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끝에 실려 온 종이는 얄팍했으나, 그 위에 얹힌 살의는 지나치게 무거웠다.
붉은 실링 왁스가 조잡하게 짓눌린 초대장. 모서리 언저리에서 풍기는 은은한 장미 향수 냄새 밑바닥에는, 기어이 숨기지 못한 비린내가 깔려 있었다. 빛을 삼키는 유독한 어둠을 품은 검은 독약의 냄새였다.
“이자벨라, 머리를 굴린 결과가 겨우 사교계 차회라니. 가련해서 눈물이 앞을 가리는군요.”
엘리시아는 빳빳한 초대장을 가볍게 손가락 사이로 튕겼다.
이것은 사약의 서막이자, 동시에 그녀에게는 찬란한 도파민을 선사할 황금빛 영수증이었다. 죽음의 유예를 선고받은 시한부의 육신이 차가운 전율로 들끓었다. 뺨 위로 붉은 홍조가 번져 나갔다. 피를 흘릴 때마다, 그리고 저들이 나를 죽이려 발악할 때마다 영혼의 장부는 빈틈없이 채워질 것이다.
그때, 등 뒤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방 안의 온도를 단숨에 빙점 아래로 떨어뜨리는 매혹적이고도 위압적인 냉기. 엘리시아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그가 왔음을 직감했다.
칼릭스 카이엔. 북부의 차가운 지배자가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그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 속에서 검은 안개 같은 마기가 가느다랗게 일렁이고 있었다. 겉으로는 태연해 보였으나, 그의 굳게 다문 입술 틈새로 흘러나오는 숨결은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마기가 그의 이성을 갉아먹기 시작했다는 징후였다.
“대공 전하, 기척도 없이 사적인 방에 드는 버릇은 여전하시군요.”
엘리시아가 부드러운 실크 가운을 스치며 돌아섰다. 그녀의 하얀 목덜미가 촛불 아래에서 투명하게 빛났다.
“그대의 안색이 몹시 나쁘군, 엘리시아.”
칼릭스의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밀폐된 침실을 울렸다. 그의 시선이 엘리시아의 손에 들린 초대장, 그리고 그녀의 입술가에 잔존한 옅은 핏자국에 머물렀다. 그의 눈동자가 더욱 짙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나쁜 건 제 안색이 아니라, 전하의 체내에서 날뛰는 마기 같은데요.”
엘리시아가 생긋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발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칼릭스의 단단한 가슴팍 위로 미끄러지듯 닿았다. 얇은 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심장 박동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촉촉하고 차가운 엘리시아의 손길이 닿자마자, 칼릭스의 체내 깊숙한 곳에 박혀 있던 마기의 핵이 기다렸다는 듯 격렬하게 요동쳤다. 마치 거대한 자석이 서로를 끌어당기듯, 그의 마기가 엘리시아의 존재 자체에 격렬하게 공명하며 가파르게 요동쳐 왔다.
그것은 이 세상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오직 엘리시아에게만 반응하는 부동의 친화 특성이었다.
“아……!”
칼릭스의 입술 사이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넓은 어깨가 크게 들썩였고, 엘리시아의 손을 덮어 누르는 그의 커다란 손길에는 뼈가 으스러질 듯한 힘이 실렸다. 그의 이성이 마기의 폭주를 억누르기 위해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긴장했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고통 대신 황홀한 미소를 지었다.
머릿속에서 영혼의 장부가 요란하게 지저귀기 시작했다.
[특수 대상 '칼릭스 카이엔'과의 치명적 마기 공명 감지!] [마기 정화 및 흡수 프로세스 가동.] [극락 포인트가 폭발적으로 상승합니다!] [+10,000p… +25,000p… +50,000p!] [현재 보유 포인트: 110,000p (안전 한계치 돌파!)]
온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시한부의 열증이 칼릭스의 매서운 냉기에 씻겨 내려갔다. 뼛속까지 시원해지는 극락의 쾌감이 척추를 타고 짜릿하게 피어올랐다. 엘리시아는 칼릭스의 가슴에 이마를 기댄 채, 그의 가파른 숨소리를 만끽했다.
“전하, 느껴지시나요? 전하의 그 끔찍한 저주가, 저에게는 가장 달콤한 명약이 된다는 사실이.”
칼릭스는 대답하는 대신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거칠게 감싸 안았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마기가 서서히 걷히며, 그 자리에 엘리시아를 향한 지독한 소유욕과 갈증이 들어찼다.
“그대는 참으로…… 기괴하고 아름다운 생물이야.”
그의 뜨거운 숨결이 엘리시아의 귀밑머리를 적셨다. 은밀한 체온 접촉을 통해 장부의 적자는 완벽하게 해소되었고, 수명은 안전 한계치 이상으로 증폭되었다. 이제 사교계라는 전장으로 걸어 들어갈 무기는 완벽하게 준비된 셈이었다.
***
사흘 뒤.
황실의 동부 정원은 그야말로 장엄한 위선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황태자 유진과 이자벨라가 공동으로 주최한 공식 차회는, 최근 사교계를 뒤흔든 추문을 덮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세력 과시였다. 정원 한가운데에는 이자벨라가 자신의 안목을 뽐내기 위해 공들여 준비한 최고급 가구들과 화려한 장식들이 가득했다. 제국 남부에서 공수해 왔다는 붉은 장미들과 금빛 레이스를 덧댄 테이블보가 햇빛 아래에서 반짝였다.
“어머, 이자벨라 영애의 안목이 역시 대단하네요. 이토록 화려한 차회라니.” “황태자 전하의 총애를 받는 이유가 다 있지 않겠어요?”
모여든 귀족들은 이자벨라의 비위를 맞추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자벨라는 고상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들었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연신 정원 입구를 향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정원 입구를 지키던 황실 시종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카이엔 대공 전하, 그리고 로렌 공작 영애 입장하십니다!”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그곳에는 칠흑 같은 제복을 입은 칼릭스 대공의 호위를 받으며,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엘리시아가 서 있었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카이엔령 특산물인 밤하늘색 실크 위에, 최고급 다이아몬드 가루를 뿌려 만든 특수 실로 정교한 장미 자수를 놓은 예술품이었다. 햇빛이 비칠 때마다 그녀의 몸짓을 따라 은하수가 흐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엘리시아는 우아하게 부채를 접으며 정원 중앙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이자벨라가 마련한 테이블 세팅을 한 번 쓱 훑어보았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가소롭다는 듯 호선을 그렸다.
“어머나.”
그 짧은 한마디에 정원 안의 모든 공기가 얼어붙었다. 엘리시아는 코끝을 살짝 찡그리며 부채로 코 앞을 가볍게 저었다.
“이자벨라 영애. 나를 초대해 준 성의는 고맙지만…… 이런 서민적인 수준의 자리는 내 피부에 맞지 않는군요. 먼지가 날려 숨을 쉴 수가 없어요.”
“……네?”
이자벨라의 얼굴이 순간 흙빛으로 변했다. 주변의 귀족들도 경악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제국 최고의 장인들이 꾸민 정원을 두고 '서민적'이라니.
“세바스티안.”
엘리시아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기다렸다는 듯, 정원 뒤편에서 대공가의 문장이 새겨진 제복을 입은 시종 수십 명이 일사불란하게 걸어 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번쩍이는 순은제 식기들과, 언뜻 보기에도 황실 보물고에서나 나올 법한 보석들이 박힌 화병들이 들려 있었다.
“전부 치우세요. 대공비가 되실 분이 앉으실 자리에 이런 조잡한 물건들을 둘 수는 없으니까요.”
세바스티안의 냉철하고 절제된 목소리가 정원에 울려 퍼졌다.
대공가의 시종들은 이자벨라가 배치해 둔 붉은 장미와 금빛 레이스 테이블보를 가차 없이 걷어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시들지 않는 마법이 걸린 북부의 명품 화초인 '얼음 수정화'를 배치했다.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수정화는 정원을 단숨에 몽환적인 얼음 궁전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테이블 위에는 순은에 금박을 입힌 식기들과, 황실 차회에서도 보기 힘든 최고급 백자기들이 놓였다.
순식간에 정원의 풍경이 바뀌었다. 이자벨라가 준비했던 모든 장식은 순식간에 초라한 잡동사니로 전락해 버렸다.
“아……!”
귀족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눈은 이미 엘리시아가 가져온 압도적인 사치와 품격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다. 이자벨라의 안색은 이제 분노를 넘어 수치심으로 퍼렇게 질려 가고 있었다.
[적대 대상 '이자벨라 빌리에'의 극심한 굴욕감과 분노 감지!] [극락 포인트 +15,000p가 적립됩니다.]
장부의 알림음이 엘리시아의 귓가에 맑게 울렸다. 엘리시아는 그 소리를 들으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그녀는 새로 바뀐 은제 의자에 우아하게 기대앉으며 이자벨라를 응시했다.
“이제야 조금 숨을 쉴 만하군요. 그렇지 않나요, 영애?”
이자벨라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올 것 같았지만, 사교계의 눈들이 지켜보고 있었기에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로렌 영애의 안목이 이토록 높은 줄은 몰랐네요. 배려가 부족해 죄송해요.”
이자벨라는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내리누르며, 슬그머니 뒤에 서 있는 자신의 전담 시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 엘리시아를 이 자리에서 완전히 파멸시키겠다는 살의만이 가득했다.
‘건방진 년. 마음껏 비웃어라. 어차피 오늘이 네 마지막 날이 될 테니까.’
이자벨라는 품속에 숨겨진 비밀 거래의 잔해를 떠올렸다. 로렌 가문의 타락한 시녀를 매수하여 손에 넣은 흔적 없는 지연성 독약. 그것을 떨어뜨린 초대장을 받았으니, 엘리시아의 몸에는 이미 독기가 스며들기 시작했을 터였다. 그리고 이제, 쐐기를 박을 차례였다.
이자벨라의 독촉을 받은 시녀가 은밀하게 움직여, 미리 준비해 둔 특별한 홍차 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엘리시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 잔에는 황실 차회에 쓰이는 최상급 찻잎과 함께, 치명적인 검은 독약이 몇 방울 섞여 있었다.
은은한 실론 티의 향기 뒤로, 미세하게 불길한 독향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엘리시아의 예민한 감각이 그 독향을 놓칠 리 없었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모른 척, 그저 눈을 가늘게 뜨며 찻잔을 바라볼 뿐이었다.
한편, 그 모든 광경을 침묵 속에서 지켜보고 있던 황태자 유진의 눈동자는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엘리시아에게서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과거의 엘리시아는 늘 자신을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기분만을 살피던 순종적인 ‘로렌의 장미’였다. 가스라이팅에 갇혀 제 가치를 모르던 가련한 인형.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엘리시아는, 북부 대공의 비호 아래 그 누구보다 오만하고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는 그 얼음 같은 태도가, 유진의 비틀린 독점욕을 미친 듯이 자극했다.
‘어째서…… 어째서 나를 보지 않는 거지?’
유진의 가슴속에서 뒤늦은 후회와 집착이 피어올랐다. 이자벨라의 가증스러운 눈물보다, 저 오만하고 잔인한 엘리시아의 미소가 그의 심장을 더 강하게 쥐흔들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가 다시 예전처럼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신을 위해 헌신하던 그때로 귀환하기를 애타게 갈망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빛이 집착으로 끈적하게 젖어 들었다.
[적대 대상 '유진 알베르트'의 강렬한 후회와 비틀린 집착 감지!] [극락 포인트가 실시간으로 흡수됩니다.] [+8,000p… +12,000p… 현재 포인트 지속 상승 중!]
엘리시아는 시선을 돌려 유진의 애타는 눈빛과 마주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한 줌의 온기도 없었다. 오직 철저한 계산과 멸시만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유진은 그녀의 차가운 시선에 가슴이 턱 막히는 통증을 느꼈지만, 오히려 그 고통이 그의 집착을 더 부추겼다.
그때, 이자벨라의 시녀가 마침내 엘리시아의 바로 앞에 홍차 잔을 내려놓았다.
달콤하고 우아한 차향 속에 숨겨진, 파멸의 붉은 액체.
이자벨라는 숨을 죽인 채 엘리시아의 손끝을 주시했다. 홍차 잔을 쥔 엘리시아의 손가락은 백옥처럼 희고 고왔다.
엘리시아는 찻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자벨라를 향해 눈부시게 오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잔 속에 담긴 불길한 붉은 액체가 일렁였다.
그녀는 과연 이 독을 알고 있는 것일까, 모르는 것일까.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엘리시아는 이자벨라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그 치명적인 붉은 액체를 조금씩, 아주 천천히 혀끝으로 맛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