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혜태상장로가 붉은 주사(朱砂)로 낙인을 찍은 서찰은 어둠을 타고 천태성가의 성영대(星影隊)에게 전달되었다. 자신의 추악한 부정이 담긴 흔적이 폭로될까 두려워 이성을 잃은 늙은 도사의 탐욕이 빚어낸 참살령이었다.
“무당의 수치를 베어내고, 천태성가의 안녕을 보전하라.”
그 피비린내 나는 명령의 결과가 지금, 설원의 머리 위를 짓누르고 있었다.
낙엽당 지붕을 뚫고 쏟아지는 기와 조각과 흙먼지 사이로, 네 줄기의 은빛 광망이 설원의 정수리를 겨냥해 수직으로 낙하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청색 검기가 아닌, 검붉은 핏빛의 인과선들이 방바닥을 기어 다니며 설원의 발끝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왔다.
같은 시각, 낙엽당 외곽을 에워싼 숲속에는 은밀한 대치 정국이 형성되어 있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장대비가 나뭇잎을 사정없이 때리며 둔탁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밤바람에 젖은 도포 자락이 무겁게 가라앉았으나, 백자운은 검자루를 쥔 손을 늦추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당의 정풍(整風)을 고뇌하며 설원의 거처 부근을 지키던 그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다름 아닌 가문의 그림자들이었다.
“물러서십시오, 소가주.”
빗줄기 사이로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장막을 두른 듯한 대여섯 명의 형체가 나무 사이에서 스러지듯 나타났다. 천태성가가 대대로 육성해 온 극단(極團) 자객들이었다. 그들의 발걸음은 진흙바닥을 딛고 있으면서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고, 기의 흐름은 완벽하게 갈무리되어 있었다.
백자운의 미간이 좁아졌다.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양심이 그의 이성을 난도질했다. 무너져가는 천태성가를 살리기 위해 단혜태상장로와 손을 잡아야만 하는 가문의 비참한 운명, 그리고 그 대가로 희생되어야 하는 설원이라는 천재 도사.
“성영대가 어찌하여 이곳에 있는가.”
백자운의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차갑게 울렸다.
“태상장로의 명이자, 가주의 엄령입니다. 오늘 밤 낙엽당의 불빛은 꺼져야 합니다. 소가주께서는 가문의 미래를 위해 눈을 감으셔야 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흑의인들이 신형을 펼쳤다. 그들이 움직이는 궤적은 단순한 보법이 아니었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기운이 서로 얽히며 거대한 그물을 형성했다. 천태성가의 비전 진법인 천성환영진(天星幻影陣)이었다.
쿠우웅.
주변의 공간이 왜곡되는 듯한 착각과 함께, 빗방울조차 그들의 기세에 밀려 허공에서 멈추는 듯했다. 백자운이 검을 뽑아 들었으나, 진법의 중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박감은 그의 발목을 진흙속에 묶어두기에 충분했다. 가문의 비급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자들이 펼치는 진법은, 백자운이 지닌 무당의 검로를 사전에 차단하며 그의 접근을 불허했다.
“비켜라!”
백자운의 일성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빗소리에 묻혔다. 그의 검에서 뿜어진 순양의 검기가 허공을 갈랐으나, 환영처럼 흩어지는 자객들의 신형을 꿰뚫지 못했다. 가문을 등질 수도, 그렇다고 설원의 죽음을 방관할 수도 없는 극심한 딜레마가 그의 검끝을 무겁게 무디게 만들고 있었다.
그 시각, 낙엽당 내부의 공기는 파멸의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천장을 뚫고 하강한 세 명의 살수가 설원의 전방과 좌우를 동시에 짓쳐 들어왔다. 그들의 검끝은 바람 소리조차 내지 않는 음독(陰毒)한 궤적을 그리며 좁혀왔다.
설원은 신형을 뒤로 젖히며 고검을 뽑아 들었다. 투명하게 각성한 그녀의 눈동자에 적들의 인과선이 붉은 실타래처럼 얽혀 들어왔다.
스스슥!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금속성이 세 번 연달아 일어났다. 설원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그들의 참격을 흘려보냈다. 그러나 살수들의 공세는 끊임없는 파도와 같았다. 한 명이 물러서면 다른 두 명이 틈새를 메우며 치명적인 급소를 노려왔다.
그때였다.
“설원 언니!”
닫혀 있던 방 문이 거칠게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설원이 늦은 밤까지 잠들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여, 따뜻하게 데운 죽 그릇을 받쳐 든 이초의가 들어서고 있었다.
상황은 찰나의 순간에 파국으로 치달았다.
설원을 겨냥했던 살수 중 한 명이, 갑작스러운 침입자의 등장에 본능적으로 소매 안에서 암기를 사출했다. 흑색 독기가 서린 세 줄기의 독침이 허공을 갈랐다.
“안 돼!”
설원의 외침이 터져 나왔으나, 그녀의 신형은 이미 다른 두 살수의 검풍에 가로막혀 있었다.
치익!
“아윽...!”
둔탁한 마찰음과 서글픈 신음이 방 안을 채웠다. 이초의가 들고 있던 사발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하얀 죽 위로 붉은 선혈이 튀었다. 이초의의 가녀린 어깨에 깊숙이 박힌 독침에서부터 검붉은 독기가 살을 타고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이초의의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검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
“초의야!”
설원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균열이 일어났다. 타인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홀로 고립벽을 쌓아 올렸던 그녀였으나,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어주던 유일한 온기였다. 그 온기가 지금 눈앞에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설원의 안광이 급격히 흔들렸다.
살수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금 검을 곧추세웠다. 그들의 눈빛에는 자비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임무의 완수만을 바라는 기계적인 살의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설원은 쓰러진 이초의를 등 뒤로 감싸 안으며 고검을 가로누웠다. 그녀의 뇌리 속에서 차가운 깨달음이 번뜩였다.
‘세상의 모든 인연은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있거늘, 어찌하여 나를 스치는 인연들은 이토록 피비린내 나는 흔적만을 남기는가.’
그것은 도를 닦는 도사로서 가지는 회의이자, 가문의 멸문을 목도했던 한 인간의 처절한 독백이었다. 힘을 얻기 위해 감정을 버려야 하는 가혹한 규칙 속에서, 그녀는 다시 한번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빗줄기가 부서진 지붕 사이로 낙엽당 바닥을 적셨다. 설원의 눈동자가 마침내 투명한 백색으로 완전히 전환되었다. 천인감응의 혜검이 스스로 한계를 깨뜨리며 폭발적으로 깨어난 것이다.
사방을 메우던 살수들의 정교한 흑색 매복 진이 그녀의 시야 속에서 수많은 틈새로 쪼개졌다.
그들이 자부하던 완벽한 합격진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인위적인 조작에 불과했다. 바람이 불면 풀이 눕고, 비가 내리면 대지가 젖는 법. 그 흐름을 거스르려는 자들의 인과는 필연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다.
설원의 신형이 움직였다.
그것은 검의 초식이라기보다, 흐르는 물과 같았고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 같았다. 무당의 태극혜검결이 투명한 안광 속에서 완벽하게 구현되었다.
파아앗!
빗줄기를 가르며 번뜩인 백색 광망이 방 안을 휩쓸었다. 살수들의 검끝이 설원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하고 허공을 맴돌았다. 설원은 단 한 번의 불필요한 몸짓도 없이, 적들의 검로 사이를 유령처럼 통과했다.
퍼억! 퍽!
그녀의 손가락 끝이 살수들의 가슴과 어깨의 급소를 정확히 관통했다. 혜검으로 꿰뚫어 본 기의 혈로를 역류시키는 점혈법이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세 명의 일류 살수들이 무릎을 꿇으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전신의 내력이 뒤틀리고 뼈등줄기가 어긋난 그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폐인이 되어 신음했다. 천태성가가 자랑하던 성영대의 정예들이 단 세 숨 만에 궤멸당한 것이다.
설원은 차가운 눈빛으로 쓰러진 살수들의 우두머리에게 다가갔다. 그의 가슴팍을 거칠게 수색하던 설원의 손끝에 거친 종이 질감이 걸려왔다.
품 안에서 꺼내 올린 서한과 영수증을 확인하는 순간, 설원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것은 단혜태상장로가 천태성가와 긴밀히 묵약하며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독점하려던 벽천단의 유통 영수증과, 무당파 내부의 개혁 세력을 숙청하라는 상세한 계획이 적힌 친필 서한이었다. 단혜의 목줄을 완벽하게 죌 수 있는, 위선의 가면을 벗겨낼 확실한 물증이 마침내 그녀의 손에 들어왔다.
그러나 승리의 희열을 느낄 시간은 없었다.
“커흑... 언니...”
이초의의 호흡이 급격히 가빠지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은 이미 검푸르게 변했고, 목덜미를 타고 올라오는 독기가 심장 바로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설원은 급히 이초의를 품에 안아 올렸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그녀의 맥박은 마치 끊어지기 직전의 거문고 줄처럼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초의야, 정신 차려라. 눈을 떠라.”
설원은 필사적으로 아는 독초의 지식을 머릿속에서 짜내었다. 그러나 이 독은 평범한 비상이나 단환으로 해독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천태성가의 비전 독인 ‘칠야성독(七夜星毒)’이었다. 일곱 번의 밤이 지나기 전에 영혼까지 녹여버린다는 천하의 기독.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반 각도 되지 않아 독기가 심장을 침범하면, 천하의 화타가 살아 돌아온다 해도 살려낼 방도가 없었다.
설원의 떨리는 손이 품속을 헤집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주머니에서 나무 상자 하나가 딸려 나왔다. 상자를 열자 은은하고도 가슴을 저미는 향취가 흘러나왔다. 낮에 이초의가 그녀의 기묘한 망각 증세를 걱정하며 남몰래 쥐여주었던 가문의 비전 단환, '환정향(喚情香)'이었다.
기억의 마모를 일시적으로 억제하고 잃어가는 인간성을 붙잡아준다는 전설의 영약.
이초의는 설원이 자신을 잊어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녀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의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던 가장 귀한 보물을 아낌없이 내주었던 것이다.
설원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감정이 메말라가는 중에도 이초의의 헌신만큼은 가슴 깊은 곳에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 남아 있었다.
‘나를 위해 이토록 자신을 내던진 너를, 어찌 내가 외면할 수 있겠느냐.’
설원은 환정향 상자를 소중하게 쥐여 쥔 채, 스스로를 심연의 각성 상태로 밀어 넣었다.
웅웅거리는 이명이 귓가를 때리며 주변의 빗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세상이 멈추고, 오직 이초의의 몸을 잠식해 들어가는 검붉은 독기의 인과선만이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독 또한 기(氣)의 일종이며, 기는 흘러가는 법칙을 따른다. 그렇다면 그 법칙의 매듭을 잘라내어 흐름을 멈추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의술의 영역을 넘어선, 인과 자체의 지배를 노리는 신의 영역이었다. 혜검을 한계 너머로 우려내어 독기의 흐름 자체를 차단하는 선택.
하지만 그 대가는 가혹할 터였다.
이초의를 살리기 위해 그녀의 생명을 옥죄는 독의 인과를 베어내는 순간, 설원은 이초의에 대한 가장 소중한 감정과 그녀와 함께했던 모든 기억의 조각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자신을 향해 웃어주던 얼굴도, 밤새 나누었던 다정한 이야기도, 그녀의 이름마저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져 한 줌의 재로 변할 터였다.
이초의를 살리는 대가로, 이초의를 완전히 잃어버려야 하는 잔혹한 등가교환.
설원은 고검의 끝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검푸른 독기가 요동치는 이초의의 하얀 목줄기, 그 위로 흐르는 가느다란 생명의 실타래를 향해 검끝을 겨누었다.
검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검이 너를 구하고 나면... 나는 과연 누구를 위해 검을 쥐고 서 있을 것인가.’
설원은 눈을 감았다. 사방을 채운 무거운 침묵 속에서, 그녀의 칼날이 이초의의 목덜미를 향해 아주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