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정오에 위로를 배달한다더니, 아주 눈물겨운 구걸 신파극을 찍고 자빠졌네. 야, 한정우! 너 대기업에서 잘려 나가고 고향 내려와서 노인네 푼돈이나 뜯어내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졌냐? 그깟 감성팔이 국밥 얘기 백날 해봐라, 망해가는 동네에서 돈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아주 구질구질해서 들어줄 수가 없네!"
송수신기 너머로 터져 나오는 거친 쇳소리가 스튜디오의 차가운 정적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조정실 유리창 너머로 민소희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보였다. 소희는 당장이라도 연결을 끊어버릴 듯 콘솔의 붉은색 뮤트 버튼 위로 손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실시간 청취자 게시판은 이미 폭발 직전이었다. '저 무례한 놈은 누구냐', '방송 사고 아니냐'는 항의 글이 초 단위로 밀려들며 모니터 화면을 가득 메웠다.
정우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굳어 있던 번아웃의 납덩어리가 덜컥거리며 숨통을 좁혀왔다. 귓가에서 이명이 삐 소리를 내며 맴돌았고, 차가운 땀방울이 구두 굽을 타고 내려앉는 듯한 오한이 척추를 훑었다.
이대로 물러서면 폐국을 앞둔 이 작은 방송국은 영영 일어설 기회를 잃는다. 정우는 명치끝을 꽉 부여잡으며 왼손으로 마이크 믹서의 페이더를 잡았다. 손가락 끝에 닿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머리를 맑게 깨웠다.
스르륵.
정우는 윤성호의 고함 소리가 온 동네 스피커를 찢어놓지 않도록, 그의 마이크 볼륨 레벨을 정교하게 3데시벨 낮추었다. 동시에 자신의 목소리 톤을 한 음절 아래로 무겁게 가라앉혔다.
"혜성 청춘 FM을 애청해 주시는 청취자 여러분, 잠시 매끄럽지 못한 연결음과 정돈되지 않은 음성이 송출된 점 사과드립니다."
정우의 목소리는 잔잔한 호수 위에 돌을 던졌을 때 퍼지는 파문처럼 차분하고 규칙적이었다. 흥분한 기색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그 서늘한 침착함이 라디오 스피커를 타고 흐르자, 소란스럽던 주파수 대역 전체가 기묘한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 야! 한정우! 너 지금 내 목소리 줄였냐? 어딜 감히 대기업물 좀 먹었다고 사람을 가르치려 들어? 너 내가 누군지 몰라? 나 윤성호야! 이 동네 상가 절반이 우리 아버지 건데, 너 같은 월급쟁이 나부랭이가……!
"잘 알고 있습니다, 윤성호 씨."
정우가 윤성호의 말을 칼로 자르듯 끊어냈다.
그 순간, 정우의 시야에 푸르스름한 반투명 빛무리가 번지기 시작했다. 눈앞의 공간이 왜곡되며 오직 그에게만 보이는 복식부기 형태의 장부가 허공에 떠올랐다.
================================== [마음의 경영 장부 - 대상: 윤성호 (28)] - 정서적 결손액(고통 지표): 4억 8,500만 원 (원인: 부친 윤태식 회장으로부터의 지속적인 언어폭력 및 존재 부정) - 은폐 부채: 유령 인력 등재를 통한 하청 대금 횡령 및 증여세 포탈 의혹 (추정치 1억 2,000만 원) - 특이 소지품: 스위스 골드버그 하이엔드 스마트폰 (현재 자체 보안 녹음 애플리케이션 실시간 작동 중) - 솔루션 작동 비용: MP 35 소모 - 현재 보유 MP: 82 / 100 ==================================
장부의 숫자들이 붉고 푸른 빛을 발하며 정우의 뇌리에 내리꽂혔다. 정우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대기업 기획실에서 수조 원대 자산가들의 포트폴리오를 해체하던 시절의 감각이 손가락 끝에서부터 되살아났다.
정우는 책상 서랍 속에 고이 넣어두었던 낡은 파일철을 살짝 만지작거렸다. 1화에서 쓰레기통 옆에서 주워 모았던, 태진 미디어가 지역 광고주들을 상대로 작성했던 독점 규제법 위반 합의서 패턴 문서의 촉감이 손끝에 닿았다. 대기업의 거대한 침탈 음모가 이 작은 도시에 뻗치고 있는 이 시점에, 저 눈앞의 졸부를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 그림이 그려졌다.
"윤성호 씨. 지금 손에 들고 계신 그 번쩍이는 스위스제 스마트폰, 참 비싸 보이더군요. 국내에 몇 대 수입되지도 않은 한정판 골드 에디션이죠?"
전화기 건너편에서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듯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 어……? 어, 그래! 새끼, 눈은 있어 가지고. 이게 얼마짜린지 아냐? 천만 원이 넘어, 인마! 너 같은 놈은 평생 구경도 못 해!
"그 비싼 기계로 늘 통화 녹음을 켜두시는 버릇이 있더군요. 보안 녹음 앱 말입니다. 왜 대화할 때마다 상대방의 목소리를 녹음해 두시는 겁니까? 혹시, 언제 누구에게 버림받거나 뒤통수를 맞을지 몰라 불안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
- 뭐, 뭐야? 네가 그걸 어떻게……!
"그리고 그 휴대폰의 단축 번호 1번은 여전히 아버님이신 윤태식 회장님이시겠지요."
정우는 숨 한 번 쉬지 않고 딕션을 정교하게 밀어붙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조롱도 없었다. 오직 차가운 사실의 나열만이 존재했다.
"하지만 최근 일주일 동안 아버님과 통화하신 기록은 단 세 번. 그나마도 평균 통화 시간은 12초에 불과하더군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너한테 들어가는 돈이 아깝다'. 대략 이런 내용의 훈계로 끝났을 텐데, 제 분석이 틀렸습니까?"
- 너…… 너 미쳤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어떤 새끼가 불었어!
윤성호의 목소리가 얇게 찢어지며 떨렸다. 당황과 공포가 뒤섞인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이 수만 명의 청취자가 듣고 있는 주파수를 타고 그대로 흘러나갔다.
조정실의 민소희는 입을 벌린 채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의 칼날 같은 팩트 폭격은 멈추지 않았다. 이제 '의혹 제기'와 '팩트 증명'을 넘어, 결정적인 보완 비수를 꽂을 타이밍이었다.
"윤성호 씨. 당신이 오늘 타고 나온 수입 스포츠카의 배기음이 시청 앞 대로를 울릴 때, 사람들은 당신의 재력을 보는 게 아닙니다. 오직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해, 나이 서른이 다 되도록 자기 이름으로 된 사업 하나 제대로 성공시키지 못한 응석받이의 비명으로 들을 뿐이죠."
- 닥쳐! 이 개새끼가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아버님이 매번 말씀하시죠? '네 형의 반만 닯아봐라'라고. 그래서 당신은 그 열등감을 감추려고 이 작은 로컬 라디오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짖어대는 겁니다.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이웃들을 깎아내려야만, 겨우 당신의 존재가 증명되는 것 같으니까요."
정우가 마지막 단어를 내뱉는 순간, 가슴 통증이 밀려왔다.
[경고: 솔루션 실행으로 MP가 35 차감됩니다. 현재 MP: 47] [주의: MP가 절반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가벼운 과호흡 및 두통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허파가 쪼그라드는 듯한 압박감이 정우의 목을 조였다. 그는 이빨을 악물고 책상 모서리를 손가락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움켜쥐었다. 흐트러지지 않기 위해 침을 삼키며, 마이크를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돈이 많으시다고 하셨죠. 그렇다면 그 돈으로 누군가를 짓밟는 대신, 당신의 그 빈약한 자존감을 진짜 가치 있는 곳에 써보는 건 어떻습니까?"
라디오 스피커 너머로 거친 숨소리만 들려왔다. 윤성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언제나 돈과 권력으로 사람들을 무릎 꿇려왔던 그였지만,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치부와 열등감을 대중 앞에서 완벽하게 해체당하자 영혼 자체가 발가벗겨진 듯한 충격을 받은 것이다.
정우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신이 그토록 비웃는 이 망해가는 똥통 방송국은, 매일 정오에 당신 아버지가 푼돈이라 부르는 그 국밥 한 그릇으로 하루를 버티는 진짜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진짜 '혜성의 청년 사업가'로 아버님께 인정받고 싶다면, 졸렬하게 뒤에서 욕하는 짓은 그만두십시오."
-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윤성호의 목소리에서 핏기가 가셨다. 으스대던 기세는 온데간데없고,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나약한 음성이 주파수를 탔다.
"당당하게 파트너가 되십시오. 우리 방송국은 혜성시 골목상권을 살리기 위한 새로운 로컬 광고 구역을 기획 중입니다. 당신이 인수한 그 수입차 멀티숍과 외식 브랜드들, 아버님의 그늘 없이 오직 당신의 기획으로 채워진 그 브랜드들 말입니다. 그 브랜드들을 이 방송국에 독점 광고로 유치하십시오. 당신의 돈이 사람을 상처 주는 무기가 아니라, 이 도시를 살리는 진짜 자본임을 아버님께 증명해 보이란 말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정오의 뜨거운 햇살이 스튜디오 유리창을 통과해 정우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땀방울이 턱 끝에 맺혀 뚝 떨어졌다. MP 고갈로 인한 현기증이 시야를 흐릿하게 흔들었다.
마침내, 수화기 너머에서 깊은 한숨과 함께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 내가…… 내가 하면 되잖아. 하겠다고! 그깟 광고비가 문제야? 내가 아버님 도움 없이 내 돈으로 직접 계약할 테니까, 그 더러운 주둥이 좀 다물어!
윤성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분노가 아닌 기묘한 해방감과 벅참이 섞인 울먹임에 가까웠다. 평생 그 누구도 자신에게 이렇게 명확한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며 자극해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계약서 들고 당장 거기로 갈 테니까…… 기다려. 한정우 너, 내가 진짜 성공하는 거 똑똑히 봐라!
뚝.
전화가 끊겼다.
동시에 스튜디오 모니터 화면의 실시간 청취자 게시판이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로 변했다.
[와, 한정우 PD 대박이다. 팩폭으로 졸부를 치료해 버렸네.] [윤성호 저 인간 맨날 시내에서 시끄럽게 굴어서 극혐이었는데, 사이다 마신 기분입니다!] [이게 진짜 라디오지! 혜성 청춘 FM 파이팅!]
그와 동시에 정우의 눈앞에 나타난 푸른 장부의 수치들이 급격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 [마음의 경영 장부 - 실시간 공감 피드백 유입] - 청취자 공감도: 급상승 (지표 45% 증가) - MP 충전 중: +25 MP 흡수 - 현재 보유 MP: 72 / 100 - 광고 수지 예측: 윤성호 브랜드 독점 광고 계약 체결 시, 월 고정 광고 수익 800만 원 확보 예정 (목표 매출의 30% 즉각 달성) ==================================
"하아……."
정우는 헤드폰을 벗어 책상 위에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손목을 타고 전해지는 묵직한 피로감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명치를 짓누르던 통증도 청취자들의 뜨거운 공감 반응 덕분에 빠르게 완화되었다.
조정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민소희가 튀어나왔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 있었다.
"정우야! 너 진짜 미쳤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윤성호 그 인간이 자기 발로 광고를 하겠다고 소리를 지르다니…… 나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
소희는 정우의 어깨를 붙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꿈 아닙니다, 민 PD님. 이제 겨우 첫 단추를 끼운 것뿐이니까 흥분 가라앉히시죠."
정우는 까칠하게 대꾸하면서도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번아웃으로 무너져 내렸던 고향 땅에서,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지켜내고 변화시키기 시작했다는 실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따스하게 번져나갔다.
이 작은 로컬 방송국이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이 눈앞에 보였다. 첫 번째 대형 유료 광고 수주가 코앞이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태진 미디어의 고사 작전에서도 충분히 버텨낼 재정적 체력을 기를 수 있을 터였다.
두 사람이 기쁨을 나누며 다음 방송 순서를 준비하려던 바로 그 순간.
드르륵, 탁. 탁. 탁.
스튜디오 구석에 놓여 있던 구형 팩스기가 날카로운 기계음을 내뿜으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광고 문의조차 오지 않아 먼지만 쌓여 있던 기계였다.
소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팩스기 앞으로 다가갔다. 인쇄 용지가 천천히 밀려 나오는 소리가 스튜디오의 고요함을 차갑게 두드렸다. 용지를 집어 든 소희의 신형 티셔츠 자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셔갔다.
"정우야…… 이것 봐."
소희의 떨리는 손에서 종이를 건네받은 정우의 눈동자가 차갑게 굳어졌다.
종이의 상단에는 굵은 고딕체로 거대한 기업의 로고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태진 미디어 그룹 법무팀]
그리고 그 아래로 이어지는 붉은색 직인이 찍힌 문구들은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본 송신소 및 주파수 대역(FM 100.3)은 태진 미디어 주식회사의 자산 인수 계약에 따라 소유권이 이전되었음을 알립니다. 귀 방송국은 현재 공익 주파수를 무단 점유하고 있는바, 즉시 송출을 중단하고 시설을 비워줄 것을 엄중히 경고합니다. 본 불응 시 무단 점유에 따른 강제 명도 소송 및 손해배상 청구가 즉각 개시될 예정입니다.'
정우의 눈앞에 다시 한번 붉은색 경고등이 격렬하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겨우 첫걸음을 뗀 방송국을 향해, 거대 자본의 무자비한 이빨이 마침내 그 정체를 드러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