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문인께서 백일 감금(유폐)에 빠지셨다니!”
이초의의 비명이 빗물 섞인 바람을 타고 낙엽당의 허물어진 뜨락을 세차게 때렸다. 빗소리보다 더 거세게 요동치는 것은 백자운의 흔들리는 두 눈이었다. 흙탕물에 젖은 채 숨을 헐떡이는 이초의의 품에선 은은하고도 서글픈 환정향의 기운이 안개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설원의 손끝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단혜태상장로의 위선이 마침내 무당의 가장 높은 곳마저 집어삼킨 것이다.
“마도의 끄나풀이라…….”
설원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맺혔다. 계율당주는 이미 금강쇄를 쥔 무사들을 독려하며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빗줄기는 굵어만 가고, 어둠이 내린 산등성이를 따라 수백 개의 횃불이 요동치며 낙엽당을 향해 거대한 뱀처럼 밀려들었다. 무당파의 모든 세력이 단혜의 위선 아래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죽여라! 장문인의 명을 사칭하고 마교와 내통한 자는 그 자리에서 참해도 좋다!”
계율당주의 고함이 우레처럼 쏟아졌다. 흑색 도포를 입은 묵영각 무사들이 금강쇄를 휘두르며 좁혀왔다. 쇠사슬이 부딪치는 마찰음이 빗소리를 가르고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
설원은 소매 안쪽에서 빗물에 젖지 않도록 밀봉해 둔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누렇게 바랜 서한과 붉은 인장이 선명히 찍힌 비장한 영수증들이었다. 단혜태상장로가 천태성가와 밀착하여 벽천단을 독점하고, 무당 내의 반대파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공모한 명백한 증좌였다.
“이것을 보고도 내가 마도의 끄나풀이라 지껄이겠느냐.”
설원이 그것들을 흙바닥으로 내던졌다. 백자운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가문의 존망을 위해 짊어졌던 의무의 실체가, 이 종이 몇 장에 담긴 추악한 거래에 불과했음을 목도한 것이다. 그의 손가락이 검 자루를 부러뜨릴 듯 움켜쥐었다.
“이것이…… 내가 지키려 했던 가문의 안위였단 말인가.”
백자운의 목소리가 젖은 흙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분노와 배신감이 그의 이성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계율당주는 당황하여 눈동자를 굴렸으나, 이내 얼굴을 흉측하게 일그러뜨렸다. 진실이 밝혀지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자신들의 파멸이었다.
“사술로 조작한 위서다! 저 년이 장문인을 해치고 무당의 비기를 훔치기 위해 마교와 내통한 증거가 이미 확보되었다!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가문의 영광을 위해, 천태성가의 무사들이여, 검을 뽑아라!”
계율당주는 진실을 덮기 위해 설원을 완전히 매장하려 했다. 천태성가의 고수 삼십여 명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시퍼런 검신들이 빗물에 젖어 차가운 안광을 뿜어냈다.
설원은 이초의의 손목을 잡았다.
“가자. 여기 있어 봐야 개죽음뿐이다.”
평소 타인에게 마음을 열지 않고 모든 책임을 홀로 짊어지려던 그녀였다. 그런 설원이 처음으로 타인의 손을 잡고 함께 도망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초의는 설원의 손을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밀어냈다.
“아니, 언니. 난 무당의 도사야. 장문실로 가야 해.”
이초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
“내가 남아서 장문인의 안위를 확인하고, 장문실의 상황을 파악할게. 언니가 마도의 누명을 쓰고 여기서 죽는다면, 무당의 진정한 도(道)는 영원히 땅에 묻혀버려. 어서 가!”
이초의는 품에서 환정향이 담긴 작은 옥병을 설원의 손에 꼭 쥐여주었다.
“이걸 가져가. 언니가 잃어버리는 기억을, 이 향이 조금이라도 붙잡아줄 거야. 제발 살아남아 줘.”
설원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혜검을 쓸 때마다 소중한 이들에 대한 감정과 기억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던 감각이 뇌리를 스쳤다. 이 이별 끝에, 자신이 이초의라는 아이의 얼굴을, 이 따뜻한 온기를 기억할 수 있을까? 가슴 한구석이 도려내지는 듯한 슬픔이 밀려왔지만, 설원은 이내 어금니를 깨물었다. 슬픔은 칼날을 무디게 할 뿐이다.
“기다려라. 반드시 데리러 올 테니.”
설원은 환정향을 품에 깊숙이 넣고, 가죽 수첩과 청풍검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사방에서 가쁜 숨소리와 살기가 낙엽당을 겹겹이 에워쌌다. 무당의 정예 무사들과 천태성가의 고수들이 삼십여 명. 도망칠 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꽉 막힌 형국이었다.
설원은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뇌리로 태극검총의 부서진 비석 틈새에서 건져 올렸던 전설의 '태극혜검결' 일실 구결 쪽지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음과 양은 서로를 배척하지 아니하고, 물과 불은 서로를 멸하지 않으니, 기의 흐름은 흐르는 물과 같아 막힘이 없어야 한다.’
내력이 부족하여 검을 찌르는 힘이 무뎌질 때, 이 구결은 하늘의 도리를 일깨웠다. 억지로 내공을 쥐어짜는 대신, 자연의 섭리대로 기의 순환을 따르는 법.
만물이 제자리를 찾아 흐르듯, 내 안의 진기도 우주의 자전과 공전을 따라 흘러야 한다. 막힌 기경팔맥이 뚫리며, 단전에서 맑고 시린 기운이 폭포수처럼 솟구쳤다. 혜검의 통찰이 한 단계 더 높은 경지로 도약하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이전과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천인감응의 혜검이 발동하자, 빗방울 하나하나의 궤적과 삼십여 명 고수들이 뿜어내는 살기의 흐름이 오색의 실타래가 되어 시야에 가득 찼다. 그들의 유기적인 포위망 속에서, 유독 기의 흐름이 어긋나 기맥이 꼬인 결손처가 선명한 붉은 실로 드러났다.
동북방. 천태성가 무사들과 묵영각 살수들의 경계가 겹치는 그 좁은 틈새였다. 서로 다른 계파의 무공이 충돌하며 발생한 미세한 불협화음. 그것이 설원에게는 탄탄대로처럼 넓은 탈출로로 보였다.
“투척하라! 뼈도 추리지 못하게 만들어라!”
계율당주의 잔인한 외침과 함께, 검은 구체들이 빗줄기를 뚫고 설원이 서 있는 처소로 날아들었다. 정무맹의 비기이자 가차 없는 살상력을 자랑하는 벽력폭뢰탄이었다.
콰아아앙!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낙엽당의 목조 건물이 비명을 지르며 산산조각이 났다. 붉은 화염이 빗물을 집어삼키며 아가리를 벌렸고, 기와와 목재 파편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흙먼지와 자욱한 연기가 낙엽당 전체를 뒤덮었다.
적들은 설원이 그 지옥 같은 불길 속에서 재가 되었으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그 자욱한 불길과 연기 속에서, 청량한 검광 한 줄기가 섬전처럼 솟구쳐 올랐다.
설원이었다.
그녀는 가죽 수첩과 보검을 품에 안은 채, 불타오르는 잔해를 디딤돌 삼아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녀의 신형은 마치 바람에 흐르는 낙엽처럼 우아하고도 거침없었다.
“저기 있다! 쏴라!”
묵영각 무사들이 쇠사슬을 던지고 궁수들이 화살을 날렸으나, 설원의 눈에는 그 모든 궤적이 느리게 흐르는 물결과 같았다.
설원은 허공에서 신형을 가볍게 뒤틀었다. 청풍검이 백색의 호선을 그리며 번쩍였다. 그것은 무당의 정종 검법이 지닌 부드러움과 혜검의 예리함이 결합된, 자연의 바람과도 같은 일격이었다.
스카아아앙!
“컥!”
살수들의 살기가 설원의 몸에 닿기도 전에, 청풍검이 그들의 목덜미와 검날의 연결부를 정확히 쪼개버렸다. 단 한 번의 군더더기 없는 검무로 동북방을 지키던 살수 세 명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기가 막힌 타이밍과 침투였다. 포위망의 가장 약한 고리가 단 한 번의 격돌로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설원은 무너진 지붕의 잔해를 가볍게 딛고 웅비하여,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신형을 날렸다.
“추격하라! 놓치면 우리 모두의 목이 달아난다!”
계율당주의 비명이 등 뒤에서 멀어져 갔다.
설원은 빗속을 뚫고 신형을 날려 산문으로 향했다. 나무들이 빠른 속도로 뒤로 밀려났다. 이대로 산문을 돌파하기만 하면 무당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산문으로 이어지는 좁은 협로, 차가운 석문 앞에 다다랐을 때 설원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쏴아아아―.
세찬 비바람 속에서, 열두 명의 도사가 장검을 비스듬히 쥔 채 움직임 없이 서 있었다. 그들의 도포 자락이 바람에 펄럭였고,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협로 전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들은 무당의 최정예이자 장문인의 직속 호위 세력인 십이호법 도사들이었다.
그들이 서서히 발걸음을 옮기자, 바닥에 고인 빗물이 태극의 형상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열두 개의 검날이 허공에 기이한 궤적을 그리며, 무당파 최강의 방어이자 공격 진법인 ‘진무칠성진(眞武七星陣)’의 기틀을 잡았다.
거대한 무형의 장막이 설원의 앞길을 완벽히 차단했다.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 완벽한 진법의 기운이 설원의 호흡을 턱 막히게 했다.
설원은 청풍검을 굳게 쥐며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여기서 물러설 곳은 없었다.
천풍(天風)이 울부짖는 협로 사이로 열두 자루의 검이 자아내는 살기가 뿜어졌다. 진무칠성진. 그것은 무당의 개파조사가 창안한 이래, 그 어떤 외마(外魔)도 뚫지 못했던 불패의 진형이었다. 비장한 침묵 속에서 호법 도사들의 호흡이 하나로 맞물리자, 빗줄기마저 그들의 검막(劍幕)에 가로막혀 허공에서 미세한 수증기로 산화했다.
설원은 청풍검을 비스듬히 내리트린 채 그 장엄한 위용을 응시했다.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기운이 단전을 뜨겁게 달구었으나, 그녀의 머릿속은 오히려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내렸다.
‘무당의 도(道)는 만물을 이롭게 하되 다투지 않는 물과 같거늘.’
그녀는 천천히 검끝을 들어 올렸다.
‘장문인을 가두고 위선을 지키기 위해 펼치는 이 검阵이 정녕 무당의 참된 도란 말인가.’
도사들이 지켜내고자 하는 법도가 한낱 권력의 노리개로 전락한 현실 앞에서, 설원은 진정한 협(俠)의 의미를 되새겼다. 진정한 도는 정형화된 비석이나 썩어빠진 규율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불의를 보고 꺾이지 않는 칼날에, 짓밟힌 자를 위해 일어서는 기개 속에 살아 숨 쉬는 법이었다. 위선으로 가득 찬 하늘이라면, 내 검으로 그 하늘을 가르고 새로운 길을 내리라.
“진(陣), 기(起)!”
장령호법의 내성이 빗소리를 뚫고 포효했다.
순간, 열두 명의 도사가 유기적으로 교차하며 자아낸 검망이 거대한 태극의 형상을 그리며 설원을 압박해 왔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검기는 대지를 찢고 바위를 가루로 만들 기세였다. 피할 곳도, 물러설 곳도 없었다. 오직 정면돌파뿐이었다.
설원은 심안(心眼)을 열었다.
스스스슥―.
세상이 멈춘 듯 느려지며, 십이호법 도사들의 몸에서 뻗어 나온 인과의 실타래가 어지럽게 뒤엉킨 채 시야를 가득 채웠다. 진무칠성진의 무결해 보이는 방어벽 뒤로, 끊임없이 순환하는 기의 흐름이 보였다. 음과 양이 교차하는 찰나의 틈새, 그곳에 태극혜검결의 진리가 이정표처럼 빛나고 있었다.
‘보인다.’
그녀는 검을 가볍게 뒤틀었다.
그러나 혜검의 권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순간, 뇌리 깊은 곳에서 무언가 날카롭게 찢어지는 고통이 엄습했다. 머릿속의 영혼 한구석이 통째로 도려내 지는 듯한 참혹한 상실감이었다.
비 내리는 낙엽당에서 자신의 소매를 붙잡고 울먹이던 이초의의 얼굴이, 그 아이가 건네주던 따뜻한 차의 온기가, 함께 밤하늘을 바라보며 나누었던 소소한 이야기들이 잿가루처럼 바스러져 허공으로 날아갔다. 이초의라는 존재의 형태는 남았으되, 그녀를 향해 품었던 애틋한 우정과 온정의 실타래가 흔적도 없이 마모되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설원의 왼쪽 눈에서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려 빗물과 섞였다. 가슴이 뻥 뚫린 듯한 공동(空洞)이 생겨났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검을 뻗었다. 이 상실의 고통마저도 지금은 검끝의 날카로움으로 치환해야 했다.
스아아악!
설원의 청풍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것은 빠르지 않았으나, 자연의 섭리를 그대로 따르는 바람처럼 유려했다.
태극혜검결의 진의가 담긴 일격이 진무칠성진의 가장 거대한 기의 흐름이 교차하는 중심부를 정확히 파고들었다. 억지로 힘을 받아치는 것이 아닌, 상대의 힘을 그대로 흘려보내며 인과의 고리를 끊어내는 혜검의 묘리였다.
깡! 깡! 까아앙!
기괴한 쇠붙이 소리와 함께,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던 십이호법의 검진이 한순간에 어긋나기 시작했다. 흐름을 잃은 검기들이 서로 충돌하며 거대한 역류를 일으켰다.
“이, 이럴 수가……!”
장령호법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무당 최강의 진법이 일개 여도사의 단 한 자루 검에 의해 해체되고 있었다.
설원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역류하는 기운을 타고 신형을 가볍게 띄워, 도사들의 머리 위를 밟고 나는 듯이 협로를 돌파했다. 단 한 명의 목숨도 해치지 않으면서, 오직 진법의 인과만을 베어내어 길을 열어젖힌 것이다.
타앗!
석문을 통과해 무당산의 경계를 벗어나는 순간, 설원은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드디어 탈출에 성공한 듯싶었다.
그러나 산문을 나서는 마지막 외길, 벼랑 끝의 좁은 다리 위에서 설원의 발걸음이 무겁게 멈춰 섰다.
다리 한가운데, 폭풍우 속에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차가운 그림자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주변의 빗방울들이 그의 몸뚱이에 닿기도 전에 보이지 않는 기의 장막에 막혀 사방으로 튕겨 나가고 있었다. 칠흑 같은 도포를 입고, 자색 서대를 두른 사내. 그의 손에는 정무맹의 권위를 상징하는 신물인 ‘현무령(玄武令)’이 쥐여 있었다.
안찰사 청운익이었다.
그의 등 뒤로 묵영각의 최정예 살수 수십 명이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운익의 입가에 잔인하고도 오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기어코 산문을 나섰구나, 무당의 배교자여.”
청운익이 천천히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린 검기가 쏟아지는 빗줄기마저 얼려버릴 듯했다.
“네 가문이 어찌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지, 그 참혹한 비밀이 궁금하지 않더냐? 무당을 벗어난 네가 갈 곳은 저승길뿐이다.”
그의 목소리가 천둥소리와 섞여 뇌성벽력처럼 설원의 귓전을 때렸다. 가문의 몰락 뒤에 숨겨진 또 다른 거대한 음모의 심연이, 어둠 속에서 서서히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