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진짜 도살장이 뭔지 보여줄게. 네 그 잘난 다리가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고.”

강태훈의 목소리가 복도의 눅눅한 공기를 찌르며 가라앉았다.

그의 입가에 걸린 비열한 미소는 사냥감을 구석으로 몰아넣은 맹수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거구의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강태훈의 뒷모습을 보며, 은우는 턱을 굳게 깨물었다.

스으으으.

그가 남기고 간 얼어붙은 빙판의 냄새와 짐승 같은 기세가 복도에 잔뜩 고여 있었다.

적막이 찾아온 순간, 은우의 전신이 파르르 떨렸다.

쿵!

가슴속 깊은 곳에서 거대한 해머가 내려치는 듯한 충격이 고동쳤다.

뇌리를 사정없이 짓누르는 이명. 과거, 전성기의 끝자락에서 무릎이 처참하게 으스러지던 그날의 파열음이 환청이 되어 귀막을 찢었다.

드드득. 뼈와 인대가 억지로 뜯겨 나가는 듯한 감각이 척수를 타고 뇌로 직행했다.

“으, 윽……!”

숨이 턱 막혔다. 은우는 급히 오른손을 뻗어 숙소 복도의 거친 시멘트 벽을 짚었다. 손가락 끝이 허옇게 죽어가며 벽지를 긁었다.

눈앞이 붉은색 경고등으로 점멸했다.

`[경고: 극심한 정신적 트라우마 자극으로 인한 환상통(Phantom Pain) 급증!]` `[우측 무릎 관절 마모도: 95% (임계 돌파 위험!)]` `[신경계 피로도: 98%]` `[경고: 통증 한계치 도달. 신체 제어 기능이 저하됩니다.]`

허공에 떠오른 붉은 글씨들이 은우의 시야를 피처럼 붉게 물들였다.

회귀 직후부터 줄곧 은우를 괴롭히던 아킬레스건. 오른쪽 무릎 관절 마모도 상시 12%의 적색 경고등이, 한성고의 폭력적인 기세와 과거의 기억이 맞물리자 단숨에 95%라는 파멸적인 수치까지 치솟아 버린 것이다.

화끈거렸다. 아니, 얼음 송곳으로 무릎 뼈 사이를 사정없이 쑤셔 박는 듯한 극통이었다.

실제로 무릎이 파열된 것이 아니었다. 실시간으로 뇌가 보내는 거짓 통증. 하지만 그 고통의 깊이는 실제 부상보다 더 잔혹하게 은우의 이성을 갉아먹었다.

“하아, 윽…… 하아!”

은우는 결국 벽을 지탱하지 못하고 차가운 리놀륨 바닥 위로 쓰러지듯 고꾸라졌다.

무릎을 가슴팍으로 끌어당기며 몸을 웅크렸다. 이빨을 너무 세게 맞물린 탓에 비릿한 피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결승전이 코앞이었다. 한성고를 무너뜨리고 NHL로 가는 첫 관문을 열어야 하는 이때, 과거의 망령 따위에 발목을 잡힐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절망적인 마비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타다다닷!

그때, 복도 저편에서 날카롭고 다급한 발소리가 고요를 깨뜨렸다.

“이은우!”

탁한 시야 너머로 헐떡이며 달려오는 인영이 보였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있었다. 송원고의 매니저이자 과학적 트레이닝을 고집하는 서아린이었다.

그녀는 바닥에 처참하게 쓰러져 신음하는 은우를 보자마자 차가운 눈매를 사정없이 찌푸렸다.

“또 시작이네. 심박수 오버레이, 호흡 불균형. 뇌 신경계 과부하야!”

아린은 주저 없이 은우의 곁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손에는 이미 기괴한 형태의 휴대용 기기가 들려 있었다. 금속 하우징에 복잡한 케이블이 엉켜 있는, 구형이지만 정밀해 보이는 장치였다.

그것은 송원고 트레이닝실 구석, 대형 먼지 더미 아래 방치되어 있던 아린의 대학 연구용 ‘진동 파동 수치 치료기’였다.

은우는 과거 회귀 초기에 그 장비를 유심히 관찰해 두었었다. 단순한 저주파 물리치료기가 아니었다. 특정 신경 전도율을 교란하고 안정시키는 미세 전기 자극의 수치들이 내장된 특수 장비라는 것을, 은우는 본능적으로 기억해 두고 있었다.

“비켜, 내가…… 세팅할게……”

은우가 갈라진 목소리로 힘겹게 손을 뻗으려 하자, 아린이 그의 손을 탁 쳐냈다.

“가만히 있어! 환자 주제에 어딜 만져? 가만히 숨이나 쉬어!”

그녀는 깐깐한 목소리로 쏘아붙이면서도, 재빠르게 은우의 오른쪽 무릎 바지춤을 걷어 올렸다. 그리고 은우의 무릎 주변에 특수 패치 네 개를 자석처럼 정확한 위치에 밀착시켰다.

위이이잉.

기기에서 미세한 구동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어떤 수치야? 네가 저번에 트레이닝실에서 내 기계 뚫어지게 보고 있었잖아. 분석해 둔 전도율이 있을 거 아냐!”

아린이 패드의 액정을 두드리며 다급하게 물었다. 은우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며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은우는 가물거리는 시야 속에서, 자신의 장부 시스템이 제시하는 최적의 신경 주파수 데이터를 간신히 읽어냈다.

`[추천 진동 파동 수치: 142.8Hz]` `[전류 변조 주파수: 0.4ch]`

“142.8…… 헤르츠.”

은우가 밭은 숨을 토해내며 중얼거렸다.

“변조는…… 0.4로 잡고, 파동은 사인파로 인가해.”

아린의 손가락이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움직였다.

다이얼이 째깍 소리를 내며 돌아갔고, 액정 화면에 푸른색 파형이 정밀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세팅 완료. 들어간다!”

그녀가 붉은색 가동 버튼을 눌렀다.

치리리리릭!

순간, 은우의 오른쪽 무릎 뼈 깊숙한 곳으로 기묘한 진동이 파고들었다.

차가우면서도 찌릿한 미세 전류가 통증이 시작되는 신경의 뿌리를 직접 정밀 타격하는 느낌이었다. 뇌로 향하던 가짜 통증 신호들이 미세한 전기 파동에 가로막혀 흩어지기 시작했다.

거짓말 같은 변화였다.

“……!”

은우의 입에서 길고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불타는 얼음 송곳으로 쑤시는 듯했던 무릎의 극통이 거짓말처럼 씻겨 내려갔다. 신경 세포 하나하나를 짓누르던 팽팽한 긴장감이 느슨하게 풀리며, 안락하고 시원한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눈앞의 적색 경고등이 푸른빛으로 변환되기 시작했다.

`[외부 미세 진동 파동 동기화 완료: 142.8Hz]` `[신경 전도율 안정화 성공!]` `[우측 무릎 관절 마모도: 95% -> 40% -> 15% -> 7% (완전 안전 영역 진입!)]` `[환상통 차단율: 98%]`

“하아…… 하.”

은우는 바닥에 머리를 기댄 채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릎을 짓누르던 붉은 폭풍이 완전히 가라앉고, 시원하고 푸른 에너지가 전신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완벽한 해방감이었다. 회귀 이후 늘 자신을 쾡하게 짓누르던 상시 12%의 미세한 마모도 경고마저, 이 정밀한 진동 치료 과정을 거치며 생애 최저치인 7%까지 떨어졌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어때? 좀 살 것 같아?”

아린이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은우를 내려다보았다. 평소의 냉정하고 까칠한 표정 뒤에 감춰진 깊은 안도와 걱정이 눈동자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은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을 딛는 오른발에 묵직하고 단단한 힘이 실렸다. 통증은 단 1그램도 남아있지 않았다.

“고마워. 살았어.”

은우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굽혔다 폈다. 관절이 부드럽게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완벽했다.

“이 기계, 내일 경기장 락커룸에도 가져가 줘. 경기 직전이랑 인터미션 때 한 번 더 조율하면 완벽할 것 같아.”

“당연히 챙겨야지. 내 연구 성과가 이렇게 괴물 같은 놈한테 쓰일 줄은 몰랐지만.”

아린이 툴툴거리며 장비를 정리했다.

은우는 방으로 돌아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몸 상태는 그 어느 때보다 완벽했다. 장부의 수치들이 푸른빛으로 안정되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머릿속에서 결승전의 체스판이 선명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강태훈.

그 포식자의 오만함과 거친 압박을 역이용할 완벽한 계산식이 은우의 뇌리에서 정밀하게 연산 되었다.

은우는 장부의 메모리 탭을 열었다.

`[정밀 분석 데이터: 강태훈]` `[약점: 왼쪽 스케이트 날 아웃코너 장착 각도 미세 2도 휘어짐]`

강태훈의 치명적인 약점. 그는 합법적인 폭력과 거친 바디체크를 즐기는 포식자다. 무조건 힘으로 상대를 짓밟으려 드는 버릇이 있다. 그렇다면 그가 왼쪽으로 체중을 실어 강하게 들이받으려 할 때, 그 아웃코너의 미세한 각도 결함을 파고드는 역회전 드리프트 라인을 그리면 어떻게 될까?

그의 거구는 자신의 회전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빙판 위에서 처참하게 미끄러질 것이다.

“도살장이라고?”

은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누가 도살당하는지 내일 똑똑히 보여주지.”

***

대망의 결승전 아침이 밝았다.

하늘은 낮게 내려앉아 차가운 납빛을 띠고 있었고, 목동 아이스링크 주변은 이른 아침부터 몰려든 관중들과 대회 관계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학원 하키의 절대 강자, 대기업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는 괴물 집단 한성고등학교. 그리고 폐부 위기에서 기적처럼 살아 돌아온 언덕 위의 반란군, 송원고등학교.

두 팀의 대결은 이미 언론과 하키 팬들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였다.

웅성거리는 로비를 지나 락커룸으로 들어서는 송원고 선수들의 얼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야, 은우야. 진짜 결승이다.”

민지후가 스케이트 끈을 묶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입술을 너무 세게 깨물어 붉은 피가 살짝 맺혀 있었다. 단순하고 우직한 불나방 같은 녀석다웠다.

은우는 지후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동료 싱크로율: 95% (최상)]` `[민지후 어깨 관절 마모도: 18% (양호)]` `[박한솔 무릎 피로도: 22% (양호)]`

모든 동료들의 상태가 완벽히 제어되고 있었다. 은우가 장부를 통해 최적의 전술과 패스 루트를 설계해 온 덕분에, 송원고 선수들은 준결승이라는 가혹한 일정을 소화하고도 최상의 피지컬을 유지하고 있었다.

“긴장할 거 없어.”

은우가 헬멧을 고쳐 쓰며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가 준비한 대로만 하면 이겨. 저들은 힘으로 밀어붙이겠지만, 우리는 그 힘의 균열을 쪼갤 거니까.”

지후가 은우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가슴속에 웅크려 있던 패배감과 두려움이, 은우의 확신에 찬 목소리 한마디에 완전히 씻겨 나갔다.

“그래, 가자! 박살 내버리자고!”

우오오오!

송원고 선수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락커룸 문을 열어젖혔다.

***

쾅!

두꺼운 링크장의 철문이 열리며, 목동 아이스링크의 칼날 같은 냉기가 선수들의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은반 위로 들어서는 순간, 사방을 가득 메운 관중들의 폭발적인 함성이 고막을 강타했다.

“송원고! 송원고!” “한성고! 전승 우승 가자!”

화려한 조명 아래 빛나는 차가운 얼음 대지. 그곳은 온갖 전략과 육체적 충돌이 허용되는 빙판 위의 콜로세움이었다.

은우는 스케이트 날로 얼음을 지치며 빙판 중앙으로 나아갔다.

저편에서 붉은색과 검은색이 조화된 강렬한 유니폼을 입은 한성고 선수들이 위압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며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 190센티미터가 넘는 거구의 사내가 서 있었다.

주장, 강태훈이었다.

태훈은 헬멧 너머로 은우를 발견하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어젯밤, 분명히 심리적 트라우마를 자극해 완전히 무너뜨렸다고 확신했었다. 극한의 공포 속에서 다리를 벌벌 떨며 기어 다녀야 할 은우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맑고 매서운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태훈의 입술이 비틀렸다.

‘허세 부리기는. 기어이 빙판 위로 기어 나왔단 말이지.’

강태훈이 천천히 스케이트를 지쳐 센터 서클로 다가왔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얼음이 깎여 나가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울렸다.

스어어억.

두 팀의 에이스가 센터 서클에서 대치했다.

공기 중에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는 듯한 팽팽한 살기가 락커룸 밖까지 퍼져나갔다.

심판이 양 팀의 센터를 부르며 경기 개시를 알렸다. 퍽을 쥔 심판의 손이 허공으로 올라갔다.

은우는 강태훈의 왼쪽 발끝을 유심히 응시했다.

`[약점 데이터 정밀 궤적 시뮬레이션 가동 중……]` `[성공 확률: 94.2%]`

은우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강태훈.”

은우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진짜 도살장이 뭔지, 이제부터 보여줄게.”

강태훈의 눈동자가 분노로 크게 일렁이는 순간, 심판의 손에서 떨어진 검은색 퍽이 얼음 바닥을 향해 내리꽂혔다.

퍽!

양 팀의 스케이트 날이 얼음을 거칠게 파고들며, 마침내 운명의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