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김복순 할머니의 아들, 민우에게서 온 메시지 아래에는 붉은 페인트로 쓰인 글씨가 선명한 강제 철거 예고장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액정 화면을 가득 채운 붉은 글씨가 마치 뚝뚝 떨어지는 핏물처럼 정우의 시선에 박혔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 들어갔다. 겨우 안정을 찾았던 숨소리가 다시 불규칙해지려는 찰나, 정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가늘고 따끔한 통증이 그를 현실로 붙잡아 두었다.

"이게 무슨……."

옆에서 화면을 훔쳐보던 소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들고 있던 대본 뭉치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서류 침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복순 할머니 국밥집이요? 거길 왜? 거긴 엄연히 할머니 명의로 된 땅이잖아요!"

"진정해, 민소희."

정우가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낮게 속삭였다.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냈다는 건, 저들이 내세우는 서류상 근거가 있다는 뜻이야.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맹탕으로 딱지부터 붙이진 않아."

"그럼 어떡해요? 할머니 쓰러지셨다잖아요! 당장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성호가 믹서기 콘솔을 거칠게 짚으며 소리쳤다. 성호의 이마에 핏대가 붉게 솟아올랐다. 금방이라도 당장 튀어 나갈 기세인 두 사람을 향해 정우는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렸다.

"지금 가면 몸싸움밖에 안 돼. 저들이 원하는 게 바로 그거야. 감정적으로 대응해서 법적 효력을 가진 집행관들을 폭행하게 만들거나, 소란을 피워 우리를 불리하게 만드는 것."

정우가 자켓 주머니에서 낡은 수첩을 꺼냈다. 복순 할머니의 장부를 정리해 주며 눈여겨보았던 구절들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회전했다.

할머니의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전, 유품처럼 남겨두었던 오래된 로컬 임대차 계약 대장. 그 낡은 갈색 가죽 표지의 장부 구석에는 분명 정체불명의 이중 부기 흔적이 있었다. 단순한 지출 명세가 아니라, 혜성시의 초기 개발 단계에서 맺어진 명의 수탁 계약에 관한 기밀한 메모였다.

'그 장부의 실체를 완벽히 파악하기 전까지는 함부로 움직여선 안 돼.'

정우는 차갑게 굳은 눈빛으로 화면 속 붉은 딱지를 응시했다.

"성호야. 너 어제 그 스마트폰, 보안 녹음 기능 항상 켜둔다고 했지?"

"어? 어, 내 폰은 스위스제 하이엔드 전용 앱이라 통화는 물론이고 주변 음성까지 실시간으로 암호화돼서 서버에 저장돼. 아버지가 하도 감시를 하니까 내가 따로 깔아둔 건데…… 그건 왜?"

"쓸 일이 있을 거다. 조만간 아주 유용하게."

정우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상대가 비열한 법적 꼼수와 자본의 힘으로 목을 조여온다면, 이쪽 역시 철저한 데이터와 팩트로 그들의 숨통을 끊어놓아야 했다. 감상적인 눈물은 아무런 방패가 되지 못했다.

***

다음 날 오후.

혜성시 외곽, 울창한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고급 일식집 '송죽'의 밀실.

은은한 다다미 향과 가냘픈 대나무 잎사귀 부딪치는 소리가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정갈하게 세팅된 테이블 위에는 빛깔 고운 참치 뱃살 초밥과 전복 회가 얼음 접시 위에 놓여 있었다.

정우의 맞은편에 앉은 사내, 태진 미디어 전략기획실 비서실장 오만식은 여유로운 태도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은빛 테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그의 눈빛은 뱀처럼 차갑고 집요했다.

"한정우 PD님. 혜성 FM 같은 좁은 구석에서 썩기에는 그 기획력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오 실장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저희 강도윤 본부장님께서 정우 씨의 이력을 아주 인상 깊게 보셨습니다. 서울 본사 기획팀 팀장 자리. 그리고 연봉은 지금 받으시는 것에 세 배, 아니 세후 2억 원을 보장해 드리죠."

정우는 젓가락을 들지 않은 채, 테이블 중앙에 놓인 참치 초밥을 묵묵히 응시했다.

오 실장의 뒤편 허공으로, 정우의 시야에만 보이는 푸른빛의 반투명한 격자 장부가 스르륵 펼쳐졌다.

[대상: 태진 미디어 전략기획실 비서실장 오만식] [정서적 은폐 부채: 4억 5천만 원 (내부 배임 및 불법 하도급 자금 세탁 정황)] [솔루션 실행 비용: MP 25 소모] [현재 보유 MP: 100]

정우의 눈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장부의 복식부기 항목들이 빠른 속도로 갱신되며 오만식과 태진 미디어의 어두운 자금 흐름을 여과 없이 토해내기 시작했다.

'역시 그랬군.'

정우는 마음속으로 숫자를 정렬했다.

태진 미디어가 혜성시 중심가의 대형 상가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복순네 국밥집을 비롯한 골목 상권을 강제로 밀어내려던 계획의 실체가 드러났다. 그 배후에는 오만식이 개인적으로 리베이트를 챙기기 위해 설립한 위장 하도급 철거업체 '대호 건설'이 있었다. 법원의 가처분 신청 역시 정상적인 절차가 아닌, 위조된 명의 신탁 서류를 기반으로 한 야바위였다.

"게다가 말입니다."

오 실장이 품 안에서 묵직한 가죽 서류 가방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지퍼를 열자, 빳빳한 신권 백만 원권 다발들이 가득 들어찬 모습이 드러났다.

"이건 주파수 이관 전속 계약에 따른 '침묵 수당'입니다. 현금으로 3억 원입니다. 세금도 붙지 않는 깨끗한 돈이죠. 정우 씨가 이번 주파수 매각 안건에 대해 이사회에서 침묵해 주시고, 혜성 FM의 자진 폐업 서류에 서명만 해 주신다면 이 모든 게 정우 씨의 것이 됩니다."

오 실장은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시골 구석의 작은 라디오 방송국에서 푼돈을 벌며 버티는 젊은 PD에게, 서울 대기업의 요직과 5억 원에 달하는 거금은 거절할 수 없는 독배와 같을 터였다.

정우는 천천히 젓가락을 들어 참치 초밥 한 점을 집었다. 그리고는 아주 느릿하게, 밥알의 식감과 와사비의 알싸한 향을 음미하며 씹어 삼켰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서늘한 감각을 느끼며, 정우는 컵에 담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초밥이 아주 싱싱하네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인생의 선택도 이렇게 고급스럽게 하셔야지요."

오 실장이 만족스러운 듯 안경을 치켜올렸다.

정우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둔탁한 마찰음이 다다미 방의 정적을 깨뜨렸다.

"그런데 오 실장님."

"예, 말씀하시죠."

"이 돈, 그리고 대호 건설로 흘러 들어간 용역비 3억 원 말입니다."

오 실장의 미소가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게 무슨……."

"태진 미디어 이사회 승인 문서에는 이 자금의 출처가 '혜성시 지역 상생 기금'으로 처리되어 있더군요. 하지만 실제로는 실장님 개인 라인에서 집행된, 대표이사 전결조차 거치지 않은 가공의 배임 자금 아닙니까?"

정우의 딕션은 자로 잰 듯 정확했고,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대호 건설이라는 유령 회사를 세워 두고, 국밥집 부지를 강제 수용하기 위해 법원에 제출한 소유권 이전 가처분 신청서. 그거 30년 전 복순 할머니 남편분이 보증을 섰던 사채업자의 가짜 채권 장부를 기반으로 위조한 거잖아요."

오 실장의 안경 너머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잡고 있던 찻잔이 미세하게 떨리며 찻물이 출렁였다.

"당신, 그걸 어떻게……!"

"장부를 굴려 보면 다 나옵니다. 떼먹은 세금과 불법으로 세탁한 자금의 꼬리는 생각보다 길거든요."

정우는 손을 뻗어 테이블 위의 돈 봉투를 수저통 아래로 툭 밀어버렸다.

"고향 사람들 피 빨아서 서울 가는 고속열차 티켓을 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 썩은 돈은 도로 가져가시죠. 그리고 강도윤 본부장에게 전하세요. 혜성 FM의 주파수는 물론이고, 복순네 국밥집의 흙 한 줌도 당신들 뜻대로 가져가지 못할 거라고."

오 실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한정우! 네가 지금 누구를 상대로 이따위 건방을 떠는 줄 알아? 일개 시골 구석 라디오 PD 주제에 감히 태진을 상대로……!"

"상대는 대기업 태진이 아니라, 법을 어기고 횡령을 일삼는 범죄자 오만식 씨, 당신이지요."

정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걸쳤다.

"배임 혐의로 검찰청 포토라인에 서고 싶지 않다면, 당장 그 더러운 손 치우는 게 좋을 겁니다."

밀실 문을 열고 나서는 정우의 등 뒤로 오 실장의 거친 숨소리와 찻잔이 바닥에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

일식집 마당을 나서자, 낡은 백색 경차가 시동을 걸어둔 채 대기하고 있었다.

운전석 창문이 내려가며 소희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녀의 귀에 꽂힌 무선 이어폰에서는 정우의 스마트폰과 연결된 통화 수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우가 방 안의 대화를 실시간으로 소희에게 들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야! 한정우! 너 방금 진짜 미쳤다! 내 속이 다 시원하네!"

소희가 운전대를 탕탕 치며 환호했다.

"오만식 그 인간 얼굴 똥색 되는 거 내 두 눈으로 못 본 게 한이다, 한!"

정우는 조수석에 올라타며 안전벨트를 맸다.

"좋아할 때가 아니야. 저들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밥집을 압박할 거다. 당장 복순 할머니 가게로 가자."

"오케이, 꽉 잡아!"

경차가 낡은 엔진 소리를 뿜어내며 혜성시 중심가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

하지만 승리의 통쾌함은 그리 길지 않았다.

경차가 국밥집이 위치한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정우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자욱한 매연과 길게 늘어선 검은색 승합차들이었다.

"이게 뭐야……."

소희가 다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익 하는 비명 같은 마찰음과 함께 차가 멈춰 섰다.

국밥집 앞 거리는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가죽 재킷을 입고 쇠파이프와 붉은색 락카 통을 든 험악한 덩치 수십 명이 가게 앞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당장 비우라고 했지! 이 할망구야!"

문신이 가득한 거구의 남자가 복순 할머니의 어깨를 밀쳤다. 할머니는 힘없이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로 툭 쓰러졌다.

"엄마! 이 나쁜 놈들아, 손대지 마!"

민우가 온몸으로 덤벼들었지만, 다른 용역 세 세 명에게 붙잡혀 길바닥에 짓눌린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챙그랑-!

가게의 유리창이 무참하게 깨져 나가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붉은색 강제 명도 딱지들이 국밥집의 기둥과 깨진 유리창, 그리고 할머니가 정성스레 닦아두었던 솥단지 위에 사정없이 갈겨 붙여지고 있었다.

"안 돼……!"

소희가 차 문을 열고 비명을 지르며 뛰어나갔다. 정우 역시 차에서 내려 그 아수라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피비린내 나는 폭력과 자본의 거대한 발톱이 그들의 가장 소중한 안식처를 무참히 짓밟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할머니! 정신 차려보세요.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정우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쓰러진 복순 할머니에게 가장 먼저 달려갔습니다. 할머니의 마른 뺨에는 흙먼지가 허옇게 묻어 있었고, 낡은 스웨터 자락은 거칠게 뜯겨 나가 있었습니다. 정우가 할머니의 등을 조심스럽게 받쳐 안자, 곱아든 손가락이 정우의 소맷자락을 부르르 떨며 움켜쥐었습니다.

"정, 정우야…… 우리 영감 가게가……."

"괜찮아요, 할머니. 숨 크게 쉬세요. 제가 왔어요."

정우는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머릿속이 징하게 울리며 예전 대기업 시절 자신을 짓누르던 공황의 그림자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려 했습니다. 하지만 정우는 입술을 짓씹으며 그 어둠을 강제로 밀어냈습니다. 지금 여기서 자신이 무너지면, 이 노인과 이 가게를 지킬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야, 너희들은 뭐야? 영업 방해하지 말고 비켜!"

가죽 자켓을 입은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쇠파이프를 바닥에 직직 긁으며 다가왔습니다. 그가 내뿜는 담배 연기가 정우의 얼굴로 매캐하게 덮여왔습니다.

정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의 눈빛은 일식집에서 오만식 실장을 내려다볼 때보다 더 차갑고 예리하게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스르륵.

사내의 머리 위로 푸른빛의 격자 장부가 펼쳐졌습니다.

[대상: 대호건설 현장소장 임종식] [정서적 결손액: 1억 2천만 원] [숨겨진 진실: 집행유예 기간 중 불법 용역 동원 및 야간 주거침입 준강도 전과 은폐] [솔루션 실행 비용: MP 20 소모]

정우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습니다.

"대호건설 임종식 소장님."

정우가 자로 잰 듯이 정확한 발음으로 사내의 이름을 부르자, 사내의 발걸음이 뚝 멈췄습니다. 칠칠치 못하게 열려 있던 사내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습니다.

"너, 내 이름은 어떻게……."

"법원 집행관도 동행하지 않은 사설 용역의 강제 점유 이전 및 명도 집행은 형법 제319조 주거침입, 그리고 제366조 재물손괴죄에 정확히 부합합니다. 게다가 임 소장님, 특수폭행으로 집행유예 기간이 아직 석 달이나 남으셨던데."

정우는 한 걸음 더 사내에게 다가갔습니다.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반 걸음 물러섰습니다.

"여기서 붉은 딱지 붙이시다가, 본인 인생에 진짜 빨간 줄 하나 더 긋고 싶으신 겁니까? 태진 미디어에서 주는 푼돈 몇 푼에 남은 인생을 감옥에서 보내기엔 억울하지 않으시겠어요?"

"이, 이 자식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법원에서 가처분 결정이 났다잖아!"

사내가 악을 썼지만, 목소리 끝이 잘게 흔들리는 것까지 숨기지는 못했습니다. 주위에서 수군거리던 이웃들이 정우의 당당한 태도에 동요하며 하나둘 휴대폰을 꺼내 들기 시작했습니다. 동영상 촬영 버튼을 누르는 불빛들이 사내의 얼굴을 비추자, 용역들의 기세가 눈에 띄게 꺾였습니다.

"소희야, 민우 씨 데리고 할머니 모시고 안으로 들어가."

정우가 낮게 지시했습니다. 소희와 민우가 서둘러 복순 할머니를 부축해 국밥집 안으로 피신시켰습니다. 정우 역시 그들을 보호하며 안으로 들어선 뒤, 낡은 미닫이문을 걸어 잠그고 쇠창살 빗장을 질렀습니다.

쿵! 쿵! 쿵!

밖에서 용역들이 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가게 안은 성한 집기 하나 없이 난장판이 되어 있었습니다. 찌개 냄새가 정겹게 배어 있던 벽지에는 붉은색 락카 칠이 사정없이 그어져 있었고, 유리 파편이 발밑에서 서글픈 소리를 내며 밟혔습니다.

복순 할머니는 안방 구석 낡은 장롱 밑바닥을 더듬거리더니, 이윽고 때 묻은 보자기 하나를 꺼내 정우의 손에 쥐여주었습니다. 보자기를 풀자 나타난 것은 해진 갈색 가죽 표지의 낡은 장부였습니다. 할머니의 남편이 평생을 기록해 온 로컬 임대차 계약 대장이었습니다.

"정우야…… 그놈들이 법원 서류네 뭐네 하면서 빼앗으려고 했던 게 이거다. 우리 영감이 살아생전에 혜성시 땅 가진 놈들 속사정을 여기 다 적어놨어. 특히 태진 그놈들이 삼십 년 전에 이 땅을 어떻게 가로채려고 했는지 다 적혀 있단다."

정우가 떨리는 손으로 장부를 펼쳤습니다. 빛바랜 종이 위에 삐뚤빼뚤하지만 정갈하게 적힌 숫자들이 빼곡했습니다. 그리고 그 장부를 손에 쥔 순간, 정우의 시야에 거대한 황금빛 알림창이 떠올랐습니다.

[시스템 안내: '김복순 남편의 이중 부기 장부' 정밀 분석 완료.] [숨겨진 진실: 1993년 태진개발(현 태진 미디어의 전신)이 맺은 명의 수탁 계약서 원본 및 채권 소멸시효 완성 사실 확인.] [분석 결과: 현재 태진 미디어가 주장하는 소유권 이전 가처분 신청은 허위 채권에 기반한 기망 행위임이 입증됨. 법적 효력 100% 무효화 가능.]

정우의 눈통자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이 장부만 있으면 태진 미디어가 놓은 덫을 단번에 부수고 역공을 가할 수 있었습니다. 가슴속에 꽉 막혀 있던 응어리가 씻겨 내려가는 듯한 전율이 일었습니다.

그러나 승리의 예감은 찰나에 불과했습니다.

지이이잉-!

정우의 주머니 속에서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진동했습니다. 화면에 뜬 이름은 졸부 윤성호였습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성호의 다급하고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습니다.

- 정우야! 큰일 났어! 진짜 큰일 났다고!

"성호야, 진정하고 말해. 무슨 일이야?"

- 지금 태진 미디어 놈들이 혜성 청춘 FM 송신소로 사람들을 보냈대! 오늘 밤 정오의 위로 생방송 송출 장치 전원을 강제로 내리려고 한단 말이야! 송신소가 저 뒤쪽 팔봉산 꼭대기에 있어서 경비원 한 명밖에 없는데, 지금 깡패 같은 놈들이 들이닥쳤나 봐!

머리를 둔기로 얻맞은 듯한 충격이 정우를 덮쳤습니다.

오늘 밤 방송이 중단된다면 청취율 지표는 폭락할 것이고, 방송국은 법적 기준을 채우지 못해 그대로 폐국 절차를 밟게 될 터였습니다. 저들은 국밥집을 미끼로 던져놓고, 정우의 시선이 쏠린 틈을 타 방송국의 심장인 송신소를 도려내려 한 것이었습니다.

[경고: 극심한 다중 정서적 스트레스로 인해 MP 역류 위험 감지.] [현재 보유 MP: 80 -> 60 -> 45 (급격히 하락 중……)]

숨이 턱 막혀왔습니다. 목구멍이 좁아지며 식은땀이 정우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밖에서는 용역들이 쇠파이프로 미닫이문의 유리창을 마저 깨뜨리며 문을 뜯어내려 하고 있었고, 수화기 너머에서는 송신소가 마비되기 직전이라는 성호의 비명이 메아리치고 있었습니다.

국밥집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남아야 하는가, 아니면 주파수를 지키기 위해 송신소로 달려가야 하는가.

갈기갈기 찢기는 선택의 기로 위에서, 정우의 호흡이 다시 가빠지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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