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장대비가 낙엽당의 기와지붕을 사정없이 두들기며 사방으로 뽀얀 물안개를 뿌려댔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호법무사들의 어깨 너머로, 백색 도포를 백선처럼 휘날리며 걸어온 사내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백자운.

그의 미간에는 가문의 명운을 짊어진 자 특유의 짙은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다. 등 뒤에 비껴 찬 고검의 자루를 쥔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참담한 슬픔과 무당의 대권을 향한 숙명적 책임감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 격렬히 소용돌이쳤다.

반면 그를 마주하는 설원의 눈빛은 동천(冬天)의 얼어붙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일말의 미련도, 반가움도, 혹은 원망조차 비치지 않는 무채색의 시선. 이미 그녀의 심연에서 사형이라는 존재에 얽힌 온기와 기억의 갈래들은 천인감응의 혜검을 휘두른 대가로 송두리째 마모되어 가고 있었다.

백자운이 낮게 읊조렸다.

“설 사매…… 결국 이 길을 가야만 하는가.”

그의 음성은 빗소리에 짓눌려 무겁게 가라앉았다. 정무맹이 그녀를 향해 발부한 극비의 체포령, 아니 사실상의 즉결 처분령을 품에 안고 온 그였다. 그러나 백자운은 차마 그 잔인한 문서를 꺼내 들지 못했다. 무당의 대의와 가문의 존속을 위해 그녀를 꺾어야만 하는 잔혹한 운명 앞에서, 그의 고결한 이성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설원은 대답 대신 손을 가볍게 털었다. 누렇게 바랜 종이 뭉치와 장부가 빗물 고인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진흙탕 위로 단혜태상장로의 붉은 수결과 천태성가의 인장이 선명하게 번져갔다.

“이것이 무엇인지, 너의 그 잘난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아라.”

설원의 목소리에는 감정의 높낮이가 없었다. 마치 타인의 일을 전하는 서기처럼 덤덤하고 서늘했다.

“단혜가 무당의 대권을 손에 쥐기 위해 정무맹과 결탁한 증거다. 벽천단(碧天丹)의 유통을 매점매석하고, 그 과정에서 반대 세력을 마도로 몰아 숙청한 내역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 너희가 들이대는 그 숭고한 율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추악한 위선을 가리기 위한 가리개였는지 똑똑히 보란 말이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흘겨본 호법무사 대장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 이것은…… 장로님의 친필……!”

비밀은 햇빛 아래 드러나는 순간 무기가 된다. 단혜태상장로가 천태성가와 긴밀히 묵약하며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독점하려던 벽천단의 유통 영수증과 부정이 적힌 서한. 1화에서 태극검총을 탈출할 당시 원로들의 밀실에서 빼돌렸던 그 치명적인 역린이 마침내 백자운과 호법들의 면전에 완전히 발가벗겨진 채 던져진 것이다.

백자운의 시선이 바닥의 서한에 닿았다. 가슴을 찌르는 환멸이 그의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문의 부활을 위해 자신이 손을 잡아야만 했던 단혜의 손바닥이 얼마나 더러운 흙탕물로 가득차 있었는지를.

백자운은 천천히 허리춤에 찬 고검으로 손을 옮겼다. 그것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었다. 몰락한 천태성가 분가의 부활을 약속받는 대가로 단혜와 맺을 수밖에 없었던 종속적 ‘봉문 서약 보검’이었다. 검집 표면에 새겨진 가문의 문양이 빗물에 젖어 기괴하게 일렁였다. 이 검목을 쥐고 있는 한, 그는 단혜의 사냥개가 되어 설원을 베거나, 혹은 스스로 가문과 함께 파멸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독한 연민과 책임의 사슬이 백자운의 목을 조여왔다. 설원을 베어 가문을 살릴 것인가, 아니면 무당의 참된 도를 위해 스스로 검을 꺾을 것인가.

설원은 묵묵히 젖어가는 백자운을 바라보며 가슴속을 들여다보았다. 따뜻했던 인연의 불씨는 이미 꺼져 가고 있었다. 백자운이라는 사내를 향해 뛰던 심장의 고동도 이제는 남의 일처럼 아득했다.

하지만 그녀는 품속에 감춰둔 묵로(默路)의 기록을 마음의 눈으로 읽어 내렸다. 칼끝으로 새겨 넣었던 거친 자국들. '백자운, 무당의 의로운 검이자 내가 지켜야 할 별.'

기억과 감정은 닳아 없어질지언정, 그가 걸어온 협(俠)의 궤적과 도(道)의 실체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설원은 깨달았다. 마음이 비워진 자리에 남는 것은 허무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명경지수(明鏡止水)와도 같은 투명함이라는 것을. 비록 대가가 가혹하여 온기를 잃었을지언정, 눈앞의 사형은 진정 무당을 진흙탕에서 건져 올릴 고결한 재목이었다.

“사형.”

설원의 입에서 오랜만에 흘러나온 호칭에 백자운의 어깨가 움찔했다.

“손에 쥔 그 사슬이 무겁다면, 검으로 풀어내는 수밖에 없겠지.”

백자운이 참담하게 웃었다.

“……그렇군. 설 사매, 너의 검이 가리키는 곳이 진정 무당의 도라면, 내 검으로 그 깊이를 시험해 보아야만 하겠구나.”

백자운은 가볍게 손짓하여 호법무사들을 뒤로 물리쳤다.

“물러서라. 이것은 무당의 법을 집행하는 자와, 그 법의 진위를 묻는 자 사이의 사적인 비무다.”

“하지만 백 소협, 이 자는 배교의 혐의가……!”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백자운의 사호(獅吼)와도 같은 일갈에 호법무사들은 기가 죽어 뒤로 물러섰다.

밤하늘을 가득 메웠던 먹구름이 서서히 갈라지며, 그 틈새로 서늘한 백색 달빛이 낙엽당 마당을 비추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어느새 가느다란 안개비로 변해 허공을 떠돌았다. 달빛 아래 마주 선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얽혔다.

백자운이 천천히 봉문 서약 보검을 뽑아 들었다. 서슬 퍼런 검날이 달빛을 받아 차갑게 명멸했다.

그에 반해 설원은 검 손잡이에 손을 대지도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발을 옮겨 마당 구석, 담벼락 밑에 쓰러져 있는 갈대 한 자루를 눈여겨보았다. 빗물에 젖어 꺾인, 아무런 힘도 없는 가느다란 갈대 나뭇가지였다.

설원은 허리를 숙여 그 갈대를 꺾어 쥐었다.

백자운의 눈썹이 꿈틀했다.

“나를 모욕하려는 것인가?”

“모욕이 아니다.”

설원이 갈대 끝을 비스듬히 내리트리며 대답했다.

“검선의 자취를 완전히 지우고, 내 마음을 맑게 비우니 세상 만물이 모두 검이 되더구나. 사형의 그 무거운 검세를 받기에, 이 가벼운 갈대만큼 좋은 키가 어디 있겠느냐.”

백자운은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았다. 그의 전신에서 푸른 진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무당삼십육검(武當三十六劍)의 정수가 그의 검끝에 맺혔다.

스아아아!

백자운의 검이 움직였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산맥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웅장하고도 강맹한 기세였다. 산을 깎아내릴 듯한 검풍이 낙엽당의 잡초들을 모조리 눕히며 설원의 전신을 압박해 들어왔다. 대기를 찢는 파공음이 귀청을 때렸다.

그러나 설원의 눈에는 그 가공할 검세의 사이사이로 흐르는 기의 실타래가 선명하게 보였다. 천인감응의 혜검이 보여주는 인과의 궤적.

설원은 가볍게 발을 내딛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처럼, 그녀의 신형이 백자운의 검막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툭.

갈대 나뭇가지 끝이 백자운의 검날 측면을 가볍게 건드렸다.

그 찰나, 산을 무너뜨릴 것 같던 백자운의 강맹한 내력이 갈대의 부드러운 휨을 타고 허공으로 흘러내려 갔다. 유(柔)가 강(剛)을 제압하고, 정(靜)이 동(動)을 통제하는 무당 태극의 진정한 극의였다.

백자운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의 검세가 물 흐르듯 꺾이며 방향을 잃었다. 설원은 멈추지 않고 갈대를 가볍게 휘둘러 백자운의 손목을 툭 쳤다.

탁!

검기를 잔뜩 머금었던 보검이 아래로 툭 떨어지려 하자, 백자운은 급히 신형을 뒤로 날리며 검을 회수했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단 한 초식.

쇠붙이도 아닌 일개 갈대 나뭇가지로 자신의 모든 성취를 무력화시킨 설원의 무예는 이미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고 있었다. 검선(劍仙)의 유산이 지닌 참된 위력이 그녀의 비워진 마음속에서 비로소 완전한 꽃을 피운 것이다.

백자운은 참담함 속에서도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녀의 검은 위선으로 가득 찬 무당의 현실을 꾸짖는 회초리와 같았다.

“……과연, 이것이 네가 도달한 경지인가.”

백자운이 다시금 검을 곧게 세우며 내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그의 등 뒤로 무당의 태극형상이 푸른 빛으로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가문의 숙명도, 단혜의 맹세도 아닌, 오직 도(道)를 추구하는 한 명의 무인으로서 펼치는 마지막 초식이었다.

사색 어린 초식이 마침내 폭발하여 무당파 산정을 흔들려던 바로 그 찰나.

쿠구구구궁!

낙엽당 바깥, 무당산의 정문 쪽에서 기괴하고도 굉막한 화약 폭발 소리가 대지를 흔들었다. 밤하늘이 붉은 화염으로 번쩍이며 물들었다.

“이 소리는…… 벽력탄(霹靂彈)?”

백자운의 검세가 뚝 멈췄다.

동시에 산 아래에서 수많은 인마의 다급한 함성과 함께, 무당의 산문이 굳게 닫히는 육중한 쇠소리가 메아리쳐 왔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산문을 통제하고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단순한 정풍(整風)의 차원을 넘어선, 거대한 위기가 무당산을 통째로 삼키려 들고 있었다.

쿠구구구궁!

낙엽당 바깥, 무당산의 정문 쪽에서 기괴하고도 굉막한 화약 폭발 소리가 대지를 흔들었다. 밤하늘이 붉은 화염으로 번쩍이며 물들었다.

“이 소리는…… 벽력탄(霹靂彈)?”

백자운의 검세가 뚝 멈췄다.

동시에 산 아래에서 수많은 인마의 다급한 함성과 함께, 무당의 산문이 굳게 닫히는 육중한 쇠소리가 메아리쳐 왔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산문을 통제하고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단순한 정풍(整風)의 차원을 넘어선, 거대한 위기가 무당산을 통째로 삼키려 들고 있었다.

대기를 뒤흔든 진각(震脚)의 여파로 낙엽당 기와지붕에 고여 있던 빗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사방을 메운 불길한 초연(硝煙) 냄새가 빗물 냄새를 덮어버렸다.

백자운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거친 숨결을 따라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의 시선은 산문 쪽을 향해 있었으나, 손에 쥔 봉문 서약 보검의 검끝은 여전히 허공을 부르르 떨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가문의 명운과 무당의 대의, 그 거대한 양 갈래 길에서 그의 영혼은 갈가리 찢어지고 있었다.

“산문이 닫혔다…….”

백자운이 신음하듯 내뱉었다. 그것은 단순한 폐관(閉關)이 아니었다. 외부와의 통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내부의 사냥감을 구석으로 몰아넣는 사냥꾼의 그물망이었다.

설원은 귀를 기울였다. 빗소리 틈새로 서걱거리는 살기 어린 발소리들이 낙엽당을 향해 사방에서 좁혀오고 있었다. 최소 수십 명, 아니 백여 명에 달하는 고수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소맷자락 안쪽을 더듬었다.

손끝에 닿은 것은 까칠하고 빛바랜 종이 조각이었다. 과거 태극검총의 부서진 비석 틈에서 손에 넣었던 전설의 ‘태극혜검결(太極慧劍決)’ 일실 구결 쪽지.

그 낡은 종이에서 미세한 온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백자운이 방금 전 펼쳐 보였던 무당삼십육검의 끝자락, 그 미완의 흐름과 소매 속 구결이 기이하게 공명하며 설원의 단전을 자극했다.

‘태극은 음양의 조화이나, 음이 극에 달하면 양이 생기고 양이 극에 달하면 음으로 돌아간다…….’

머릿속에서 벼락같은 깨달음이 스쳤다. 혜검의 통찰안이 백자운의 검로에 얽힌 인과의 실타래를 다시금 해체했다. 백자운이 가문의 책임이라는 무거운 양(陽)의 굴레에 갇혀 검세가 둔해졌다면, 자신은 감정을 잃어가는 음(陰)의 심연 속에서 오히려 무한한 자유를 얻고 있었다. 비워진 마음에 내려앉는 도의 진리. 그것은 채우려 발버둥 치는 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맑고 투명한 경지였다.

설원은 갈대 나뭇가지를 쥔 손에 힘을 뺌으로써 오히려 그 끝에 서린 검기를 극대화했다. 자연의 순리는 억지로 흐름을 막아서는 둑을 무너뜨리고, 결국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 바다를 이루는 법이다. 그녀의 검 또한 그러해야 했다.

“사형, 아직도 깨닫지 못했느냐.”

설원의 서늘한 목소리가 빗장을 지르듯 백자운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단혜는 너를 도구로 삼아 무당을 집어삼키려 하는 것이다. 네가 쥔 그 보검은 가문을 부활시킬 열쇠가 아니라, 천태성가를 영원히 그의 발밑에 묶어둘 사슬일 뿐이다.”

“시끄럽다!”

백자운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는 폭발하듯 신형을 날려 설원을 향해 쇄도했다. 그의 검끝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검강이 낙엽당 마당의 진흙을 양옆으로 가르며 거대한 용오름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설원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의 혜검은 이미 백자운의 검로가 지닌 미세한 균열, 즉 가문을 향한 죄책감과 의리 사이에서 흔들리는 마음의 틈새를 정확히 포착하고 있었다.

스윽.

설원이 가볍게 갈대를 휘둘렀다.

허공에 호를 그린 갈대 끝이 백자운이 뿜어낸 검강의 중심부를 정확히 찔렀다. 거대한 폭풍의 가장 고요한 태풍의 눈을 꿰뚫은 격이었다.

콰아아앙!

백자운의 검강이 사방으로 산산이 흩어지며 낙엽당의 담벼락들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먼지와 빗물이 뒤섞여 자욱한 안개를 만드는 가운데, 백자운은 뒤로 대여섯 걸음 물러서며 흙바닥에 검을 짚고 버텼다. 그의 입가에서 붉은 선혈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의 눈에 불신과 참담함, 그리고 아련한 경외심이 교차했다.

단 한 자루의 갈대로 자신의 전력을 다한 초식을 완벽히 파쇄했다. 그것도 힘 대 힘의 격돌이 아닌, 완벽한 흐름의 제어만으로 이루어진 결과였다.

그때, 무너진 담벼락 너머 구름처럼 몰려든 그림자들이 낙엽당 마당을 겹겹이 에워쌌다.

검은 야행의를 걸치고 얼굴을 가린 무인들. 그들의 가슴팍에는 정무맹의 은밀한 처단 부대인 ‘묵영각(默影閣)’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는 낯익은 태극 도포를 입은 인물이 서 있었다.

단혜태상장로의 심복이자, 무당파의 계율을 집행하는 계율당주였다.

계율당주가 차가운 안광을 번뜩이며 백자운을 바라보았다.

“백 소협, 단혜 장로님께서 내리신 기한은 여기까지다. 가문의 안위를 보장받고 싶다면, 지금 당장 그 손으로 배교자 설원의 목을 베어 바쳐라.”

그의 손에는 단혜의 수결이 찍힌 또 다른 밀지가 쥐어져 있었다. 그것은 천태성가의 비리를 덮어주는 대가로 설원의 목숨을 요구하는 피의 계약서였다.

백자운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그가 쥔 봉문 서약 보검의 검날이 빗물 속에서 기괴하게 울부짖었다.

설원은 그 모습을 보며 차갑게 식어버린 자신의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진동을 느꼈다. 기억은 사라졌으되, 눈앞의 사형이 짊어진 고통의 무게만은 혜검의 통찰로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사방을 포위한 정무맹과 무당파 변절자들의 살기가 낙엽당을 숨 막히게 짓눌렀다. 백자운은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려, 설원이 아닌 사방의 포위망을 향해 겨누려 했다.

그러나 계율당주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손짓하자, 묵영각의 무사들이 일제히 품속에서 검은 기운이 서린 쇠사슬을 꺼내 들었다. 무당의 진기를 억누르는 금강쇄(金剛鎖)였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말라, 백자운. 네 가문의 가솔들이 지금 어디에 구금되어 있는지 잊었단 말이냐?”

계율당주의 한마디에 백자운의 검끝이 허공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심하게 흔들렸다.

사방에서 좁혀오는 사슬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기괴하게 울려 퍼지는 일촉즉발의 순간. 설원은 갈대를 던져버리고 천천히 제 손을 바라보았다. 이제 진정으로 인과의 실타래를 끊어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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