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아아앙!
빙판을 긁는 날카로운 에지 소리가 귓가를 찢었다.
뇌리를 때리는 감독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링크의 냉기보다 더 차갑게 은우의 가슴에 박혔다.
“기어 나가서 웜업 존에 처박혀 있어.”
박한솔 감독의 단호한 선언은 타협을 불허하는 벽이었다.
은우의 시야 전면에 붉은색 경고등이 미친 듯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위기 상황 발생!] [주전 배제로 인한 커리어 진행 불가 확률: 74.2% → 78.5% 상승 중!] [우측 무릎 관절 마모도: 12.1% (적색 경고 유지)]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이 고동쳤다. 턱관절이 부서져라 악물어졌다.
회귀하자마자 완벽한 골을 터뜨렸다. 30초 만에 상대 수비를 바보로 만들며 얼음을 갈랐다. 그런데 돌아온 결과가 고작 주전 배제라니.
머릿속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열기가 시야를 붉게 물들였다. 10년 전, 무릎이 터져 나가며 강제로 은반을 떠나야 했던 그 절망의 순간이 겹쳐 보였다. 여기서 밀려나면 끝장이다. 은퇴라는 파멸의 궤도로 다시 미끄러질 수는 없었다.
은우가 차가운 스틱을 쥔 손가락에 터질 듯 힘을 주었다.
그때였다.
덥석.
두껍고 투박한 장갑이 은우의 어깨를 묵직하게 내리눌렀다.
“…….”
돌아본 곳에는 민지후가 서 있었다. 지후의 거친 숨결이 헬멧의 쇠창살 틈새로 하얗게 흩어졌다. 입술을 너무 세게 깨문 탓인지, 그의 아랫입술 끝에 붉은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지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은우의 어깨를 더 꽉 쥐었다. 그 우직한 힘에 은우의 팽팽하던 긴장이 뚝 끊어졌다.
“은우야. 가자. 일단 나가자.”
지후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은우는 침묵을 지키며 스틱을 고쳐 잡았다. 스케이트 날을 돌려 웜업 존으로 향하는 걸음걸이마다 얼음 파편이 서걱거리며 밟혔다. 벤치 뒤편의 좁고 어두운 공간. 그곳이 지금 이은우에게 허락된 전부였다.
지후가 슬그머니 은우의 옆으로 다가와 펜스에 몸을 기대었다. 링크 위에서는 2피리어드 훈련이 다시 시작되어 퍽이 빠르고 무겁게 튀는 소리가 사방을 울리고 있었다. 팍! 팍! 퍽이 펜스에 부딪힐 때마다 진동이 발끝을 타고 올라왔다.
“너 감독님 미워하지 마라.”
지후가 헬멧을 벗어 벤치에 툭 내려놓으며 웅얼거렸다. 그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차가운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뭐가 말입니까.”
은우의 목소리는 감정이 배제되어 있었다. 철저하게 온도가 내려간 냉동고 같았다.
“감독님이 저러시는 거, 너 다칠까 봐 저러시는 거야. 진짜로.”
지후가 입술을 다시 한번 깨물었다. 그의 눈동자에 깊은 그늘이 내려앉았다.
“너 작년에 우리 팀 어땠는지 기억 안 나냐? 태성이 형, 윤우 형, 그리고 민재 형까지…… 전부 한성고 새끼들이랑 붙다가 무릎 나가고 어깨 깨져서 하키 접었어. 우리 학년 중에도 벌써 반은 운동 치료실에서 살고 있잖아.”
지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우리 팀 장비 꼬라지 봐라. 숄더 패드는 다 터져서 스펀지가 기어 나오고, 스케이트 날은 갈 돈이 없어서 무뎌진 지 오래야. 그런 몸으로 한성고 놈들의 그 무지막지한 바디체크를 받아내다가 다들 부서졌어. 감독님, 작년에 민재 형 응급실 실려 갈 때 병원 복도 구석에서 담배 피우면서 우시더라. 자기가 능력이 없어서 애들 몸뚱이를 고기방패로 썼다고.”
은우의 시선이 지후의 옆모습에 머물렀다.
지후의 넓은 어깨 위로 장부의 반투명한 텍스트가 떠올랐다.
[싱크로 후보 대상: 민지후 (DF/FW)] [우측 무릎 관절 마모도: 45.3%] [좌측 어깨 회전근개 부하: 68.1% (주의)] [부상 위험도: 32.5% (바디체크 허용 시 급증 위험)]
그랬다. 송원고 하키부는 이미 만신창이였다. 깨진 유리 조각들을 억지로 이어 붙여 은반 위에 올려놓은 형국이었다. 박한솔 감독에게 하키는 이제 승리의 스포츠가 아니라, 아이들의 신체가 파괴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가혹한 생존 게임이었던 것이다.
“네가 아까 혼자 치고 나갈 때 말이야.”
지후가 은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진짜 멋있었어. 미친 새끼처럼 빠르더라. 그런데 감독님 눈에는 네가 언제 부러질지 모르는 얇은 유리칼처럼 보였을 거야. 상대 수비가 들이받으면 그대로 산산조각 날 것 같은데, 동료들한테 패스도 안 하고 혼자 몸을 던지니까. 그래서 화를 내신 거다. 널 미워해서가 아니라, 너마저 병원 침대에 눕는 꼴을 보기 싫으셔서.”
우직하고 단순한 녀석의 위로였지만, 그 안에는 송원고 하키부가 짊어진 묵직한 패배감과 공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은우는 대답 대신 시선을 돌려 펜스 너머의 링크를 바라보았다.
‘내가 너무 내 몸만 사렸나.’
그것은 은우의 결함이었다. 과거 무릎 파열로 은퇴해야 했던 트라우마. 그 지독한 공포증이 은우로 하여금 극단적인 이기적 플레이를 고집하게 만들었다. 동료를 믿지 못하고, 오직 장부가 그려주는 자신만의 안전한 스케이팅 라인만을 쫓았던 결과가 바로 이 주전 배제였다.
하지만 은우는 포기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면 방식을 바꾼다.’
혼자서 모든 충격을 피하며 골을 넣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팀 전체를 움직여 충격을 분산시키면 된다.
훈련이 끝난 직후, 은우는 땀에 젖은 유니폼을 벗지도 않은 채 송원고 트레이닝실로 향했다.
트레이닝실은 열악함 그 자체였다. 낡은 벤치 프레스는 녹이 슬어 붉은 가루가 떨어졌고, 요가 매트는 여기저기 뜯겨 나가 내부의 스펀지가 보였다.
그 좁고 퀴퀴한 방 한가운데서 서아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은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흰 가운 아래로 단정하게 묶은 머리가 그녀의 깐깐한 성격을 대변했다.
“누워.”
아린이 틱틱거리는 말투로 침대를 가리켰다. 은우는 조용히 침대에 걸터앉아 오른쪽 다리를 뻗었다.
아린의 차가운 손가락이 은우의 무릎 주변을 정밀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슬개골 아래쪽을 꾹 누를 때마다 미세한 신경통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스케이팅할 때 가속 각도가 비정상적으로 깊어. 날을 빙판에 억지로 처박으면서 회전력을 만들어내고 있잖아. 무릎 외측 인대에 가해지는 부하가 일반적인 고등학생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어. 너 이대로 한 달만 더 타면 인대 늘어나는 걸로 안 끝나. 파열이야.”
아린의 분석은 정확했다. 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장부의 수치가 예민하게 요동쳤다.
[경고! 우측 무릎 슬개건 마찰 계수 상승.] [신체 마모도 실시간 동기화 중……]
“알고 있습니다.”
은우가 무표정하게 답했다.
“알면서 그렇게 타? 바보야? 네 몸이 무슨 강철로 만든 줄 알아?”
아린이 미간을 찌푸리며 심박계와 체온계를 은우의 이마에 들이댔다.
“심박수 안정기 기준 52. 운동 직후인데도 회복 속도는 엄청 빨라. 피지컬 엔진 자체는 괴물 수준인데, 왜 이렇게 스스로를 깎아먹는 방식으로 타는지 이해가 안 가네. 전술적인 선택이라기엔 너무 가학적이야.”
은우는 그녀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트레이닝실 구석의 어두운 골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은 부서진 장비들과 쓰지 않는 낡은 박스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는 창고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그 대형 먼지 더미 아래,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하고 육중한 기계의 실루엣이 은우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스르륵.
장부의 푸른색 스캔 레이저가 은우의 시야를 가로지르며 그 기계를 훑었다.
[특수 영양/물리 장비 감지!] - 명칭: 대학 연구용 초고주파 진동 파동 수치 치료기 (미작동 상태) - 현재 상태: 전력 차단, 내부 전도체 먼지 고착화율 88% - 분석 결과: 특정 주파수(432Hz~440Hz) 동조 시, 미세 신경 전도율 회복 효과 발현 가능. - 예상 피드백: 사용 시 환상통 임계치 +15% 일시 완화 효과 및 근섬유 복원 속도 2배 가속.
은우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환상통 일시 완화.
인간의 한계를 넘는 플레이를 펼칠 때마다 뇌를 갉아먹던 그 끔찍한 가짜 통증을 제어할 수 있는 열쇠가 저 구석에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린이 대학 연구 시절 쓰다가 처박아 둔 기기가 분명했다.
“저 기계, 작동합니까?”
은우가 턱끝으로 골방 구석을 가리켰다. 아린이 고개를 돌려 먼지 쌓인 기계를 바라보더니 귀찮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아, 저 쓰레기? 내 대학원 논문용 기계였는데, 주파수 출력이 너무 불규칙해서 폐기 처분하려던 거야. 전기 자극 수치가 너무 미세해서 일반적인 물리치료에는 아무 쓸모도 없거든. 왜, 저 먼지 구덩이에 관심이라도 생겼어?”
“아닙니다. 그냥 신기해서요.”
은우는 무심하게 대답하며 장부의 메모리에 해당 기기의 전기 자극 주파수 데이터를 정밀하게 기록해 두었다.
지금 당장은 쓸 수 없지만, 한계치에 다다랐을 때 저 기계는 자신의 구명줄이 될 것이다.
‘이제, 진짜 문제를 해결해 볼까.’
아린이 검진을 마치고 차트를 정리하러 나간 사이, 은우는 트레이닝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장부의 시스템을 강제로 호출했다.
윙-!
고주파 음과 함께 은우의 의식 속에서 거대한 홀로그램 장부가 펼쳐졌다. 장부의 가장 깊은 곳, 굳게 잠겨 있던 붉은색 자물쇠 아이콘이 명멸하고 있었다.
[시스템 락(Lock) 해제 조건 충족.] - 조건: 팀의 붕괴 위기 인식 및 자신의 전술적 한계 도달. - '동료 싱크로 계약(Sync-Link)' 기능을 개방하시겠습니까?
‘개방해.’
은우가 마음속으로 명령을 내렸다.
바지직!
시야를 가득 채운 푸른색 스파크와 함께 자물쇠가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어서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은우의 뇌세포로 직접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료 싱크로 계약 기능이 완벽 활성화되었습니다.] [본 기능은 등록된 동료의 실시간 피지컬 상태(관절 마모도, 근육 피로도, 부상 확률)를 자신의 장부에 실시간 동기화합니다.] [싱크로 효과:] 1. 동료의 안전 경로 가시화: 동료가 부상을 입지 않고 최적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스케이팅 및 패스 라인을 푸른색 궤적으로 표시. 2. 마모도 분산 법칙: 자신이 감당해야 할 물리적 압박 및 충돌 부하를 동료들의 유기적인 패스 워크와 포지셔닝을 통해 공간적으로 분산 소멸시킴. (환상통 발생 확률 최고 45% 감소) 3. 단, 동기화 인원이 늘어날수록 사용자 본인의 정신력 소모 및 환상통 임계치 압박이 실시간으로 증가합니다.
은우의 입꼬리가 천천히 비틀려 올라갔다.
전율이 척수를 타고 짜릿하게 흘렀다.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이 찾던 완벽한 하키의 해답이었다.
기존의 스포츠 회귀물들이 주인공 혼자서 미친 피지컬로 전장을 쓸어버리는 일차원적인 폭주에 그쳤다면, 이 장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지배를 제안하고 있었다.
팀원들 전체를 자신의 부상 회피 도구이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강력한 유기 무기로 업그레이드하는 것.
송원고라는 깨진 유리 조각들을 가장 단단하고 날카로운 강철 칼날로 제련해 내는 오너십.
은우는 즉시 동기화 대상 목록을 띄웠다.
[싱크로 등록 대기 목록:] - 민지후 (DF/FW) : 동기화 확률 95% (적합도: 최상) - 김태민 (C) : 동기화 확률 78% (적합도: 보통) - 이준서 (GK) : 동기화 확률 82% (적합도: 양호)
‘전원 등록.’
쉬이이익!
장부의 푸른색 선들이 뻗어 나가 송원고 부원들의 이름 위에 연결 고리를 만들었다.
그 순간, 은우의 머릿속에 송원고 하키부 전원의 신체 데이터가 실시간 입체 지도로 재구성되었다. 누구의 왼쪽 발목이 약하고, 누구의 오른쪽 어깨 회전력이 무뎌졌는지, 그리고 어떤 타이밍에 패스를 찔러 넣어야 그들이 다치지 않고 최고의 슛을 날릴 수 있는지.
모든 패스 루트가, 모든 충돌 회피 경로가 기하학적인 수식과 푸른색 광선으로 링크 위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더 이상 강태훈의 무자비한 바디체크를 두려워하며 도망칠 필요가 없다. 동료들을 방패로 삼고, 그들을 가장 날카로운 창으로 부려 빙판을 지배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이은우가 완성할 '부상 확률 0%'의 불멸의 전술이었다.
* * *
다음 날 오후.
송원고등학교 하키부 전용 연습 링크장.
탁하고 매캐한 파스 냄새와 얼어붙은 습기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송원고 선수들이 빙판을 지치고 있었다. 박한솔 감독의 호각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삑-!
“정리하고 벤치로 모여!”
선수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하나둘 펜스 앞으로 모여들었다. 은우 역시 웜업 존에서 벗어나 링크 구석에서 스케이트 날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제 장부의 싱크로 기능을 실전에 대입해 보려는 찰나였다.
그때였다.
쿵-! 쿵-!
체육관 입구의 육중한 철문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거칠게 열렸다.
차가운 겨울바람과 함께 이질적이고 압도적인 아우라가 링크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송원고 선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입구 쪽으로 향했다. 훈련을 지도하던 박한솔 감독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라? 여기가 그 말로만 듣던 송원고 도살장인가?”
오만하고 끈적한 목소리가 얼어붙은 링크의 공기를 가르고 날아왔다.
검은색과 붉은색이 강렬하게 대비되는 초호화 유니폼. 가슴팍에 선명하게 새겨진 황금색 독수리 문양.
전국 고교 하키의 절대 존엄이자, 빙판 위의 포식자로 군림하는 '한성고등학교' 하키부였다.
그들의 중심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거구의 피지컬. 양어깨의 숄더 패드가 터질 듯 솟아오른 사내. 합법적인 폭력을 즐기며 수많은 선수의 커리어를 끝장내 온 한성고의 주장, 강태훈이었다.
그의 옆에는 안경을 쓸어 올리며 비열한 미소를 짓고 있는 지략가, 윤성현이 함께 서 있었다.
“여전히 퀴퀴한 냄새가 나는군. 장비도 다 터져 나가는 쓰레기 조각들을 쓰고 있고.”
윤성현이 코를 킁킁거리며 송원고의 낡은 펜스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너희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
민지후가 스틱을 바닥에 쾅 찍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강태훈은 지후를 안중에도 없다는 듯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가학적인 시선은 오직 한 사람, 은반 구석에 고요히 서 있는 이은우에게 꽂혀 있었다.
질근.
강태훈이 입안의 껌을 씹으며 비열하게 웃었다.
“송원고에 쓸 만한 장난감이 하나 들어왔다는 소문을 들어서 말이야. 어떤 천재 새끼가 혼자서 발광을 한다던데.”
강태훈이 천천히 스케이트를 신은 발을 빙판 위로 디뎠다. 서걱, 하는 묵직한 마찰음이 링크 전체를 압도했다.
은우의 시야에 강태훈의 스탯과 장부의 붉은 경고가 요동치며 떴다.
[적대 대상 감지: 강태훈 (한성고 DF)] [피지컬 등급: S- (고교 최상급 체격 및 파워)] [특이 사항: 왼쪽 스케이트 날 아웃코너 장착 각도가 미세하게 2도 휘어짐 (수집 완료)]
강태훈이 송원고 벤치 앞까지 걸어와 박한솔 감독을 내려다보았다.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고압적인 태도였다.
“감독님. 곧 있을 춘계 대회 전에 가볍게 몸풀기나 한번 하시죠. 저희가 특별히 원정까지 와 드렸는데, 연습 경기 한 판 안 해주시면 섭섭하잖습니까?”
“연습 경기……?”
박한솔 감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것은 단순한 제안이 아니었다. 대회 직전, 송원고 선수들의 기를 완전히 꺾어놓고 몸뚱이를 박살 내놓겠다는 가학적인 선전포고였다.
윤성현이 뒤에서 비웃음을 흘리며 덧붙였다.
“설마 무서워서 도망치시는 건 아니겠죠? 명색이 과거의 명문이라면서, 후배들 앞에서 꼬리 내리는 꼴 보여주면 애들 교육에 안 좋잖아요.”
송원고 선수들의 얼굴에 공포와 굴욕감이 동시에 교차했다. 작년에 저 괴물들에게 들이받혀 선수 생명이 끝난 선배들의 얼굴이 떠오른 탓이었다.
강태훈이 은우를 향해 스틱을 겨누며 도발했다.
“어이, 천재 분들. 도망칠 거면 지금 기어 나가든가. 빙판 위에서 질질 짜면서 실려 가기 싫으면 말이지.”
그 오만한 비웃음이 링크를 가득 채운 순간.
은우가 천천히 스케이트 날을 돌렸다. 서걱.
그의 시야에 떠오른 장부의 화면이 푸른색 빛을 뿜어내며 기하학적인 전술 매트릭스를 완성해 가고 있었다.
[동료 싱크로율: 100% 가동 준비 완료.] [한성고 전술 패턴 분석 중……] [첫 번째 유효 반격 경로가 생성되었습니다.]
은우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호선을 그렸다.
‘기어 들어온 건 너희들이다.’
완벽한 사냥판이 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