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머금은 먹구름이 하늘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으나, 오두막을 찢고 들어온 흑창(黑槍)의 강기는 그 어둠보다 더 짙고 흉포했다.
콰아아앙!
사방으로 비산하는 목재 파편들이 빗줄기와 뒤섞여 칼날처럼 허공을 갈랐다. 묵풍단주가 내지른 창끝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기류가 흙바닥을 통째로 뒤엎으며 설원의 발밑을 파고들었다. 대지를 뒤흔드는 충격파 속에서, 설원은 신형을 깃털처럼 가볍게 솟구쳤다.
전신을 감싸고 도는 온기가 아직 따스했다. 이초의가 가슴 졸이며 건네주었던 영약, 환정향(還情香)의 약효가 맥락을 타고 흐르며 마모되어 가던 감정의 불씨를 일시적으로 지피고 있었다. 잊히던 기억의 편린들이 가슴 속에서 아련한 통증으로 요동치는 순간, 설원의 발끝이 무너지는 대들보를 딛고 하늘을 향해 도약했다.
"배교자 설원! 네 목숨은 오늘로 끝이다!"
묵풍단주의 고함이 천둥소리처럼 대기를 울렸다. 그의 신형을 호위하듯, 사방의 어둠 속에서 십여 명의 일류 사수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쥐고 있는 강궁의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빗소리를 짓밟는 불길한 파공음이 사방을 메웠다.
휘이이이이익!
지독한 살기를 머금은 쇠화살들이 그물망처럼 설원을 향해 쏟아졌다. 사방이 가로막힌 허공, 디딜 곳 하나 없는 그 찰나의 공간에서 설원은 눈을 감았다. 아니, 마음의 눈을 떴다.
천인감응의 혜검(慧劍).
푸른 안광이 그녀의 눈꺼풀 너머로 번뜩이며 세상의 흐름을 멈추어 세웠다. 세차게 내리치던 빗방울들이 허공에 정지한 듯 느려지고, 날아드는 화살촉 끝에 매달린 붉고 검은 인과의 실타래가 선명하게 시야를 채웠다.
'모든 물리(物理)는 흐름을 따르고, 모든 무공은 기점을 가진다.'
뇌리를 스치는 것은 과거 태극검총의 부서진 비석 틈새에서 얻었던, 전설의 '태극혜검결(太極慧劍決)' 일실 구결 쪽지였다.
― 무극(無極)에서 태극(太極)이 일어나니, 음양이 찰나에 흩어지고 모임이라. 혜검을 쥐고 인과를 벨 때는 스스로가 바람이 되고 물이 되어야 하느니라.
깨달음은 번개처럼 매끄러웠다. 설원은 허공에서 몸을 반바퀴 회전시키며 수중의 도검을 가볍게 그어 내렸다. 그녀의 검로(劍路)는 굳이 가공할 내력을 뿜어내지 않았으나, 자연의 섭리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었다. 마치 떨어지는 낙엽이 강물의 흐름을 바꾸듯, 미세한 검끝의 떨림이 날아드는 화살들의 기회(氣會)를 정확히 타격했다.
챙! 채쟁!
허공을 가르던 화살들이 서로의 몸체를 부딪치며 궤적을 잃고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신급의 초식이었다. 착지와 동시에 설원의 신형이 진흙바닥을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말도 안 되는……!"
사수 중 한 명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다음 화살을 먹이려 했으나, 설원의 검은 이미 그의 목덜미를 스쳐 지나간 뒤였다. 붉은 선혈이 빗물에 씻겨 내리기도 전에, 설원의 시선은 정면에서 회전하는 거대한 흑창으로 향했다.
묵풍단주가 펼쳐내는 창법은 무겁고 횡포하여 일견 틈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혜검의 눈에는 그의 창대와 손잡이가 맞물리는 결합점, 그리고 어깨 관절의 미세한 뒤틀림이 자아내는 둔탁한 인과의 고리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설원은 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바람이 대나무 숲을 막힘없이 통과하듯, 묵풍단주가 자랑하는 흑색 강기의 소용돌이 틈새로 검날을 밀어 넣었다.
스르릉!
"무엇이?!"
묵풍단주의 안색이 급변했다. 자신의 창세(槍勢)가 허무하게 분쇄되는 감각. 설원의 일검은 그의 강기를 정면으로 깨부순 것이 아니었다. 창이 회전하며 만들어내는 기류의 가장 취약한 접점, 즉 음(陰)과 양(陽)이 교차하는 그 찰나의 빈틈을 쐐기처럼 박살 낸 것이었다.
쩍, 하는 파열음과 함께 미늘 달린 흑창이 균열을 일으키며 뒤로 튕겨 나갔다. 반동으로 인해 묵풍단주의 상체가 완전히 비틀거리며 열렸다.
"정무맹의 사살 추격대장이 고작 이 정도라니, 가소롭기 짝이 없구나."
설원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조소가 서려 있었다.
"배교자라 짖어대며 대의를 논하던 네놈들의 실체가 결국 이것이더냐?"
그녀는 품속에서 주름진 서한 한 장과 붉은 인장이 찍힌 영수증 뭉치를 꺼내 들어 묵풍단주의 면전에 던졌다. 빗물에 젖어 허공에 날리는 종이들에는 단혜태상장로가 천태성가와 긴밀히 묵약하며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독점하려던 벽천단의 밀거래 내역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이것이 네놈들이 목숨 걸고 지키려던 정무맹의 법이자, 단혜가 추구하던 무당의 대의다. 추악한 은자와 더러운 부정으로 점철된 서한을 품에 안고서도, 감히 협(俠)을 입에 올리는가!"
묵풍단주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 서한의 존재를 자신들 역시 은밀히 회수하려 추적해 왔던 터였다. 그것이 이 배교자의 손에 들려 백일하에 드러나는 순간, 정무맹과 단혜의 파멸은 자명했다.
"네년이…… 감히 장로님과 맹을 모욕하는구나! 죽여라! 단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저 배교자를 찢어발겨라!"
묵풍단주가 광인처럼 포효하자, 남은 흑의 살수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신법을 전개하며 설원을 에워쌌다. 그들의 검날이 빗줄기를 가르며 사방에서 살기등등하게 들이닥쳤다.
그러나 설원의 안광은 흔들림이 없었다.
'인과를 벨수록, 마음은 비워지리라.'
그녀는 혜검의 힘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전신의 경맥이 얼어붙는 듯한 차가운 극통이 엄습했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 이초의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무당의 따스했던 노을빛이 모래성처럼 바스러지며 사라지는 감각이 실시간으로 전해졌다. 환정향으로 간신히 되살려 놓았던 감정의 온기가, 혜검을 혹사할 때마다 차디찬 얼음물로 변해 전신을 적셨다.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설원은 멈추지 않았다. 가슴이 얼어붙는다면, 그 얼어붙은 검으로 위선을 베어버리면 그만이었다.
"무극(無極)에서 태어나 무극으로 돌아가라."
설원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스아아아아아―.
빗소리마저 지워버리는 기이한 검의 울림이 숲을 메웠다. 그것은 단순한 가속이 아니었다. 적들이 펼치는 신법의 궤적을 미리 인지하고, 그들이 도달하기도 전에 길목을 차단하는 인과의 선점이었다.
서걱! 서거걱!
순식간에 대지를 가른 세 줄기 설광이 허공을 수놓았다. 살수들의 신법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무참히 지워졌다. 그들의 몸이 인형처럼 힘없이 진흙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마지막 한 사람, 묵풍단주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부러진 창대를 쥔 채 뒤로 물러섰다.
"괴물…… 네년은 도사가 아니라 마물이다……!"
"마물이라."
설원이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의 검끝에서 빗물과 함께 섞인 붉은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위선의 탈을 쓰고 세상을 기만하는 자들에게는, 마물이 가장 어울리는 심판관이겠지."
스윽.
가차 없는 일검이 허공을 갈랐다. 묵풍단주의 목이 번뜩이는 검광 속에서 잘려 나갔고, 그의 거구는 차가운 빗물 고인 구덩이 속으로 무겁게 처박혔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오직 세차게 내리치는 빗소리와, 부서진 오두막 잔해를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만이 황량한 정적을 채우고 있었다.
"하아…… 흑!"
설원은 검을 짚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전신이 덜덜 떨렸다. 손가락 끝부터 시작된 지독한 냉기가 심장을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가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가슴을 채우고 있던 애틋함과 분노, 그리고 이초의를 향한 서글픈 연민의 잔상들이 빠르게 지워져 갔다.
약효가 다한 환정향의 마지막 향기가 빗물에 씻겨 내려가며, 가슴속에는 오직 텅 빈 허무만이 남았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으나, 그것이 슬퍼서 흘리는 눈물인지, 아니면 육체의 거부 반응일 뿐인지 스스로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잊혀진다…… 또다시 모든 것이…….'
설원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무표정하게 굳어가는 얼굴 너머로, 아직 온전히 사라지지 않은 마지막 의지의 불꽃을 쥐어짜 냈다. 이대로 가슴속의 불씨가 꺼지면, 자신이 왜 이 길을 가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릴 터였다.
그녀는 허리춤에서 묵로(默路)를 새기던 작은 칼을 꺼내 들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설원은 자신의 왼쪽 허벅지를 가차 없이 찔러 넣었다. 전율하는 고통이 뇌리를 때렸으나, 그녀는 핏빛으로 물드는 살갗 위에 칼끝을 움직여 한 자 한 자 깊이 새겨넣기 시작했다.
― 단혜와 청운익의 피를 보아 장문인을 구하라.
살이 찢기고 선혈이 흘러내려 바지를 붉게 적셨다. 그러나 설원의 눈동자는 깊은 심연처럼 가라앉아 갈 뿐이었다. 고통조차 무감각해지는 지독한 인과잠식의 굴레 속에서, 그녀는 스스로의 육체에 붉은 낙인을 각인했다.
마침내 칼을 거둔 설원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벅지의 통증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극을 주었으나, 그것만이 그녀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이정표였다.
그녀는 부러진 검집에 칼을 꽂아 넣고, 빗속을 뚫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 * *
어두운 숲을 벗어나자, 사방이 절벽으로 가로막힌 좁은 협곡의 어귀가 나타났다. 세찬 비바람이 협곡 사이를 거세게 휘몰아치며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설원은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협곡의 외길, 그 한가운데에 단 한 필의 기마가 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빗속에서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고삐를 쥐고 있는 사내의 넓은 어깨에는 무거운 중갑이 얹혀 있었고, 허리춤에는 차가운 은빛을 발하는 보검이 매달려 있었다.
백자운이었다.
가문을 구해야 한다는 무거운 멍에와, 단혜태상장로와의 피할 수 없는 약조로 얽매인 '봉문 서약 보검(封門誓約寶劍)'. 그의 허리에서 빛나는 그 보검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그를 죈 무형의 사슬과도 같았다.
빗물에 젖은 백자운의 눈빛은 깊고도 어두웠다. 그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설원을 내려다보았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설원 사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으며, 협곡의 바람 소리마저 잠재울 만큼 단호했다. 설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허벅지에서 흐르는 피를 무시한 채, 그의 허리춤에 찬 보검을 조용히 응시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침묵은 그 어떤 강기보다도 날카롭게 대기를 찢고 있었다.
말에서 내려서는 백자운의 신형은 대지 위에 단단히 뿌리박은 노송(老松)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질척이는 진흙바닥에 그의 가죽 장화가 닿을 때마다 둔탁한 파음이 협곡의 절벽을 타고 공명했다.
설원은 그저 묵묵히 서 있었다. 허벅지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짓단을 적시고 구두 굽을 타고 내려가 진흙을 붉게 물들였으나, 그녀의 눈빛에는 고통도,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환정향의 약효가 완전히 소멸한 자리에 들어찬 것은, 만년설처럼 차갑고 투명한 명경지수(明鏡止水)의 심상뿐이었다.
백자운의 시선이 설원의 피 묻은 허벅지와, 그녀의 손에 들린 검끝으로 향했다. 정무맹 사살대의 붉은 선혈이 아직 검날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참담함을 억누르려는 듯, 백자운은 허리춤에 찬 보검의 손잡이를 가볍게 쥐었다.
"결국 묵풍단마저 네 검 끝에 스러졌구나. 네 무위가 이미 아득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면서도, 내 앞길을 비켜설 수 없음이 참으로 한스럽다."
"사형."
설원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씻겨 나간 듯 담담했다.
"그 검을 쥔 손이 떨리고 있네. 가문의 구원이라는 명분이 자네의 검을 이토록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가."
백자운의 입술이 일자로 굳어졌다. 그가 차고 있는 '봉문 서약 보검'은 단혜태상장로와 맺은 피의 맹세이자, 몰락해 가는 천태성가의 명맥을 보존하기 위해 스스로 목에 걸어 잠근 쇠사슬이었다. 혜검의 푸른 안광을 통해 바라본 그 보검의 주위에는, 핏빛에 가까운 탁한 인과의 실타래가 백자운의 전신을 그물망처럼 옭아매고 있었다.
사물의 인과를 꿰뚫어 보는 안목은 가차 없이 진실을 보여주었다. 그 보검이 지닌 기운은 단순한 가문의 영광이 아니었다. 그것은 백자운의 생명력과 무당의 정기를 빨아먹으며 자라나는, 단혜태상장로가 심어둔 주술적 제약이자 영혼의 족쇄였다.
설원은 내면에서 솟구치는 기이한 감각에 직면했다. 백자운이라는 사형의 이름, 그와 함께 무당의 연무장에서 땀을 흘렸던 기억들은 머릿속에 활자로 인쇄된 것처럼 명확히 존재했다. 그러나 그 기억을 바라보는 가슴에는 아무런 파동도 일지 않았다. 슬픔도, 분노도, 아쉬움도 느껴지지 않는 텅 빈 허무.
'인간이 맺는 인연이란 한 조각 서리와 같아서, 햇살이 비추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인가.'
그녀는 가슴을 채우는 텅 빈 공동(空洞) 속에서 철학적인 사유에 잠겼다. 도(道)의 끝에 도달하여 천하제일의 검을 손에 쥔다 한들, 그 검으로 지켜야 할 이들의 얼굴조차 가슴으로 그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득도인가, 아니면 영원한 망각의 형벌인가. 하지만 지금의 설원에게는 그 의문마저도 흐르는 물 위의 낙엽처럼 덧없게 느껴질 뿐이었다. 오직 허벅지에 새겨진 붉은 낙인만이 그녀의 나침반이었다.
"단혜의 개가 되어 내 앞을 막아서겠다면, 베어야 할 인과가 하나 더 늘어날 뿐이네."
설원이 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검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빗줄기가 갈라지며 미세한 검풍이 일었다.
백자운은 천천히 보검을 뽑아 들었다.
스으으릉―.
보검이 검집을 벗어나자, 협곡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는 듯한 기이한 공명이 전해졌다. 검신에 새겨진 북두칠성의 문양이 붉은 안광을 뿜어내며, 백자운의 내력을 기괴한 형태로 증폭시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도가의 순정한 내력이 아니었다. 타인의 기를 강제로 찬탈하여 구사하는 듯한, 음습하고도 파괴적인 마(魔)의 기운이었다.
"이 검은 천태성가의 생줄기이자, 내 영혼의 마지막 족쇄다. 설원, 나는 오늘 무당의 사형으로서가 아니라, 가문의 파수꾼으로서 네 앞을 막아서겠다."
백자운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강기가 성난 파도처럼 협곡의 절벽을 때렸다. 그의 눈동자 역시 붉은 기운으로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단혜가 그에게 내린 보검의 진정한 힘이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설원은 검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혜검의 통찰안이 백자운의 심장으로 연결된 인과의 실을 포착했다. 그 실을 베어내지 않는 한, 백자운은 단혜의 인형이 되어 평생을 고통 속에서 울부짖어야 하리라.
하지만 그 인과를 베어내는 대가는 오롯이 설원의 몫이었다. 이번에 혜검의 힘을 가동해 저 결계를 베어낸다면, 그녀의 머릿속에 남은 백자운에 대한 마지막 기억마저도 완벽히 마모되어 소실될 터였다. 사형의 얼굴을 기억하는 '인간 설원'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그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지워버릴 것인가.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설원의 눈동자가 푸른 혜검의 빛으로 완전히 물드는 순간, 백자운의 신형이 허공을 가르며 폭풍처럼 쇄도했다.
붉은 강기의 해일이 협곡을 뒤덮는 찰나, 설원의 혜검은 백자운의 검세 뒤쪽, 협곡 정상의 기암괴석 뒤에 숨어 숨을 죽이고 있는 또 다른 거대한 살기의 존재를 감지했다.
'저것은…… 정무맹의 진정한 흑막인가.'
예상치 못한 제3의 살기가 두 사람의 결전 위로 가차 없이 내리꽂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