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들바람마저 얼어붙은 듯한 적막 속에서, 백자운의 고요한 경고는 설원의 귀가에 무겁게 내리앉았다.
“부디 조심해라, 설원 사매.”
단혜태상장로가 산문 아래에 정무맹의 사냥개들인 묵영각의 감시자들을 배치했다는 말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당산 전체를 휘감기 시작한 위선의 쇠사슬이 드디어 자신을 옭아매러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탄이었다.
백자운은 젖은 안개 속으로 검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천천히 멀어졌다. 그의 어깨에 얹힌 가문의 무게가, 무당의 장래를 짊어진 차기 장문인 후보로서의 책임감이 그의 걸음걸이를 짓누르고 있었다. 설원은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조심하라, 라.’
설원은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나뭇가지를 쥐었던 손끝에 아직도 미세한 온기가 남아 있었으나, 그 온기는 어딘지 모르게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천인감응의 혜검을 각성한 대가. 인과를 베어낼 때마다 가슴속 가장 소중한 궤적이 마모되어 간다는 그 잔혹한 율법이 머릿속을 스쳤다.
백자운의 모습이 안개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설원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향한 곳은 무당의 비 전각 중 하나인 약초전(藥草殿)이었다.
“사매! 설원 사매!”
약초전의 초입, 붉은 기둥 뒤에서 기다리던 그림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주황빛 도포를 입은 이초의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과 안도가 뒤섞인 기색이 역력했다. 이초의는 설원의 어깨를 덥석 붙잡고는 위아래로 훑어내렸다.
“백 사형과의 비무는 어찌 되었느냐? 다친 곳은 없느냐? 내 장문전의 눈치를 보느라 숨이 턱 끝까지 막히는 줄 알았다!”
이초의의 목소리는 맑고 따뜻했다. 평소라면 그 소란스러움에 혀를 끌차며 핀잔을 주었을 설원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설원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시야가 혼탁해지고 있었다.
눈앞에 서 있는 이초의의 둥근 얼굴과 걱정 어린 눈망울이, 마치 물감에 젖은 한지처럼 번져 보였다. 머릿속의 서랍 하나가 통째로 비워진 듯한 기묘한 공허함이 가슴을 후벼 팠다. 이 아이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던가. 분명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동료이거늘, 가슴 밑바닥에서 솟구쳐야 할 정(情)의 온도가 한 치 낮아져 있었다.
잠식(蠶食)이었다. 혜검을 펼쳐 백자운의 인과를 엿보고 그의 검로를 꺾은 대가로, 영혼의 한 귀퉁이가 기어이 깎여 나간 것이다.
설원은 이초의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슬며시 손을 빼내어 소맷자락 속으로 감추었다. 그리고 오른손 검지손톱 끝으로 왼손바닥의 살을 깊게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통증이 신경을 타고 뇌리를 찌르자, 비로소 혼탁하던 시야가 맑아졌다. 고통을 매개로 기억을 붙잡아두는 묵로(默路)의 비정함이었다. 마음에 칼을 새기지 않으면, 언젠가는 이 따뜻한 아이의 이름조차 망각의 심연으로 가라앉히고 말 터였다.
“멀쩡하다. 백 사형의 검이 부드러워 다치지 않았으니 호들갑 떨지 말거라.”
설원은 일부러 평소보다 더 냉랭하고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타인에게 마음을 내어줄수록 잃어버릴 때의 고통만 커질 뿐이다. 스스로를 외딴섬으로 고립시키는 강박적인 고립벽이 그녀의 전신을 단단히 무장시켰다.
“정말이지? 거짓말이면 내 당장 장문인 처소로 달려가 태상장로께 일러바칠 테다!”
이초의가 입술을 삐죽이며 설원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 온기를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약초전 안마당으로 발을 디디려던 찰나, 산문 전체가 찌릉찌릉 울릴 정도로 거대한 쇠붙이 소리가 들려왔다.
철그럭, 철컥!
그것은 단순한 도사들의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무거운 갑주와 쇠사슬, 그리고 살기(殺氣)를 머금은 병장기가 바닥을 긁는 소리였다.
설원의 고개가 장문전(掌門殿) 방향으로 돌아갔다.
“무슨 일이지?”
이초의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설원의 뒤로 숨었다. 설원은 대답 대신 장문전으로 향하는 돌계단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녀의 신법은 바람을 타는 낙엽처럼 고요하고도 빨랐다.
장문전 앞 널찍한 백옥 광장은 이미 살풍경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황금빛 용의 문양이 수놓아진 검은 관복을 입은 무리들이 광장을 포위하듯 늘어서 있었다. 정무맹(正武盟)의 집행 세력이자, 천하 무림의 가증스러운 규율을 수호한다는 안찰사 청운익의 직속 무사들이었다. 그 중심에 한 사내가 오만하게 서 있었다.
청운익(天 Woon-ik).
법과 질서를 숭상한다는 핑계로 수많은 이단아들을 사냥해 명성을 쌓은 정무맹의 명숙. 그의 눈빛은 굶주린 매처럼 날카로웠고, 허리춤에 찬 묵직한 보검은 금방이라도 피를 부를 듯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단혜태상장로께서는 들으시오!”
청운익의 웅장한 목소리가 공력을 타고 장문전의 기와지붕을 흔들었다.
“본 맹의 묵영각 조사에 따르면, 최근 무당산 인근에 마교의 흑색 세작들이 출몰한 흔적이 발견되었소. 특히 금단의 구역이라 불리는 태극검총의 진법이 일시적으로 파괴되고 마의 기운이 분출되었다는 첩보가 접수되었으니, 이는 정파 무림 전체의 안위를 위협하는 중대사요!”
단혜태상장로는 장문전 계단 위에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내려다보고 있었으나, 그의 가느다란 눈매 속에는 음흉한 계산기가 두드려지고 있었다. 설원은 저 멀리 전각 그늘 아래에서 그 광경을 청관(聽觀)했다.
‘가증스럽구나.’
설원의 눈가가 서늘하게 식었다. 단혜와 정무맹이 뒤로 밀약하며, 자신들의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독점하려던 ‘벽천단’의 유통 영수증과 부정 서한의 존재를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태극검총을 탈출할 당시에 엿보았던 원로들의 추악한 밀담. 정무맹은 마교의 흔적을 핑계로 무당을 압박하고, 단혜는 이를 이용해 문파 내부의 불순분자들을 청소하려는 수작임이 분명했다.
청운익의 시선이 돌연 광장 구석을 향했다. 정무맹 무사들의 차가운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그 시선의 끝에, 설원이 서 있었다.
“거기 있었군.”
청운익이 입꼬리를 비틀며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발걸음이 옮겨질 때마다 돌바닥에 무거운 내력의 흔적이 새겨졌다.
“네가 바로 며칠 전, 그 험악한 태극검총에 떨어지고도 살아서 돌아왔다는 무당의 이단아, 설원이더냐?”
설원은 대답하지 않고 그를 묵묵히 응시했다.
청운익은 설원의 면전 삼 보 앞에 멈춰 서서, 마치 부정한 짐승을 보듯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기이한 경계심이 스쳤다. 천인감응의 혜검을 각성한 설원의 몸에서는, 평범한 도사들과는 격이 다른 정순하면서도 미세하게 뒤틀린 천화(天化)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극의에 달한 기연을 얻은 자만이 풍길 수 있는 기운이었다.
“정상적인 도법을 닦은 자의 기맥이 이토록 비정상적으로 요동칠 리 없다.”
청운익의 목소리가 낮고 차갑게 가라앉았다.
“검총의 마기에 오염되어 사특한 힘을 얻은 것이 분명하도다. 정무맹의 안찰사로서 명하노니, 즉시 무릎을 꿇고 맹의 ‘정화의 도법’을 거쳐 신형을 검증받아라. 만일 거부한다면, 마교의 세작으로 간주하여 즉결 처분할 것이다!”
무릎을 꿇으라.
천하의 정무맹이라 하나, 무당의 도사에게 이토록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는 것은 명백한 도발이자 핍박이었다. 주변에 모여든 무당의 젊은 도사들이 분노로 얼굴을 붉혔으나, 태상장로 단혜는 그저 묵묵부답으로 방관할 뿐이었다. 백자운 역시 주먹을 꽉 쥔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는, 철저한 고립무원의 상황이었다.
설원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결국 내 힘을 탐내거나, 아니면 꺾어버리겠다는 뜻이구나.’
세상의 위선이 온몸을 조여올 때, 도사로서의 자존은 꺾일지언정 굽혀지지 않는다. 설원은 강박적으로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갔다. 오직 자신의 검과, 자신의 성취만이 이 위선을 돌파할 유일한 열쇠였다.
그녀가 혜검의 기맥을 비틀어 전신의 기 흐름을 정렬하는 순간, 청운익의 뒤에 서 있던 거구의 정무맹 호법, 철비웅이 앞으로 나섰다.
“안찰사 어른의 명령이 들리지 않느냐! 미천한 여도사 년이 감히 무릎을 꿇지 않고 버티다니!”
철비웅이 포효하며 대형 철장을 치켜들었다. 그의 초식은 산을 무너뜨릴 듯한 기세로 설원의 어깨를 향해 내리눌렀다. 맹렬한 바람이 광장의 먼지를 쓸어 담으며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자연의 섭리에서 폭풍은 강해 보이나 무질서하며, 흐르는 물은 유연하나 바위를 뚫는다.
설원의 눈앞에 기이한 궤적이 펼쳐졌다. 철비웅의 철장이 그리는 궤적, 그의 발걸음이 디디는 지점의 무질서함, 그리고 힘의 불균형이 실타래처럼 훤히 들여다보였다. 천인감응의 혜검이 가리키는 파훼점이었다.
설원은 검을 뽑지 않았다. 그저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아주 가볍게 몸을 움직였을 뿐이다.
첫 걸음. 철장의 서슬 퍼런 궤적이 그녀의 콧등을 간발의 차로 스쳐 지나갔다. 두 걸음. 철비웅이 힘을 더해 횡으로 쓸어내리는 순간, 설원은 버들가지가 바람에 휘날리듯 그의 겨드랑이 밑 빈 공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세 걸음. 철비웅의 무게중심이 완전히 앞으로 쏠린 찰나, 설원은 그의 발목 뒤쪽으로 가볍게 발끝을 툭 밀어 넣었다.
단 세 걸음의 보법.
그것은 상대의 힘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태극의 묘리(妙理)이자, 인과의 흐름을 비튼 극의였다.
“어, 어억?!”
철비웅은 자신의 무지막지한 내력과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설원의 옷자락 끝자락조차 스치지 못한 채, 그의 거구는 허공에서 기괴하게 뒤틀렸다.
콰아아앙!
지진이 일어난 듯한 굉음과 함께, 철비웅의 머리가 장문전 앞 단단한 청석 바닥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백옥 돌판이 사방으로 산산조각 나며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철비웅은 비명 한 마디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돌바닥에 처박힌 그의 엉덩이만이 허공을 향해 우스꽝스럽게 치켜들려 있을 뿐이었다.
“……!”
광장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정무맹의 일류 고수가, 무당의 일개 여도사를 상대로 검 한 번 부딪쳐보지 못하고 스스로 머리를 깨부수며 자멸한 것이다. 무당의 도사들 사이에서 억누르지 못한 탄성이 터져 나왔고, 이초의는 입을 가린 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설원은 흙먼지 속에서 유유히 걸어 나오며, 소매에 묻은 먼지를 톡톡 털어냈다.
“무당의 돌바닥이 생각보다 단단한 모양입니다. 정무맹의 고수께서는 머리로 돌을 깨는 기예를 보여주려 하신 것입니까?”
그녀의 독설이 청운익의 심장을 찔렀다.
청운익의 얼굴이 붉다 못해 검푸르게 죽어갔다. 정무맹의 권위가 장문전 마당에서 이토록 처참하게 짓밟힌 적은 없었다. 게다가 설원이 보여준 초식은 무공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단순한 보법이었기에, 이를 트집 잡아 공격하기도 어려웠다. 스스로 자멸한 꼴이었으니까.
“네, 네 이년……!”
청운익의 눈에 핏발이 섰다. 가문의 명예와 자신의 권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그에게, 이 굴욕은 죽음보다 더한 수치였다.
스릉!
청운익의 허리춤에서 마침내 보검이 뽑혀 나왔다. 푸르스름한 검기가 검신을 타고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정무맹의 안찰을 방해하고, 호법을 습격하여 불구로 만들었으니 이는 명백한 반역이자 마도의 실체다! 전원, 저 요녀의 검을 압수하고 즉각 구금하라!”
청운익이 검자루를 쥐어짜며 관헌의 공권력을 발동했다. 그의 삼백안에 담긴 살기가 폭포수처럼 설원을 향해 쏟아졌다. 정무맹 무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며 설원을 포위망으로 조여왔다.
설원의 손이 자연스럽게 허리의 고검 자루로 향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장문전 마당에 일촉즉발의 파멸적 기운이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