던 것. 내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이, 이 새끼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음해를……!”

“증거를 보여줄까?”

준우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흔들었다. 화면에는 레이첼 민이 건네주었던 법률 서류 더미 속에서 발견한 비밀 USB의 폴더 목록 중 일부가 띄워져 있었다. 에이펙스가 국내 유망주들을 상대로 벌여온 불법 이면 계약과 부상 은폐용 강제 각서 초안들이었다.

김만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흘러내렸다.

“너, 너 그거 어디서…….”

“더 추해지기 전에 나가세요. 영업 방해로 경찰 부르기 전에.”

준우의 서늘한 경고에 김만수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는 소파 위의 가방을 낚아채며 강도윤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강도윤, 후회할 거다. 이 바닥에서 에이펙스를 등지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넌 이제 한국 야구판 어디에서도 명함 못 내밀어!”

쾅!

문이 부서질 듯 닫히며 김만수가 사라졌다.

방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남았다. 강도윤은 테이블 위에 흩어진 찢어진 계약서 조각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주먹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쥐어져 있었다. 부상에 대한 공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소년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준우는 그런 도윤의 앞에 다가가 무릎을 굽히고 시선을 맞추었다. 그의 눈빛에는 동정이나 연민 따위는 없었다. 오직 철저한 비즈니스 파트너를 바라보는 차가운 이성만이 빛나고 있었다.

“어깨를 고치고 싶나?”

준우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도윤이 마른침을 삼켰다.

“정말로…… 수술 없이 나을 수 있는 거예요?”

“내 가이드를 100% 따른다면 가능해. 4주간의 특수 코어 트레이닝과 발목 관절 가동성 물리 치료. 그리고 내가 지정하는 식단과 투구 매커니즘 수정 프로그램. 이것만 지키면 네 어깨의 통증은 완전히 사라진다. 그리고 넌 내년 봄, 시속 100마일의 광속구를 던지게 될 거다.”

100마일. 시속 161킬로미터. 한국인 투수로서는 꿈의 영역이자 메이저리그에서도 특급 에이스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신의 영역이었다.

도윤의 눈에 열망과 두려움이 동시에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공짜는 없다, 강도윤.”

준우가 품 안에서 새로운 계약서 한 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일반적인 에이전트 계약서가 아니었다. 철저하게 설계된 이익 분배 계약이자, 선수의 영혼까지 묶어두는 현실적인 ‘지배 계약(Lock-in)’서였다.

“이건 내 에이전시 계약서다. 기본 수수료는 메이저리그 최고 한도인 5%. 하지만 네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1억 달러 이상의 초대형 계약을 맺을 시, 사후 관리 및 초상권 수익 분배 비율은 내 에이전시가 30%를 가져간다.”

“3, 30%요? 너무 많잖아요!”

도윤이 놀라 소리쳤다. 통상적인 에이전트 수수료의 몇 배에 달하는 폭거였다.

“많다고 생각하나?”

준우가 차갑게 웃었다.

“넌 지금 망가진 장난감에 불과해. 내 가이드가 없다면 넌 고교 졸업과 동시에 야구를 그만두고 군대나 가야 할 신세지. 0원짜리 인생의 100%를 가질래, 아니면 3억 달러짜리 인생의 70%를 가질래? 선택은 네 몫이다.”

도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준우의 말은 잔인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이 남자는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어른이 아니었다. 자신의 가치를 철저하게 계산하고, 그 가치를 극대화해 주는 대신 대가를 요구하는 냉혹한 비즈니스맨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신뢰가 갔다. 감상적인 위로보다, 이 차가운 수치와 확신이 도윤에게는 더 강력한 구원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하나 더.”

준우가 계약서의 특정 조항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선수는 에이전트가 제시하는 훈련 루틴 및 신체 관리 프로그램을 단 한 차례도 어겨서는 안 되며, 이를 위반하여 부상이 재발하거나 성적이 하락할 시, 에이전트에게 500만 달러의 위약벌을 지불한다.’ 이 조항에 동의해라.”

“위약벌 500만 달러요? 제가 그런 돈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어기지 말라는 뜻이다.”

준우의 목소리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난 내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짓은 하지 않아. 내 통제를 벗어나는 선수는 필요 없다. 네 인생을 내 손에 완전히 맡겨라. 영혼까지 내놓고 오직 공을 던지는 기계가 되겠다고 맹세해. 그러면 난 널 메이저리그의 왕으로 만들어 주지.”

강도윤은 숨을 죽였다.

눈앞의 남자가 뿜어내는 분위기는 거대했다. 마치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 같았다. 이 남자의 손을 잡지 않으면, 자신의 야구 인생은 오늘로 끝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스르륵.

도윤의 손이 테이블 위의 인감도장으로 향했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꾹.

붉은 인감 도장이 계약서 위에 찍히는 순간, 준우의 머릿속에서 경쾌한 기계음이 울렸다.

[강도윤과의 ‘지배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계약 등급: 플래티넘 (종속도 85%)] [스카우팅 원장의 특수 기능 ‘신체 복원 및 부상 완화’가 활성화됩니다.]

준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도장을 수거했다.

‘이제 시작이다.’

준우는 지체 없이 스카우팅 원장의 특수 기능을 구동했다. 강도윤의 왼쪽 발목 염증을 강제로 완화하고, 신경 세포의 재생을 촉진하는 프로세스였다.

[경고: ‘부상 완화’ 기능을 정밀 구동하기 위해서는 등가교환의 법칙에 따라 기회비용이 발생합니다.] [소모 포인트: 50,000 USD (한화 약 6,500만 원)] [현재 에이전시 자본금 잔액: 52,400 USD] [결제를 진행하시겠습니까?]

준우의 개인 자산이자 전 재산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에이펙스에서 쫓겨나며 쥐어짜 낸 퇴직금과 영끌한 자산의 거의 전부가 이 한 번의 클릭으로 날아가게 생긴 것이다.

하지만 준우는 단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승인 버튼을 눌렀다.

[결제가 완료되었습니다.] [에이전시 자본금 잔액: 2,400 USD] [강도윤의 좌측 거골하 관절 가동성 복원율: 15% -> 95% (4주간 순차적 적용)] [우측 어깨 통증 완화율: 즉각 50% 감소]

그 순간, 강도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

도윤이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조심스럽게 돌려보았다. 늘 무겁게 짓누르던 둔탁한 통증이, 마치 거짓말처럼 가벼워져 있었다. 뻐근하던 왼쪽 발목에서도 시원한 온기가 감도는 느낌이었다.

“당신……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말했지. 넌 내 통제 하에 들어왔다고.”

준우는 계약서를 가방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부터 내가 보내는 트레이너가 이 집으로 올 거다. 한 달 동안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말고 훈련에만 집중해. 난 네 몸값을 올려받을 준비를 할 테니까.”

집을 나서는 준우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잔고는 고작 2,400달러밖에 남지 않았다. 당장 다음 달 에이전시 사무실 임대료와 트레이너 고용비를 감당하려면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하지만 준우의 머릿속에는 이미 완벽한 자본 확충 시나리오가 그려져 있었다.

‘강도윤 하나만으로는 부족해. 자본금을 비약적으로 증식시킬 ‘상품’이 필요하다.’

준우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스카우팅 원장의 검색 탭을 활성화했다. 그의 목표는 명확했다. 당장 고가에 매각할 수 있으면서도, 치명적인 리스크를 품고 있어 거대 카르텔에게 폭탄으로 던져줄 수 있는 유망주.

원장의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가며 한 소년의 프로필이 떠올랐다.

[대상: 타일러 크루즈 (Tyler Cruz)] [출신: 미국 유타주 (도미니카 공화국 이민자 가문)] [포지션: 외야수 (우투우타)] [미래 누적 WAR: 14.2] [신체 리스크: 좌측 무릎 연골 연화증 (Chondromalacia Patellae) - 발병 확률 78% (1년 이내)] [특이 사항: 극빈층 출신으로 당장의 계약금 10만 달러가 절실한 상태.]

준우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타일러 크루즈. 성실한 성품에 엄청난 장타력을 지닌 유망주지만, 무릎 연골이라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비운의 천재. 그리고 현재 보스턴 레드삭스의 GM은 라틴계 파워 히터 영입에 광적으로 집착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타일러. 네 성실함은 내 자본금의 거름이 되어줘야겠다.’

준우는 타일러 크루즈의 장부를 닫고 차의 시동을 걸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스마트폰 화면이 거칠게 점멸했다. 발신인은 국제 우편 수령 알림과 함께 도착한 법무법인의 공식 이메일이었다.

메일의 헤더에는 굵은 고딕체로 두 개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KBO (한국야구위원회) - MLB (메이저리그 사무국) 공동 조사위원회]

준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메일을 열자, 붉은색 직인이 찍힌 공식 문서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수신: 에이전트 한준우] [발신: KBO-MLB 공동 조사단 수석 위원장 에드워드 스톤] [내용: 귀하의 에이펙스 스포츠 자산 무단 유출 및 미성년 선수 대상 불법 사전 접촉(탬퍼링) 의혹과 관련하여, 에이전트 자격 무기한 박탈을 검토하기 위한 청문 위원회 소집을 통보합니다. 본 위원회에 불참하거나 소명 자료를 제출하지 않을 시, 즉각적인 자격 영구 박탈 및 형사 고발이 진행됨을 알려드립니다.]

에드워드 스톤.

메이저리그 에이전시 카르텔 ‘빅 3’의 정점에 서 있는 괴물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강도윤을 강탈당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자신의 압도적인 권력을 이용해 준우의 목줄을 죄어오고 있었다.

준우는 스마트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오히려 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에드워드 스톤…… 생각보다 빠르네.”

준우는 대시보드 서랍을 열어 레이첼 민이 남겼던 비밀 USB를 꺼내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굴렸다.

“어디 한 번 덤벼보시지. 그 위원회 청문회장이 당신들의 무덤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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