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날의 서슬이 이초의의 가느다란 목덜미에 닿아 차가운 전율을 일으켰다. 살죽 아래로 웅웅거리며 요동치는 검붉은 독기는 이미 기경팔맥의 요혈을 장악한 채, 생명의 마지막 불씨를 삼키려 들고 있었다. 설원은 깊은 숨을 들이쉬며 눈을 감았다. 사방을 내리누르던 빗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지고, 이윽고 이 세계의 이면에 흐르는 무수한 인과(因果)의 실타래가 의식의 심연 위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천인감응의 혜검(慧劍). 삼라만상의 기류와 흐름을 꿰뚫어 보는 절대적인 통찰안이 개안하는 순간, 이초의의 목줄기를 옥죄고 있는 독기의 정체가 붉고 탁한 쇠사슬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천태성가의 비전 맹독이자, 이초의의 목숨을 앗아가기 위해 뻗어 나온 죽음의 인과선이었다.
‘베어야 한다.’
하지만 그 선을 자르는 대가는 가혹하리만큼 투명했다. 감정과 기억의 마모. 이초의라는 존재가 그녀의 삶에 남겨둔 온기와 발자취가 통째로 도려내질 것이었다. 설원의 검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검선의 유산은 축복이 아닌, 인간성을 불사르는 등가교환의 저주였다. 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걸었던 아이를 살리기 위해, 그 아이와 함께했던 시간의 온기를 영원히 지워내야 하는 모순.
‘설령 내가 너를 잊을지언정, 너는 살아야 한다.’
설원은 흔들리던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어 잠갔다. 도가(道家)의 검은 사적인 정에 얽매이지 않으나, 참된 협(俠)은 눈앞의 구원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것이 설원이 검을 쥔 이유이자, 스스로 선택한 고독의 길이었다.
츠으으으!
설원의 손가락 끝에서 푸르스름한 천화(天化)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검강(劍罡)이 아닌, 인과의 매듭을 풀고 끊어내는 혜검의 신묘한 예기(銳氣)였다. 그녀는 칼끝을 극도로 정밀하게 제어하며, 이초의의 경맥 속에 깃든 독기의 인과선을 한 올씩 베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칼로 살을 째는 의술이 아니었다. 독이 몸 안에서 역사(役事)하는 법칙 자체를 부정하고, 생과 사의 인과를 강제로 역류시키는 신화(神話)적 경지의 솜씨였다. 독기가 흐르는 길목을 지키고 서서, 그 기세가 꺾이는 찰나의 순간마다 혜검의 예기로 매듭을 끊어 친다.
낙엽당 안을 채운 공기가 숨 막힐 듯 팽팽해졌다. 설원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려 턱끝을 적셨다. 한 올, 두 올, 붉고 탁한 쇠사슬이 천화의 푸른 빛에 닿아 소리 없이 바스러질 때마다, 이초의의 거칠던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기경팔맥을 장악했던 검붉은 독기가 혜검의 치유 아래 정화되어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설원의 뇌리 내벽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바스락거리며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영혼의 밑바닥에서 울려 퍼졌다.
-사형, 이것 봐요! 내가 가루약을 달여 왔어요. 엄청 쓰지만 몸에는 좋다니까요? 얼른 마셔요!
머릿속에서 어린 날의 이초의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던 기억의 파편이 떠올랐다. 햇살처럼 따스했던 그 아이의 웃음소리, 약탕기에서 피어오르던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향취, 그리고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설원의 마음을 녹여주던 눈부신 온기.
그 모든 기억이 마치 거센 파도에 쓸려 내려가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기억의 실타래가 혜검의 칼날에 베여 나가며, 다정했던 감각들은 순식간에 무채색의 재로 변해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초의의 얼굴은 흐릿해지고, 그녀와 함께 울고 웃었던 마음의 깊은 굴곡은 평평하게 깎여 나갔다. 가슴 한구석이 통째로 파여 나가는 듯한 극심한 영혼의 소실감에 설원은 신음조차 흘리지 못했다. 다만 눈을 떴을 때,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전해 없던 서늘하고 건조한 기운만이 감돌 뿐이었다.
“으, 으음…….”
이초의의 입에서 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얼굴을 뒤덮었던 검붉은 독기가 거짓말처럼 물러가고, 본래의 생기 있는 혈색이 돌아와 있었다. 이초의가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저를 내려다보는 설원의 차가운 안색이 보였다.
“사, 사형……? 저 살아난 건가요?”
이초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벌떡 일어나 설원의 품으로 무작정 안겨들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에요! 사형이 절 구해줄 줄 알았어요!”
따뜻한 체온이 품 안 가득 안겨 왔다. 그러나 설원은 그 온기를 느끼는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품에 안긴 이 아이가 분명 소중한 존재라는 인지적 사실은 머리에 남아 있었으나, 가슴은 아무런 파동도 일으키지 않았다. 마치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품에 안은 것처럼, 아무런 감정도, 애틋함도 솟아나지 않았다.
질겁한 설원은 다급히 이초의를 밀쳐냈다.
“사형……?”
이초의가 충격받은 눈빛으로 설원을 바라보았다. 설원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설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슴속에 일어난 이 거대한 공허와 이질감을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낙엽당의 어두운 구석으로 자리를 피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품속에서 묵로(默路)를 위한 단도를 꺼내려다, 이내 멈추었다. 지금 당장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아이의 이름조차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져 버릴 것 같았다.
설원은 벽면의 어두운 나무 기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거칠게 돋아난 손톱 끝에 내력을 실어 벽을 깊숙이 긁어내리기 한 시작했다.
뿌드득, 뼈가 우는 듯한 소리와 함께 손가락 끝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이 상실의 공포를 이겨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 초. 의.’
피로 얼룩진 세 글자가 기둥 위에 깊고 선명하게 새겨졌다. 손톱이 깨지고 피가 뚝뚝 흘러내렸지만, 설원은 멈추지 않았다.
‘너는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나는 그런 너를 구하기 위해 내 마음을 버렸다.’
그 슬픈 인과를, 마음이 아닌 차가운 나무 기둥에 몸서리치도록 깊게 각인시켰다. 흘러간 마음의 온기는 두 번 다시 복원할 수 없겠지만, 이 붉은 흔적만큼은 그녀가 가야 할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되어 줄 터였다.
* * *
같은 시각, 무당파의 장엄한 원로전(元老殿).
사방을 채운 촛불이 일렁이며 차가운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원로전의 상좌에 앉은 단혜태상장로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아래를 굽어보았다. 그의 앞에는 무당파의 차기 장문인 후보이자 천태성가의 후계자인 백자운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자운아. 방금 낙엽당 쪽에서 불길한 마도(魔道)의 기운이 감지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단혜의 목소리는 인자함으로 포장되어 있었으나, 그 너머에는 뱀 같은 음흉함이 숨어 있었다.
“설원 그 아이가 끝내 금단의 힘에 손을 대어 문도들을 해치려 야습을 감행한 모양이구나. 정무맹의 청운익 안찰사도 그 아이의 변절을 의심하고 있으니, 이번 기회에 확실히 단죄하여 무당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
백자운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의 주먹이 도포 자락 속에서 강하게 쥐어졌다.
“태상장로님. 설 사매는 비록 성정이 거칠고 이단아라 불리나, 결코 마도에 빠질 아이가 아닙니다. 낙엽당의 야습은 필시 다른 배후가 있을 터…….”
“배후라니? 무당의 안위를 책임지는 원로원이 내린 결론이다.”
단혜가 백자운의 말을 가차 없이 자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천태성가의 명맥을 잇고 무당의 장문인이 되려는 자가, 사사로운 배교자 하나 때문에 대의를 그르치려 드는구나. 자운아, 네 가문이 처한 처지를 잊었느냐? 정무맹의 협조 없이는 천태성가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명백한 협박이었다. 백자운의 가슴 밑바닥에서 극도의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정파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무당의 최고 원로가, 자신들의 사익과 입지를 위해 무고한 제자를 마도로 몰아 날조하고 있었다. 백자운은 눈을 감았다. 가문을 구하기 위해 단혜의 뜻에 따르는 척해야 하는 이 가혹한 현실과, 자신의 고결한 무협의 도 사이에서 영혼이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명심하겠습니다.”
백자운은 간신히 대답을 뱉어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의 눈빛 속에는 단혜의 위선에 대한 깊은 멸시와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 * *
다시 낙엽당.
폭우가 내리치는 낙엽당의 뜰 위로, 은밀한 살기를 품은 그림자들이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무당파의 규율을 집행하는 호법원(護法院)의 무사들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시퍼런 철검이 쥐어져 있었고, 살기등등한 눈빛은 낙엽당의 안쪽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반도(叛徒) 설원은 들어라! 마도의 기운을 방출하여 무당의 법도를 어지럽힌 죄로 태상장로님의 체포령이 떨어졌다! 얌전히 검을 내려놓고 포박을 받거라!”
호법무사의 칼날 같은 외침이 빗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낙엽당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 안에서 걸어 나오는 설원의 모습에 무사들은 움찔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설원의 손끝에는 여전히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안색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침착했고, 눈동자는 차가운 얼음 호수처럼 고요했다. 감정이 메말라 버린 완전무결의 상태. 두려움도, 분노도, 슬픔도 존재하지 않는 극단의 무심(無心) 경지가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마도의 기운이라.”
설원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단혜 늙은이가 드디어 이빨을 드러내는군.”
“무례하다! 감히 태상장로님의 함자를 함부로 부르다니! 저 배교자를 쳐라!”
호법무사 대장이 검을 비껴 세우며 소리쳤다. 순식간에 네 명의 호법무사가 사방에서 맹렬한 기세로 검을 뻗어왔다. 검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기가 빗줄기를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그러나 설원의 천인감응 혜검은 이미 그들의 초식이 지닌 모든 인과의 궤적을 완벽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좌측의 검은 빠르나 하반의 안정이 부족하고, 우측의 검은 묵직하나 전환이 더디다.’
설원은 검을 뽑지 않았다. 그저 들고 있던 고검의 검집째로 천천히 신형을 움직였다.
스어어억.
그녀의 움직임은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유연하고 자연스러웠다. 도가의 참된 도리가 자연의 섭리를 따르듯, 설원의 신법은 쏟아지는 빗방울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콰아아앙!
호법무사들의 검이 허공을 가르며 땅바닥을 폭파시켰다. 먼지와 빗물이 사방으로 튀는 찰나, 설원의 신형이 무사들의 초식 틈새를 유령처럼 파고들었다.
탁! 탁! 탁!
가벼운 타격음과 함께, 설원의 검집 끝이 무사들의 기경요혈을 정확하게 짚고 지나갔다. 인과의 흐름을 거스르는 정밀한 일격이었다. 무사들은 자신들이 펼친 검기의 반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헉 소리를 내며 뒤로 자빠졌다.
“무, 무슨 이런 무공이……!”
호법무사 대장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검을 고쳐 잡았다. 그는 무당파 내에서도 일류로 꼽히는 고수였으나, 단 한 초식도 설원의 옷자락에 닿지 못했다. 그녀의 검무는 화려하지 않았으나, 삼라만상의 이치를 꿰뚫는 도가의 진정한 태극(太極)의 묘리가 담겨 있었다.
설원은 바닥에 쓰러진 무사들을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품속을 뒤적였다. 그리고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체포라니, 명분이 아주 그럴듯하구나. 하지만 너희가 섬기는 태상장로의 명분이 얼마나 추악한 위선 위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알고는 있느냐?”
설원의 손끝에서 누렇게 빛이 바랜 서한 몇 장과 장부가 드러났다.
그것은 과거 태극검총에서 탈출할 당시, 원로들의 밀실에서 빼돌렸던 극비의 문서들이었다. 단혜태상장로가 천태성가와 은밀히 묵약하며 반대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독점하려던 벽천단(碧天丹)의 유통 영수증과, 가문들을 멸문지화로 몰아넣은 부정이 상세히 적힌 친필 서한이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아라.”
설원이 서한을 펼쳐 보였다. 빗물에 젖어 들어가는 종이 위로 단혜의 수결과 천태성가의 인장이 선명하게 보였다.
“단혜는 무당의 대권을 쥐기 위해 정무맹과 밀거래를 텄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동도들을 마도로 몰아 숙청했다. 너희가 지금 들이대는 그 잘난 율법의 칼날이, 실상은 이 추악한 장부의 치부를 덮기 위한 개수작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 그것은……!”
호법무사 대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장부에 적힌 액수와 이름들은 무당파의 존립 자체를 흔들 수 있는 가공할 만한 도화선이었다. 설원이 이 서한을 들고 있는 한, 그녀를 마도로 몰아 처단하려던 명분은 완전히 뒤집어질 터였다.
그녀의 눈빛은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차갑고도 예리하게 빛났다. 적들의 숨통을 쥐고 흔드는 완벽한 역공이었다. 호법무사들은 더 이상 검을 뻗지 못하고 부르르 떨며 대치할 뿐이었다.
그때, 낙엽당의 부서진 담벼락 너머로 묵직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빗줄기를 뚫고 걸어 나오는 백색 도포의 무인.
등 뒤에 고검을 비껴 찬 채, 참담한 슬픔과 거대한 책임을 어깨에 짊어진 사형, 백자운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복잡한 고뇌와 흔들림 없는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설원은 차가운 시선으로 백자운을 바라보았다.
기억 속에서 그의 이름과 사형이라는 지위는 흐릿한 자국으로만 남아 있을 뿐, 그를 향한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눈앞을 가로막는 무거운 인과의 벽으로만 인식될 뿐이었다.
백자운이 검자루를 쥐며 낮게 읊조렸다.
“설 사매…… 결국 이 길을 가야만 하는가.”
가문을 지켜야 하는 무거운 숙명과, 진정한 협(俠)을 구하고자 하는 뜨거운 의지 사이에서 갈등하는 고결한 숙적. 백자운은 설원의 차가운 눈빛 속에서 그녀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직감하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참담함을 느꼈다.
두 천재의 시선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부딪쳤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무당의 진정한 도를 가리기 위한 숙명적인 대립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