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벗어난 협곡의 어귀에서, 단혜장로의 영을 받아 자신의 가문을 다시 구해야만 하는 백자운이 중갑 보검을 차고 단 기마로 길을 가로막고 가차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쏟아지는 폭우가 말갈기를 적시고 철갑의 견갑 위로 튕겨 나갔다. 검은 군마의 콧김이 축축한 안개 속에서 하얗게 바스러졌다. 백자운은 고삐를 쥔 손을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빗속을 걸어 나오는 한 여인을 응시했다.
설원의 걸음걸이는 느렸으나 무거웠다. 발바닥이 진흙을 밟을 때마다 미세한 도가의 진기가 일어 물방울을 사방으로 밀어냈다. 그녀의 시선은 백자운의 얼굴을 지나, 그가 허리에 차고 있는 육중한 보검에 머물렀다.
붉음.
그것은 도가의 청명한 진기가 아니었다. 백자운의 전신을 휘감고 있는 기류는 피비린내 나는 업보의 사슬처럼 붉고 탁했다. 단혜태상장로가 천태성가의 명맥을 미끼로 그에게 채운 족쇄. 그 무거운 사명이 백자운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설원은 걸음을 멈추었다. 허벅지에 깊게 새겨진 묵로(默路)의 흉터가 빗물에 젖어 아려왔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소중한 기억의 파편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려는 조짐이 일었다. 혜검을 쓸 때마다 찾아오는 영혼의 마모. 이대로 백자운과 검을 섞는다면, 그녀는 사형의 고결했던 미소마저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내야 할지도 몰랐다.
설원은 차가운 빗물 속에서 품을 더듬었다. 손가락 끝에 닿은 것은 이초의가 건네주었던 작은 옥병이었다. 수수께끼의 문파 한의서에서 찾아내어 지극정성으로 달여 만들었다는 영약, 환정향(還情香).
뚜껑을 열자 빗소리를 뚫고 알싸하면서도 애절한 향취가 코끝을 찔렀다. 설원은 주저 없이 약향을 가슴 깊이들이마셨다.
화―.
폐부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마모되어 흐릿해지던 뇌리가 일순간 벼락을 맞은 듯 명징해졌다. 지워져 가던 이초의의 목소리, 백자운이 과거 무당의 사제로서 자신에게 건넸던 무거운 격려의 눈빛이 한 폭의 진경산수화처럼 선명하게 복원되었다. 타들어 가는 고통 뒤에 찾아온 기적 같은 인지였다.
"사형."
설원의 목소리는 낮고 가라앉아 있었다.
"그 향은……."
백자운의 두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설원의 안색이 일시적으로 붉게 상기되는 것을 보며, 그녀가 어떤 대가를 치르며 이 자리에 서 있는지 직감했다. 그러나 백자운은 고삐를 강하게 쥐며 말에서 내렸다. 가죽 장화가 진흙 바닥을 짓밟았다.
"돌아가라, 설원. 이 앞은 무당의 영토가 아니며, 네가 가야 할 도(道)의 길도 아니다. 태상장로님의 명은 절대적이다. 천태성가의 수백 명 문도의 목숨이 이 검 한 자루에 걸려 있다."
백자운이 허리춤의 중갑 보검을 뽑아 들었다.
스으으릉―.
검신이 드러나자 협곡 전체가 흐느끼는 듯한 공명이 일었다. 단혜와 맺은 종속의 계약이 깃든 봉문 서약 보검. 검날에 양각된 주술적 문양이 붉은 안광을 뿜어내며 백자운의 기맥을 강제로 뒤흔들었다. 그것은 가문의 구원이라는 명분 뒤에 숨겨진, 단혜의 비열한 속박이었다.
"가문의 파수꾼이라 자처하면서, 정작 그 가문을 도살하려는 자의 사냥개가 되었단 말인가."
설원이 냉소했다. 그녀는 소매 안에서 젖은 종이 뭉치 하나를 꺼냈다. 단혜태상장로가 천태성가와 긴밀히 밀약하며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독점하려던 벽천단의 유통 영수증과 부정이 고스란히 적힌 밀서였다. 1화에서 태극검총을 탈출할 때 원로들의 밀실에서 훔쳐내었던, 단혜의 명줄을 쥘 수 있는 결정적 증거.
설원은 손가락을 튕겼다. 진기를 머금은 서한이 빗줄기를 가르고 날아가 백자운의 발밑 진흙탕에 정확히 꽂혔다.
"똑똑히 보아라. 네가 목숨을 바쳐 지키려는 가문이, 어떻게 단혜의 손바닥 위에서 노리개처럼 찢기고 있었는지."
백자운의 시선이 진흙에 젖어가는 서한으로 향했다. 단혜의 친필 서명과 천태성가의 가주 인장이 찍힌 벽천단 밀거래 내역. 그것은 천태성가가 무당의 비호 아래 금지된 독약을 유통하고, 그 대가로 가문의 세속적 영달을 보장받겠다는 추악한 야합의 기록이었다. 백자운이 그토록 피하려 했던 가문의 타락이, 이미 단혜의 손끝에서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짊어진 사명의 실체란 말인가."
백자운의 안광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가 쥔 보검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붉은 마기를 더해갔다. 단혜가 보검에 심어둔 독문 기맥 계약이 백자운의 심장을 조여들며 그의 이성을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으아아악!"
백자운이 괴성을 지르며 대지를 박찼다.
그의 신형이 붉은 강기의 궤적을 그리며 쇄도했다. 검풍이 협곡의 암벽을 긁어내며 거대한 바위 파편들을 비바람 속으로 날려 보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 가공할 기세는 이미 도가의 검법이 아니었다. 파괴와 살육만을 위해 정제된 마(魔)의 칼질이었다.
설원은 검 손잡이를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푸른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천인감응의 혜검. 세상의 기류가 멈추고, 빗방울 하나하나의 낙하 궤적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백자운의 몸과 보검을 연결하고 있는 수많은 붉은 실들이 보였다. 그 실들은 그의 심장과 단전, 그리고 손목의 기맥을 관통하며 보검의 칼자루로 이어져 있었다. 그야말로 영혼을 구속하는 인과의 사슬이었다.
'내력이 부족하다.'
협곡을 가득 채운 백자운의 패도적인 강기를 막아내기에 설원의 단전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연이은 도주와 전투로 내력이 고갈된 상태였다.
그때, 설원의 머릿속에서 일순간 섬광이 스쳤다. 과거 태극검총의 부서진 비석 틈새에서 발견했던, 전설의 '태극혜검결' 일실 구결 쪽지의 문장들이 뇌해를 스쳤다.
[무극에서 태극이 나고, 동정이 음양을 가르니, 혜검은 그 흐름의 시원을 베어 만물을 무(無)로 돌린다.]
그것은 내력의 크기로 싸우는 법이 아니었다. 흐르는 물이 바위를 깎듯, 태풍이 썩은 나뭇가지의 매듭만을 골라 꺾듯, 적의 기운이 가장 약해지는 찰나의 틈새를 찔러 인과 자체를 되돌리는 극의였다.
"태극은 본래 비어 있는 것."
설원이 검을 가볍게 찔러 올렸다.
그녀의 검끝이 허공에서 완만한 원을 그렸다. 물 흐르듯 유려하고, 바람처럼 실체가 없는 궤적이었다. 백자운이 내뿜은 붉은 강기의 해일이 설원의 푸른 검선과 마주치는 순간, 거짓말처럼 양옆으로 갈라졌다. 폭풍의 눈 속으로 걸어 들어가듯, 설원의 신형이 백자운의 검막을 뚫고 파고들었다.
백자운의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자신의 검세가 이토록 무력하게 흩어질 줄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설원의 혜검이 백자운의 손목을 향해 전진했다. 그녀의 목표는 백자운의 육체가 아니었다. 그를 옭아매고 있는 붉은 사슬, 단혜의 기맥 계약 그 자체였다.
‘이것을 베면…… 사형과 함께했던 무당에서의 기억은 영원히 사라진다.’
가슴속에서 환정향으로 간신히 붙잡아두었던 백자운과의 추억들이 모래가 되어 흩어지는 감각이 실시간으로 전해졌다. 사형과 함께 검을 나누며 흘렸던 땀방울, 가문의 비극 속에서도 도를 잃지 말자며 서로를 격려했던 다짐들이 지워져 갔다. 눈가에서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려 빗물과 섞였다.
하지만 설원의 검끝은 흔들리지 않았다.
"사형, 무당의 검은 억압하는 자를 베는 것이지, 스스로를 억압하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네."
챙―!
설원의 검끝이 백자운이 쥔 보검의 칼자루, 정확히 붉은 마기가 모여드는 기맥의 중심점을 격타했다.
단순한 충돌이 아니었다. 혜검의 예리한 통찰이 보검에 깃든 단혜의 독문 주술과 인과의 실을 정확히 도려내었다. 극의에 달한 태극혜검결의 진기가 칼자루를 타고 흐르며, 백자운의 기맥을 구속하던 마의 사슬을 자비 없이 끊어발겼다.
콰아아앙!
기괴한 파공음과 함께 보검에 서려 있던 붉은 기운이 사방으로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백자운의 손에서 보검이 튕겨 나가 협곡의 절벽 바위에 박혔다.
"크아아악!"
백자운이 한 걸음 물러서며 선혈을 울컥 토해냈다. 그의 가슴을 짓누르던 음습한 기운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기맥을 강제로 지배하던 쇠사슬이 끊어지자, 그의 전신에서 도가의 맑고 순정한 진기가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 돌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에서 불길한 붉은 안광이 사라지고, 본래의 깊고 고결한 눈빛이 돌아왔다.
백자운은 무릎을 꿇었다. 흙탕물이 그의 무릎 적셨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 단혜의 꼭두각시가 되어 움직이던 그 기괴한 박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영혼을 옭아매던 가장 무거운 족쇄가 완벽히 사라진 것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하려 했던가."
백자운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려 진흙을 적셨다. 그는 가문의 구원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정작 무당의 진정한 협(俠)을 짓밟으려 했던 자신의 위선과 어리석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참된 우군이자 무당의 미래를 짊어질 대협사가, 바로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설원은 검을 거두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머릿속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제 백자운이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그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더 이상 가슴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눈앞에 서 있는 이 사내가 무당의 도반이며, 지켜야 할 협객이라는 이성적인 사실만이 뇌리에 남았을 뿐이었다. 혜검의 대가는 가혹했으나,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사형, 이제 가야 할 길을 보았는가."
설원의 목소리에는 미움도, 원망도 없었다. 오직 명경지수와 같은 고요함만이 깃들어 있었다.
백자운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설원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것은 사형으로서 사제에게 하는 인사가 아니었다. 무당의 참된 도를 깨달은 자가, 그 도를 증명해 낸 선구자에게 바치는 경의였다.
"내 눈을 가렸던 장막을 걷어주었구나, 설원. 내가 지키려 했던 가문도, 무당의 이름도 모두 위선 위에 서 있었음을 이제야 알았다."
백자운은 허리에 차고 있던 천태성가의 인장과 단혜가 내렸던 밀지를 품에서 꺼냈다.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나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단단한 결의만이 서려 있었다.
"이것을 받아라."
백자운이 건넨 밀지를 펼쳐 든 설원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좁혀졌다.
거기에는 천하 무림을 뒤흔들 가공할 만한 음모의 전말이 적혀 있었다.
"오늘 오후, 무당산 정상 천태검비 앞에서 단혜태상장로가 정무맹의 맹주와 만나기로 되어 있다. 그 자리에서 단혜는 무당파의 세속적 이권과 영토를 정무맹에 정식으로 헌납하고, 너를 마도에 빠진 배교자로 선포하여 공개 처형하는 식을 거행할 예정이다. 정무맹의 명숙들과 묵영각의 살수들이 이미 무당산 정상에 진을 치고 있다."
백자운의 목소리가 낮고 무겁게 협곡에 울려 퍼졌다.
"그들은 네가 오지 않더라도, 가짜 대역을 세워서라도 너의 처형을 기정사실로 만들고 무당파를 완전히 삼키려 하고 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설원의 시선 끝에, 먹구름으로 가득 찬 무당산의 정상이 걸려 있었다. 번개가 치며 협곡을 백색으로 물들였다. 마침내 모든 위선의 장막이 걷히고, 마지막 결전의 장이 강호의 모든 무림인 앞에서 열리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