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비상등이 어둠을 가를 때마다 스튜디오 안은 핏빛으로 물들었다가 다시 칠흑 같은 암전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습니다.
귀를 찢는 듯한 경보음이 고막을 사정없이 두드렸지만, 정우의 폐부는 단 한 모금의 공기도 빨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목구멍에 단단한 돌덩이가 가로막힌 것처럼 숨통이 막혀왔습니다. 리놀륨 바닥의 냉기가 뺨을 통해 스며들었으나, 온몸의 신경은 이미 차갑게 마비되어 갈 뿐이었습니다.
"정우야! 한정우! 정신 차려!"
어둠 속에서 소희의 다급한 비명이 들렸습니다. 그녀의 손길이 정우의 어깨를 붙잡고 거세게 흔들었습니다. 하지만 정우의 시야는 이미 흑백의 노이즈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눈앞에서 깜빡이는 붉은색 경고창만이 그의 마지막 이성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경고: MP가 한계치 이하로 급감했습니다.] [현재 보유 MP: 12 / 100 (극도로 위험)]
"허억…… 흑……."
정우가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며 가슴을 쥐어뜯었습니다. 손끝이 하얗게 질려 곱아들었습니다. 타인의 아픔을 계산하고 구명줄을 던져준 대가는 이토록 혹독했습니다. 뇌가 산소 부족으로 비명을 지르며 모든 사고 기능을 정지시키려 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찰방-!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뼈를 시리게 만드는 얼음물이 정우의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습니다.
"푸하아아아헉!"
정우가 본능적으로 숨을 크게 들이쉬며 상체를 일으켰습니다. 차가운 물줄기가 콧구멍과 목구멍으로 넘어가며 기침이 터져 나왔습니다. 기침과 함께 막혀 있던 숨길이 기적적으로 열렸습니다. 물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정우의 손끝이 잘게 떨렸습니다.
"살았냐? 살았으면 얼른 숨 쉬어! 내 손 잡고, 들숨 날숨! 자, 하나 둘!"
소희가 젖은 정우의 뺨을 가볍게 찰싹 때리며 호흡을 유도했습니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땀 냄새와 먼지 냄새, 그리고 이 작은 방송국을 지키고자 하는 절박한 온기가 묻어났습니다.
"야, 한정우. 너 여기서 죽으면 산재 처리도 안 돼. 내가 네 상여 나갈 때 우리 라디오 시그널 송 틀어줄까? 싫으면 숨 쉬어, 얼른!"
소희의 억척스럽고 거친 농담에 정우는 헛웃음을 삼켰습니다. 차가운 물기와 그녀의 목소리가 닻이 되어 그를 현실로 끌어내렸습니다. 깊은 숨이 몇 번 더 오고 간 뒤에야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서서히 가벼워졌습니다.
[MP: 12 -> 15 (미약한 안정 상태)]
"……어떻게 된 거야."
정우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소희는 그제야 안도한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가, 이내 창밖의 송전탑 쪽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습니다.
"송신소 뒷마당 변압기가 터졌어. 정전이야. 그냥 단순한 고장이 아니야. 누군가 고의로 장비를 건드린 흔적이 있어. 변압기 커버가 강제로 열려 있었다고."
"강도윤……."
정우의 입에서 차가운 이름이 흘러나왔습니다. 태진 미디어의 강도윤. 그가 혜성 청춘 FM의 목을 조르기 위해 결국 이 비열한 수단까지 동원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광고주를 협박해 돈줄을 말리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전파 자체를 죽이려 들고 있었습니다.
정우는 바닥에 흐트러진 서류 더미 속에서 1화 때부터 모아두었던 종이 뭉치를 더듬어 찾았습니다. 태진 미디어가 취소시킨 지역 광고 계약서들. 기획실 출신인 정우의 눈에는 그 계약서들 틈에 교묘하게 끼워져 있던 '독점 규제법 위반 합의서 패턴'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대기업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지역 상인들의 손발을 묶으려 했던 범법 행위의 증거들이었습니다.
'이 개자식들이, 진짜 선을 넘었군.'
정우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차갑게 가라앉았습니다. 이 계약서들은 단순한 쓰레기가 아니었습니다. 법의 테두리를 우습게 아는 대기업의 목덜미를 단숨에 물어뜯을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비수였습니다.
동시에 정우의 머릿속에 또 다른 장부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국밥집 김복순 할머니의 오래된 임대차 계약 대장. 그 낡은 종이 틈에 숨겨져 있던 기묘한 이중 부기의 흔적들. 태진의 위장 자회사가 이 일대 골목을 통째로 집어삼키려 하는 거대한 음모의 단서가 분명했습니다.
"송신이 끊기면 끝이야. 청취율 조사 기간에 방송이 멈추면, 우린 두 번 다시 주파수를 켤 수 없어."
소희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습니다. 그녀는 이미 장비를 점검하겠다며 송신 설비실로 뛰어갈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가서 임시 배선이라도 연결해 볼게. 넌 여기서 쉬고 있어."
"잠깐만, 소희야."
정우가 그녀의 소매를 붙잡았습니다.
"임시 배선으로는 송신기의 고전압을 감당 못 해. 우리에겐 더 확실하고 무식한 방법이 필요해."
정우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습니다. 화면의 불빛이 그의 젖은 얼굴을 비추었습니다. 그가 단축번호를 누르자, 이내 연결음이 울리기도 전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습니다.
- 야! 한정우! 이 시간에 웬일이냐? 내 광고 지표 확인했어? 오늘 내 이름 라디오에서 몇 번 나왔냐?
윤성호였습니다. 3화에서 정우의 팩트 폭격에 두들겨 맞은 뒤, 묘하게 정우에게 길들여져 파트너십을 맺은 지역의 졸부.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거들먹거리는 과시욕이 가득했습니다.
정우는 차갑고 정확한 딕션으로 수화기 너머의 자존심을 긁어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윤 사장님. 지금 사장님 돈이 공중분해 되게 생겼습니다."
-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대기업 태진 미디어 놈들이 혜성시를 우습게 보고 방송국 전기를 끊었습니다. 윤 사장님의 그 대단한 광고가 전파를 타고 나가야 하는데, 저 서울 놈들이 사장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주파수를 짓밟아버렸단 말입니다. 사장님의 위세가 대기업 장난질에 묻히게 생겼는데, 그냥 보고만 계실 겁니까?"
- 뭐, 뭐야? 어떤 새끼들이 내 광고를 끊어?! 감히 내 구역에서 불을 꺼? 내가 혜성시의 윤성호야! 대기업이고 나발이고 내 돈을 우습게 봐?!
수화기 너머에서 씩씩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정우는 쐐기를 박았습니다.
"사장님 아버님이 하시는 소방 설비 업체에 재난 대비용 초호화 자가발전 차량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거라면 우리 방송국 전체를 돌리고도 남을 텐데…… 역시 대기업을 상대하긴 무리겠죠?"
- 무리?! 누가 무리래! 한정우, 너 거기 딱 기다려! 내가 그 대기업 놈들 코를 삐뚤어지게 만들어 줄 테니까!
전화가 뚝 끊겼습니다.
소희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정우를 바라보았습니다.
"너…… 성호 걔를 또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구워삶은 게 아닙니다. 자존심밖에 없는 사람에겐, 그 자존심을 휘두를 가장 화려한 무대를 만들어주면 되는 겁니다."
정우가 엷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로부터 채 10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쿠우우우웅-!
방송국 마당 전체가 흔들리는 거대한 엔진음이 밤공기를 갈랐습니다. 어둠을 뚫고 눈이 부실 정도로 사방을 비추는 서치라이트 불빛과 함께, 거대한 노란색 발전차가 마당으로 들이닥쳤습니다. 타이어 타는 냄새와 함께 급제동한 차량의 문이 열리고, 선글라스를 낀 윤성호가 내렸습니다. 밤인데도 말입니다.
"야! 비켜! 혜성시의 구원투수 윤성호가 왔다!"
성호가 소리치자, 그의 뒤로 건장한 인부들이 일제히 내려 거대한 동력 케이블을 끌어당기기 시작했습니다.
"어디다 꽂으면 돼? 한정우! 대기업 새끼들이 어디 전기를 끊었어? 내 돈 삼억짜리 발전기 맛 좀 보여주지!"
성호의 호령에 인부들이 전력 분전반을 열고 굵직한 케이블을 사정없이 꽂아 넣었습니다.
클릭, 웅-!
발전기가 굉음을 내며 스핀업하기 시작하자, 방송국 건물이 미세하게 떨렸습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정전되었던 스튜디오의 믹서 LED 불빛들이 아래서부터 위로 쿵, 쿵, 쿵 소리를 내며 일제히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붉은 온에어(ON AIR) 등이 스튜디오 안을 따뜻하고 강렬한 빛으로 채웠습니다.
"됐어……! 전원 복구됐어!"
소희가 콘솔 앞으로 달려가 헤드폰을 쓰며 소리쳤습니다.
정우는 젖은 머리를 대충 털어내고 마이크 앞으로 걸어가 앉았습니다. 여전히 가슴 깊은 곳에서 미약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물러설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믹서의 페이더를 힘껏 올렸습니다.
"혜성 청춘 FM, 100.3메가헤르츠입니다."
정우의 목소리가 혜성시 전역의 라디오 스피커를 타고 퍼져나갔습니다. 평소보다 더 낮고, 더 차갑고, 그래서 더 귀에 꽂히는 목소리였습니다.
"방금 전, 저희 방송국의 전파가 잠시 어둠에 갇혔습니다. 대기업 태진 미디어가 이 작은 도시의 숨통을 끊기 위해 비열하게 전기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대기업의 자본보다 더 단단한 이웃의 힘이 이 불을 다시 켰습니다."
정우는 품에서 꺼낸 광고 계약서 사본을 마이크 앞에 툭 내려놓았습니다. 그 소리가 전파를 타고 청취자들의 귀에 가닿았습니다.
"제 손에는 태진 미디어가 우리 지역 상인들을 협박하고, 독점 규제법을 위반하며 체결하려 했던 불법 합의서들이 들려 있습니다. 대기업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법을 우습게 아는 자들에게 경고합니다. 당신들이 꺼뜨리려 하는 것은 한낱 라디오 전파가 아니라, 이 도시 주민들의 삶입니다."
정우의 거침없는 폭로와 팩트 폭격이 이어지자, 스튜디오의 실시간 문자 모니터가 미친 듯이 깜빡이기 시작했습니다.
- [0912님: 라디오가 갑자기 꺼지길래 무슨 일인가 했어요! 정말 나쁜 놈들이네요!] - [하늘바람님: 우리 지역 방송을 대기업이 왜 없애려 합니까? 지켜내야 합니다!] - [국밥러버: 정우 PD님 목소리 엄청 멋있어요! 힘내세요!]
순간, 정우의 눈앞에 떠 있는 '마음의 경영 장부'가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시스템 안내: 실시간 청취자들의 '진심 어린 공감 반응(하트 피드백)'이 대폭 유입됩니다.] [백색 하트 공감 이펙트 주입 중…….]
모니터 화면에서 시작된 눈부신 백색 빛무리들이 정우의 몸을 감싸 안는 듯했습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에너지가 그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꽉 막혀 있던 폐가 시원하게 열리고, 곱아들었던 손가락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보상: MP가 급격히 충전됩니다.] [현재 보유 MP: 15 -> 40 -> 75 -> 100 (완전 복구!)]
온몸을 짓누르던 공황의 어둠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정우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예리하게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멈추지 않습니다. 이 주파수는 여러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정오의 위로를 배달하는 혜성 청춘 FM이었습니다."
오프닝 곡이 흘러나오며 정우가 마이크를 껐습니다.
"후우……."
정우가 길게 숨을 내쉬며 헤드폰을 벗었습니다. 소희가 달려와 그의 어깨를 툭 쳤습니다.
"야, 대박이야! 실시간 동시 접속자 수 최고치 찍었어! 문자 참여율도 평소의 세 배야!"
"거봐, 내가 뭐라 그랬냐? 이 윤성호가 뜨면 안 되는 일이 없다니까!"
성호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으로 믹서실 문을 열고 들어오며 거들먹거렸습니다. 정우는 그 둘을 보며 처음으로 진심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대기업의 강도 높은 압박 속에서도, 결국 연대의 힘으로 첫 번째 큰 고비를 넘긴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승리의 여운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딩동-!
정우의 주머니 속에서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진동했습니다. 개인 메신저로 들어온 다급한 알림음이었습니다.
화면을 켠 정우의 미소가 순식간에 굳어버렸습니다. 보낸 사람은 김복순 할머니의 아들이었습니다. 메시지와 함께 전송된 사진 한 장이 정우의 시야를 가득 채웠습니다.
[형, 큰일 났어요. 지금 엄마 국밥집 문 앞에 정체 모를 덩치들이 들이닥쳐서 강제 철거 딱지를 붙여놓고 갔어요! 법원에 소유권 이전 가처분이 신청됐다면서 당장 비우라는데, 엄마는 지금 충격으로 쓰러지셨어요. 어떡해요, 형?!]
사진 속에는 붉은색 글씨로 선명하게 적힌 '강제 철거 예고장'이 복순네 국밥집 유리창에 사정없이 붙어 있었습니다.
정우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습니다. 대기업의 다음 칼날이 결국 그들의 가장 소중한 안식처를 향해 좁혀오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