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마비는 심장으로 치닫는 한빙(寒氷)의 쐐기 같았다.
이초의의 따스한 체온이 손바닥을 타고 흘러들수록, 설원의 머릿속은 오히려 차갑게 얼어붙었다. 찰나의 이명이 귓가를 찢고 지나간 자리에는 오직 적막만이 남았다. 무언가 소중한 것이 가슴 가장자리에서부터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내리는 감각. 그것은 형언할 수 없는 상실감이었으나, 정작 ‘무엇을 잃었는지’는 온전히 떠오르지 않았다.
“설원아? 왜 그래? 어디가 안 좋은 거야? 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
이초의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걱정이 가득 담긴 눈망울이 설원의 얼굴을 집요하게 쫓고 있었다. 설원은 겨우 숨을 고르며, 마비되어 가는 손가락을 억지로 움직여 이초의의 손을 가볍게 밀어냈다. 온기가 떨어져 나가자 비로소 뇌리의 이명이 잦아들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검총의 한기가 뼈마디에 조금 남아 있는 모양이구나.”
설원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옥타브 낮았고, 어딘가 건조했다. 이초의의 얼굴을 바라보는 눈빛동자에도 미세한 거리감이 서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 그녀를 향해 품었던 스스럼없는 애정과 깊은 유대감이, 마치 먼지 쌓인 서책의 한 페이지처럼 희미해져 있었다. 머리로는 ‘이 아이는 내게 소중한 도반이다’라고 인지하고 있었으나, 가슴은 달아오른 화로가 아닌 식어버린 잿더미처럼 고요할 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천인감응의 혜검을 각성한 대가였다.
세상의 인과를 꿰뚫어 보고 운명의 실타래를 베어내는 절대적인 힘. 그러나 그 칼날을 휘두를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고 사랑하는 이들과의 인연을 제 살을 도려내듯 잃어가야만 했다. 힘을 얻을수록 인간으로서의 마음을 잃고 차가운 석상으로 변해가는 등가교환의 극독.
“정말 괜찮은 거지? 얼굴이 꼭 귀신이라도 본 사람 같단 말이야. 얼른 방에 들어가서 쉬어. 내가 따뜻한 생강차라도 끓여다 줄 테니까.”
이초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면서도, 설원의 등을 처소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떠밀었다. 설원은 그 호의에 가볍게 목례를 보내고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평소의 경쾌함을 잃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처소의 거친 목문을 닫고 들어서자마자, 설원은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사방이 고요한 방안에서, 그녀는 자신의 품속을 뒤져 낡은 가죽 수첩과 끝이 날카로운 조각도를 꺼내 들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잊지 말아야 했다. 이 마음이 완전히 마모되어 돌덩이가 되기 전에, 자신이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 누구를 위해 검을 쥐었는지 기록해야만 했다.
설원은 방 한구석에 우뚝 서 있는 굵은 버팀기둥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날카로운 조각도 끝을 나무 표면에 가차 없이 박아 넣었다. 서걱,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이끼 낀 나무껍질이 벗겨지며 글자가 새겨졌다.
[이초의(李初衣): 목숨보다 소중한 자매. 무당산에 들어와 피눈물을 흘리던 나를 유일하게 안아준 온기.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도반.]
글자를 새겨 넣는 설원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칼끝이 기둥을 파고들 때마다 가슴을 저미는 통증이 밀려왔다. 머리로는 흐려진 기억의 공백을 메우려 애썼지만, 한 번 지워진 감정의 온도는 온전히 복원되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나무에 새겨진 차가운 문자를 읽으며, 자신이 그런 감정을 느꼈었음을 사후에 증명할 뿐이었다.
‘천하의 모든 인과를 베어낼 수 있는 혜검을 얻었으나, 정작 내 손끝은 제 마음에 온기를 채우지 못하는구나. 이 어찌 천도의 가혹한 조롱이 아니리오.’
설원은 조각도를 쥔 손을 꽉 쥐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무딘 고통만이 자신이 아직 살아 숨 쉬는 인간임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마음이 메말라 돌이 된 고대 검선의 좌화신처럼 되지는 않으리라. 그녀는 굳게 다짐하며, 붉게 물든 손가락으로 기둥에 새겨진 글자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이것이 그녀가 가야 할 길, 마음을 칼끝으로 새기며 걷는 묵로(默路)의 시작이었다.
***
이튿날 아침, 무당산의 안개는 평소보다 더욱 짙게 깔려 있었다.
설원은 평소와 다름없는 허름한 외문 도복을 걸치고 처소를 나섰다. 그녀의 당면 과제는 하나였다. 자신이 태극검총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 그리고 그곳에서 전설적인 검선의 기연을 얻었다는 사실을 철저히 은폐하는 것. 무당파의 실권자인 단혜태상장로와 그들의 수하들이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 터였다.
설원은 의도적으로 단전의 진기를 깊숙이 가라앉혔다. 혜검을 각성하며 급격히 격상된 내력을 인위적인 기공으로 억누르고, 오직 평범한 외문 제자의 수준으로만 기운이 겉돌게 만들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운 좋게 검총의 절벽에서 살아 돌아온, 약간의 내상만을 입은 일개 도사로 보일 터였다.
그녀는 어제 탈출했던 검총의 입구 근처를 배회하며 주위의 흔적을 살폈다. 혹여라도 자신이 남긴 흔적이 단혜의 수하들에게 빌미를 제공할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세찬 바람이 계곡을 타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원은 무너진 돌더미와 부서진 비석들이 흩어져 있는 낙엽 천지를 지나쳤다. 그러다 문득, 검총의 결계가 깨어지며 반파된 고대 비석의 틈새가 눈에 들어왔다. 그 쪼개진 돌 틈 사이에, 흙먼지에 싸인 채 희미한 영기를 뿜어내고 있는 누르스름한 종이쪽지가 끼어 있었다.
‘이것은……?’
설원은 주위를 기민하게 살핀 뒤, 신형을 낮추어 자연스럽게 낙엽을 줍는 척하며 그 종이쪽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었다.
빛바랜 종이 위에는 고풍스러운 필체로 몇 줄의 구결이 적혀 있었다.
[태극의 도는 비우는 데 있고, 혜검의 법은 채우는 데 있으니…… 기(氣)를 끊어 인(因)을 보고, 검(劍)을 휘둘러 과(果)를 벤다.]
그것은 전설적인 ‘태극혜검결’의 소실된 일실 구결 쪽지였다. 비록 온전한 비급은 아니었으나, 혜검의 힘을 다스리고 내력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결정적인 실마리가 담겨 있는 영기 어린 흔적이었다. 설원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억누르며, 그 쪽지를 품속 깊은 곳에 은밀히 숨겼다.
바로 그때였다.
사각―
짙은 안개 속에서 낙엽을 밟는 가볍고도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기의 흐름이 대기를 무겁게 누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설원은 즉각 안광을 지우고, 허리를 굽혀 빗자루를 든 채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안개를 헤치고 나타난 인물은 무당파의 수석 제자이자, 천태성가의 후계자인 백자운이었다.
그는 청아한 청색 도포를 단정하게 차려입고 있었으며, 허리춤에는 가문의 보검이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수려한 이목구비에는 가문의 존망과 무당의 미래를 짊어진 젊은 가주 특유의 깊은 고뇌와 책임감이 서려 있었다. 그의 눈빛은 맑으면서도 예리하여, 마치 상대의 폐부까지 꿰뚫어 볼 듯했다.
“설원 사매.”
백자운의 목소리는 나직하면서도 산들바람처럼 청량했다.
“자운 사형을 뵙습니다. 어찌 이리 이른 아침부터 외문 제자들의 거처까지 걸음을 하셨습니까?”
설원은 짐짓 어리숙한 표정으로 허리를 굽혔다.
백자운은 멈추어 서서 설원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설원의 어깨, 손목, 그리고 단전 부근을 치밀하게 훑고 지나갔다. 일개 외문 제자가 태극검총이라는 사지(死地)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무당파 내부에서는 이미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네가 검총의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심려가 깊었다. 다행히 목숨을 건졌구나.”
“조사님들의 음덕 덕분이지요. 굴러떨어지는 와중에 덩굴에 걸려 겨우 명줄을 붙잡았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설원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어 보였다. 그러나 백자운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한 걸음 더 다가서며 허리께의 검자루를 가볍게 매만졌다.
“운이라…… 무당의 검총은 운만으로 살아 돌아올 수 있는 만만한 곳이 아니다. 사매, 네 눈빛이 이전과 달라졌구나. 기운은 억눌려 있으나, 안광에 서린 기색은 마치 폭풍을 품은 고요한 바다와 같다.”
그의 예리한 감각은 설원이 숨겨둔 기운의 정체를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본능적인 위화감을 감지하고 있었다. 백자운은 정파의 대의를 무겁게 여기는 이였으나, 동시에 몰락하는 가문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절박함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설원의 급작스러운 변화가 가문과 문파의 판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확인해야만 했을 터였다.
창―
백자운이 허리춤의 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푸른 검신이 안개 속에서 차가운 광채를 뿜어냈다.
“사매의 무공이 어느 경지에 이르렀는지, 이 사형이 직접 확인해보고 싶구나. 대련을 청한다.”
“사형, 저는 그저 비천한 외문 제자일 뿐입니다. 사형의 신검을 상대할 재간이 어찌 있겠습니까.”
설원이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백자운은 이미 기운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의 주위로 무당 정종의 도가 기운이 푸른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사양할 필요 없다. 검총에서 얻은 성취가 있다면, 그것을 감추는 것 또한 도(道)에 어긋나는 법. 검을 뽑아라.”
백자운의 어조에는 거절을 허용하지 않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설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 여기서 순순히 당해주기만 한다면 오히려 의심을 살 터였다. 그렇다고 혜검의 신통을 완전히 드러내어 인과를 베어낸다면, 또다시 소중한 기억이 마모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혜검의 권능을 쓰지 않고, 오직 각도와 타이밍만으로 상대한다.’
설원은 주위에 굴러다니던, 썩어가는 나무 막대기 하나를 슬그머니 주워 들었다.
“정 그러하시다면, 소매가 사형의 가르침을 한 수 받겠습니다.”
백자운의 눈썹이 가볍게 꿈틀했다. 천하의 백자운을 상대로 고작 썩은 나뭇가지를 들다니. 무례하다고 여길 법도 했으나, 백자운은 오히려 검을 고쳐 쥐며 자세를 낮추었다. 그의 신형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마치 거대한 태산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압도적인 패도를 품고 있었다.
“간다.”
파아앗―
백자운의 신형이 안기 속으로 녹아들듯 사라졌다.
이윽고 설원의 정면에서 수십 개의 검 그림자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무당파의 정종 검초인 ‘태성삼십육검(千台三十六劍)’이었다. 자연의 노도가 바위를 때리듯, 맹렬하고도 빈틈없는 검격이 설원의 전신을 장악해 들어왔다. 검기가 스칠 때마다 주위의 낙엽들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보통의 무인이라면 그 압도적인 기세와 속도에 질려 검을 떨어뜨렸을 터였다.
그러나 설원의 눈에는 그 모든 움직임이 기묘할 정도로 느리게 비쳤다. 혜검의 전력을 개방하지 않았음에도, 눈동자에 맺힌 기의 흐름은 백자운의 검로가 지닌 태생적인 결점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왼쪽 어깨의 움직임이 반 치 빠르다. 가문의 안위를 짊어진 중압감이 검끝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구나.’
설원은 단전을 요동치게 하지 않았다. 내력을 끌어올려 부딪치는 대신, 물처럼 흐르는 무당의 기초 보법인 ‘칠성보(七星步)’를 밟았다.
스윽.
그녀의 신형이 아주 미세한 차이로 백자운의 첫 번째 검격을 비껴갔다. 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가볍게 흔들리는 한 잎의 잎사귀처럼, 설원은 오직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백자운의 파도 같은 검망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엇……!”
백자운의 눈에 경악의 빛이 스쳤다. 자신의 검이 완벽한 궤적으로 뻗어 나갔음에도, 설원은 마치 그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찰나의 각도 조절만으로 피해내고 있었다.
백자운은 검세를 바꾸어 ‘태극양의검’의 비초를 전개했다. 음과 양의 조화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맷돌 같은 검기가 설원을 압박해 들어왔다. 이번에는 피할 공간이 없었다.
하지만 설원은 피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손에 쥔 썩은 나뭇가지를 가볍게 찔러 넣었다. 아무런 내력도 실려 있지 않은, 흔해 빠진 기초 태극검의 ‘일자자(一字刺)’였다.
툭.
나뭇가지의 끝이 백자운이 펼친 거대한 검망의 흐름이 교차하는 정확한 ‘결절점’을 건드렸다. 그것은 무공의 힘이 가장 약하게 얽히는, 인과의 틈새였다.
지이잉―
마치 거대한 수레바퀴의 축에 작은 모래알 하나가 끼어들어 전체 흐름을 멈추게 하듯, 백자운의 패도적인 검기가 허무하게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이, 이것은……!”
백자운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자신의 검로가 완벽하게 파훼당했음을 깨달은 찰나, 설원의 나뭇가지 끝은 이미 그의 목덜미를 스치고 있었다. 차갑고 무딘 나무의 감촉이 백자운의 목 끝에 닿는 순간, 시간은 멈춘 듯 고요해졌다.
설원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나뭇가지를 거두고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포권을 취했다.
“사형의 검로가 너무나 깊고 웅해, 소매가 감히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그녀의 태도는 지극히 겸손했으나, 방금 보여준 성취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오직 기막힌 각도와 찰나의 타이밍만으로 무당 최고의 천재인 백자운의 검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힘을 숨긴 채 상대를 압도하는 여유로운 사이다 같은 일격이었다.
백자운은 검을 거두지 못한 채, 멍하니 설원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사매…… 너는 대체 검총에서 무엇을 본 것이냐.”
그의 목소리에는 경외감과 함께, 차마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무거운 고뇌가 담겨 있었다. 가문을 위해 무당의 최정상에 서야만 하는 자신을, 단 한 초식의 타이밍만으로 무너뜨린 여도사.
설원은 그저 말없이 미소를 유지할 뿐이었다.
백자운은 천천히 검을 칼집에 밀어 넣었다. 철컥하는 소리가 안개 낀 숲속에 무겁게 울려 퍼졌다. 그는 설원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이내 나직하고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힘을 숨기고 있다는 것은 알겠다. 허나 사매, 네 성취가 이다지도 높다면…… 그것은 머지않아 네게 축복이 아닌 가장 잔혹한 저주가 될 것이다.”
설원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백자운은 주위를 한번 기민하게 살핀 뒤, 설원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추어 경고했다.
“단혜태상장로께서 이미 산문 아래에 정무맹의 은밀한 정보 조직, 묵영각(墨影閣)의 감시자들을 배치하셨다. 그들은 네가 검총에서 살아 돌아온 진짜 이유를 캐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터이다.”
백자운의 눈빛에 짙은 그늘과 경고의 빛이 번졌다.
“네가 지닌 그 기이한 힘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너는 무당의 이단아를 넘어 정파 전체의 공적으로 사냥당하게 될 것이다. 부디 조심해라, 설원 사매.”
안개 너머에서 들려오는 산새의 울음소리가 기괴하게 일그러져 들렸다. 산문 아래를 포위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위협의 그림자가 서서히 좁혀오고 있음을 알리는, 불길한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