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지금 당장 여의도로 오지. 아스테르의 진짜 목소리를 내 프로그램에서 들려줄 기회를 주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안형준 PD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 전화를 끊은 서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비틀려 올라갔다. 스타더스트의 그 견고하던 방송 출연 차단 카르텔에 마침내 거대한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서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낡은 망원동 지하 연습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가자. 여의도로.”

* * *

사흘 뒤, 서울 여의도 SBS 본사 6층 음악 방송 대회의실.

사방이 통유리로 막힌 회의실 안에는 텁텁한 담배 연기 대신 갓 내린 에스프레소의 쓴 향이 가득했다. 테이블 상석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안형준 PD는 턱을 괴고 서현을 흥미롭다는 듯이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굶주린 맹수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시청률과 화제성이라는 먹잇감을 쫓는 지상파 최고의 반골 PD다웠다.

“한서현 매니저. 자네가 인터넷에서 판을 흔드는 솜씨는 잘 봤네. 대기업의 목줄을 죄어오는 솜씨가 아주 일품이더군.”

안 PD는 툭 던지듯 서류 한 장을 테이블 위로 밀어냈다. SBS <뮤직 챔버>의 이번 주 큐시트 초안이었다. 아스테르의 이름은 당연히 없었다.

“하지만 방송은 실전이야. 스타더스트 최태준 부사장이 예능본부장 라인을 타고 압박을 넣고 있거든. 내가 아무리 반골 소리를 들어도 명분 없이 자네들을 무대에 세울 순 없어. 아스테르가 방송에 나와야 할 ‘확실한 도파민’을 내게 증명해 봐.”

서현은 가볍게 웃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허공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덕질 계정부(Fandom Ledger), 기동.’

[시스템: ‘덕질 계정부’를 활성화합니다.] [소모 정신력: -15 SP (현재 정신력: 45/100)] [경고: 정신력 수치가 반감되었습니다. 가벼운 환각 및 두통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순간 서현의 시야 속으로 푸른빛의 홀로그램 인터페이스가 쏟아져 들어왔다. 망막 위에 정교하게 정렬된 수치들과 그래프들이 실시간으로 요동쳤다.

[커뮤니티 여론 실시간 온도: 91.2°C (끓는점 돌파)] [아스테르 복귀 시 예상 시청률 상승 폭: +2.8% (동시간대 1위 가능)] [타깃 대중 도파민 지수: 97%]

지독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찌르고 들어왔으나, 서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품 안에서 두툼한 서류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툭 던졌다.

“이걸로 명분은 충분할 겁니다, 안 PD님.”

안 PD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봉투 안의 서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훑어내려 가던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커졌다.

서류에 적힌 것은 다름 아닌 수십 개의 IP 주소와 상세한 신상 명세였다.

“이건…….”

“스타더스트 홍보팀 소속의 바이럴 실행 대리인들이 신촌과 홍대 일대의 PC방을 돌며 아스테르의 학폭 누명 글을 작성했던 실시간 채증 자료입니다.”

이 자료는 아스테르의 단 한 명 남은 전설적인 탑시드 홈마이자, 골방의 천재 키보드 워리어인 안세희가 밤을 새워가며 불법 IP 우회 경로를 역추적해 완벽하게 채증해 낸 결정적 물리적 카드였다. 2화에서 세희가 건넸던 그 은밀한 파일이, 마침내 가장 완벽한 타이밍에 스타더스트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맹독으로 탈바꿈한 순간이었다.

“작성자의 맥 주소(MAC Address)와 스타더스트 본사 내부망 로그인 타임라인까지 일치합니다. 법정에서도 즉시 효력을 발휘할 100% 진짜배기 증거물이죠. 제가 이걸 터뜨리는 순간, 스타더스트는 아스테르를 저격할 여력 따위는 없어집니다. 자기들 집구석에 붙은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까요.”

서현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안 PD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 광기 어린 확신이 서려 있었다.

“스타더스트의 압박이 무서우십니까? 아니면 대기업의 횡포에 맞서 싸우는 ‘언론의 정의’와 ‘역대급 시청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거머쥔 전설적인 PD가 되고 싶으십니까?”

안 PD의 입술이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그는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으며 소리 내어 웃었다.

“미친 자식. 마음에 드는군. 좋아, 이번 주 <뮤직 챔버>의 가장 뜨거운 골든타임, 오후 6시 20분을 비워두지. 아스테르의 복귀 무대는 무조건 단독 편성이다.”

* * *

방송 당일, SBS 대기실 복도는 리허설을 준비하는 스태프들과 출연자들로 발 디딜 틈 없이 혼잡했다.

먼지와 스프레이 냄새, 사람들의 땀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극심한 결벽증과 불안 장애를 앓고 있는 서현에게는 그야말로 최악의 환경이었다.

“하아…… 윽.”

서현은 벽을 짚은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아까 전 덕질 계정부를 무리하게 기동한 탓에 정신력 수치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시야가 흐려지고, 주변의 소음이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웅웅거리며 왜곡되어 들렸다. 손끝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잘게 떨렸다.

그때였다.

“형.”

낮고 따뜻한 목소리와 함께, 단단하고 온기 가득한 손이 서현의 차갑게 식어버린 손을 감싸 쥐었다.

고개를 들자 아스테르의 리더 강이온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대 의상인 거친 블랙 레더 재킷을 입은 이온의 눈망울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흔들림이 없었다.

“이온아…….”

“형, 많이 힘들죠? 우리가 다 알아요. 형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위험한 싸움을 하고 있는지.”

이온은 서현의 떨리는 손을 두 손으로 꼭 쥐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 미소에는 어떤 의심도, 불안도 없었다. 오직 매니저를 향한 절대적인 신뢰만이 가득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무대, 우리가 형의 자랑이 될게요. 그러니까 형은 그냥 뒤에서 편하게 지켜보기만 해요.”

[시스템: 담당 아이돌 ‘강이온’과의 진심 어린 교감이 감지되었습니다.] [코어 팬덤 및 멤버들의 ‘덕심 포인트’가 수급됩니다.] [정신력 수치가 즉시 회복됩니다: +30 SP (현재 정신력: 60/100)] [상태 이상 ‘공황 및 환각’이 억제됩니다.]

머리를 짓누르던 무거운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시야가 맑아졌다. 서현은 이온의 따뜻한 손길에 머쓱해진 듯, 급히 손을 빼내며 특유의 뇌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광기 어린 독설을 내뱉었다.

“누가 누구 걱정을 해? 야, 강이온. 네 그 눈부신 얼굴 때문에 방송 카메라 렌즈가 깨질까 봐 내가 걱정하는 거야! 오늘 무대에서 아주 뼈가 부서져라 춤추고 목청이 터져라 노래해라. 대중들 귀를 아주 다 녹여버리지 않으면 오늘 밤 연습실 바닥은 네 눈물로 청소하게 될 줄 알아, 알았어?”

이온은 서현의 험악한 독설에도 전혀 기죽지 않고, 오히려 ‘츤데레 매니저님의 지극한 사랑’이라며 눈을 반짝였다.

“네! 뼈가 부서져라 하고 올게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메인 댄서 백도훈이 자신의 레더 재킷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하게 접힌 노트를 슬며시 꺼내 서현에게 보여주었다. 망원동 지하 연습실 곰팡이 냄새가 밴, 그가 세상을 향한 분노를 랩으로 쏟아냈던 비밀 작곡 노트였다.

“형. 오늘 인트로 랩에 이거 썼어요.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갈게요.”

도훈의 거친 눈빛에는 세상을 향해 들이받을 반골의 에너지가 가득 차 있었다. 서현은 도훈의 어깨를 툭 쳤다.

“그래. 숨기지 말고 다 뱉어내. 대기업 놈들이 씌운 프레임 따위, 네 랩으로 다 씹어 먹어버려.”

* * *

아스테르의 컴백 콘셉트는 정석적인 귀여운 미소년 아이돌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기업의 폭압에 상처 입었으나 절대로 굴복하지 않고 고개를 치켜든 ‘거친 반체제 전사’들이었다. 찢어진 블랙 데님, 거칠게 칠해진 스모키 메이크업, 그리고 타협을 거부하는 눈빛.

리허설 시간이 다가오자, 서현은 다시 한번 덕질 계정부를 켜고 커뮤니티의 실시간 반응을 확인했다.

[시스템: 실시간 중계 스레드 예측치를 계산합니다.] [예상 실시간 중계 스레드: 238,500 건 (폭발적 증가세)]

이미 온라인은 폭풍 전야였다.

- **[더쿠 - 스퀘어]** **제목: 오늘 뮤챔 아스테르 복귀 무대 콘셉트 유출 짤 떴다 ㄷㄷㄷ** 미친 거 아님??? 맨날 스타더스트가 시키던 그 뽀샤시한 파스텔톤 컨셉 어디 가고 갑자기 흑화함??? 블랙 레더에 체인 감고 나옴 ㅠㅠㅠㅠㅠ 개간지 난다 진짜;; - 댓글(421): - 와 대박... 대기업한테 처맞고 독기 품은 거 온몸으로 표현하는 듯 - 이게 진짜 힙합이고 이게 진짜 락이다 ㅋㅋㅋㅋ 존나 기대됨 - 스타더스트가 방송 막으려고 그렇게 발악을 하더니 결국 뚫었네 ㅋㅋㅋ 아스테르 매니저 일 잘한다 진짜

-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 #아스테르_뮤챔_지상파_귀환 #대기업_카르텔_박살 - @aster_love_me: 우리 애들 눈빛 바뀐 거 봐... 억울하게 누명 씌운 놈들 오늘 무대로 다 대가리 깨버리겠다는 의지가 보임 ㅠㅠㅠㅠ 이온아 도훈아 누나가 응원한다!!!

* * *

리허설 시작을 알리는 버저음이 방송국 복도에 울려 퍼졌다. 아스테르 멤버들이 무대 위로 올라가고, 첫 전주가 흐르기 시작했다.

쿵- 쿵- 심장을 울리는 묵직한 베이스 음과 함께 백도훈의 거친 반항적인 랩이 무대를 찢고 나왔다. 강이온의 맑으면서도 단단한 고음이 공중파 스튜디오의 천장을 뚫을 듯이 울려 퍼지자, 현장에 있던 스태프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완벽한 무대였다. 대중의 반골 심리와 도파민을 완벽하게 자극하는,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독보적인 아우라가 스튜디오를 지배했다.

서현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무대가 끝나고 본방송만 송출되면, 스타더스트의 몰락은 시간문제였다.

바로 그 순간.

탁!

대기실 문이 부서질 듯이 거칠게 열렸다.

서현이 고개를 돌리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SBS 예능국장이 서 있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스마트폰에서는 계속해서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국장은 무대 위의 아스테르를 가리키며,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안 PD! 당장 리허설 중단해! 그리고 오늘 출연자 명단에서 아스테르 삭제해!”

스튜디오의 모든 시선이 국장에게로 쏠렸다. 안형준 PD가 미간을 찌푸리며 다가갔다.

“국장님,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미 큐시트 조율 끝났고 무대 리허설 중입니다!”

국장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망적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스타더스트 최태준 부사장이 직접 본부장실로 연락했어! 오늘 아스테르가 단 1초라도 방송에 나가면, 향후 스타더스트 소속 모든 아티스트의 SBS 출연을 전면 보이콧하겠대! 연말 가요대전도, 광고 협찬도 전부 다 빼버리겠다고 협박하고 있다고! 당장 무대 내려!!!”

차갑게 식어버린 정적 속에서, 국장의 일방적인 방송 취소 통보가 스튜디오 전체를 사정없이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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