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지하 2층의 공기는 늘 축축하고 비릿했다. 망원동 일대의 낡은 빌라 틈새, 하수구 냄새와 곰팡이 꽃이 만개한 콘크리트 벽면 사이로 숨이 턱 막히는 습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한서현은 가슴을 짓누르는 지독한 압박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이 차가웠다. 업계에서 가장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위기관리 전문가에서, 누명을 쓰고 밑바닥으로 처박힌 지 정확히 1년 만이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것처럼 쿵쾅거렸다. 조금만 방심하면 공황 발작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서현은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낡은 철문을 밀어젖혔다. 끼이익, 고막을 긁는 비명이 정적을 깼다.

"……대표님, 정말 이 방법밖에는 없는 건가요?"

방음재가 다 뜯겨 나간 연습실 한구석. 아스테르의 리더 강이온이 젖은 목소리로 읊조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 서 있는 LS 뮤직의 대표 김상덕은 초라하게 어깨를 늘어뜨린 채,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 한 장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속계약 합의 해지 및 그룹 해체 동의서]

그 옆에는 거대 공룡 기획사, 스타더스트 엔터테인먼트의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합의각서가 놓여 있었다. 학폭과 마약이라는 잔인한 누명을 씌워 아스테르를 매장해 버린 주범들이 던져준, 마지막 '자비'의 탈을 쓴 사형선고장이었다.

"이온아. 나라고 이러고 싶겠냐……."

김상덕이 피가 배어 나오는 입술을 깨물며 볼펜을 쥐었다. 손끝이 사시나무 떨듯 흔들렸다.

"스타더스트에서 제시한 위약금 소송 감당 못 해. 이거 도장 안 찍으면 우리 다 신용불량자야. 너희 인생 동과 서를 막론하고 빨간 줄 긋고 시작하게 만들 순 없잖아. 여기서 멈추는 게…… 그나마 너희를 지키는 길이다."

"하지만 저희는 진짜로 마약 같은 거 안 했어요! 학폭도 다 조작된 캡처본이잖아요! 왜 우리가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도망쳐야 하는데요?"

구석에 처박혀 있던 메인 댄서 백도훈이 거칠게 벽을 걷어찼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시멘트 가루가 바스러져 내렸다. 그의 눈에 서린 억울함과 분노는 이미 임계점을 넘어선 상태였다.

그 처절한 절망의 순간, 김상덕의 볼펜 끝이 계약서 서명란에 닿으려 했다.

탁.

구두 굽 소리가 낮게 울렸다. 김상덕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위를 향했다. 그의 손목을 움켜쥔 것은, 언제 들어왔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고요하게 다가온 한서현이었다.

"뭐, 뭐야? 누군데 남의 사무실에……."

"놓아줄 때와 움켜쥘 때를 구분 못 하시는 건 여전하시네요, 김 대표님."

서현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그녀는 김상덕의 손목을 가볍게 꺾어 볼펜을 빼앗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해체 계약서를 집어 들어 찌르르륵, 소리가 나도록 반으로 갈랐다. 가차 없는 손길에 찢어진 종이 뭉치가 바닥으로 흩날렸다.

"미쳤어?! 지금 뭐 하는 짓거리야!"

김상덕이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서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흩어진 종이 조각을 구두 굽으로 짓밟았다.

"대기업이 뱉어놓은 위협용 침 가래에 쫄아서 자식 같은 애들 목줄을 넘겨줘요? 스타더스트의 최태준이 무섭습니까? 그 인간은 애초에 당신네 애들을 살려둘 생각이 없어요. 이 해체서에 도장 찍는 순간, '아스테르는 혐의를 인정하고 도망쳤다'고 대대적으로 기사 나갈 겁니다. 그게 당신이 원하는 '애들을 지키는 길'인가요?"

"그, 그건……!"

"사과하면 지는 판입니다, 여기는. 억울하다고 질질 짜는 순간 대중은 그걸 '유죄의 증거'로 수입하거든요."

순간, 서현의 시야가 기이하게 흔들렸다. 머릿속을 찌르는 극심한 두통과 함께, 허공에 푸른빛의 홀로그램 장부가 펼쳐졌다.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공황의 안개를 뚫고, 오직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덕질 계정부]가 안구 전면에 투사되었다.

---

[덕질 계정부(Fandom Ledger) 가동] * 대상 그룹: 아스테르 (ASTER) * 실시간 여론 온도: -98.4℃ (빙하기 / 절대적 조롱 및 멸시 상태) * 코어 팬덤 이탈률: 99.1% (생존 팬 수: 극소수) * 주요 리스크: 마약 투약 의혹 (진척도 85%), 학폭 가해 프레임 (진척도 90%) * 특이사항: 여론 반전 타이밍 계산 중…… 최적의 루트 도출 완료. * [!경고!] 현재 정신력 수치: 35/100 (가동 지속 시 환각 증세 발생 위험)

---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정신력 수치가 깎여 나가는 서늘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내려왔다. 하지만 동시에 명확한 이정표가 뇌리에 박혔다.

'여론 온도 영하 98도. 완벽한 빙판길이네. 그렇다면 굳이 녹이려 들 필요 없어. 그냥 그 위에서 미끄러지며 춤을 추면 그만이지.'

서현은 가슴을 쥐어짜는 불안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났다. 뇌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광기 어린 주접과 독설의 가면이 그녀의 얼굴 위에 덧씌워진 순간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리더 강이온을 응시했다.

"야, 강이온."

"네, 네?"

"너 거울은 보고 사냐? 지금 그 억울해 뒤지겠다는 눈빛, 아주 미치겠네. 청순한 퇴폐미가 아주 철철 넘쳐흐르다 못해 망원동 하수구를 정화할 기세야. 그 눈빛으로 왜 질질 짜고 있어? 그 와꾸와 그 성대로 대중의 대가리를 깨부술 생각을 해야지, 어디서 해체 도장을 찍으려고 대기 타고 있어?"

"……예?"

강이온은 황당한 듯 눈을 깜빡였다. 옆에 있던 백도훈 역시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너, 백도훈. 방금 벽 걷어차는 각도 봤어? 앵글만 잘 잡았으면 덤블링하면서 스타더스트 본사 유리창 깨부술 기세더만. 그 피지컬로 구석에서 똥 씹은 표정 짓고 있으면 악플러들이 '어머, 무서워라' 하고 도망갈 것 같아? 걔들은 지금 너희가 쫄아 있는 모습을 보며 도파민을 빠는 거라고!"

서현의 목소리가 좁은 연습실을 맹렬하게 휘감았다. 그녀는 연습실 구석, 커다란 카메라 가방을 꼭 쥔 채 숨어 있던 안세희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아스테르의 단 한 명 남은 탑시드 홈마이자, 골방의 키보드 워리어.

"거기 안세희 씨. 손에 쥔 대포 카메라, 그거 장식입니까? 최애가 억울하게 난도질당하고 있는데, 방구석에서 눈물 흘리며 키보드나 두드리고 있을 거예요? 나랑 같이 판 한 번 뒤집어볼 생각 없냐고 묻잖아."

안세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고여 있던 절망이, 서현의 광기 어린 기세에 밀려 점차 경악과 기묘한 불꽃으로 변해갔다.

"매, 매니저님……?"

강이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이상하게도 서현의 그 독설 섞인 주접이 가슴을 뜨겁게 울렸다.

'이 사람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았어.'

이온은 서현의 살기등등한 미소 속에서, 자신들을 구원하러 온 미친 천사의 오라(Aura)를 보았다. 심장이 다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 한서현이야."

서현은 품에서 LS 뮤직 소속 매니저 계약서를 꺼내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던졌다.

"스타더스트의 최태준이 판을 짰다면, 난 그 판을 통째로 불태워버릴 거야.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노잼 해명글 따윈 안 써. 대중이 도파민을 원해? 그럼 아주 뇌가 절여질 정도의 고농도 도파민을 주사해 줘야지. 내가 너희 멱살 잡고 천상으로 올린다. 그러니까 내 밑에서 구를 준비나 해."

그녀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아스테르의 공식 SNS 계정 관리자 페이지가 열려 있었다. 김상덕 대표의 지갑에서 몰래 훔쳐낸 비밀번호로 접속한 상태였다.

"대표님, 그리고 얘들아. 지금부터 K-POP 역사상 가장 힙하고 미친 짓거리를 시작할 테니까, 똑똑히 봐."

현재 인터넷 커뮤니티는 아스테르에 대한 조롱과 비난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

[여성시대] 아스테르 얘네 결국 해체 수순 밟는 듯? ㅋㅋㅋ - ㅇㅇ: 애초에 학폭에 마약까지 터졌는데 활동을 어케 함? - ㅇㅇ: 얼굴은 반반해서 좋아했는데 완전 실망임. 잘 가라 멀리 안 나간다 ㅃㅃ - ㅇㅇ: 기획사도 좆소라 해명도 못 하고 잠수 타는 게 킬포 ㅋㅋㅋ

[디시인사이드 남자 연예인 갤러리] 아스테르 이온 얘 마약 찌든 눈빛 보소 ㅋㅋㅋ - ㅇㅇ(118.23): 눈 풀린 거 보니까 100% 흡입했네. - ㅇㅇ(220.74): 쉴드 치던 정병 팬들도 다 탈덕함? - ㅇㅇ(121.13): 팩트) 이미 스케줄 다 취소되고 오늘내일하는 중.

---

서현은 쏟아지는 악성 댓글들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손가락이 화면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아스테르의 공식 트위터(X) 계정에 새로운 포스트를 작성하는 창이 활성화되었다.

보통의 기획사라면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다'로 시작하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사과문을 올렸을 타이밍.

하지만 한서현은 달랐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백도훈이 거칠게 낙서해 둔 가사 노트를 꺼내 들었다. 세상을 향한 분노와 반항이 가득 찬, 날것 그대로의 가사 구절들. 그리고 강이온이 연습실 소파에 기대어 차가운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미공개 비하인드 컷 한 장을 첨부했다.

[ASTER Official] "우리가 약을 했다고? 그래, 너희들의 그 얄팍한 관심이라는 약에는 취했을지도. 억울해서 우는 건 우리 스타일이 아니라서. 억측은 마음대로 해봐. 우린 우리 갈 길 갈 테니까. #ASTER #COMING_SOON #우리가_진짜_미친놈들이다"

사과 대신 도발. 해명 대신 정면 돌파. 정석을 완전히 깨부수는, 극단적으로 힙하고 자극적인 노이즈 마케팅의 시작이었다.

"미, 미쳤어요?! 이걸 공식 계정에 올린다고?!"

안세희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서현의 손가락은 이미 망설임 없이 '업로드' 버튼을 누른 뒤였다.

"진실이 중요해 보이지? 아니, 대중은 지금 진흙탕 싸움이라는 축제를 즐기고 있는 거야. 그렇다면 우리가 그 축제의 가장 미친 광대가 되어주면 돼."

서현이 고개를 들어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 푸른빛의 [덕질 계정부]가 요동치며, 실시간 여론의 온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

[실시간 반응 감지] * 아스테르 공식 트위터 업로드 10초 경과 * 조회수: 100,000 돌파 * 여론 온도: -98.4℃ → -85.0℃ (급격한 평판 균열 발생!) * 커뮤니티 반응 유형: "이 새끼들 진짜 미친 건가?" / "컨셉 개지린다" / "해명 안 하고 기싸움 오지네"

---

인터넷 세상이 즉각적으로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

[더쿠] 야 방금 아스테르 공식 트위터 올라온 거 봄?????? 미친 거 아님? - ㅇㅇ: 헐 글자 그대로 맑눈광이네 ㅋㅋㅋㅋ 사과문 대신 저격글을 올린다고? - ㅇㅇ: "너희들의 관심이라는 약에 취했다" 시발 오글거리는데 존나 힙하네 ㅋㅋㅋㅋㅋ - ㅇㅇ: 학폭이랑 마약 루머인데 이렇게 당당하다고? 진짜 억울한 거 아냐? - ㅇㅇ: 와 나 방금 이온 사진 저장함 눈빛 미쳤다 진짜;;; 입덕할 것 같음

[네이트판] 아스테르 이 새끼들 정면 돌파 선언함 ㅋㅋㅋㅋ - ㅇㅇ: 좆소 매니저가 미쳤거나 멤버들이 미쳤거나 둘 중 하나다 ㅋㅋㅋㅋㅋ - ㅇㅇ: 근데 솔직히 구구절절 해명하는 것보다 이게 백배 나음. 도파민 존나 터지네 ㅋㅋㅋㅋ - ㅇㅇ: 애초에 증거도 찌라시밖에 없긴 했음. 얘네 행보 흥미진진하다 팝콘 준비해라

---

지하 2층의 퀴퀴한 연습실 안,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것은 종말의 침묵이 아니었다.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 폭풍의 눈 속에 갇힌 듯한 터질 듯한 긴장감이었다.

서현은 미동도 하지 않는 스마트폰 액정 화면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잔인하게 끌어올렸다.

"자, 판은 깔아줬어."

그녀가 아스테르 멤버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제 진짜 쇼를 시작해 볼까?"

그녀의 눈앞에서, [덕질 계정부]의 푸른 홀로그램 장부가 미친 듯이 숫자를 갱신하며 빛나고 있었다. 사형선고를 기다리던 소년들의 눈빛에, 전에 없던 기묘한 생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