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기꾼 년놈들아! 돈 안 내놓으면 오늘 여기서 한 발짝도 안 움직여!"
가죽 재킷에서 땀내와 담배 연기 찌든 내가 훅 풍겼다. 혜성가구점 황 사장은 거구의 몸집을 흔들며 조정실 스튜디오의 얇은 유리창을 주먹으로 쾅쾅 내리쳤다. 낡은 문틈으로 들어온 밤바람이 스튜디오 안의 먼지를 뿌옇게 일깨웠다. 민소희는 제 목을 죄어오는 압박감에 어깨를 잘게 떨며 뒤로 물러섰다. 쓰러질 것 같은 방송국의 위태로운 공기 속에서, 정우는 코트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손을 천천히 뺐다.
어지러운 공기 너머로 정우의 시야에 푸르스름한 반투명 창이 띄어 올랐다.
[마음의 경영 장부 활성화] [대상: 황만수 (54세, 혜성가구점 대표)] [정서적 결손액(고통 지표): 12,000원 (극히 낮음 - 탐욕과 분노가 지배적)] [은폐 부채: 428,500,000원 (비자금 조성 및 무자료 거래를 통한 지방세 포탈)] [치유 솔루션 가동 비용: MP 15 소모]
정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머릿속이 징 소리를 내며 울렸지만,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차가운 이성이 그의 감각을 예리하게 벼려놓았다. 대기업 기획실에서 수십억짜리 계약판을 구르며 체득한 본능이었다. 상대가 목소리를 높일 때야말로 가장 확실한 빈틈을 드러내는 법이다.
"황 사장님, 오늘 낮 12시 정각에 가구점 광고 분명히 정상 송출 되었습니다. 제 시간에 오디오 파일 나간 것 여기 로그 기록에도 다 남아 있어요."
소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해명하려 했지만, 황 사장은 더욱 기세등등하게 책상을 들이받았다.
"누가 그걸 몰라? 그딴 장송곡 같은 목소리로 동네 구석탱이 라디오에 백날 틀어봐야 가구 한 점이 나가냐고! 광고 효과가 전혀 없잖아, 효과가! 당장 내 돈 삼백만 원 돌려내! 안 그러면 당장 내일부터 이 앞에 드러누워 버릴 테니까!"
사방으로 튀는 침방울과 안면을 가득 채운 붉은 핏발. 소희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순간, 정우가 조용히 걸어 나가 소희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발소리는 가벼웠지만, 마주 선 황 사장의 기세를 꺾기에는 충분할 만큼 단호했다.
정우는 조정 콘솔의 마이크 스위치를 켜고, 스튜디오 내부 스피커 볼륨을 천천히 올렸다. 웅성거리던 하울링 소리가 잦아들고, 오직 정우의 나직하면서도 송곳처럼 날카로운 목소리만이 스튜디오를 채웠다.
"황만수 씨."
사장이라는 직함 대신 이름을 똑바로 부르자, 황 사장의 눈썹이 거칠게 꿈틀거렸다.
"뭐? 너 지금 뭐라 그랬어?"
"광고 계약서 제4조 2항을 기억하십니까? '광고주의 단순 변심 및 주관적 만족도 저하로 인한 계약 해지는 불가하며, 기납부된 광고비는 일체 반환하지 않는다.' 법인 인감까지 선명하게 찍어놓고 이제 와서 떼를 쓰시는 건 혜성시 상공인 연합회 회장단 직함에 스스로 먹칠을 하는 꼴 아닙니까?"
"이, 이 새끼가 어디서 꼬박꼬박 말대꾸야? 계약서고 뭐고 돈 안 주면 가만 안 둔다고 했지!"
황 사장이 굵은 손가락으로 정우의 깃을 낚아채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정우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시야에 뜬 장부의 붉은 글씨들을 눈동자로 훑었다.
"대구 도매상가."
정우의 입에서 흘러나온 다섯 글자에 황 사장의 손끝이 허공에서 멈췄다.
"뭐, 뭐?"
"거기서 무자료로 떼어온 이태리제 모조 가죽 소파 세트 말입니다. 장부에는 정품 수입 소파로 허위 기재하시고 고객들에게는 현금 결제만 유도하셨더군요. 그것도 모자라 가구점 법인 계좌가 아닌, 사모님 개인 명의의 농협 계좌로 따로 송금받으신 내역들."
정우는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의 눈빛은 비바람에 깎인 절벽처럼 차가웠다.
"최근 3년간 누락된 매출액만 대충 계산해도 4억 2천 8백 5십만 원이 넘더군요. 세무서 재산세과에 이 이중 장부 내역과 현금 영수증 미발행 제보서가 들어가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가산세에 조세범 처벌법까지 적용되면, 삼백만 원 환불받으려다 삼억 원 넘게 토해내고 가구점 문을 닫으셔야 할 텐데요."
스튜디오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오직 노후화된 히터가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렸다. 황 사장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붉게 상기되었던 뺨은 밀가루를 뒤집어쓴 것처럼 하얗게 질려갔고, 삿대질을 하던 손가락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너, 너…… 그걸 어떻게……."
"기획실에서 밥 먹고 한 일이 이런 부실 채권 기업들 장부 털어내는 것이었습니다. 혜성시가 좁다 한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곳 없고 묻어둔 돈이 안 보이는 법은 없지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계속 여기서 환불해 달라고 소리를 지르시겠습니까, 아니면 조용히 나가서 내일 오전 중으로 계약 유지 관련 합의서에 서명하시겠습니까?"
황 사장은 정우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바닥의 해진 카펫을 헤매다, 이내 땀에 젖은 이마를 훔쳤다. 정우의 칼날 같은 딕션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구체적인 액수 제시는 늙은 장사꾼의 얄팍한 배짱을 완전히 박살 내놓았다.
"내, 내가……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그냥 가는데……."
황 사장은 뒷말을 흐리며 문고리를 잡았다. 들어올 때의 기세는 간데없이, 굽은 어깨로 허겁지겁 문을 열고 도망치듯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쾅 닫히는 문소리와 함께 무거운 침묵이 다시 내려앉았다.
[솔루션 성공: 악성 광고주 자진 철수] [MP가 15 차감됩니다. 현재 MP: 45/100] [경고: MP가 절반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감정적 과부하에 주의하십시오.]
정우는 가슴 깊은 곳에서 가쁜 숨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손끝이 살짝 저려왔다. 확실히 이 장부를 쓰는 것은 육체적인 소모를 동반했다. 대기업에서 번아웃으로 쓰러졌을 때의 그 끔찍한 무기력증이 척추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정우야…… 너 진짜 미쳤어? 그걸 어떻게 다 안 거야?"
소희가 턱을 덜덜 떨며 정우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경외감과 함께 낯선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정우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말했잖아. 기획실 밥을 그냥 먹은 게 아니라고. 지역 영세 가구점 유통 구조 정도는 며칠만 혜성시 돌아다니며 단가 비교해 보면 답이 나와."
실제로는 눈앞에 뜬 시스템 창 덕분이었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이 쓸모없는 능력이 망해가는 주파수를 지키는 데 유용하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그때, 닫혔던 스튜디오 문이 다시 한번 조용히 열렸다. 정우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긴장시켰으나, 문틈으로 들어온 것은 매서운 바람이 아닌 구수한 멸치 육수 냄새였다.
"아이고, 스튜디오 문이 왜 이리 덜컹거린다냐. 정우야, 소희야!"
양손에 큼지막한 보온 바구니를 들고 들어온 이는 국밥집 여주인, 김복순 할머니였다. 머리에 수건을 얹고 앞치마를 두른 할머니의 모습에 차가웠던 기류가 단숨에 녹아내렸다.
"할머니? 이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소희가 깜짝 놀라 달려가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복순 할머니는 숨을 몰아쉬며 정우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내 오늘 낮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는데, 정우 네 목소리가 영 힘이 없어 뵈더라고. 대기업 다니다가 요 조그만 데 내려와 고생하는 게 안쓰러워서 뜨끈한 돼지국밥 좀 말아왔다. 식기 전에 얼른 먹어라."
뚜껑을 열자 뽀얀 사골 국물과 부드러운 머리 고기 위로 송송 썬 파가 듬뿍 올라간 국밥이 모습을 드러냈다. 뚝배기에서 피어오르는 온기가 정우의 코끝을 스쳤다. 그 순간, 정우의 눈앞에 다시 한번 장부가 펼쳐졌다.
[대상: 김복순 (67세, 태양국밥 대표)] [정서적 결손액(고통 지표): 89,000,000원 (매우 높음 - 사별한 남편과의 추억이 깃든 가게의 강제 철거 위기 및 권리금 회수 불가로 인한 극심한 불안)] [은폐 부채: 0원 (지극히 정직하고 투명한 회계)] [특수 정보 (유품): 사별한 남편이 남긴 다락방 낡은 궤짝 속 '구 임대차 계약 대장'. 혜성시 상가번영회 초기 수탁 명의가 적힌 이중 부기 장부의 흔적이 존재함. (가치: 태진 미디어의 강제 철거를 법적으로 무력화할 수 있는 비장의 카드)]
정우는 국밥을 내려다보며 장부의 수치들을 가만히 읽어내려갔다. 8천 9백만 원이라는 거대한 정서적 결손액. 평생을 남에게 베풀며 살아온 고지식한 노인이 짊어지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삶의 무게였다. 게다가 태진 미디어의 위장 자회사가 골목 상권을 밀어버리려 한다는 계획이 장부의 붉은 실선을 통해 정우의 뇌리에 선명하게 꽂혔다.
"정우 너, 낯빛이 왜 이리 하얗냐. 밥을 굶고 다니니까 뼈가 삭지. 얼른 국물부터 들이켜."
복순 할머니가 거친 손으로 정우의 손목을 꽉 쥐었다. 일하느라 굳은살이 박인 딱딱하고 따뜻한 손끝에서 정우의 맥박을 타고 온기가 전해졌다. 기묘하게도, 그녀가 손을 잡는 순간 머릿속의 이명이 가라앉으며 차갑게 식어 가던 손끝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청취자 연대 공감 반응 감지] [MP가 서서히 충전됩니다. 현재 MP: 60/100]
정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숟가락을 들었다. 국물을 한 모금 삼키자, 진하고 구수한 맛이 가슴을 따뜻하게 적셨다. 가식 없는 진짜 위로가 혀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맛있네요, 할머니."
"맛있으면 됐다. 많이 먹고 기운 차려서 이 방송국 꼭 살려내야 한다. 우리 같은 영감 할멈들이 정오에 네 목소리 듣는 재미로 하루를 버틴단다."
할머니는 정우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정우는 국밥을 우물거리며 머릿속으로 정밀한 계산을 시작했다. 단순한 위로만으로는 이 할머니의 가게를 지킬 수 없다. 대기업의 거대 자본이 골목을 집어삼키려 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감성 어린 눈물이 아니라 철저히 타깃팅된 '돈이 되는 광고'와 법적인 방패막이다.
'할머니 남편분의 유품 속에 있는 그 이중 부기 대장…… 그게 결정적인 열쇠가 되겠군.'
정우는 장부에 기록된 유품 정보의 존재를 마음속 깊이 새겨두었다. 당장 그것을 꺼내 쓸 수는 없지만, 태진 미디어가 이 골목을 본격적으로 압박해 올 때 목덜미를 후려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카드가 될 터였다.
그렇다면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정우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소희를 바라보았다.
"소희야, 내일 정오 방송 큐시트 전부 갈아엎자."
"어? 갑자기 왜? 내일은 사연 소개 코너잖아."
"뻔한 연애 사연이나 동네 푸념 읽어주는 걸로는 청취율 3% 못 넘겨. 타깃을 확실하게 잡아야 해. 내일 방송의 메인 테마는 '태양국밥'이다."
정우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태양국밥의 따뜻한 국물 한 그릇에 담긴 40년의 역사, 그리고 이 골목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팩트를 아주 정밀하게 엮을 거야. 감정에만 호소하는 게 아니라, 점심시간에 따뜻한 밥 한 끼가 간절한 인근 공단 근로자들과 택시 기사들을 정확히 타깃으로 잡는 광고 매칭 시스템을 돌릴 거다."
"하지만 정우야, 우리가 광고비를 받고 내보내는 것도 아닌데……."
"이게 미끼 상품이야. 태양국밥을 성공사례로 만들어서, 혜성시의 다른 골목상권 상인들이 제 발로 찾아와 우리한테 광고를 달라고 돈을 싸 들고 오게 만드는 거지. 대기업이 우리 밥줄을 끊으려 한다면, 우린 더 촘촘한 그물망으로 지역 자금을 흡수하면 돼."
정우의 치밀한 분석과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소희의 눈에 다시금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볼펜을 쥐었다.
"좋아. 네가 설계하는 대로 가보자. 나 오디오 믹싱이랑 이펙트 다 다시 손볼게."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스튜디오의 불빛은 환하게 빛났다. 정우는 콘솔 앞에 앉아 마이크의 감도를 조절했다. 머릿속의 장부에는 이미 내일 방송을 통해 얻어야 할 예상 청취율 지표와 광고 유입 경로가 복식부기 형태로 빽빽하게 적혀 내려가고 있었다.
다음 날 정오.
스튜디오의 'ON AIR' 빨간 불빛이 선명하게 켜졌다. 정우는 헤드폰을 귀에 걸고 마이크 앞으로 다가섰다. 그의 목소리가 혜성시 전역의 주파수 FM 100.3을 타고 잔잔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매일 정오, 지친 하루의 길목에서 위로를 배달합니다. 혜성 청춘 FM, 한정우입니다. 오늘 여러분께 들려드릴 이야기는, 찬 바람 불 때 우리 마음을 가장 먼저 데워주는 뽀얀 국물 한 그릇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정우의 차분하면서도 가슴을 파고드는 오프닝 멘트가 송출되자, 실시간 문자 창의 반응이 평소보다 빠르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공단의 기계 소음 속에서, 운전대 위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이웃들이 하나둘 주파수를 맞추는 것이 눈에 보였다. 마음의 장부 창에 표시된 실시간 동시 접속자 수가 조금씩 상승 곡선을 그렸다.
성공적이었다. 이대로만 가면 첫 번째 로컬 타깃 광고의 유효성이 입증될 터였다.
그러나 정우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음 대본으로 시선을 옮기던 바로 그 순간.
조정실의 연결 전화기에서 날카로운 벨 소리가 울렸다. 소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고, 이내 그녀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소희는 떨리는 손으로 통화 보류 버튼을 누른 채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야…… 그, 윤성호야. 윤성호가 생방송 연결을 요구하고 있어."
혜성시의 소문난 졸부이자 안하무인으로 악명 높은 청년, 윤성호.
정우의 미간이 좁아졌다. 거절할 틈도 없이, 시스템의 자동 연결 설정으로 인해 윤성호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뚫고 생방송 전파로 그대로 송출되기 시작했다.
- 아, 여보세요? 거기 혜성 청춘 FM인가 뭔가 하는 똥통 방송국 맞죠?
확성기를 댄 듯 째지는 웃음소리가 라디오를 듣고 있던 수천 명의 청취자들에게 가감 없이 울려 퍼졌다.
- 매일 정오에 위로를 배달한다더니, 아주 눈물겨운 구걸 신파극을 찍고 자빠졌네. 야, 한정우! 너 대기업에서 잘려 나가고 고향 내려와서 노인네 푼돈이나 뜯어내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졌냐? 그깟 감성팔이 국밥 얘기 백날 해봐라, 망해가는 동네에서 돈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아주 구질구질해서 들어줄 수가 없네!
라디오 스튜디오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실시간 문자 창이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대기업 기획실 출신 정우를 향한 날 것 그대로의 조롱과 폭언이 주파수를 타고 퍼져나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