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엔터."

망설임 없이 내리치듯 누른 검지손가락 끝에서 가벼운 마찰음이 터져 나왔다.

서현의 입꼬리가 삐딱하게 올라갔다. 눈가에는 미세한 경련과 함께 광기 어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스테르의 공식 SNS 비밀번호를 탈취해 로그인한 뒤, 실시간으로 악플이 빗발치던 타임라인 한복판에 새로운 게시물을 투척한 직후였다.

"미, 미쳤어요?! 이걸 진짜 공식 계정에 올린다고?!"

뒤에서 모니터를 훔쳐보던 안세희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제 손으로 키운 아이돌의 종말을 실시간으로 목도한 사람의 절망적인 안색이었다.

하지만 서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눈앞에 떠오른 푸른빛의 [덕질 계정부]가 미친 듯이 연산을 시작하며 사방으로 디지털 노이즈를 흩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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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질 계정부(Fandom Ledger) 동기화 중...] * 대상: 아스테르(ASTER) 공식 트위터/X 채널 * 실시간 여론 온도: -98.4℃ → -81.2℃ (급격한 온도 상승 감지!) * 평판 균열 지수: 94% (경고! 파괴적 전환 진행 중) * 가용 정신력: 45/100 (※주의: 수치 저하 시 공황 발작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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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억울함? 대중은 그런 지루하고 칙칙한 다큐멘터리 따위엔 관심 없어."

서현은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쥐었다. 공황의 전조 증상으로 심장이 갈비뼈 안쪽을 사정없이 두드렸지만,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차분하고 날카로웠다.

"그들이 원하는 건 오직 하나. 씹고 뜯고 맛볼 수 있는 확실한 '도파민'이지. 억울하다고 질질 짜는 해명문 올리는 순간, 우린 그냥 뻔하고 재미없는 가해자가 되는 거야. 하지만 이렇게 판을 뒤집어버리면?"

모니터 화면 속, 방금 업로드된 '사과 영상'의 조회수가 가파른 수직 곡선을 그리며 치솟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반적인 아이돌의 사과 영상이 아니었다.

검은 배경에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뻔하디뻔한 영상이 아니었다. 영상 속 아스테르 멤버들은 연습실의 구질구질한 곰팡이 핀 벽지를 배경으로, 온통 붉은색의 궁서체 자막을 온몸에 주렁주렁 매단 채 덤덤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학폭 의혹 해명? 저희도 저희가 누굴 때렸는지 기억이 안 나서 어제부터 서로 꿀밤 때려보며 물리 치료 임상시험 중입니다.] [마약 혐의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사실 저희는 하루 18시간 연습에 취해 있어서 합법적 찌찌뽕 외에는 그 어떤 강력한 자극도 수용하지 못하는 무방비 상태입니다.]

마치 2000년대 초반의 b급 감성 인터넷 짤방을 그대로 재현한 듯한 자학 개그 영상.

동시에 멤버들의 비주얼만큼은 극강의 퇴폐미와 날것의 날카로움을 고스란히 살려 연출했다. 조명조차 제대로 없는 지하 연습실의 형광등 불빛이 강이온의 콧날을 타고 흘러내려 처연한 그림자를 만들었고, 백도훈의 반항적인 눈빛은 오히려 세상을 비웃는 듯한 힙한 분위기를 극대화했다.

자학적인 멘트와는 대조되는, 심장이 멎을 것 같은 비주얼의 조화.

그 모순이 인터넷 세상을 직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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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시대] 야 방금 아스테르 공식에 올라온 영상 컨셉 미친 거 아님? ㅋㅋㅋㅋㅋ - 익명1: 아 시발 ㅋㅋㅋㅋㅋ 꿀밤 임상시험 뭔데 ㅋㅋㅋㅋㅋ 도파민 개터지네 ㅋㅋㅋㅋㅋ - 익명2: 아니 근데 진짜 비주얼은 개미쳤음... 이온이 얼굴 봐라 저 얼굴로 눈 깜빡이면서 헛소리하니까 존나 홀린 듯이 보게 됨;; - 익명3: 좆소 특유의 쌈마이 감성인데 묘하게 힙함 ㅋㅋㅋㅋㅋ 요즘 애들 감성 저격했네 ㅋㅋㅋㅋㅋ - 익명4: 솔직히 학폭 찌라시도 증거 존나 허접하긴 했잖아. 가해자라고 패던 정병들 단체로 틀딱 꼰대행 됨 ㅋㅋㅋㅋ

[인스티즈] 아스테르 이 영상 뭐야? 신박하다 ㅋㅋㅋㅋㅋㅋㅋ - 익명: 요즘 누가 구구절절 해명문 쓰냐 ㅋㅋㅋ 이게 z세대 감성이지 ㅋㅋㅋ - 익명: 악플러들 저격하는 꼬라지 진짜 개사이다네 ㅋㅋㅋ "합법적 찌찌뽕"에서 침 흘리면서 웃음 ㅋㅋㅋㅋ - 익명: 백도훈 귀걸이 어디 거임? 영상에서 눈빛 개지린다 진짜... 입덕 부정기 올 것 같아 어떡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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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게 반응이 온다고...?"

안세희가 모니터 화면에 코가 닿을 듯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의 마우스 휠을 내리는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아스테르의 모든 게시물은 입에 담지도 못할 악플과 해체 요구로 도배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조롱과 비난의 방향이 기묘하게 비틀려 있었다.

"당연한 결과야."

서현이 비웃음 섞인 독설을 뱉었다.

"인터넷에서 엄숙한 척 정의로운 척 굴던 새끼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게 뭔 줄 알아? 자기가 정의가 아니라 '재미없는 꼰대' 취급받는 거야. 우리가 먼저 루머를 개그로 소비해 버리는 순간, 악다구니 쓰며 학폭이니 뭐니 물고 늘어지던 놈들은 순식간에 '눈치 없이 갑분싸 만드는 옛날 사람'이 되는 거지."

"매니저님..."

낮고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서현의 귓가를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자, 아스테르의 리더 강이온이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로 서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붉어진 눈시울이었지만, 그 안에는 원망 대신 기묘한 열기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저희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주신 거였군요."

"뭐?"

서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온은 가슴팍에 손을 얹으며 한 걸음 다가왔다.

"공식 계정을 해킹한 것처럼 꾸며서 모든 비난의 화살을 매니저님 혼자 뒤집어쓰려고 하신 거잖아요.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면 매니저님만의 독단이었다고 꼬리 자르기를 할 수 있도록... 저희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나쁜 악역을 자처하신 거였어요."

"아니, 난 그냥 내 마음대로..."

"진심 어린 안티와 팬들을 직접 마주하며 피를 말리는 이 싸움터에서, 매니저님은 온몸으로 바람을 막아주고 계셨던 거예요. 저희가 다칠까 봐, 그 차가운 독설 뒤에 이런 뜨거운 사랑을 숨겨두고 계셨다니..."

강이온의 눈에서 마침내 감동의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던 메인 댄서 백도훈마저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귀끝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말은 싸가지 없게 해도... 결국 우리 편이라는 거잖아. 귀찮게 진짜."

'이 미친 긍정 충만 돌아이 새끼들이 도대체 뭘 어떻게 해석하는 거야?!'

서현은 속에서 천불이 나는 것을 느꼈다.

뇌를 거치지 않고 터져 나오려는 독설을 억누르느라 이가 갈렸다. 하지만 그 순간, 머릿속에서 경쾌한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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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알림] * 담당 아이돌 '강이온'의 코어 덕심 대폭 폭발! * 담당 아이돌 '백도훈'의 입덕 부정기 진입 및 신뢰도 상승! * 실시간 '덕심 포인트' 5,000SP 수급 완료! * 한서현의 정신력 수치가 회복됩니다: 45 → 85/100 * 극심한 불안 장애와 공황 전조 증상이 완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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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짓누르던 타는 듯한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머릿속이 맑아졌다.

덕질 계정부의 대가로 깎여 나갔던 정신력이 멤버들의 진심 어린 '덕심' 덕분에 순식간에 채워진 것이다. 비록 이온의 뇌 필터가 우주급으로 고장 나 있긴 했지만, 지금 당장 살기 위해서는 이 기적의 해석을 굳이 부정할 필요가 없었다.

"알았으면 닥치고 연습이나 해. 비주얼은 그럭저럭 쓸만하니까, 다음 무대에서 대가리 박고 노래할 생각이나 하라고."

서현이 쌀쌀맞게 뱉어내자, 이온의 얼굴에 꽃이 피었다.

"네! 매니저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목이 터져라 부르겠습니다!"

그때, 구석에서 조용히 키보드를 두드리던 안세희가 마우스를 쾅 내려놓았다. 그녀의 안경 너머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매니저 언니."

"왜."

"나, LS 뮤직 대표 새끼가 스타더스트랑 뒤로 연락하면서 애들 해체 합의금 챙기려고 했던 거 알고 나서 진짜 다 포기하려고 했었거든요. 이 바닥 다 똑같은 쓰레기들이라고 생각해서."

세희가 품 안에서 낡은 usb 하나를 꺼내 서현의 책상 위로 툭 던졌다.

"근데 언니 보니까 생각이 바뀌었어. 언니는 진짜 미친년... 아니, 진짜 아티스트예요. 이거 가져가요."

"이게 뭔데?"

"내가 PC방 돌면서 아스테르 학폭 폭로글 쓴 새끼들 IP 역추적한 자료예요. 그리고 그 IP 중 세 개가 스타더스트 홍보팀 내선망이랑 일치한다는 채증 자료까지 다 들어있어요."

서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덕질 계정부]의 화면 한구석에서 희미하게 빛나던 복선 연결선이 세희의 손길을 따라 선명한 붉은빛으로 연결되었다. 코어 팬의 정보력과 해킹 능력이 완벽한 무기가 되어 서현의 손아귀에 쥐어지는 순간이었다.

"안세희."

서현이 usb를 꽉 쥐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너 진짜 최고다. 이 은혜는 내 반드시 스타더스트 놈들의 대가리를 깨부수는 걸로 갚아주지."

"꼭 그래줘요. 나 이온이 얼굴 평생 보면서 살아야 하니까."

안세희가 키보드를 거칠게 두드리며 전투 태세를 갖췄다.

서현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덕질 계정부]의 홀로그램 장부가 다시 한번 요동치며 최종 평판 리포트를 출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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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여론 분석 리포트] * 평판 상태: '학폭 가해 돌' → '독특한 도파민 유발자' (포지셔닝 전환 성공!) * 부정 평판 지수: -98.4% → -28.1% (무려 70%p 완화!) * 유저 이탈률: 0.2% (사실상 이탈 차단 및 신규 유입 대기 중) * 핵심 여론: "얘네 진짜 억울한가 봐", "루머 유포한 새끼들 역바이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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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은 완전히 돌아섰다.

구구절절하게 해명하지 않고, 오히려 악플러들의 조롱거리를 '힙한 놀이문화'로 승화시킨 서현의 역발상이 완벽하게 먹혀들어 간 것이다. 이제 아스테르는 단순한 '논란의 아이돌'이 아닌, 대중이 주목하는 '가장 흥미로운 도파민의 축제'가 되었다.

"이제 겨우 한 걸음이야."

서현이 차갑게 읊조렸다.

하지만 승리의 여운을 만끽할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삐- 삐- 삐-!

갑자기 [덕질 계정부]의 푸른 홀로그램 화면이 붉은색 경고등으로 깜빡이기 시작했다. 전례 없는 속도의 데이터 유입이었다. 서현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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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위험 감지(Danger Trigger)] * 평판 오염 지수 급상승 중! * 발신지: 스타더스트 내부 보안 서버 및 주요 언론사 커넥션 * 카테고리: 마약(Narcotics) 프레임 강제 주입 * 타깃: 아스테르 메인 댄서 '백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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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저님! 이거 보세요!"

세희가 비명을 지르며 모니터를 가리켰다.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낯선 단어가 무서운 속도로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 1. 아스테르 백도훈 마약 ] [ 2. 백도훈 이태원 클럽 목격담 ] [ 3. LS뮤직 아이돌 마약 간이 검사 ]

동시에 대형 언론사의 단독 기사가 메인을 장식했다.

[단독] 신인 아이돌 그룹 A사 멤버 B군, 최근 이태원 클럽서 마약류 투약 정황 포착... 경찰 내사 착수

"이, 이게 무슨... 도훈아, 너 이태원 간 적 있어?!"

이온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도훈의 어깨를 붙잡았다. 도훈은 억울함과 분노로 주먹을 꽉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안 갔어... 나 이태원 근처에도 간 적 없다고...!"

백도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대중의 시선이 다시 한번 차가운 살의를 띠고 아스테르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학폭 루머를 간신히 유쾌한 밈으로 돌려세우자마자, 스타더스트의 최태준이 설계한 진짜 '사형 선고'가 그들의 목을 죄어온 것이다.

서현의 눈앞에서 푸른 장부가 핏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최태준... 이 비열한 새끼가 결국 무리수를 던지시는군."

서현이 이를 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빛에서 번뜩이는 광기가 다시 한번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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