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수치심에 떨며 엘리시아의 마차를 따라붙으려던 유진의 손을 차가운 은색 가갑을 낀 칼릭스의 손아귀가 으스러질 듯 압박했다.

뼈와 뼈가 맞부딪치며 삐걱거리는 섬뜩한 마찰음이 유진의 귓가를 잔인하게 파고들었다. 칼릭스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혹한의 마기는 유진의 얇은 손목 피부를 타고 올라가 혈관을 얼려버릴 듯 사납게 날뛰었다. 유진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숨을 들이켜며 무릎을 꿇었다. 대리석 바닥의 차가운 감촉이 무릎뼈를 타고 시리게 올라왔지만, 손목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는 그 어떤 감각도 사치에 불과했다.

“내 반려의 길을 가로막지 마라, 황태자.”

낮게 가라앉은 칼릭스의 목소리는 제국 최북단의 만년설보다 더 시리고 냉혹했다. 그가 손을 거칠게 털어내자 유진은 보기 좋게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먼지가 내려앉은 대리석 바닥 위에서 겨우 상체를 일으킨 유진의 눈에 비친 것은, 닫히는 마차 문틈 사이로 보인 엘리시아의 나른하고도 오만한 미소뿐이었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황궁 깊숙한 곳에 위치한 황태자 집무실의 공기는 질식할 것처럼 무겁고 탁했다. 창밖으로는 따스한 초여름의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으나, 방 안은 마치 두꺼운 얼음 장막에 둘러싸인 것처럼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바스락, 타악!

유진은 왼손으로 오른쪽 손목을 감싸 쥐었다. 은색 장갑에 짓눌렸던 손목에는 여전히 검푸른 피멍이 고리 모양으로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뼈마디가 시큰거리는 통증이 밀려왔다. 육체적인 고통보다 그를 더 미치게 만드는 것은 뇌리를 떠나지 않는 수치심과 기이한 갈증이었다.

탁자 위에는 엘리시아의 최근 행적을 샅샅이 조사하여 올린 보고서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북부 대공가와의 밀약, 사교계에서 벌인 전대미문의 사치 행각, 그리고 카이엔 대공과의 은밀한 접촉에 이르기까지. 종이 위에 인쇄된 활자 하나하나가 유진의 안구를 찌르는 것 같았다.

“겨우 이딴 정보나 가져오려고 황실의 정보원들을 부렸단 말인가!”

유진이 거칠게 손을 휘둘렀다. 빳빳한 양장본 서류철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낱장의 종이들이 나비 날개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엘리시아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힌 서류를 집어 들고 신경질적으로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찌익, 찌익 하는 매끄러운 종이의 파열음이 집무실의 고요를 난폭하게 갈라놓았다.

찢긴 종이 조각들이 그의 가죽 장화 위로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렸다.

“엘리시아…… 감히 내 손귀를 벗어나 북부의 괴물 품에 안겨?”

그녀의 하얀 목덜미를 휘감고 있던 붉은 선혈, 그리고 그 피를 입술에 묻힌 채 지어 보였던 황홀한 미소. 죽어 마땅한 시한부의 몸이면서도,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 오만무쌍한 눈빛이 유진의 소유욕을 사납게 자극했다. 자신이 비참하게 버렸던 여자가, 어째서 자신보다 더 높은 곳에서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끈적한 질투와 후회가 뒤섞인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 순간, 유진의 목구멍에서 마른기침이 새어 나왔다. 그가 느낀 절망의 깊이만큼, 허공에 보이지 않는 기묘한 황금빛 장부의 눈금이 가차 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

같은 시각, 밤의 어둠을 가르며 달리는 카이엔 대공가의 마차 안.

사방이 최고급 흑색 벨벳과 금빛 자수로 장식된 마차 내부는 고요하다 못해 숨이 막힐 듯한 텐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죽 시트 위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엘리시아는 여전히 입가에 마르지 않은 핏자국을 매단 채였다. 순백의 실크 드레스 가슴팍에 흐트러진 붉은 얼룩은 마치 하얀 눈밭에 떨어진 장미 꽃잎처럼 기괴하면서도 탐미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칼릭스는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차가운 푸른 눈동자 속에서 기묘한 정열이 일렁였다.

칼릭스가 서서히 몸을 기울였다. 가죽 시트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주 미세하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의 크고 다부진 손이 엘리시아의 얼굴을 향해 뻗어왔다. 가죽 장갑을 벗어던진 그의 맨손가락 끝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서늘했다.

조심스럽고도 위압적인 손길이 엘리시아의 하얀 볼을 쓸어내렸다. 그의 손가락이 뺨을 타고 내려와 붉은 피가 번진 입술 가장자리에 멈추어 섰다.

“피를 흘리면서도 그리 기쁜 표정을 짓다니.”

칼릭스의 목소리는 낮고 낮아서 마차의 진동 속으로 녹아들 것만 같았다. 그의 손끝이 엘리시아의 입술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묻어나는 선혈이 그의 엄지손가락을 붉게 물들였다.

“그대의 목숨을 갉아먹는 것이 이 붉은 피라면, 내 심장이라도 터뜨려 채워주지. 거래 이상의 무언가를 원한다면 말이야.”

그의 눈빛은 단순한 동맹이나 계약 파트너를 바라보는 그것이 아니었다. 엘리시아의 존재 자체를 집어삼키고, 그녀의 잔인한 생명력 속에 자신을 매장하고 싶어 하는 깊은 갈망과 시험이 깃들어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닿는 순간, 엘리시아는 느꼈다. 칼릭스의 체내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마기 핵이 격렬하게 공명하며 요동치기 시작하는 것을. 평소라면 차갑게 얼어붙어 있어야 할 그의 마기가, 오직 엘리시아의 피부와 맞닿는 것만으로도 뜨거운 파도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접촉이 아니었다.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부동의 친화 특성이었다.

동시에 엘리시아의 머릿속에서 기계적이고 차가운 장부의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경고: 계약 상대 '칼릭스 카이엔'의 감정 동요 감지.] [마기 핵 공명도 급상승! 장부의 활성화 속도가 가속화됩니다.] [현재 여유 포인트: 35,000p]

엘리시아는 칼릭스의 손가락 밑에서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그의 손가락에서 전해지는 차가운 체온은 그녀의 뜨겁게 달아오른 열증을 식혀주는 유일한 해독제였지만, 그녀의 마음은 그 온기보다 훨씬 더 차가웠다.

그녀는 칼릭스의 깊은 눈빛을 보며, 그것을 인간 대 인간의 교감이 아닌 장부 위에 정교하게 기록될 '감정적 자산'으로 분류했다. 그녀에게 인간의 선의와 사랑이란 언제든 배신으로 돌아올 수 있는 가장 불안정한 화폐에 불과했다.

“대공 전하.”

엘리시아가 나른하게 웃으며 칼릭스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끝이 그의 맥박이 뛰는 손목 안쪽에 단단히 내려앉았다. 체온이 맞닿자 장부의 적자가 완벽히 상쇄되며 온 몸의 뼈마디를 누르던 환각 증세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극락의 희열이 척추를 타고 짜릿하게 흘러내렸다.

“우리는 서로의 가장 어두운 틈새를 메워주는 완벽한 동맹입니다. 저를 향한 그대의 그 기묘한 호기심은 장부상의 이득으로만 환산될 때 가장 아름답게 빛나지요.”

그녀는 그의 손을 거칠게 떼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손을 자신의 뺨에 더 깊이 밀착시키며, 눈동자에 서린 오만한 불신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제게 마음을 구걸하지 마세요. 계약서의 검은 잉크보다 더 단단한 것은 오직 서로의 이해관계뿐이니까요. 그대가 내게서 마기의 정화를 얻고, 제가 그대에게서 차가운 체온을 취하는 이 완벽한 거래에 감정이라는 불순물을 섞지 마십시오.”

칼릭스의 눈썹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의 오만한 거절은 오히려 그의 심장 속 마기 핵을 더욱 거칠게 흔들어 놓았다. 타인에게 지배당하기를 거부하고, 오직 자신만의 도파민과 극락을 위해 움직이는 이 아름다운 악녀를, 그는 기어이 완전히 소유하고 싶다는 파괴적인 충동에 휩싸였다.

***

사흘 뒤, 제국 사교계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황실과 공작가의 균열이 가시화된 가운데, 사교계의 중심이라 불리는 라 프리모네 후작 부인의 화려한 온실 살롱에는 제국의 내로라하는 영애들과 귀부인들이 모여 찻잔을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사방에 만발한 분홍빛 장미 향기 속에서, 그들이 나누는 은밀한 대화의 주제는 단 하나, 엘리시아 로렌의 '비극적인 세기의 연인' 행보였다.

“어머, 들으셨어요? 로렌 영애가 실은 몹쓸 병에 걸려 하루하루 피를 말려가고 있다는 소문 말이에요.”

레이스 장식이 화려한 부채로 입가를 가린 한 영애가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후작 부인이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뿐인가요? 지난번 무도회에서 황태자 전하가 주신 사파이어 목걸이를 가차 없이 밟아 뭉갠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더군요. 시한부의 짧은 생을 남겨두고, 자신을 기만한 황태자의 거짓 사랑 대신 북부 대공과의 고결하고 영혼을 불사르는 진실한 사랑을 선택한 것이라지요.”

“세상에……! 그렇다면 로렌 영애가 그토록 상상을 초월하는 화려한 사치 파티를 열고 드레스를 사들이는 것도…….”

“남은 생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찬란하게 불태우기 위함이겠지요. 죽음을 앞두고 비겁하게 눈물을 흘리는 대신, 가장 화려한 모습으로 대공 전하의 곁을 지키겠다니. 이 얼마나 비장하고 아름다운 사랑인가요!”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교계 전체로 번져나갔다.

엘리시아가 흘린 붉은 피와 화려한 사치 행각은, 사교계의 위선적인 시선 속에서 '비극적 운명에 맞서는 오만하고 아름다운 연인의 마지막 불꽃'으로 완벽하게 미화되고 우상화되었다. 귀족들은 그녀의 퇴폐적인 사치와 파괴적인 감각에 매료되어, 마치 유행처럼 그녀의 행보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그 반대급부로, 전 약혼자인 황태자 유진에 대한 여론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시한부인 약혼녀를 두고 빌리에 자작 영애와 눈이 맞아 기만하려 들다니, 황태자 전하도 참 무자비한 사내이십니다.”

“모조석 목걸이로 영애의 눈을 가리려 했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보더군요. 정말 천하의 개자식이 따로 없지요.”

황실의 권위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고, 유진은 사교계에서 은밀하게 기피해야 할 가식적인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제국 사교계의 동조 효과 발생!] [유진 알베르트의 사회적 명예 하락으로 인한 후회 포인트 대량 수급: +15,000p] [현재 여유 포인트: 50,000p 돌파!]

자신의 저택 침실에서 실크 가운을 걸친 채 침대에 누워 장부의 수치를 확인하던 엘리시아는 나른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사교계가 자신을 비극의 여주인공으로 우상화하든 말든, 그녀에게는 오직 이 장부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만이 진정한 극락이었다.

피를 토할 때마다 차오르는 생명력과, 자신을 배신했던 이들의 파멸을 지켜보며 얻는 도파민. 이것이야말로 시한부의 삶을 가장 완벽하게 누리는 방법이었다.

***

한편, 빌리에 자작가의 저택.

이자벨라의 화장대 위에는 값비싼 화장품과 보석함들이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그녀의 고운 얼굴은 분노와 초조함으로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사교계에 퍼진 소문은 그녀를 황태자의 정부이자, 친구의 약혼자를 가로챈 파렴치한 고양이로 만들어 버렸다.

“엘리시아…… 감히 네가 나를 이토록 비참하게 만들어?”

이자벨라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화장대 거울을 내려쳤다. 댕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향수병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지며 진한 향기가 사방으로 진동했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황태자비의 왕관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사교계의 이 불리한 여론을 단숨에 뒤집고, 엘리시아 로렌을 영원히 매장할 방법이 필요했다.

이자벨라는 서랍 깊숙한 곳에서 정교하게 세공된 은색 열쇠를 꺼냈다. 그리고 비밀 보관함을 열어, 붉은 실링 왁스가 칠해진 봉투와 함께 조그만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유리병 안에는 빛을 흡수하는 듯한 기묘한 검은빛의 액체가 담겨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로렌 가문의 타락한 시녀를 통해 막대한 보석을 주고 구한, 흔적이 남지 않는 특수 지연성 독약이었다.

“비극의 여주인공 노릇도 여기까지야, 엘리시아.”

이자벨라의 입술이 비틀린 호선을 그렸다. 그녀는 빳빳하고 고급스러운 종이 위에 황태자 유진과 자신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공식 황실 차회의 초대장을 써 내려갔다. 깃펜의 날카로운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방 안에 음산하게 울렸다.

완성된 초대장 모서리에, 이자벨라는 유리병에 담긴 독약을 미세하게 떨어뜨려 스며들게 했다. 향기로운 장미 향수와 섞인 독약은 눈으로는 도무지 식별할 수 없었다. 오직 공기 중으로 미세하게 풍기는 불길하고 기묘한 독향만이 그 안에 도사린 살의를 증명할 뿐이었다.

초대장을 봉인한 이자벨라는 시녀를 불러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이것을 당장 로렌 영애의 저택으로 보내라. 단 한 사람도 모르게, 아주 은밀하게 전해야 할 것이다.”

사교계의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황실 차회. 그곳은 엘리시아 로렌의 화려한 연극이 끝나는 종착지가 될 것이었다. 지독한 살의가 담긴 정체불명의 초대장이 어둠을 틈타 엘리시아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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