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날카로운 팩스 소리가 휩쓸고 간 밤은 길고도 차가웠습니다.

다음 날 아침, 혜성시의 하늘은 낮게 가라앉은 먹구름으로 가득했습니다. 금방이라도 진눈깨비가 쏟아질 것처럼 스산한 바람이 창문을 덜컹덜컹 흔들었습니다. 라디오 스튜디오의 유리창에는 밤새 흘러내린 이슬이 눈물자국처럼 길게 번져 있었습니다.

정우는 스튜디오 조정실 책상에 엎드려 잠시 붙였던 눈을 떴습니다. 뻐근한 목덜미를 짚으며 고개를 들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밤새 차갑게 식어버린 종이컵 속의 아메리카노였습니다. 검게 가라앉은 액체 표면 위로 혜성 청춘 FM의 낡은 형광등 빛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정우야, 너 진짜 괜찮은 거야? 얼굴이 반쪽이 됐어."

민소희가 어깨에 담요를 두른 채 따뜻한 둥굴레차 한 잔을 건넸습니다. 그녀의 눈 밑에도 짙은 피로가 그늘져 있었습니다. 어제 밤새 태진 미디어에서 날아온 강제 명도 소송 예고장을 붙잡고 둘이서 머리를 맞댄 탓이었습니다.

"괜찮습니다. 늘 마시던 쓴 약이라 생각하면 그만이니까요."

정우는 건네받은 컵을 쥐었지만 마시지는 않았습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온기보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차가운 숫자들의 행렬이 더 급했기 때문입니다. 정우의 시야 오른쪽 구석에 옅은 청색 빛을 띠며 떠오른 '마음의 경영 장부'가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갱신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의 경영 장부] - 혜성 청춘 FM 정서적 결손액: 240,000,000원 (지역 상권 붕괴 및 퇴거 위기로 인한 주민 불안도 반영) - 현재 보유 MP: 55 / 100 (주의 단계) - 대기업 법적 침탈 방어 솔루션 가동 비용: MP 35 소모 - 경고: 솔루션 실행 시 MP가 한계치인 20 이하로 떨어져 급성 공황 발작 및 과호흡 증후군이 발생할 위험이 극도로 높음.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저려왔습니다. 대기업 기획실 시절, 밤을 새워 기획안을 짜던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던 숨 가쁜 증상이 목구멍 언저리에서 맴돌았습니다. 하지만 정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가슴을 꾹 눌렀습니다. 지금 물러서면 이 시골 방송국은 물론이고, 자신을 믿고 광고를 맡겨준 국밥집 복순 할머니와 윤성호의 진심마저 태진 미디어라는 거대 자본의 바퀴 아래 깔려 뭉개질 것이 뻔했습니다.

"똑, 똑."

회의실 유리문 너머로 구두 굽 소리와 함께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습니다.

시간은 아침 9시 정각. 법률 대리인치고는 지나치게 정확하고, 동시에 지나치게 거만한 발걸음이었습니다.

회의실 안으로 걸어 들어온 남자는 빳빳하게 풀이 죽은 이탈리아제 맞춤 슈트를 입고 있었습니다. 태진 미디어의 법률 대리인이자, 대형 로펌의 에이스로 이름을 날리는 임현석 변호사였습니다. 그의 뒤에는 두 명의 젊은 어소시에이트 변호사가 두꺼운 서류 가방을 든 채 보좌관처럼 서 있었습니다.

"반갑습니다. 태진 미디어 측 법률 대리인 임현석입니다."

임 변호사는 형식적인 명함을 테이블 위에 툭 던지듯 올려놓았습니다. 그의 시선은 회의실 구석의 칠이 벗겨진 화이트보드와 삐걱거리는 플라스틱 의자를 훑었습니다. 마치 먼지 쌓인 고물상에 들어온 듯한 노골적인 불쾌감이 그의 미간에 서려 있었습니다.

"앉으시죠."

정우는 의자를 끌어당겨 마주 앉았습니다. 옆에 선 소희가 긴장으로 침묵을 지키는 사이, 정우는 테이블 위에 낡은 가죽 서류철 하나만을 덩그러니 올려놓았습니다.

임 변호사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서류 가방에서 붉은색 직인이 찍힌 명도 합의서 서류를 꺼내 정우의 코앞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한정우 임시 본부장님. 대기업 기획실 출신이시라니 말이 잘 통하겠군요. 굳이 법정까지 가서 서로 밑천 드러낼 필요 있겠습니까? 태진 미디어가 이 송신소 부지와 주파수 사용권에 대한 양수 계약을 마친 상태입니다. 여기 합의서에 서명하시고 이번 달 말까지 깔끔하게 짐 비워 주시죠. 안 그러면 무단 점유 기간 동안 발생한 손해배상 청구는 물론이고, 방송 장비 압류 절차까지 밟게 될 겁니다."

임 변호사의 어조는 겉보기에 정중했으나, 그 안에는 거역할 수 없는 자본의 위압감이 서려 있었습니다. 마치 거대한 덤프트럭이 작은 경차를 밀어붙이는 듯한 일방적인 폭력이었습니다.

"손해배상이라……."

정우는 합의서의 자잘한 글씨들을 훑어내렸습니다.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습니다.

"임 변호사님. 법을 공부하신 분치고는 계약의 기본 전제를 아주 가볍게 무시하시는군요. 이 주파수 대역(FM 100.3)은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국가가 공익적 목적으로 혜성 청춘 FM에 부여한 주파수 사용권입니다. 태진 미디어가 송신소 부지를 샀다고 해서 주파수 정식 허가권까지 자동으로 승계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설마 모르고 이 자리에 오신 겁니까?"

임 변호사의 한쪽 눈썹이 미세하게 치켜올라갔습니다.

"행정적 승인은 대기업의 네트워크와 자본력으로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어차피 광고주들도 다 떨어져 나간 유령 방송국 아닙니까? 혜성시의 대기업 광고 집행 비율이 제로에 가깝다는 지표를 이미 확인했습니다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정우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습니다. 사냥감이 쳐놓은 덫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왔을 때 짓는, 지극히 기획자다운 미소였습니다.

"지표라. 역시 대기업 법무팀다우십니다. 오직 보고서의 숫자만 보고 움직이시는군요. 하지만 그 숫자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분석해 보셨습니까?"

정우는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낡은 가죽 서류철을 열었습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반쯤 누렇게 바랜 서류 뭉치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정우가 혜성 청춘 FM에 처음 출근했던 날, 먼지 쌓인 캐비닛 옆 쓰레기통 뭉치 속에서 기획실 특유의 직감으로 골라내 정리해 두었던 '취소된 지역 광고 계약서'들이었습니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정우가 서류 한 장을 손가락으로 툭 쳤습니다.

"지난 1년간 태진 미디어가 우리 방송국을 고사시키기 위해 혜성시의 주요 로컬 광고주들에게 보낸 합의서 양식입니다. 여기 혜성농협, 세종건설, 그리고 영남유통의 직인이 찍힌 계약 취소 합의서들이 있죠. 신기하게도 모든 합의서의 특약 사항 4조 2항에 동일한 문구가 적혀 있더군요."

정우가 서류의 한 구절을 나직하고도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습니다.

"[본 광고주는 태진 미디어 계열사의 모바일 플랫폼 및 전국망 라디오에 광고를 집행하는 조건으로, 타 로컬 방송사(특히 혜성 청춘 FM)에 향후 3년간 어떠한 형태의 광고도 집행하지 아니한다. 이를 위반할 시 기존 집행된 광고비의 3배를 위약금으로 배상한다.]"

회의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습니다. 임 변호사의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어소시에이트 변호사들이 황급히 서류를 들여다보며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건 단순한 기업 간의 패키지 광고 계약 조건일 뿐입니다. 흔히 있는 비즈니스 모델이죠."

임 변호사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반 옥타브 가량 높아졌습니다. 그의 안경 너머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흔히 있는 비즈니스 모델이라고요?"

정우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습니다. 그의 눈빛은 사냥감을 구석으로 몰아넣은 맹수처럼 형형하게 빛났습니다.

"임 변호사님. 공정거래법 제23조 제1항 제5호, '배타적 거래 강요' 행위에 대해 들어보셨을 겁니다. 시장 지배적 사업자가 자신의 지위를 남용하여 거래 상대방이 경쟁 사업자와 거래하지 못하도록 구속하는 행위죠. 대기업인 태진 미디어가 지방의 영세 로컬 방송국 하나를 죽이기 위해 조직적으로 지역 광고주들을 협박하고 배타적 계약을 강요한 이 서류들. 이게 법정에 들어가면 어떻게 해석될 것 같습니까?"

"그건……!"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정우는 임 변호사의 말을 무자비하게 자르고 들어갔다. 그의 목소리에는 상대의 숨통을 정확히 끊어놓겠다는 확신이 실려 있었습니다.

"이 독점 규제법 위반 합의서 패턴은 태진 미디어가 지난 3년간 강원도, 전라도 등 다른 로컬 방송국들을 적대적 인수합병할 때 사용했던 수법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대기업이 골목상권의 목을 죄어 주파수를 강탈해 간 증거가 이 서류 한 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이 계약서 뭉치와 태진의 불법 외압 정황을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하고, 동시에 지상파 뉴스룸과 대기업 갑질 제보 채널에 전격 오픈하면 어떻게 될까요?"

정우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습니다.

"태진 미디어가 추진 중인 전국망 네트워크 확장 사업은 인허가 단계에서 전면 보류될 것이고, 주가는 곤두박질치겠지요. 겨우 이 혜성시의 작은 주파수 하나 뺏으려다가, 수천억 원짜리 본사 사업 전체를 날려버리게 될 텐데. 그 법적 책임을 수임인인 당신들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임 변호사의 얼굴에서 오만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셔갔습니다. 그의 이마에 얇은 땀방울이 맺혀 흘러내렸습니다. 정우가 제시한 서류는 단순한 종이 쪼가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태진 미디어가 그동안 법의 테두리를 교묘히 피해 가며 저질러온 불법 침탈의 가장 확실한 '스모킹 건'이었습니다.

"……이런 서류가 어떻게 아직 남아 있는 거지?"

임 변호사가 신음하듯 중얼거렸습니다. 원래대로라면 태진의 압박을 받은 광고주들이 진작에 파기했어야 할 문서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혜성 청춘 FM의 전임 직원들이 대기업의 횡포에 억울함을 품고 쓰레기 더미 속에 몰래 숨겨두었던 것을, 정우가 기획실 특유의 꼼꼼함으로 찾아내 복원해 두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패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정우는 쐐기를 박듯 말을 이어갔습니다.

"혜성 청춘 FM은 지난주 청취율 조사에서 정오 방송 기준 지역 점유율 2.9%를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어제 윤성호 씨와의 광고 파트너십 체결로 인해 자체 매출 비중은 41.2%를 돌파했습니다. 정부 보조금과 주파수 공익 유지를 위한 법정 기준선인 '청취율 3%와 자체 매출 40%'를 이미 사실상 충족했다는 뜻입니다. 법적으로 우리는 아무런 하자가 없는 정당한 방송 사업자입니다."

정우는 차갑게 식은 둥굴레차 잔을 들어 한 모금 축였습니다. 그리고 서류철을 쾅 닫았습니다.

"돌아가서 강도윤 본부장에게 전하십시오. 법대로 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상대해 줄 테니, 공정위 전원회의장에서 만날 준비나 하라고 말입니다."

정적이 회의실을 지배했습니다. 임 변호사는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서류들을 대충 가방에 쑤셔 넣었습니다. 그의 완벽하던 슈트 매무새는 이미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오늘 일은 본사 법무팀과 다시 검토해 보겠습니다. 가자."

임 변호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의실 문을 열고 도망치듯 빠져나갔습니다. 그의 비서들이 허둥지둥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들의 다급한 구두 굽 소리가 복도 멀리 사라질 때까지, 회의실에는 침묵만이 맴돌았습니다.

"정우야……!"

소희가 참았던 숨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녀의 두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 있었습니다.

"너 진짜 미쳤어! 어떻게 그 대단한 변호사들을 말 한마디로 꼼짝 못 하게 만들어? 나 진짜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단 말이야!"

소희는 정우의 어깨를 붙잡고 마구 흔들어댔습니다. 대기업의 소송 폭탄이라는 거대한 바위가 머리 위에서 치워진 듯한 해방감이 그녀의 얼굴에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정우는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어……."

정우의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만이 흘러나왔습니다.

시야가 급격히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눈앞에 떠 있던 '마음의 경영 장부'가 붉은색 경고등을 요란하게 깜빡이며 정우의 뇌리를 때렸습니다.

[경고: MP가 한계치 이하로 급감했습니다.] [현재 보유 MP: 12 / 100 (극도로 위험)] [경고: 고강도 법적 데이터 분석 및 감정적 방어 행동으로 인한 뇌파 과부하 발생. 급성 정서적 유리몸 결함 발동. 공황 발작 및 과호흡 상태에 진입합니다.]

"허억…… 흑……."

가슴이 쇠사슬로 조여드는 듯한 압박감이 정우의 폐부를 짓눌렀습니다. 들이쉬는 숨은 목구멍 언저리에서 차갑게 맴돌 뿐, 허파 깊은 곳까지 닿지 않았습니다. 산소가 부족해진 뇌가 비명을 지르며 정우의 사지를 마비시켰습니다.

"정우야? 정우야! 왜 그래?"

소희의 목소리가 수중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웅웅거리며 멀어졌습니다.

정우는 균형을 잃고 쓰레기통 옆 바닥으로 쓰러졌습니다. 차가운 리놀륨 바닥의 감촉이 뺨에 닿았지만, 그 차가움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온몸의 감각이 마비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손끝이 찌릿하게 저려오며 곱아들었습니다. 시야가 흑백으로 점멸하며 어둠이 그를 집어삼키려 했습니다.

타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멘탈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대가였습니다. 정우는 주머니 속에 든 신경안정제 약통을 향해 손을 뻗으려 했지만, 손가락 끝 하나조차 부들부들 떨릴 뿐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는데…….'

정우가 흐릿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이를 악물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라디오 스튜디오 천장에 매달린 적색 비상 경보등이 격렬하게 회전하며 온 사방을 붉은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웅장하게 빛나던 오디오 믹서의 수백 개 LED 전원 불빛들이 쿵- 하는 무거운 기계음과 함께 일제히 꺼져 내렸습니다. 스튜디오를 가득 채우고 있던 전자기기의 미세한 백색소음이 완벽한 어둠과 정적 속으로 묻혀버렸습니다.

"정우야……! 정전이야! 송신소 전원이 통째로 나갔어!"

어둠 속에서 소희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정우의 귓가를 때렸습니다. 의식을 잃어가는 정우의 가슴 위로,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자본의 그림자가 다시 한번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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