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청운익의 검끝에서 뿜어져 나온 파르스름한 검기가 장문전 마당의 차가운 돌바닥을 긁으며 스산한 파공음을 흘렸다. 정무맹 안찰사의 권위를 상징하는 장검이 반원을 그리며 설원의 목을 겨누자, 사방을 에워싼 무사들의 살기가 벼랑 끝의 삭풍처럼 매섭게 몰아쳤다.

“감히 정무맹의 법도를 능멸하고 호법을 상해하다니, 이는 명백한 반역이다! 검을 버리고 무릎을 꿇어라!”

청운익의 고함은 장문전의 기와장을 흔들 만큼 웅장했으나, 설원의 눈에는 그저 껍데기만 요란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그녀는 허리춤에 느슨하게 걸린 고검 자루를 가볍게 쥔 채, 숨각을 가라앉혔다.

스스스스.

설원의 깊은 안구 속에서 보이지 않는 빛무리들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천인감응의 혜검(慧劍). 세상만사를 얽어매는 인과(因果)의 실타래가 그녀의 시야 속에서 푸른빛의 궤적으로 전개되었다.

청운익을 감싸고 도는 기의 흐름이 한눈에 들어왔. 겉으로는 기운차게 요동치는 장강의 물결처럼 기세등등했으나, 실상은 달랐다. 그의 단전 한복판, 정확히 관원혈(關元穴) 주위에서 푸른 실타래가 기괴하게 뒤틀려 뭉쳐 있었다.

‘무리한 연공으로 기맥의 뿌리가 상했군.’

그것은 마치 거대한 제방 한구석에 깊숙이 파고든 개미굴과 같았다. 화려한 외양에 가려진 치명적인 결함. 청운익이 검기를 뿜어내며 기세를 올릴수록, 단전의 균열은 더욱 벌어지고 있었다. 그가 만약 무리하게 내력을 끌어올려 검을 휘두른다면, 적을 베기 전에 스스로의 단전이 폭발하여 폐인이 될 터였다.

설원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세상의 인과란 이토록 가소롭다. 위선으로 포장된 강자들의 무공과 권력은 결국 썩어 문드러진 실낱 하나에 의지해 서 있을 뿐이었다. 도(道)는 스스로 그러한 자연을 닮아 물처럼 흘러야 하거늘, 억지로 얽어맨 법과 힘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를 짓누르는 족쇄가 된다.

설원이 비웃음을 흘리자 청운익의 삼백안이 한층 더 흉포하게 뒤틀렸다.

“무엇이 그리 우스우냐, 요녀!”

“청 안찰사, 겉포장만 번지르르한 검기를 거두시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입니다. 관원혈 밑바닥에서 요동치는 역류를 감당할 재간이 장문전 마당에는 없어 보이니 말입니다.”

청운익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자신의 단전에 깃든 고질적인 내상은 정무맹 내부에서도 극소수만이 아는 극비 중의 극비였다. 일개 무당의 이단아에 불과한 여도사가 그것을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는 사실에, 그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사정없이 흘러내렸다.

“네, 네 이놈이 감히 구설로 맹주 부의 권위를 모독하려 드는구나!”

정무맹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바짝 세우며 포위망을 좁혀왔다. 일촉즉발의 순간, 설원은 칼자루에서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 그리고 가사 소매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항복하려는 것이냐?”

청운익이 기세를 잡았다는 듯 소리쳤으나, 정작 설원이 꺼내 든 것은 무기가 아니었다. 누렇게 바랜 종이 한 장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팔랑거렸다.

“정무맹의 법도가 그리도 추상 같다면, 이 종이 쪼가리에 적힌 법도 역시 엄정하게 집행하셔야 마땅하겠지요.”

설원이 손목을 툭 튕겼다. 누런 종이가 허공을 완만하게 비행하며 청운익의 발치로 떨어졌다.

청운익은 본능적으로 검끝으로 종이를 받아채려다, 서면의 가장자리에 찍힌 붉은 낙인을 보고 멈칫했다. 그것은 무당파 태상장로 단혜의 사인(私印)과 천태성가의 문양이었다.

“이것은…….”

청운익이 종이를 낚아채어 서둘러 훑어내렸다. 종이를 읽어 내려가는 그의 눈꺼풀이 미친 듯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그 서한에는 단혜태상장로와 천태성가가 정무맹의 묵인 아래 은밀히 유통하려던 신비의 영약, ‘벽천단(碧天丹)’의 세부적인 거래 내역과 액수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혀 있었다. 벽천단은 정무맹이 독점 관리하며 무림의 세력 판도를 조율하는 금단의 영약이었다. 그것이 무당의 원로들과 밀거래되어 반대 세력을 숙청하는 군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물증이, 지금 청운익의 손에 쥐여 있었다.

단순한 밀거래 영수증이 아니었다. 서한의 하단에는 정무맹 고위층의 서명과 함께, 청운익 자신의 가문이 이 부정 거래의 배후에서 막대한 이익을 취했음을 증명하는 은밀한 수칙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너, 너 같은 년이 어떻게 이 문서를……!”

청운익의 안색이 사색을 넘어 흙빛으로 변했다. 이 서한이 강호 만천하에 드러나는 날에는, 단혜장로는 물론이고 정무맹 내에서 청운익 가문의 명줄은 완전히 끊어질 것이 자명했다. 군림과 공권력을 부르짖던 그의 입술이 사시나무 떨듯 파르르 떨렸다.

설원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독설을 뱉었다.

“정무맹의 안찰사께서 무당의 도사를 마도로 몰아 처단하시려는데, 정작 본인의 품속에는 마도보다 더한 추잡한 야합의 산물이 들어차 있군요. 법도를 집행하시려거든, 우선 본인의 목부터 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장문전 마당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주변의 무당 도사들은 영문을 몰라 웅성거렸으나, 청운익은 이미 검을 쥘 힘조차 잃어버린 듯 손귀를 덜덜 떨었다.

그때, 장문전 뒤편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청색 도포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사형, 백자운이 천천히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등 뒤에는 천태성가의 가주 대행으로서 품은 묵직한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백자운은 설원의 손에 들렸던 서한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의 가문인 천태성가가 연루된 치명적인 약점. 그것이 폭로된다면 가문의 부흥은커녕 멸문의 화를 면치 못할 터였다.

백자운은 청운익과 설원의 사이에 굳건히 버티고 섰다.

“청 안찰사.”

백자운의 음성은 무겁고 깊었다.

“무당의 장문전 마당은 정무맹의 사사로운 사법권이 통용되는 곳이 아니오. 설 도우의 언행에 무례함이 있었다면, 그것은 우리 무당 내부의 계율로 다스릴 일. 정무맹이 무력을 앞세워 본 파의 도사를 핍박하려 든다면, 나 역시 천태성가와 무당의 검을 걸고 묵과하지 않겠소.”

백자운의 중재는 청운익에게 썩은 동줄기나마 잡게 해주는 유일한 퇴로였다. 청운익은 침을 꿀꺽 삼키며, 찢어발기고 싶은 서한을 품속으로 거두어들였다.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군.”

청운익이 이빨을 악물며 검을 검집에 쑤셔 넣었다.

“정무맹은 무당의 자정 능력을 믿고 이만 물러가겠다. 단, 오늘 있었던 일은 맹주 부에 상세히 보고될 것이다.”

청운익은 바닥에 기절해 있는 철비웅을 수하들에게 짊어지게 한 뒤, 도망치듯 장문전을 빠져나갔다. 그의 뒷모습은 기세등등하게 들어설 때와는 달리 사냥개에게 쫓기는 도둑고양이처럼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정적이 찾아왔다.

“설원아!”

이초의가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와 설원의 소매를 붙잡았다.

“너 정말 미쳤어? 정무맹 안찰사한테 그런 문서를 들이밀다니! 조금만 어긋났어도 장문전 마당이 피바다가 됐을 거야!”

이초의의 따뜻한 손길이 설원의 소매 끝자락에 닿았다. 그러나 설원은 그 온기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슬그머니 몸을 뒤로 물렸다.

백자운 역시 복잡한 눈빛으로 설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설 도우, 네가 쥔 칼날이 너무 날카롭구나. 가문의 원한과 세상의 위선을 베어내려는 마음은 이해하나, 그 칼날이 결국 너 자신을 베게 될까 두렵다.”

설원은 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며 가볍게 냉소를 지었다.

3년 전, 자신의 가문이 멸문지화의 참변을 당했을 때, 정파 무림의 원로들은 방관하며 침묵했었다. 타인에 대한 믿음은 사치였고, 오직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만이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방패였다.

“사형의 고결한 중재에는 감사드립니다만, 제 걱정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설원은 차갑게 쏘아붙인 뒤, 몸을 돌려 전각의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걸어갔다.

이초의가 뒤에서 이름을 불렀으나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장문전의 기와지붕 너머로 붉은 노을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어둠이 짙어지는 전각의 뒤편에 다다랐을 때야, 설원은 홀로 멈춰 섰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치는 서글픈 한기가 전신을 엄습했다. 혜검을 발동하여 인과를 벨 때마다 소중한 사람들과의 감정이 마모되어 간다는 가혹한 규칙. 오늘 청운익의 기맥을 읽고 서한의 인과를 비틀어버린 대가로, 그녀는 이초의의 따뜻했던 눈빛의 온기를 아주 조금 잊어버렸다.

설원은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을 소매깃으로 훔쳐냈다. 기억이 닳아 없어지기 전에 모든 위선을 베어내야 한다는 강박이 그녀의 심장을 옥죄었다.

한편, 장문전 깊숙한 곳에 자리한 태상장로의 밀실.

어스름한 촉불 아래, 단혜태상장로의 인자했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청운익이 설원의 서한 한 장에 굴복해 도망쳤다는 전령의 보고를 들은 그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탁!

단혜가 찻잔을 바닥에 내던졌다. 도자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일개 여도사 년이 내 밀서를 쥐고 놀아나다니……!”

자신의 야욕과 부정이 천하에 폭로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성을 잃은 단혜의 눈에 차가운 살기가 맺혔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종이에 피처럼 붉은 인장을 찍어내렸다.

그것은 천태성가의 어둠 속에 숨겨진 비밀 살수 집단, ‘성영대(星影隊)’를 소집하는 밀지였다.

“설원…… 그 요녀의 목을 취해라.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어라.”

붉은 인장이 찍힌 서찰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무당산의 밤공기가 한층 더 서늘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밀지가 밤의 어둠을 타고 무당산의 음지를 흐르는 동안, 설원은 자신의 허름한 거처인 낙엽당(落葉堂)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책상 위에 작은 대나무 조각들과 청강석으로 만든 조각도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설원은 말없이 자리에 앉아 조각도를 쥐었다. 손끝이 밤바람보다 차갑게 떨렸다.

스각, 서걱.

칼끝이 대나무의 단단한 결을 찢으며 날카로운 파찰음을 냈다. 한 자, 한 자 새겨질 때마다 가슴 한구석의 살점이 도려내어지는 듯한 기묘한 통증이 뇌리를 스쳤다.

‘이초의(李楚衣).’

낮에 정무맹의 서한을 들이밀며 폭풍을 일으켰을 때, 제 옷소매를 붙잡고 울먹이던 아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분명 머리로는 기억하고 있었다. 대화의 세세한 문맥도, 그녀가 입었던 도포의 해진 소맷자락도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러나 정작 가슴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 아이를 떠올릴 때 느껴져야 마땅할 온기, 지켜주고 싶다는 본능적인 애틋함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내린 뒤였다. 머릿속의 기억은 박제가 된 그림처럼 박제되어 있을 뿐, 심장을 뛰게 하는 생명력을 잃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천인감응 혜검의 대가이자, 인과를 벤 자가 짊어져야 할 형벌이었다.

도(道)란 본래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라 했다. 천지 만물이 스스로의 자리를 찾아 흘러가듯, 마음 역시 비워내야만 비로소 자연의 순리에 닿을 수 있다고 무당의 장문인들은 가르쳤다. 하지만 이토록 소중한 인연의 온기마저 강제로 깎아내는 것이 과연 도의 본질이란 말인가.

세상의 위선을 베어 타인을 구하되, 정작 자신은 그 인연의 고리에서 영원히 외톨이로 남는 형벌. 그것은 협(俠)이 아니라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는 가혹한 순교에 불과했다. 설원은 대나무 판에 새겨진 이초의의 이름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차가운 대나무의 나이테만이 손끝을 타고 전해질 뿐,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깊은 심연처럼 어두워졌다.

사위가 깊은 수묵화처럼 어두워진 삼경(三更).

무당산의 밤을 채우던 산새와 풀벌레 소리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산들바람조차 숨을 죽인 듯, 낙엽당 정원의 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사방을 채운 무거운 침묵은 단순한 고요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포식자가 숨을 죽이고 먹이를 노릴 때 발생하는 기괴한 압박감이었다.

설원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숨을 고르던 눈을 아주 천천히 떴다.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기의 실타래들이 방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것은 낮에 보았던 청운익의 거친 검기와는 차원이 다른, 소리 없고 형체 없는 죽음의 실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푸른빛이 아닌, 검붉은 핏빛의 인과선들이 방바닥을 기어 다니며 설원의 발끝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왔다.

‘성영대(星影隊).’

천태성가가 대대로 키워낸 그림자 살수들. 그들의 무공은 겨울밤의 서리가 소리 없이 대지를 얼리듯 은밀하고, 먹구름이 달빛을 지우듯 잔혹했다.

스스슥.

문풍지가 소리도 없이 찢어지며, 서너 줄기의 실바람이 방 안으로 흘러들었다. 바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극도로 압축되어 형체를 감춘 비수(匕首)의 궤적이었다.

콰아앙!

찰나의 순간, 설원의 머리 위 천장이 굉음과 함께 주저앉았다. 기와와 흙먼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네 명의 흑의인이 은빛 광망을 뿌리며 허공에서 수직으로 낙하했다. 그들의 칼끝이 가리키는 곳은 단 한 군데, 설원의 정수리였다.

어둠 속에서 설원의 혜검이 다시금 차갑게 눈을 떴다. 사방에서 짓쳐 드는 죽음의 궤적이 찰나의 순간으로 쪼개져 시야에 박혔다. 그러나 이번 습격자들은 만만치 않았다. 네 명의 합격진(合擊陣)은 서로의 결점을 완벽하게 메우며, 베어낼 틈조차 주지 않는 인과의 그물을 짜고 있었다.

피할 곳이 없었다. 검을 뽑아 이 죽음의 그물을 베어내려면, 그녀는 또다시 소중한 기억의 파편을 대가로 지불해야만 했다.

설원의 손이 허리춤의 고검 자루를 움켜쥐는 순간, 차가운 쇠붙이의 감촉과 함께 심연과도 같은 선택의 기로가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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