귓가를 찢는 이명이 멈추지 않았다. 서울발 막차 버스에서 내렸을 때, 한정우의 폐부로 가장 먼저 치고 들어온 것은 빌딩 숲의 매연이 아닌 짭조름하고 비릿한 바닷바람이었다. 심장이 늑골을 뚫고 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손끝이 딱딱하게 굳어 타이핑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던 그 지독한 번아웃의 감각이 여전히 척수를 타고 축축하게 흘러내렸다. 정우는 코트 주머니 속에 쑤셔 박아둔 청심환 빈 병을 만지작거리며 혜성시의 부서진 보도블록을 밟았다.
기침이 왈칵 터져 나왔다. 가슴을 쥐어짜며 길가에 멈춰 서자, 가로등 불빛 아래로 뽀얗게 일어나는 미세한 먼지들이 보였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쇠락해 가는 소도시의 쓸쓸함, 밤 9시만 되어도 간판을 내리는 상점들의 고요함, 그리고 낡은 기억의 냄새까지. 정우는 수개월 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불면증의 원인이 어쩌면 이 비릿한 바람을 잊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을 여유는 없었다. 그가 발걸음을 옮긴 곳은 혜성시의 낡은 번화가 모퉁이에 자리 잡은 3층짜리 상가 건물이었다.
정우의 시선이 닿은 곳은 녹슨 철제 계단 끝에 위태롭게 매달린 낡은 아크릴 간판이었다.
[혜성 청춘 FM 100.3MHz]
한때는 이 작은 도시의 유일한 심장박동을 전하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페인트가 쩍쩍 갈라진 채 밤바람에 끼익끼익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대기업 기획실에서 매일 수십억 대의 예산안과 사업 계획서를 주무르던 엘리트 기획자 한정우. 그가 번아웃 증후군으로 무너져 내린 뒤 마지막 안식처로 택한 곳이 바로 이 폐업 직전의 고향 라디오 방송국이라는 사실은 지독한 아이러니였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마다 삐걱이는 소리가 이명과 겹쳐 들렸다. 3층 방송국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차가운 냉기와 서늘한 먼지 냄새가 정우의 얼굴을 덮쳤다. 정리가 되지 않은 로비 책상 위에는 수취인 불명의 독촉장과 붉은 글씨가 선명한 공과금 고지서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정우는 굳이 계산기를 두드려보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작은 방송국이 처한 재정적 파탄의 상태는 이미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적자, 적자, 그리고 완전한 자본 잠식. 대형 미디어 그룹인 태진 미디어가 이 지역의 로컬 광고주들을 야금야금 포섭하며 숨통을 조여온 결과가 이 난장판 속에 고스란히 박혀 있었다.
"어머, 세상에. 이게 누구야?"
날카로우면서도 어딘가 구수한 억양이 섞인 목소리가 정우의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다. 낡은 붉은색 패딩 점퍼를 껴입고 양손에 분홍색 먼지떨이와 걸레를 들고 있던 민소희였다. 그녀의 얼굴은 며칠 동안 밤을 새운 듯 흙빛이었고 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지만, 새카만 눈동자만큼은 여전히 살아 움직였다.
소희는 손에 들고 있던 먼지떨이를 책상 위에 툭 던져두고 정우에게 뚜벅뚜벅 다가왔다. 그녀의 시선이 정우의 핼쑥한 뺨과 초점 흐린 눈동자에 머물렀다.
"한정우? 너 진짜 한정우 맞니? 와, 몰골 좀 봐라. 서울 대기업 기획실에서 억대 연봉 받으면서 잘나간다는 소문만 무성하더니, 웬 반쯤 말라비틀어진 송장 하나가 기어들어 왔네."
"말투는 여전하네, 민소희."
정우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목구멍이 빳빳하게 마른 탓에 갈라진 쇳소리가 섞여 나왔다. 소희는 혀를 쯧 차며 정우의 어깨를 툭 쳤다.
"여전하긴 뭐가 여전해. 너 진짜 어디 아픈 사람 같아. 얼굴색이 이게 뭐야? 혜성시 가뭄 든 논바닥이 너보다 생기 있겠다. 얼른 들어와서 앉아. 바깥바람 차다."
소희는 구석에 놓인 낡은 전기포트에 물을 올렸다. 덜덜거리는 소리를 내며 포트가 끓어오르는 동안, 정우는 가죽이 다 벗겨진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오는 것을 숨기기 위해 그는 양손을 코트 주머니 속에 깊이 찔러 넣었다.
"방송국 꼴이 이게 뭐냐. 서류로 보던 것보다 실제가 훨씬 더 처참하네."
정우의 뼈 있는 말에 소희의 어깨가 굳어졌다. 그녀는 믹스커피 두 잔을 타서 투명한 유리잔에 담아 정우의 앞에 툭 내려놓았다. 달콤하고 텁텁한 인스턴트커피 향이 공기 중의 먼지 냄새를 덮었다.
"처참하든 말든, 여긴 아직 안 망했어. 내가 매일 쓸고 닦고, 어떻게든 이 100.3 메가헤르츠 주파수 붙들고 있으니까. 근데 너는 왜 온 거야? 대기업 사표 던졌다는 소식은 건너 들었다만, 이런 구석진 시골 방송국 임시 매니저 자리나 맡으려고 내려온 건 아닐 테고. 네가 올 곳이 아니잖아, 여기는."
소희의 눈빛에는 날 선 경계심과 동시에 오랜 친구에 대한 걱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정우는 뜨거운 커피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인공적인 온기가 굳은 손가락 끝으로 미미하게 전해졌다.
"갈 곳이 없어서 왔어."
정우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서울은 너무 시끄러웠거든. 매 순간 초단위로 실적을 증명해야 하고, 남의 목을 밟고 올라서야 하는 그 짓거리에 밑바닥까지 털렸어. 여기선 최소한 숨은 쉴 수 있을 줄 알았지."
"하! 착각도 유분수지."
소희가 실소를 터뜨리며 소파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혜성 FM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진짜 몰라서 그래? 태진 미디어가 우리 로컬 광고주들 싹 다 가로채 가고 협박해서, 다음 달 전기세랑 송신소 임대료 낼 돈도 없어. 네가 그 잘난 기획실 엘리트였다면, 이 개판 오 분 전인 장부 좀 보고 해결책이나 내놓든가. 매니저라며?"
소희가 발로 테이블 밑을 툭 차자, 먼지 쌓인 플라스틱 상자 하나가 밀려 나왔다. 그 안에는 최근 한 달 동안 해지된 로컬 광고주들의 계약 해약서들과 독촉장들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정우는 씁쓸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여 상자 속의 서류 뭉치를 집어 들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쿵-!
뇌리를 직격하는 기이한 타격음과 함께 정우의 관자놀이에 송곳으로 쑤시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덮쳐왔다.
"아윽……!"
정우는 급격히 밀려오는 두통에 손에 쥐었던 서류를 놓치며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눈앞이 하얗게 번쩍이더니 시야가 기이하게 왜곡되기 시작했다. 단순한 편두통이 아니었다. 주위의 모든 사물이 일순간 정지한 것처럼 보였고, 허공에 형광 빛을 내뿜는 투명한 입체 홀로그램 선들이 정우의 시야를 격자무늬로 쪼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격자무늬 위로, 복잡한 회계 장부의 형태를 한 텍스트들이 실시간으로 인쇄되듯 떠올랐다.
[ 대상: 민소희 (혜성 청춘 FM PD) ] - 정서적 결손액: 45,000,000원 (방송국 폐국 위기로 인한 극심한 불안감 및 누적된 책임감) - 은폐 부채: 12,000,000원 (사비로 메운 방송 장비 수리비 및 미지급 임금) - 현재 스트레스 지수: 92% (위험 수준 - 과호흡 및 만성 피로) - 치유 솔루션 가동 비용: MP 15 소모 - 현재 보유 MP: 50 / 50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정우는 숨을 들이켜며 눈을 비벼보았다. 하지만 눈을 감았다가 떠도, 민소희의 머리 위에 둥둥 떠 있는 붉은색 수치들과 복식부기 형태의 장부는 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소희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사비로 메웠던 장비 수리비와 받지 못한 임금의 구체적인 액수까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머릿속에 정체불명의 정보들이 차갑고 기계적인 감각으로 주입되었다. 타인의 정서적 고통과 숨겨진 진실을 숫자로 시각화하여 보여주는 '마음의 경영 장부'. 그리고 이를 해결할 솔루션을 실행할 때마다 자신의 멘탈 포인트(MP)가 소모되며, 한계치에 도달하면 극심한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경고까지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서울에서 겪었던 과호흡 증상이 다시 도지는 듯 가슴이 답답해졌다. 정우는 무릎을 꿇은 채 바닥을 짚고 억지로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후우, 하아. 찬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가자 겨우 시야의 흔들림이 잦아들었다.
"정우야? 너 진짜 왜 그래? 어디 많이 아파? 얼굴이 완전히 종잇장 같아!"
소희가 깜짝 놀라 소파에서 일어나 정우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의 손길이 닿는 순간, 허공의 장부 수치들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스트레스 지수가 94%까지 치솟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진심 어린 걱정이 정우의 눈에는 숫자의 변화로 고스란히 읽히고 있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잠깐 어지러워서 그래."
정우는 소희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내며 바닥에 흩어진 계약 서류들을 수거했다. 기이한 초감각에 머리가 혼란스러웠지만, 대기업 기획실에서 갈고닦은 그의 본능적인 안목은 흩어진 서류 더미 속에서 이질적인 요소를 포착해 냈다.
정우는 바닥에 떨어진 혜성 가구점, 대박 국밥, 한양 세탁소 등의 광고 해약 합의서들을 하나씩 빠르게 훑어내려 갔다. 그의 손가락이 특정 문구 위에서 딱 멈췄다.
"소희야. 이 해약 합의서들, 광고주들이 직접 작성해서 가져온 거라고 했지?"
"어? 어…… 그렇지. 다들 사정이 어렵다면서 도장 찍어달라고 직접 들고 왔어. 우리가 방송 제대로 안 내보낸 것도 아닌데 미안하다면서……."
"바보 같기는."
정우의 입에서 냉소적인 팩트 폭격이 흘러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명확했다.
"이건 광고주들이 자발적으로 쓴 게 아니야. 어떤 멍청한 시골 자영업자가 이런 전문적인 법률 용어가 담긴 합의서를 스스로 작성해 오겠어? 여기 하단에 적힌 특약 조항 좀 봐."
정우가 합의서의 한 구석을 톡톡 쳤다. 소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그곳을 바라보았다.
[본 계약 해지 후 1개년 동안, 을(광고주)은 혜성시 관내의 동종 유사 매체 및 라디오 주파수에 광고, 협찬, 기부금 지급 등의 행위를 일체 집행할 수 없으며, 이를 위반할 시 기지급된 광고비의 3배에 달하는 금액을 위약벌로 배상한다.]
"이게…… 무슨 뜻인데?"
"독점 규제 및 공정거래법 위반이야. 대기업이 중소 로컬 방송사를 고사시킬 때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대기업 법무팀 표준 합의서 패턴이지. 태진 미디어가 뒤에서 이 합의서 양식을 뿌리고, 대기업 유통망에서 이탈시키겠다는 협박을 섞어가며 광고주들의 눈과 귀를 막은 거야. 넌 그것도 모르고 미안하다는 말에 속아 군말 없이 도장만 찍어준 거고."
정우의 거침없는 딕션에 소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의 뺨이 부끄러움과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그, 그럼…… 그 사람들이 우리한테 미안해서가 아니라, 협박당해서 어쩔 수 없이 끊은 거라고?"
"팩트는 그래. 우린 지금 조직적인 방해 공작을 당하고 있는 거고, 이 합의서들은 그 명백한 증거물이지."
정우는 눈앞에 펼쳐진 장부의 데이터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소희의 스트레스 지수가 분노로 인해 급격히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쓸쓸하게 웃으며 합의서 뭉치를 반으로 접어 자신의 코트 안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었다. 언젠가 태진 미디어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수 있는 훌륭한 비장의 카드가 될 터였다.
번아웃으로 시들어 가던 정우의 심장이 기묘한 활기로 뛰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이 장부와 차가운 숫자들이, 어쩌면 이 망해가는 방송국과 자신을 구원할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정우가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이었다.
쾅-!
방송국 유리가 깨질 듯한 폭음과 함께 철제 문이 부서져라 열렸다. 찬 바람이 들이닥치는 문틈으로 거구의 사내가 씩씩거리며 걸어 들어왔다. 붉게 상기된 얼굴에 가죽 재킷을 걸친 사내, 혜성 가구점의 황 사장이었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험악한 인상을 쓰며 소희를 향해 삿대질을 해댔다.
"야! 민 PD! 오늘 정오에 나간 우리 가구점 광고 송출 분량, 그게 방송이라고 내보낸 거야? 당장 계약 취소하고 지금까지 낸 돈 전액 환불해 내! 아주 사기꾼 년놈들이 따로 없구만, 어?!"
황 사장의 거친 폭언이 좁은 라디오 스튜디오의 공기를 한순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소희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고, 정우의 눈앞에서는 다시 한번 붉은색 장부의 경고등이 요란하게 점멸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