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뒤, 서울 도심의 한 복판에 자리한 목동 아이스링크.
지독하게 차가운 냉기가 콘크리트 벽면을 타고 내려와 발목을 무겁게 짓눌렀다. 전국 고교 아이스하키 춘계 토너먼트의 성대한 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협회의 온갖 비열한 징계 음해를 정면으로 돌파하고 마침내 움켜쥔 본선 첫 경기 출전권.
라커룸의 삐걱거리는 벤치에 앉아 스케이트 끈을 당단히 조여 매는 이은우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질질 끄는 전주곡 따위는 필요 없다. 빙판 위에서 적들을 완전히 짓부수는 것만이 유일한 해답이다. 은우가 고개를 가볍게 흔들자, 시야 위로 푸른빛의 반투명한 장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피지컬 상태 장부]` `- 오른쪽 무릎 관절 마모도: 10.2% (안정)` `- 환상통 자극 역치: 95% (안전)`
서아린의 진동 파동 치료기 덕에 마모도는 10% 안팎을 유지하며 안전권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아이스하키는 언제 어느 순간에 뼈가 으스러질지 모르는 은반 위의 격투기체였다.
“은우야, 진짜 괜찮은 거 맞지?”
어깨 패드를 툭툭 치며 다가온 민지후의 입술이 바짝 마라 있었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묻어났다. 은우는 대답 대신 가볍게 턱을 끄덕였다.
“내 걱정 말고 네 몸이나 잘 챙겨. 오늘 상대는 보통 놈들이 아니니까.”
대진표에 선명하게 새겨진 첫 적수. 경성공업고등학교 대신 대진표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온 16강 상대는 바로 도봉고등학교였다.
한성고의 든든한 대기업 백업 아래에서 온갖 더러운 지시를 수행해 온 그들은, 리그 내에서 ‘바디 체크 크러셔’라 불리는 무자비한 폭력 하키의 대명사였다. 한성고의 주장 강태훈과 지략가 윤성현이 뒤에서 조종하고 있음이 불을 보듯 뻔했다. 은우를 아예 정면 부상으로 담가서 은퇴시키라는 은밀한 지령이 그들의 스케이트 날 끝에 실려 있을 터였다.
“도봉고 놈들, 초반부터 무식하게 들이받을 거다.”
감독 박한솔이 전술 보드를 펜 끝으로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은우 너를 타깃으로 삼고 사방에서 덮쳐올 게 뻔해. 절대 정면에서 충돌하지 마라. 알겠나?”
“알고 있습니다.”
은우가 차가운 헬멧을 머리에 썼다. 바이저 너머로 보이는 빙판은 푸른빛과 붉은빛의 기하학적 각도로 쪼개지기 시작했다.
웅-.
대형 제빙기가 빠져나간 은반 위로 양 팀 선수들이 미끄러져 들어갔다. 관중석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 소리가 링크의 얼어붙은 천장을 때리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송원고! 기적을 보여줘!” “이은우! 오늘만 이기자!”
하지만 도봉고 선수들의 눈빛은 응원 열기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살기를 품고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 선 주장 배진태가 은우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스윽.
배진태가 자신의 목을 스틱 깃으로 긋는 시늉을 했다. 대놓고 던지는 살벌한 도발이었다.
은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머릿속 장부가 배진태를 비롯한 도봉고 선수들의 신체 스펙과 경로를 실시간으로 연산해 내기 시작했다.
`[도봉고 배진태 - 체중 92kg / 스케이팅 최고 속도: 32km/h]` `[전술 양상: 바디 체크 크러셔 (부상 유발 확률: 74%)]`
‘무식하게 들이받기만 하는 곰탱이들이군.’
은우는 차갑게 읊조렸다. 과거 무릎이 부서지던 순간의 지독한 충돌 트라우마가 척추를 타고 찌르르하게 올라왔지만, 이제는 두려움에 떨던 예전의 이은우가 아니었다. 장부가 그려주는 푸른색의 안전 경로가 이미 그의 발끝 아래에 고속도로처럼 펼쳐져 있었다.
삑-!
심판의 휘슬 소리와 함께 퍽이 빙판 위로 떨어졌다.
전국 대회의 치열한 서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 * *
퍽을 차지한 것은 송원고의 센터였다. 하지만 채 3초도 지나지 않아 도봉고의 거구들이 폭풍처럼 밀고 들어왔다.
콰앙-!
“윽!”
송원고의 윙어가 도봉고 수비수의 무자비한 바디체크에 밀려 보드 벽면에 처참하게 처박혔다. 퍽이 빙판 위를 굴렀다. 은우는 본능적으로 스케이트 날을 꺾어 퍽을 낚아챘다.
스윽, 사각!
얼음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은우가 퍽을 소유하자마자, 도봉고의 수비수 두 명이 약속이나 한 듯 양옆에서 덮쳐왔다. 시속 30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달려드는 거대한 고깃덩어리들이었다.
“저 새끼 다리 분질러!”
배진태의 포효가 링크를 울렸다.
은우의 시야에 붉은색 경고등이 격렬하게 깜빡였다.
`[위험! 양방향 교차 충돌 각도 진입]` `[예상 마모도 폭발 확률: 85%]` `[회피 경로 탐색 중...]`
정면 충돌은 자살 행위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은우의 턱관절을 강하게 굳혔다. 하지만 은우의 뇌는 극도로 차분했다. 그는 즉시 동료 싱크로 기능을 가동했다.
`[동료 싱크로 가동: 민지후 (싱크로율 88%)]` `- 민지후 무릎 마모도: 24% (양호)` `- 마모 분산 통로 개설 완료.`
은우는 퍽을 민지후가 달리는 오른쪽 공간으로 가볍게 밀어 넣었다.
스윽.
“지후야, 받아!”
퍽이 자로 잰 듯이 지후의 스틱 끝에 정확히 배달되었다. 퍽의 소유권이 넘어가자, 도봉고 수비수들의 시선이 찰나의 순간 흔들렸다. 그들은 은우를 받아버릴지, 아니면 퍽을 쫓을지 순간적으로 갈등했다.
그 미세한 주저함이 바로 은우가 노린 틈이었다.
은우는 스스로 미끼가 되기 위해 속도를 줄이지 않고 도봉고 수비수들의 포위망 한가운데로 발을 내딛었다. 양옆에서 좁혀오는 거대한 압박의 벽.
“잡았다, 이 새끼!”
배진태가 쾌재를 부르며 은우의 어깨를 향해 온몸의 체중을 실어 돌진했다. 반대편에서도 또 다른 수비수가 퇴로를 차단하며 덮쳐왔다. 샌드위치처럼 끼여 뼈가 으스러질 위기였다.
관중석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송원고 벤치의 박한솔 감독은 이가 부러질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바로 그 순간, 은우의 스케이트 날이 기괴한 각도로 꺾였다.
사아아아악-!
경이적인 소리가 빙판을 긁었다. 은우는 몸의 무게중심을 완벽하게 뒤로 눕히며, 스케이트 날의 바깥쪽 에지만을 이용해 관성을 극단적으로 제어했다.
`[스페셜 스킬 기동: 무마찰 제로 그라비티]` `- 관성 제어율: 98%` `- 순간 감속 및 회전 반경 최적화.`
몸이 얼음판과 거의 수평을 이룰 정도로 기울어졌다. 날카로운 회전각이 그려지며 은우의 몸이 미끄러지듯 뒤로 빠져나갔다. 물 흐르듯 유려하고, 마찰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듯한 기적적인 스케이팅이었다.
“뭐, 뭐야?!”
배진태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눈앞에 있던 은우가 연기처럼 사라진 느낌이었다. 이미 최고 속도로 가속을 붙인 배진태와 도봉고의 수비수는 스스로의 무시무시한 관성을 제어할 방법이 없었다.
콰아아앙-!
엄청난 파열음이 링크를 강타했다.
서로를 향해 돌진하던 도봉고의 두 거구가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었다. 뼈와 뼈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이어서 안전 펜스에 처참하게 격돌했다.
쿵! 쿠당탕!
“커헉!” “으아악!”
두 명의 수비수가 펜스 뒤집힌 인형처럼 얼음판 위 꼴사납게 뒹굴었다. 그들이 들고 있던 스틱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스스로의 무식한 가속을 이기지 못하고 자멸한 꼴이었다.
관중석에서 폭발적인 함성과 환호가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 “말도 안 돼! 저걸 피해?!” “이은우! 방금 스케이팅 뭐야? 예술이다!”
은우는 유유히 스케이트 날을 바로 세우며 일어섰다. 몸싸움을 걸어오던 불량배 체육 특기생들이 얼음판 위에 쓰러져 신음하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에는 한 톨의 동정도 없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하는 법이지.”
은우는 지후가 뒤로 흘려준 퍽을 가볍게 가로챘다.
상대의 수비 진영은 완벽하게 붕괴되어 있었다. 가로채기 성공. 유유히 퍽을 몰고 나가는 은우의 눈앞에 광활한 오픈 아이스가 펼쳐졌다.
도봉고의 골리가 당황해 자세를 낮췄지만, 은우의 뇌는 이미 골리의 미세한 틈새를 포착하고 있었다.
`[골리 가랑이 사이 오픈 각도: 14도]` `[슛 성공 확률: 92%]`
탁!
은우의 스틱 깃이 퍽을 가볍게 때렸다. 퍽은 빙판을 스치듯 날아가 골리의 가랑이 사이를 정확히 통과했다.
철망을 흔드는 경쾌한 소리.
촤아악-!
[GOAL! 송원고등학교 득점! 1 - 0!]
전광판의 숫자가 눈부시게 박혔다. 관중석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몰락했던 송원고가 리그의 거친 도살자라 불리는 도봉고를 상대로 선제골을 뽑아낸 순간이었다.
“해냈어! 은우야!”
지후가 달려와 은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포효했다. 송원고 벤치에서도 선수들이 펜스를 두드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은우는 기뻐하기보다, 빙판 위에서 신음하며 일어서는 도봉고 선수들의 표정을 살폈다. 특히 주장 배진태의 얼굴은 독기로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배진태는 깨진 이 틈새로 피를 뱉어내며 은우를 노려보았다.
“저 새끼... 진짜 죽여버린다.”
그들의 눈빛은 이미 스포츠맨십을 완전히 상실한, 굶주린 들개의 그것과 같았다. 한성고로부터 받은 지령을 완수하지 못하면 자신들의 미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들의 절박한 발악이었다.
경기는 더욱 거칠어졌다.
도봉고는 이제 퍽을 쫓는 것이 아니라, 오직 송원고 선수들의 몸을 부수기 위해 스틱을 휘둘렀다. 쾅, 콰앙! 끊임없이 들려오는 둔탁한 충돌 소리.
지후는 온몸으로 퍽을 막아내며 리드 라인을 지켰다.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지후는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지후 이 녀석, 너무 무리하고 있어.’
은우는 장부를 통해 실시간으로 지후의 마모도를 체크했다.
`[동료: 민지후]` `- 어깨 관절 마모도: 42% (경고)` `- 허벅지 근육 피로도: 58% (주의)`
“지후야! 템포 늦춰! 굳이 무리해서 들어갈 필요 없어!”
은우가 소리쳤지만, 경기장의 거대한 함성 소리에 묻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송원고가 승기를 잡고 2대 0으로 앞서나가는 2피리어드 후반.
도봉고의 공격을 차단한 은우가 다시 한번 역습 기회를 잡았다.
날카로운 스케이팅으로 상대의 블루라인을 돌파하는 순간, 도봉고의 백업 공격수 한 명이 무서운 속도로 은우의 경로를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것은 미끼였다.
진짜 노림수는 은우가 아니었다.
은우의 시야에 들어온 뜻밖의 궤적. 도봉고의 또 다른 백업 공격수가 퍽이 없는 반대편에서 은우를 향해 달려가던 민지후의 등 뒤로 무섭게 접근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명백한 악의가 서려 있었다.
그의 스틱이 향한 곳은 퍽이 아니었다. 무방비 상태로 달리고 있는 민지후의 오른쪽 허벅지 뒤편, 인대가 가장 취약한 부위였다.
`[!!! 경고 !!!]` `[동료 민지후에게 치명적 물리 외력 접근 중]` `[예상 부상 궤적: 대퇴사두근 파열 및 무릎 십자인대 손상 확률 95%]` `[영구적 손상 위험 감지]`
“안 돼...!”
은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무자비하고 무질서한 폭력의 궤적이 은우의 장부에 붉은색 실선으로 선명하게 그려졌다.
스틱이 골프채처럼 허공을 크게 그리며 민지후의 다리를 향해 날카롭게 내리꽂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