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구두 가죽 속으로 스며든 빗물이 발가락 사이를 진득하게 적셨다. 강남 대로변의 빌딩 숲 사이로 들이치는 폭우는 가차 없이 뺨을 때렸다.

에이펙스 스포츠 코리아의 유리문이 닫히는 소리는 둔탁했다. 품에 안은 골판지 상자 위로 빗방울이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상자 안에는 10년 동안 야구판을 구르며 모은 스카우팅 리포트와 선수들의 메디컬 차트가 어지럽게 엉켜 있었다.

“한준우 씨, 회사 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한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이사회 결정에 따라 금일부로 해고입니다.”

귓가를 맴도는 감사팀장의 목소리는 기계적이었다. 억울한 누명이었다. 믿었던 동업자 놈과 내가 키워낸 메이저리그 유망주놈이 한통속이 되어 날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그들은 내 스카우팅 네트워크와 계약서 조항들을 통째로 빼앗아 에이펙스 본사로 홀라당 넘겨버렸다.

완벽한 파멸이었다.

빗물이 속눈썹을 타고 흘러내려 시야를 흐렸다. 턱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아스팔트 바닥의 웅덩이를 깨뜨렸다. 그 순간, 눈앞에 지독한 이명이 일며 시야가 번쩍였다. 단순한 현기증이 아니었다.

눈앞의 빗방울들이 허공에서 멈춘 듯 느리게 떨어지더니, 짙은 청색의 가상 그리드가 시야 전체를 덮쳐왔다.

[스카우팅 원장(Scouting Ledger)이 활성화됩니다.] [소유주: 한준우] [보유 자본금: 12,400원] [보유 계약 선수: 없음] [※ 경고: 원장의 데이터 갱신 및 미래 개입 시 '등가교환식 포인트 기회비용'이 차감됩니다. 현재 가용 자산 부족으로 강제 조율 기능은 제한됩니다.]

“이게…… 뭐지?”

헛것이 보이는 건가 싶어 거칠게 눈을 비벼 닦았다. 하지만 반투명한 푸른빛의 장부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사용하는 세이버메트릭스 분석 프로그램과 정밀 회계 장부를 하나로 합쳐놓은 듯한 형태였다.

대로변 맞은편, 거대한 빌딩 전광판에 스포츠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마운드 위에서 어깨를 감싸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젊은 투수의 모습이 보였다.

- KBO 최고 유망주 강도윤, 어깨 관절 와순 파열 의혹으로 드래프트 시장 동결. - 전문가들 “사실상 투수 생명 끝났다” 진단.

그 순간, 전광판 속 강도윤의 얼굴 위로 붉은색 타깃 마커가 정렬되더니, 스카우팅 원장의 텍스트가 미친 듯이 나열되기 시작했다.

=================================== [대상: 강도윤 (19, 우완 투수)] ■ 현재 신체 스펙: 191cm / 92kg ■ 포심 패스트볼 평균 구속: 153km/h (잠재 최대 구속: 162.5km/h / 101mph) ■ 포심 회전수(Spin Rate): 2,550 rpm (잠재 최대 회전수: 2,780 rpm) ■ 수직 무브먼트(Induced Vertical Break): 52cm (메이저리그 상위 1% 급)

■ 신체 리스크 리포트: - 국내 의료진 진단: 관절 와순 파열 (수술 권고, 복귀율 20% 미만) - 원장 정밀 분석: 소원근 및 회전근개 기능 저하로 인한 극상근 건염 및 견갑하근 충돌 증후군 (수술 불필요, 특수 재활 4주 적용 시 100% 회복 가능) - 현재 부상 리스크 지표: 12% (실제 부상 아님, 단순 기능 저하)

■ 미래 가치 예측: - 잠재 메이저리그 누적 WAR (대체 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 7.5 (전성기 기준) - 적정 계약 규모: 10년 3억 달러 ($300,000,000) ===================================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3억 달러. 한화로 약 4,000억 원에 달하는 초고가 계약을 따낼 수 있는 괴물이 지금 한국 땅에서 ‘어깨가 망가진 쓰레기’ 취급을 받으며 버려져 있었다. 국내 구단들은 물론이고 수많은 메이저리그 아시아 담당 스카우트들조차 잘못된 MRI 판독 결과만 보고 그를 외면한 상태였다.

오직 나만이 진실을 보고 있었다. 이 거대한 장부가 가리키는 수치는 거짓이 아니었다. 소원근의 기능 저하로 인한 일시적인 통증을 관절 와순 파열로 오인한 것뿐이다. 4주의 재활만 거치면 시속 100마일의 광속구를 뿌려대며 메이저리그 타자들의 방망이를 허공에 돌려세울 진짜 괴물.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갔다.

“이 괴물을…… 내가 독점한다.”

사람의 의리나 약속 따위는 믿지 않는다. 나를 배신했던 그 수많은 인간들이 증명해 주었다. 비즈니스는 철저한 수치와 계약서 조항으로만 지배해야 한다. 이 아이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록인(Lock-in)할 수 있는 완벽한 지배 계약 시나리오가 뇌리 속에서 정교하게 회로를 그리며 맞춰지기 시작했다.

***

강남역 이면도로에 위치한 어두컴컴한 위스키 바.

차가워진 몸을 녹이기 위해 가장 저렴한 버번위스키를 주문해 잔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거친 빗소리를 뚫고 가죽 구두의 날카로운 굽 소리가 바닥을 때렸다.

탁, 탁, 탁.

일정한 박자로 다가온 그림자가 준우의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준우는 고개를 들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단발머리에 칼날처럼 날이 선 차콜 그레이 슈트. 하버드 로스쿨 출신의 M&A 전문 변호사이자, 업계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독설가로 명성이 자자한 레이첼 민이었다.

“여전히 꼴사납네, 한준우 씨.”

레이첼은 비가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바 구석에 세워두고는 준우의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준우가 마시던 싸구려 버번위스키 잔을 힐끗 보더니 콧방귀를 꼈다.

“에이펙스에서 쫓겨났다는 소문은 들었어. 업계 바닥이 좁아서 그런지 쓰레기 같은 소문은 참 빨리도 돌더군. 자금 횡령이라니, 머리는 좋은 줄 알았는데 뒤처리도 못 할 만큼 둔해진 거야?”

“누명인 거 알면서 물어보는 의도가 뭡니까, 레이첼.”

준우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빗물에 씻겨 나간 듯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의도?”

레이첼이 붉은 입술을 뒤틀며 싱긋 웃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죽 핸드백 속으로 들어가더니, 꽤 두툼한 법률 서류 뭉치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로 툭 던졌다. 서류 봉투의 틈새로 묵직한 금속 재질의 Matte-black USB 드라이브가 살짝 삐져나와 있었다.

“난 가치 없는 물건에는 1초의 시간도 쓰지 않아. 내 자문료가 시간당 얼마인지 알 텐데?”

준우의 시선이 서류 봉투 아래 숨겨진 USB로 향했다.

“이게 뭡니까?”

“에이펙스를 포함한 국내외 거대 에이전시 ‘빅 3’ 카르텔이 한국 고교 및 대학 유망주들을 어떻게 사전 접촉(탬퍼링)해서 몸값을 후려쳤는지 담긴 내부 고발 자료야. 겉으로는 합법적인 스카우트처럼 보이지만, 뒤로는 부모들을 매수하고 이중 계약서를 쓰게 만들었지.”

그녀는 다리를 꼬며 턱을 괴었다. 눈동자 속에 숨겨진 야심이 야수처럼 빛났다.

“당신이 이걸로 에이펙스의 목줄을 죄어오든, 아니면 그냥 강물에 던져버리든 내 알 바는 아니야. 다만, 난 당신이 그 대단한 '눈'을 가지고도 이대로 길바닥에서 굶어 죽을 인물인지 테스트해 보고 싶을 뿐이지. 어때, 아직 이빨이 남아 있어?”

준우는 천천히 손을 뻗어 서류와 USB를 거두어들였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스카우팅 원장이 실시간으로 레이첼 민의 정보를 분석해 내고 있었다.

[인물: 레이첼 민 (변호사)] ■ 신뢰도: 45% (철저한 상호 이익 기반 관계) ■ 협력 가치: S급 (법률 및 금융 설계 능력 탁월) ■ 현재 심리 상태: 한준우의 재기 가능성에 대한 분석적 관망 중.

“테스트는 통과한 걸로 하지.”

준우가 위스키 잔을 단숨에 비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자료는 가장 치명적인 순간에, 가장 아픈 곳을 찌르는 칼로 쓰일 겁니다. 레이첼, 조만간 정식 계약서를 조율하러 갈 테니 변호사 비용 청구서나 준비해 두세요.”

“오만하네. 마음에 들어.”

레이첼의 차가운 웃음소리를 뒤로한 채, 준우는 바를 나섰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거리를 뚫고 그가 향한 곳은 인천의 한 낡은 연립주택가였다.

***

오래된 붉은 벽돌 주택의 2층. 계단을 오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낡은 철문 너머로 날카로운 고함과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봐요, 도윤 어머님! 현실을 보셔야지! 도윤이 어깨 상태로 어떤 구단이 미쳤다고 드래프트에서 뽑아줍니까? 지금 이 계약서에 사인 안 하시면, 도윤이는 대학 리그조차 못 가고 평생 야구 배트 한 번 못 잡는 신세가 되는 겁니다!”

비열하게 꺾이는 목소리. 준우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에이펙스의 하청 에이전시이자, 거대 카르텔의 끄나풀 노릇을 하는 삼류 에이전트 김만수였다.

“하지만…… 계약 조건이 너무 가혹하잖아요. 7년 동안 연봉의 40%를 수수료로 떼어가고, 부상 재발 시 모든 치료비를 도윤이가 부담해야 한다니요…….”

중년 여성의 떨리는 목소리. 강도윤의 어머니였다.

“어머님! 어깨 망가진 투수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셔야죠! 에이펙스 정도 되는 대형 에이전시니까 이 정도 리스크 감수하고 손 내밀어 주는 겁니다. 도윤아, 너도 인생 망치기 싫으면 얼른 사인해!”

방 안쪽에서 깊은 침묵이 흘렀다. 열아홉 살짜리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잔인한 압박이었다.

준우는 망설임 없이 철문 손잡이를 잡고 거칠게 밀어젖혔다.

쾅!

낡은 문이 벽에 부딪히며 굉음을 냈다. 방 안에 모여 있던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입구로 쏠렸다.

방 한가운데에는 땀에 젖은 훈련복 차림의 강도윤이 펜가락을 쥔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노란 서류 봉투를 펼쳐 든 김만수가 험악한 인상을 쓰고 서 있었다.

“누구야 당신? 남의 집 문을 왜 이렇게 험하게 열어!”

김만수가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준우는 대꾸 대신 천천히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계약서 초안을 훑었다.

[선수 권리 양도 및 전속 대리인 계약서] - 계약 기간: 7년 - 에이전트 수수료: 부대 수입 포함 40% - 신체 부상 시 구단 보상금 및 에이전시 지원금 전면 배제 조항.

노예 계약서. 전형적인 카르텔의 수법이었다. 유망주가 부상 의혹으로 약해진 틈을 타 숨통을 죄고, 평생 부려 먹을 노예 계약서에 서명하게 만드는 짓거리.

“그 펜 내려놔, 강도윤.”

준우의 목소리는 얼음송곳처럼 차갑고 단호했다.

“뭐? 야, 한준우! 너 에이펙스에서 잘린 횡령범 새끼잖아? 네가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기어들어 와!”

김만수가 준우의 정체를 알아보고는 비열한 안면 근육을 일그러뜨렸다.

“도윤 어머님, 속지 마세요! 이 새끼 회사 돈 횡령해서 쫓겨난 사기꾼입니다! 도윤이 인생 완전히 망치려고 작정하고 온 거라고요!”

준우는 김만수의 폭언을 완전히 무시한 채, 오직 강도윤의 눈만을 똑바로 응시했다. 강도윤의 흔들리는 눈동자 위로, 스카우팅 원장의 수많은 수치와 리포트가 실시간으로 투사되고 있었다.

[강도윤의 멘탈 리스크: 78% (극도의 불안 상태)] [※ 솔루션: 신체 진단의 과학적 오류를 지적하고, 잔여 부상률의 진실을 수치로 제시하여 심리적 지배권을 획득할 것.]

“강도윤.”

준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네 어깨, 안 망가졌다.”

그 한마디에 강도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김만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안 망가져? 방사선과 전문의 세 명이 관절 와순 파열이라고 진단서 끊었는데, 일개 에이전트 나부랭이가 뭘 안다고 지랄이야? 도윤아, 이 새끼 말 듣지 마!”

“소원근(Teres minor).”

준우가 김만수의 말을 자르며 정확한 근육 명칭을 뱉었다.

“우측 어깨 소원근과 회전근개의 일시적인 기능 저하로 인해, 팔을 올릴 때마다 견갑하근이 충돌하고 있는 상태다. 겉보기에는 관절 와순이 찢어진 것처럼 통증이 오지만, 실제로는 미세한 염증이 신경을 누르고 있을 뿐이지. 수술은 필요 없다. 도수 치료와 특수 코어 트레이닝 4주면 통증은 완전히 사라지고, 넌 다시 공을 던질 수 있어.”

“그……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강도윤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터져 나왔다. 갈라진 목소리 틈새로 억눌린 갈망이 튀어나왔다.

전문의들조차 ‘수술을 해야 한다, 복귀는 불투명하다’라며 사망 선고를 내렸던 자신의 어깨였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단 한 번의 접촉도 없이 정확한 통증 부위와 원인을 짚어내고 있었다.

“나는 네 미래 가치를 보는 사람이다.”

준우가 김만수가 내민 계약서를 집어 들어 강도윤의 눈앞에서 반으로 찢어버렸다.

지익!

종이가 찢어지는 날카로운 소리에 김만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미쳤어? 이 새끼가 진짜!”

“이딴 쓰레기 종이에 네 인생을 팔지 마라, 강도윤.”

준우는 찢어진 계약서 조각을 테이블 위로 흩뿌리며 강도윤의 멱살을 잡듯 그의 시선을 구속했다.

“네 몸값은 고작 이딴 삼류 에이전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넌 메이저리그를 지배할 괴물이 될 거다. 내 눈에는 보여. 네가 양키스타디움 마운드 위에서 시속 100마일의 광속구로 타자들을 찍어 누르는 미래가.”

강도윤의 거친 숨소리가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소년의 눈빛에 깃들어 있던 절망이, 서서히 형용할 수 없는 충격과 기대로 뒤바뀌기 시작했다.

“남의 귀한 선수한테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김만수가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준우의 어깨를 밀치려 손을 뻗었다.

바로 그 순간, 준우의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준우는 싸늘한 아우라를 풍기며 김만수의 손을 가볍게 쳐내고 전화를 받았다. 액정 화면에는 ‘에이펙스 코리아 본부장’의 이름이 떠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다급하고도 분노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한준우! 너 지금 어디야? 네가 들고 나간 USB에 뭐가 들어 있는 거지? 감히 우리를 협박하려는 속셈이냐! 당장 본사로 튀어와!

전화기에서 새어 나오는 고함에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준우는 전화를 끊지 않은 채, 수화기 너머의 본부장과 제 앞의 김만수, 그리고 잔뜩 겁먹은 강도윤을 차례로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이제 시작입니다, 본부장님. 내 물건 도둑질해 간 대가는 아주 비쌀 겁니다.”

준우가 전화를 툭 끊어버렸다. 그리고 김만수를 향해 서늘하게 속삭였다.

“꺼져, 김만수. 이 방에 네가 앉을 자리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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