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쿠르릉, 쾅!

정외(庭外)의 먼 하늘을 찢어발기는 듯한 폭음이 대기를 사납게 흔들었다. 뇌전이 대지를 강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당산의 외곽을 수호하는 거대한 철문이 맞물려 다치며 내지른, 기괴하고도 위압적인 화약의 파열음이었다. 쇠와 쇠가 부딪치고 화약의 잔향이 빗줄기 사이로 매캐하게 번져가는 순간, 산문을 폐쇄하는 육중한 금속음이 낙엽당 마당까지 무겁게 가라앉았다. 외부와의 모든 통로가 단절되었음을 알리는 죽음의 선고와도 같았다.

그 파열음을 신호로, 백자운의 눈동자에 고여 있던 망설임이 일순간 얼어붙었다. 가문의 안위와 가솔들의 목숨이라는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 무거운 족쇄가 마침내 그의 검끝을 움직였다.

스어어억!

백자운이 쥔 봉문 서약 보검에서 푸른 검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며 빗줄기를 증발시켰다. 무당의 비전이자 천태성가의 절예인 태극혜검의 초식이 설원의 목덜미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쇄도했다. 검날이 공기를 가를 때마다 날카로운 마찰음이 고막을 찔렀고, 사방에 고여 있던 빗해골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설원은 눈앞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궤적을 바라보았다. 이초의의 몸에 퍼진 지독한 독을 해독하기 위해 천인감응의 혜검을 무리하게 사용한 직후였다. 단전은 텅 비어 있었고, 기경팔맥을 흐르는 진기는 가뭄이 든 물길처럼 메말라 있었다. 호흡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치밀었다.

게다가 혜검을 펼친 대가로 자아의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뒤였다. 머릿속은 텅 빈 동굴처럼 서늘했고, 심장 언저리는 얼음물에 담가둔 것처럼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앞에서 검을 겨누고 있는 사형 백자운을 보아도, 그와 나누었던 수많은 대화와 정(情)의 형태가 모호한 안개 너머로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설원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명징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물의 인과와 기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혜검의 통찰안이 백자운의 무공을 실시간으로 분해하여 뇌리에 그려내고 있었다.

백자운의 검로(劍路)는 겉보기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정종의 검법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가문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과 사매를 베어야 한다는 도덕적 부채감이 기괴하게 뒤섞여 있었다. 검 기운의 조화가 미세하게 어긋나며 가빠지는 칼끝. 기맥의 흐름이 불안정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사형.”

설원의 입술이 건조하게 갈라지며 나직한 목소리를 뱉었다. 감정이 소실된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얼음처럼 차가운 이성과 도(道)에 대한 끝없는 탐구뿐이었다.

“그 검에 담긴 것은 무당의 도인가, 아니면 천태성가의 쇠사슬인가.”

백자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이빨을 악물었을 뿐이다. 그의 하얗게 질린 손가락 마디가 검자루를 부러뜨릴 듯이 쥐어짜고 있었다. 그의 검끝이 빗방울을 꿰뚫으며 설원의 미간 삼 인치 앞까지 도달했다.

일촉즉발의 순간, 설원은 자신의 텅 빈 단전을 의식했다. 이대로 적의 강맹한 진기와 정면으로 충돌한다면 전신의 기맥이 파괴되어 폐인이 될 것이 자명했다. 힘과 힘의 겨룸으로는 찰나의 순간도 버틸 수 없었다.

그때, 설원의 머릿속에서 번쩍이는 영기의 흔적이 일어났다.

그것은 지난날 태극검총의 깊은 절벽 아래, 이끼 낀 무덤의 부서진 비석 틈새에서 발견했던 전설의 ‘태극혜검결(太極慧劍決)’ 일실 구결 쪽지였다. 거칠고 낡은 한지 위에 붉은 묵선으로 적혀 있던 기이한 문자들. 무당의 건파 조사들이 심득을 얻고도 세상에 전하지 못했던 극의의 한 조각이 뇌리에 명확한 형상으로 떠올랐다.

‘역(逆)으로 순(順)을 다스리고, 허(虛)로 실(實)을 채운다. 음양이 서로 맞물려 돌아갈 때, 천지의 기운은 스스로 순환하여 마르지 않는다.’

정통 무당의 기맥 순환이 시계 방향으로 자연스러운 양(陽)의 나선을 그린다면, 이 일실 구결이 가리키는 바는 완전히 그 반대였다. 음(陰)의 극단에서 스스로를 비워내고, 역전된 순환을 통해 외부의 거대한 기류를 단전으로 끌어안는 묘리.

설원은 주저하지 않고 기경팔맥의 흐름을 뒤틀었다.

“으윽……!”

전신의 뼈마디가 어긋나고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전신을 엄습했다. 목구멍까지 뜨거운 선혈이 울컥 치밀어 올랐으나, 설원은 그것을 억지로 삼키며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혔다.

스스로를 철저히 비워내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가뭄처럼 메말라 있던 단전에 주변의 빗줄기와 세찬 바람, 그리고 백자운이 뿜어내는 강맹한 검기마저 흡수하여 회전시키는 무형의 소용돌이가 형성된 것이다. 비정상적인 외력의 폭발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주의 거대한 순리 자체를 제 몸 안에서 회전시키는 진정한 태극의 태동이었다.

설원은 7화에서 던져버렸던 갈대 대신, 마당 구석에 떨어져 있던 부러진 나뭇가지 하나를 가볍게 집어 들었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천천히 원을 그렸다.

스아아아아―!

세찬 빗소리를 압도하는 기이한 바람 소리가 낙엽당 마당을 가득 채웠다. 설원의 손끝이 만들어낸 작고 보잘것없는 나뭇가지의 궤적을 따라, 바닥에 뒹굴고 있던 붉고 누런 낙엽들이 일제히 지면에서 떠올랐다.

한 장, 두 장, 그리고 수백, 수천 장의 낙엽이 빗물과 뒤섞여 허공에서 거대한 소용돌이를 그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음양의 태극 문양이었다. 백자운이 방출한 푸른 검기가 이 거대한 태극의 흐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흔적도 없이 분해되었다.

“이, 이것은……!”

사방을 포위하고 있던 계율당주와 묵영각 무사들의 입에서 경악 어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들이 평생 무림을 누비며 보아온 그 어떤 고강한 무공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내력의 크기로 압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기운을 자신의 흐름으로 동화시키는, 자연의 섭리 그 자체였다. 무당의 무학이 한 단계 격상하여 진정한 무극(無極)의 경지에 닿았음을 증명하는 장엄한 순간이었다.

백자운은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전력을 다한 검초가 설원의 나뭇가지 끝에서 부드럽게 꺾이고, 오히려 자신의 손목을 향해 거대한 역류의 힘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카아아앙!

맑고 날카로운 파열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설원이 뻗은 나뭇가지 끝이 백자운의 보검 측면을 아주 미세하게 건드린 찰나였다. 백자운의 검 자루를 타고 흐르던 내경이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그의 손을 떠난 봉문 서약 보검이 허공으로 높이 치솟았다가 진흙바닥에 등룡처럼 꽂혔다.

스스스스……!

허공을 수놓았던 수천 장의 낙엽이 힘을 잃고 비처럼 내리깔렸다. 대결은 단 한 초식 만에 끝이 났다.

백자운은 빗속에서 멍하니 자신의 비어버린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이 화끈거렸고, 전신의 진기가 완전히 소진되어 손끝 하나 움직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지배한 것은 패배의 굴욕이 아니었다. 그것은 평생 동안 자신이 쫓아왔던 무당의 도(道), 그 진실한 실체가 마침내 눈앞에 현현했다는 경외심이었다.

툭.

백자운의 무릎이 힘없이 진흙바닥으로 꺾였다. 그는 스스로 부복하듯 손을 포개어 설원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어깨가 빗물과 눈물로 젖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졌다. 내가 쫓던 것은 허상에 불과했구나.”

백자운의 목소리에는 깊은 자괴감과 함께, 쇠사슬에서 벗어난 자의 해방감이 서려 있었다.

“무당의 진정한 부흥을…… 설 사매, 네게 기탁하마. 이 썩어 문드러진 정파의 껍데기를 깨뜨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너뿐이다.”

설원은 부복한 사형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속에 일말의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그의 눈물도, 그의 숭고한 굴복도 설원에게는 오직 인과의 흐름 중 하나로만 보였다. 그러나 혜검의 기억은 그녀에게 이 사형이 짊어진 굴레를 풀어주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속삭이고 있었다.

설원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물러서려던 계율당주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계율당주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계율당주.”

설원의 차가운 음성이 빗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단혜의 충직한 사냥개가 되어 이 낙엽당까지 불을 지르러 왔다면, 최소한 제 주인이 어떤 인간인지는 알고 왔어야지.”

설원은 품속에서 비에 젖지 않도록 가죽 주머니에 밀봉해 두었던 누런 종이 뭉치를 꺼내어 바닥에 던졌다. 사르릉 소리를 내며 진흙 위에 펼쳐진 서한들의 면면을 본 계율당주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것은 단혜태상장로가 천태성가와 긴밀히 밀약하며, 무당파 내부의 반대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독점하려던 벽천단(碧天丹)의 유통 영수증과 온갖 비리가 상세히 적힌 친필 서한이었다. 1화에서 설원이 검총을 탈출할 때 원로들의 밀담 장소 아래서 목숨을 걸고 빼내어 소지하고 있던, 단혜를 단숨에 파멸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증거였다.

“이, 이것이 어찌 네 손에……!”

계율당주가 말을 더듬었다.

백자운 역시 바닥에 떨어진 서한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가문을 구하기 위해 단혜에게 종속되어야만 했던 비극, 천태성가를 죄어오던 부정한 사슬의 실체가 바로 그곳에 완벽히 기록되어 있었다.

“단혜는 처음부터 천태성가를 구원할 생각이 없었다.”

설원이 무미건조하게 읊조렸다.

“그저 너희 가문의 재물과 명예를 빨아먹고 버릴 소모품으로 여겼을 뿐이지. 사형, 그대가 지키려 했던 가문의 족쇄는 처음부터 단혜가 채운 덫이었다.”

백자운의 눈에서 뜨거운 분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이 짊어졌던 의무의 실체가 추악한 위선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그의 심장을 찢어발겼다.

계율당주는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음을 직감했다. 이 증거가 무당파 내부는 물론 강호 전역에 퍼진다면 단혜 장로는 물론이며 그들과 밀약을 맺은 정무맹의 명예 수호자들도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죽여라! 당장 저 배교자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불태워 없애라!”

계율당주가 비명을 지르며 묵영각 무사들에게 손짓했다.

무사들이 일제히 기괴한 검은 쇠사슬, 금강쇄를 휘두르며 설원을 향해 쇄도하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설 언니! 피해야 해!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해!”

낙엽당의 무너진 담벼락 너머로, 빗속을 뚫고 헐떡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초의였다.

그녀의 온몸은 진흙과 빗물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을 쥐어짜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녀의 품에는 설원이 그녀의 마모를 염려하며 선사했던 기이한 영약, 환정향(還情香)의 미세하고 서글픈 정화의 향취가 빗물에 씻겨 내리며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이초의는 허겁지겁 설원의 앞을 가로막으며, 품에서 피에 젖은 긴급 전령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두 눈은 극도의 공포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장문인께서…… 장문인께서 이미 단혜태상장로에 의해 백일 감금(유폐) 상태에 빠지셨어! 단혜가 정무맹의 무사들을 이끌고 장문실을 장악했단 말이야! 그리고……!”

이초의가 핏기 없는 입술을 부르르 떨며 설원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설 언니를 마도의 끄나풀로 규정하고, 온 산의 도사들과 정무맹의 추격대가 이 낙엽당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어! 이미 산문은 닫혔고, 우릴 죽이기 위한 결사대가 산길을 메웠어!”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 멀리 어둠이 내린 무당산의 산등성이를 따라 수백 개의 횃불이 요동치며 낙엽당을 향해 거대한 뱀처럼 밀려드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무당파의 모든 세력이 단혜의 위선 아래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완전히 고립된 사지(死地) 속에서, 빗소리를 뚫고 수많은 무인들의 살기 어린 함성이 낙엽당을 향해 좁혀오고 있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