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검붉은 새벽빛이 무당산의 험준한 협로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산문을 벗어나는 마지막 외길, 깎아지른 절벽 사이에 자리 잡은 천혜의 요새와도 같은 협만. 그 좁고 어두운 길목을 가로막은 것은 무당파가 자랑하는 최정예 무사들, 바로 십이호법(十二護法)이었다. 그들이 뿜어내는 도가(道家)의 정종 검기가 밤안개와 뒤섞이며 사방을 차갑게 얼려가고 있었다.

지독할 정도로 고요한 정적 속에서, 설원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녀가 쥔 청풍검의 검끝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대지의 기운을 읽어 내렸다.

“설원 사매, 검을 거두고 장문인과 태상장로님의 처분을 기다리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참된 도(道)를 배반하는 배교자로 간주할 뿐이네.”

십이호법의 우두머리인 장령호법의 목소리가 협곡의 절벽에 부딪혀 무겁게 울려 퍼졌다. 그의 손에 들린 고검이 태극의 궤적을 그리며 밤하늘을 갈랐다.

설원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비소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만큼은 얼어붙은 호수처럼 맑고 깊었다.

“배교자라.”

설원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내가 배반한 것이 참된 도인지, 아니면 당신들이 수호하려는 저 썩어 문드러진 원로원의 욕망인지, 참으로 헛갈리는구려.”

설원은 품속에 넣어두었던 낡은 서한 한 장을 끄집어냈다. 빗물과 바람에 모서리가 닳아버린 종이였으나, 그 위에 적힌 붉은 수인은 선명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것은 바로 단혜태상장로가 천태성가와 긴밀히 묵약하며 무당의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독점하려던 벽천단(碧天丹)의 유통 영수증과 부정이 고스란히 적힌 밀서였다. 과거 태극검총을 탈출할 당시, 원로들의 밀담을 훔쳐보며 손에 넣었던 결정적 증거가 마침내 세상의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이것이 정녕 무당의 대의인가? 천태성가의 부를 갈취하고, 벽천단을 매점매석하여 장문인의 눈과 귀를 가린 채 무당의 대권을 움켜쥐려는 이 더러운 밀약문이, 당신들이 목숨 걸고 지키려는 도의 실체란 말인가?”

장령호법의 얼굴이 순간 흙빛으로 변했다. 십이호법의 검진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들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신념의 반석에 거대한 균열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그것은……!”

“말을 아끼시오. 이미 당신들의 검끝에는 사욕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으니.”

설원은 서한을 다시 품 깊숙이 밀어 넣으며 청풍검을 곧게 세웠다.

스아아아아!

그 순간, 십이호법이 일제히 신형을 날렸다. 그들의 움직임은 마치 북두칠성이 하늘에서 내려앉아 대지를 짓누르는 듯한 형세를 취했다. 무당 최강의 합격진, 진무칠성진(眞武七星陣)이 마침내 발동한 것이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검풍은 그 어떤 겨울의 칼바람보다 매서웠다. 열두 자루의 검이 만들어내는 기의 그물망은 설원의 전신을 사정없이 옥죄어 왔다.

설원은 눈을 감았다. 아니, 눈을 감은 것이 아니었다. 마음의 눈, 즉 ‘천인감응의 혜검(慧劍)’을 개안한 것이었다.

위이이잉!

귓가에 이명이 울리며 사방의 풍경이 변했다. 빗물도, 밤안개도, 심지어 살기를 품고 달려드는 호법들의 육신마저 흐릿해졌다. 오직 그들의 검끝에서 뻗어 나오는 푸른 내력의 줄기들과, 그것들이 정밀하게 얽히고설켜 만들어내는 ‘인과의 실타래’만이 붉은 선이 되어 허공을 수놓았다.

진무칠성진은 완벽해 보였다. 한 명이 물러서면 다른 세 명이 그 빈자리를 메우고, 사방에서 가해지는 타격이 서로의 내력을 증폭시키는 구조였다.

‘하지만 흐름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그 흐름이 꺾이는 매듭이 있는 법.’

설원은 혜검의 통찰안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머릿속이 타들어 갈 듯한 극심한 두통이 밀려왔다. 혜검을 사용할 때마다 뇌리의 한구석에서 소중한 기억들이 모래알처럼 스러져가는 감각이 생생히 전해졌다. 이초의의 밝은 웃음소리가 어스름한 안개 너머로 흐릿해지는 고통. 가슴을 찌르는 듯한 상실감에 설원의 손가락이 검자루를 부러뜨릴 듯 꽉 쥐어졌다.

게다가 그녀의 단전에 쌓인 내력은 십이호법 전체의 합력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부딪치는 순간, 그녀의 연약한 기경팔맥은 폭포수를 맞은 흙인형처럼 부서져 내릴 터였다.

그때, 설원의 뇌리에 번뜩이는 섬광이 스쳤다.

과거 태극검총의 부서진 비석 틈새에서 발견했던 일실 구결, 전설의 ‘태극혜검결(太極慧劍決)’ 쪽지에 적혀 있던 한 구절이 심연 속에서 떠올랐다.

[태극(太極)은 음양의 조화이나, 무극(無極)은 조화마저 초월한 무(無)의 심연이다. 인과를 보고 벨 수 있다면, 스스로를 인과의 밖으로 던져 무극에 이르게 하라.]

‘무극은 곧 인과를 초월함이다.’

아주 짧은 찰나, 설원의 마음속에 거대한 개달음의 파도가 몰아쳤다.

지금껏 그녀는 혜검으로 적의 인과를 ‘보기’만 했다. 인과의 흐름을 읽고 그것을 억지로 베어내려 했기에 내공이 부딪치고 마음이 깎여 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가 인과의 흐름 자체에서 벗어나 하나의 허무(虛無)가 된다면 어찌 되겠는가? 베어야 할 실타래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세상의 그 어떤 검진도 그녀를 가둘 수 없을 터였다.

설원의 단전에서 잠자고 있던 검선의 영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물결처럼 산산이 부서지던 그녀의 내력이, 태극의 둥근 곡선을 그리며 거대한 소용돌이로 응축되었다. 그것은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비워짐으로써 얻어지는 기이한 역설이었다.

파경(破境).

그녀의 무학 경지가 마침내 한 단계 더 높은 무극의 영역을 향해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하앗!”

장령호법의 검이 설원의 목덜미를 향해 짓쳐 들어왔다. 좌우에서 쏘아져 들어오는 수십 개의 검풍이 그녀의 도포 자락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그러나 설원의 신형은 허공에 번진 한 줄기 묵향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스윽.

인간의 신체로는 불가능한 궤적이었다. 설원은 칼끝이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찰나, 오히려 검을 거두고 한 걸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적들의 검기가 얽혀 가장 거대한 폭풍을 만들어내는 그 중심부, 즉 폭풍의 눈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무모하도다!”

호법들의 외침과 함께 십이호법의 검이 일제히 중심을 향해 좁혀졌다.

하지만 그들이 찌른 것은 허공이었다. 분명 눈앞에 서 있던 설원의 존재감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들이 경악하기도 전에, 설원의 청풍검이 어두운 밤하늘에 한 줄기 고요한 선을 그렸다. 그것은 빠르지도, 강하지도 않았다. 그저 흐르는 물이 바위를 감싸 안듯 지극히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스아아아학!

부드러운 검기가 진무칠성진의 기력 교차점을 가볍게 건드렸다.

그 순간,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던 십이호법의 기운이 갈 갈이 흩어지며 서로를 들이받기 시작한 것이다. 설원의 검에 실린 무극의 힘이 그들의 합격을 인과 관계의 시작점부터 비틀어버린 결과였다.

팅! 팅! 티디딩!

날카로운 파금성과 함께, 열두 호법의 손에서 고검이 일제히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어, 어찌 이런……!”

장령호법은 자신의 손바닥이 찢어지는지도 모른 채, 하늘로 날아가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자신의 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단 한 초식이었다. 단 한 번의 부드러운 휘두름에, 무당이 자랑하는 천하제일의 진법이 일률적으로 해체되어 버렸다.

십이호법은 약속이나 한 듯 사방으로 나동그라졌다. 그들의 몸에는 단 하나의 자상도 없었으나, 전신을 지탱하던 내력이 완벽히 역류하여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설원은 가볍게 신형을 착지하며 청풍검을 검집에 밀어 넣었다. 철커덕하는 맑은 쇳소리가 깊은 새벽의 협곡을 깨웠다.

그녀는 쓰러진 장령호법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품속에서 꺼낸 벽천단의 밀약서를 그의 머리맡에 던져두었다.

“가서 단혜에게 전하시오. 설원이 무당의 진짜 검(劍)을 품고 산을 내려간다고. 그리고 조만간 무당의 썩은 뿌리를 완전히 베어내기 위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말을 마친 설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산길의 짙은 안개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녀의 신형은 순식간에 안개 너머로 사라져 자취를 감추었다.

***

무당산의 가파른 기슭을 따라 단숨에 달린 지 반 시진쯤 지났을 무렵.

설원은 품속에 넣어둔 수첩의 감촉을 느꼈다. 묵로(默路). 사라져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칼끝으로 새겨넣은 수많은 이름과 마음의 형태들.

머릿속에서 흐릿해진 ‘이초의’라는 이름의 곁에, 방금 전 일어난 무극의 깨달음을 새겨넣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 한구석은 시린 바람이 부는 것처럼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소중한 것을 내어주고 얻은 힘은 너무도 차가웠다. 품속에 넣어둔 영약 ‘환정향(환정향)’의 은은한 향기만이 그녀가 아직 인간임을 증명하듯 간신히 온기를 전해올 뿐이었다.

‘자운 사형의 봉문 서약 보검도, 언젠가는 내 손으로 베어내야 하겠지.’

가문의 안위를 위해 단혜와 종속적 계약을 맺고 무당의 부흥을 짊어진 고결한 사형 백자운. 그와의 피할 수 없는 대결을 예감하며, 설원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바로 그때였다.

하산길 절벽 밑, 무성하게 우거진 수풀 사이에서 피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설원의 코끝을 찔렀다.

“윽…… 으윽……”

낮은 신음과 함께, 누군가가 흙바닥을 피로 물들이며 기어가고 있었다.

설원의 안광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는 신형을 날려 즉시 그 시체의 곁으로 다가갔다. 얼굴을 확인한 순간, 설원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는 온몸이 수십 갈래로 찢기고 무당파 특유의 음독에 중독된 채 죽어가고 있는 사내였다. 바로 이초의의 거처에서 그녀를 보필하던 젊은 하인 도사였다.

“정, 정신 차려라! 어찌 된 일이냐?”

설원이 급히 그의 혈도를 짚어 기운을 불어넣으려 했으나, 사내의 단전은 이미 완벽히 파괴되어 있었다. 사내는 초점 없는 눈으로 설원을 올려다보며, 피가 섞인 침을 토해냈다.

“설…… 설원 도협…… 님……”

“말하지 마라. 기운을 모아라!”

“아, 아닙니다…… 시간이…… 장문인께서…… 태상장로의 손에 유폐되셨고…… 묵영각의 살수들이…… 낙엽당을…… 쿨럭!”

검은 피가 사내의 입에서 폭포처럼 쏟아졌다. 사내는 설원의 도포 자락을 피 묻은 손으로 필사적으로 움켜쥐며 마지막 단말마를 뱉어냈다.

“단혜가…… 반대파 도사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있습니다…… 이미 무당산 내부가…… 피바다로…… 초의 아가씨도……!”

사내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설원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무당산 내부에서 이미 단혜의 피비린내 나는 숙청이 시작되었다는 절망적인 소식. 그리고 그녀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존재들의 위기.

설원은 굳어버린 시신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먹구름이 다시 가득 차오르는 무당산의 정상을 올려다보았다. 칼끝보다 더 매서운 살기가 그녀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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