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회의 숨결이 채 식기도 전에, 테라스의 무거운 청색 벨벳 커튼을 거칠게 젖히며 질투와 불쾌함으로 안색이 창백해진 황태자 유진이 이들을 노려보았다.
황금빛 자수가 정교하게 놓인 연회장의 불빛이 왈츠의 선율과 함께 좁은 테라스 안으로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빛과 어둠의 경계선에서, 유진의 눈동자는 칼릭스의 드넓은 가슴팍에 뺨을 기대고 있는 엘리시아에게 고정되었다. 그녀의 아랫입술 끝에 맺힌 작은 핏방울이 달빛을 받아 루비처럼 붉게 반짝이고 있었다. 흐트러진 레이스 깃과 대공의 가슴팍을 움켜쥔 고운 손가락이 남긴 흔적들이 유진의 이성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너희들…… 지금 여기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유진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호수 밑바닥을 긁는 것처럼 낮고 싸늘했다. 가느다랗게 떨리는 그의 가죽 장갑 낀 손이 허리춤에 찬 의전용 검의 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제국의 태양이라 불리는 사내의 안색이 이토록 처참하게 일그러진 것은 사교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엘리시아는 칼릭스의 옷자락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풀었다. 하지만 그의 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칼릭스의 서늘한 체온이 그녀의 뜨겁게 달아오른 뺨을 식혀주자, 가슴 안쪽에서부터 형언할 수 없는 도파민이 차올랐다. 머릿속에서는 청아한 종소리와 함께 황금빛 장부의 잔상이 선명하게 명멸했다.
[계약 상대의 감정 변화 감지.] [칼릭스 카이엔의 소유욕: +1,500p] [적대 대상 유진 알베르트의 질투 및 집착도: +3,800p] [현재 누적 극락 포인트: 9,800p]
수치가 폭발적으로 상승하는 광경을 바라보는 엘리시아의 눈동자가 희열로 가늘어졌다. 숨이 가빠오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지만, 그것은 고통이 아닌 극상의 쾌락이었다. 그녀는 입가에 묻은 피를 섬세한 실크 손수건으로 닦아내지도 않은 채, 유진을 향해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무슨 짓이라니요, 황태자 전하. 눈이 멀지 않으셨다면 보시다시피 대공 전하와 밀어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만.”
“밀어?”
유진이 가소롭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엘리시아의 붉은 입술과, 그녀의 어깨를 단단하게 감싸 안은 칼릭스의 커다란 손에 박혀 있었다.
“로렌 공작가의 영애가 이토록 천박하게 굴 줄은 몰랐군. 파혼을 선언한 지 고작 며칠이나 지났다고 북부의 야만인 품에 안겨 침을 흘리는가? 네가 부리는 이 해괴한 사치와 기행이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제국 황실의 권위마저 진흙탕에 처박으려 드는구나.”
유진의 비난은 날카로웠으나, 그 이면에는 소중한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 같은 졸렬한 집착이 끈적하게 묻어 있었다. 그는 엘리시아가 자신에게 매달려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여자는 과거의 나약한 엘리시아가 아니었다.
“황실의 권위라니요.”
엘리시아가 칼릭스의 품에서 우아하게 걸어 나왔다. 그녀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진주와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이브닝드레스의 밑단이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찬란하게 흔들렸다.
“제가 제 돈을 쓰고, 제 마음에 드는 사내와 밤공기를 마시는 것이 어찌 황실의 권위와 상관이 있겠습니까? 이미 파혼서에 서명하신 분께서 지나치게 참견이 심하시옵니다, 전하.”
“엘리시아!”
유진이 한 걸음 다가서며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려 했다. 그러나 그의 손길이 닿기 직전, 엘리시아는 들고 있던 은빛 자수 클러치백을 가볍게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푸른빛을 내뿜는 목걸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사파이어가 박혀 있지만, 세공이 조잡하고 보석의 등급 또한 떨어지는, 유진이 예전 약혼 기념이라며 던져주었던 물건이었다.
“이것을 기억하시나요?”
엘리시아가 목걸이를 유진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유진의 눈매가 좁아졌다.
“그것은 내가 너에게 준…….”
“네, 전하께서 제게 주신 ‘가장 값진’ 선물이었지요. 가짜 사파이어를 섞어 만든, 제국의 장인들이 보면 침을 뱉을 만한 조잡한 물건 말입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미련도, 분노도 없었다. 오직 철저한 경멸과 차가운 계산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엘리시아는 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가락을 가볍게 폈다.
차르릉―.
푸른 사파이어 목걸이가 테라스의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정확히 유진의 잘 닦인 검은 군화 발밑으로 굴러갔다.
“가져가세요. 이런 조잡한 유리 조각은 제 드레스의 품격을 떨어뜨릴 뿐이니까요.”
엘리시아는 주저 없이 구두 굽으로 그 목걸이의 체인 끝부분을 밟았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미세하게 도금된 은체인이 찌그러졌다. 그녀는 유진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하는 모습을 아주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적대 대상 유진 알베르트의 수치심 및 후회 수치 폭등!] [유진 알베르트의 후회도: +4,500p] [현재 여유 포인트: 14,300p]
심장 부근에서 따스한 생명력이 혈관을 타고 퍼져나가는 감각에 엘리시아는 몸을 살짝 떨었다. 이 사내의 절망은 참으로 훌륭한 비즈니스 자원이었다.
“네가 감히…… 내 선의를 짓밟는구나.”
유진이 이빨을 악물었다. 그의 이마에 푸른 힘줄이 돋아났다. 발밑에 처참하게 구겨진 목걸이는 그가 엘리시아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마지막 오만의 파편이었다.
그때, 테라스의 열린 커튼 틈새로 깃털 부채를 든 부인들의 수근거림이 새어 들어왔다. 그들의 시선이 닿는 길목에, 마치 그림자처럼 대기하고 있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렌 공작가의 집사이자 엘리시아의 충직한 보좌인, 세바스티안이었다.
세바스티안은 품위 넘치는 걸음걸이로 다가와 유진을 향해 완벽한 각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황태자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 것과 다름없었다.
“황태자 전하, 사교계의 영애들이 전하의 고결한 안목에 대해 무척이나 궁금해하고 있사옵니다. 방금 바닥에 떨어진 저 목걸이가 혹시…… 황실 창고에서 나온 ‘특등급’ 보석인지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세바스티안은 주변에 모여든 귀족 부인들이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일부러 맑고 낭랑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눈가에는 장난스러운 호기심이 서려 있었다.
“저런 조잡한 모조석이 황실의 선물이라니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로렌 공작가의 시녀들도 저런 것은 목에 걸지 않습니다만.”
“세바스티안!”
유진이 호통을 쳤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커튼 너머로 “어머, 세상에.” 하는 부인들의 나직한 비웃음 섞인 탄성이 흘러나왔다. 제국에서 가장 부유하다 자부하는 황태자가 약혼녀에게 모조 보석을 선물했다는 사실은 내일 아침이면 사교계 전체의 가장 자극적인 가십거리가 될 터였다.
유진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그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세바스티안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지금껏 조용히 관조하던 북부의 지배자가 움직였다.
칼릭스가 엘리시아의 어깨를 감싸 쥔 채, 유진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의 거대한 체구가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유진을 완벽하게 덮어버렸다. 칼릭스의 적자색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마기의 기운이 테라스 내부의 공기를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뜨렸다.
“황태자 전하.”
칼릭스의 목소리는 묵직하고도 위압적이었다.
“내 반려가 될 여인에게 지나치게 무례하시군. 로렌 공작가의 부채와 명예에 대해 염려하시는 모양인데, 더는 그 조잡한 입을 놀릴 필요는 없을 것 같소.”
칼릭스는 엘리시아의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당기며, 연회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목소리는 테라스 너머, 연회장 안의 모든 귀족에게 똑똑히 들릴 만큼 낮고 강하게 울려 퍼졌다.
“로렌 공작가가 지닌 황실에 대한 모든 채무와 부채는, 이 시간부로 카이엔 대공가에서 전액 대납 및 태환할 것을 선언하오. 또한, 엘리시아 영애가 원하는 모든 사치와 소비에 대해 본 대공은 무한한 금전적 신용을 보장할 것이오.”
무제한의 금전적 신용 보장.
그것은 북부의 막대한 광산과 영토를 손에 쥔 카이엔 대공가만이 할 수 있는, 황실조차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압도적인 선언이었다. 연회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괴괴한 침묵에 휩싸였다.
유진은 멍하니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엘리시아를 죌 수 있는 유일한 밧줄이라 여겼던 가문의 부채마저 대공의 손에 의해 단숨에 잘려 나간 것이다.
엘리시아는 칼릭스의 가슴에 기대어 나른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서늘한 마기가 그녀의 체온과 공명하며, 장부의 적자 수치를 완벽하게 지워내고 수명을 늘려주는 감각이 짜릿하게 척수를 타고 흘렀다. 이 남자와의 계약은 참으로 달콤했다.
“그럼, 전하. 저희는 이만 지루한 연회장을 물러가 보겠습니다. 부디 바닥에 떨어진 보석은 잘 챙겨 가시길 바라요.”
엘리시아는 유진을 비껴 지나치며, 그의 군화 발밑에 짓밟힌 목걸이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칼릭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세상에서 가장 오만하고 화려한 걸음걸이로 무도회장을 빠져나갔다. 귀족들은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져 그녀의 퇴로를 열어주었고, 그들의 눈빛은 경멸에서 경외와 선망으로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황태자 유진은 텅 빈 테라스에 홀로 남겨졌다. 그의 귀에는 여전히 자신을 향한 귀족들의 쑥덕거림과 비웃음이 이명처럼 맴돌았다. 참을 수 없는 굴욕감과, 가슴 한구석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기묘한 후회와 상실감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엘리시아……!”
유진은 황급히 연회장을 가로질러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화려한 망토가 거칠게 휘날렸다.
대공가의 문장이 선명하게 새겨진 검은 마차가 출발하려던 찰나였다. 유진은 이성을 잃은 채 마차의 문고리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엘리시아를 이대로 보낸다면, 정말로 그녀를 영영 잃어버릴 것 같다는 본능적인 공포가 그를 엄습했다.
“엘리시아! 내 말을 들어라! 네가 이럴 수는……!”
탁―!
가죽 장갑을 낀 유진의 손이 마차 문고리에 닿기 직전, 허공에서 차가운 은색 가죽 장갑을 낀 손아귀가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악……!”
유진의 입에서 단말마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손목의 뼈가 그대로 으스러질 듯한 압도적인 악력이었다. 고개를 들어 올린 유진의 눈에, 마차 계단에 비스듬히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칼릭스의 살기 어린 눈동자가 담겼다. 칼릭스의 은색 가죽 장갑 틈새로 검붉은 마기의 불꽃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 윽……!”
유진의 입에서 가느다란 단말마가 흘러나왔다.
손목의 뼈마디가 그대로 짓눌려 부서질 듯한 압도적인 악력이었다. 가죽 장갑 위로 고스란히 전해지는 무지막지한 힘에 유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고개를 들어 올린 유진의 눈동자에, 마차 계단에 비스듬히 선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칼릭스의 살기 어린 적자색 눈동자가 담겼다. 칼릭스의 은색 가죽 장갑 틈새로 검붉은 마기의 아지랑이가 살아 숨 쉬는 뱀처럼 스멀거리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제국의 태양이라 자부하던 유진의 자존심이, 오직 힘 하나로 자신을 내리누르는 북부의 괴물 앞에서 처참하게 구겨졌다.
“놓으란 말이다……! 감히 내 몸에 손을 대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유진이 이를 악물고 반항하려 했으나, 칼릭스의 팔은 거대한 강철 기둥처럼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히려 유진이 발버둥 칠수록 그의 손목을 조여오는 악력은 사정없이 강해질 뿐이었다. 가죽과 가죽이 쓸리며 기괴한 마찰음이 고요한 밤공기를 찢었다.
[적대 대상 유진 알베르트의 파멸적인 무력감 및 분노 감지.] [유진 알베르트의 굴욕 수치: +4,800p] [칼릭스 카이엔의 소유욕 및 지배욕: +3,000p] [현재 누적 극락 포인트: 22,100p]
머릿속에서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장부의 알림음에 엘리시아는 마차 시트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전 약혼자가 처참하게 짓밟힐 때마다 온몸의 세포가 살아나는 듯한 극상의 생명력이 혈관을 타고 흘렀다. 이 얼마나 가성비 좋은 감정 착취인가.
그녀는 어둠이 짙게 깔린 마차 창가로 스르륵 다가갔다. 비단 커튼을 살짝 걷어 올리자,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볼품없이 일그러진 유진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였다.
“전하, 추태가 지나치십니다.”
엘리시아의 목소리는 밤바람처럼 서늘하면서도 지독하게 매혹적이었다.
“이곳은 황실의 눈과 귀가 사방에 널린 벨포르궁의 정문 앞이옵니다. 제국의 후계자께서 파혼당한 영애의 마차 바퀴를 붙잡고 구걸하는 모습이 내일 아침 사교계 신문에 대서특필되기를 원치 않으신다면, 그만 품위를 지키시지요.”
“엘리시아! 네가 정녕 미쳤구나! 저 북부의 야만인에게 놀아나며 시한부인 제 명줄을 스스로 갉아먹는 줄도 모르고……!”
유진이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그의 눈동자에는 배신감과 질투, 그리고 자신을 철저히 배제한 채 완벽하게 굴러가는 두 사람의 세계에 대한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그 순간, 칼릭스의 체내에 억눌려 있던 마기 핵이 엘리시아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구릉―!
대기를 흔드는 나직한 공명음과 함께, 칼릭스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 마기가 폭주하듯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마차를 몰던 준마들이 히힝거리며 앞다리를 들었고, 주변을 지키던 호위 기사들이 검자루를 잡으며 긴장했다. 칼릭스의 미간이 고통으로 깊게 찌푸려졌다. 그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지며, 폭주하는 마기가 그의 이성을 집어삼키려 들고 있었다.
황실 무도회장의 화려함 뒤에 숨겨진 치명적인 어둠이 마침내 고개를 든 것이다.
‘공명하고 있어.’
엘리시아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칼릭스의 체내에 존재하는 마기의 핵이,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자마자 자석에 이끌리듯 폭발적인 친화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장부의 에너지가 그의 마기를 자극하는 동시에, 그의 고통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대로 두었다간 칼릭스가 이곳에서 마기를 폭발시켜 황실 기사단과 전면전을 벌이게 될 판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원하는 우아하고 사치스러운 은퇴 시나리오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엘리시아는 망설임 없이 마차 문밖으로 가느다란 손을 뻗었다. 그리고 거칠게 끓어오르는 칼릭스의 단단한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스으으읍―.
찰나의 접촉이었다.
하지만 그 기적 같은 터치 한 번에, 사납게 날뛰던 검은 마기의 파동이 거짓말처럼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칼릭스의 은색 장갑 위로 피어오르던 검붉은 불꽃이 엘리시아의 하얗고 고운 손가락 끝으로 빨려 들어가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칼릭스의 거친 숨소리가 멎었다. 그의 적자색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으로 물들었다. 평생 자신을 좀먹으며 타오르던 지옥의 불길이, 이 가녀린 여인의 손길 한번에 봄눈 녹듯 정화되는 감각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구원 그 자체였다.
그러나 대가 없는 기적은 존재하지 않는 법이었다.
[경고: 계약 상대의 폭주하는 마기를 강제 흡수함.] [신체 과부하 발생. 일시적인 혈류 역류 현상이 감지됩니다.]
“윽……!”
엘리시아의 하얀 이마에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 가슴 안쪽에서부터 뜨거운 열증이 치밀어 오르더니, 이내 목구멍을 타고 비릿하고 붉은 액체가 역류했다.
울컥―.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한 줄기 선명한 선혈이 흘러내렸다. 붉은 피는 그녀가 입은 순백의 실크 드레스 위로 툭, 툭 떨어지며 잔혹할 정도로 아름다운 붉은 꽃을 피워냈다.
“엘리시아!”
유진이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피를 토하는 모습을 직접 눈앞에서 목격한 그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하지만 정작 피를 토한 엘리시아의 얼굴에는 비극적인 절망 대신, 지독할 정도로 황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머릿속의 장부가 미친 듯이 수치를 경신하며 그녀의 영혼에 전율을 불어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체내 마기 정화 및 생명력 변환 완료!] [임시 과부하 보상 포인트: +10,000p] [현재 여유 포인트: 32,100p] [수명 연장 결산 완료: 남은 수명이 30일로 연장됩니다!]
터질 듯한 생명력이 전신을 채우는 극락의 희열 속에서, 엘리시아는 피 묻은 입술을 느리게 끌어올렸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유진의 공포에 질린 시선을 즐기며, 손가락으로 입가에 흐른 피를 나른하게 훔쳐냈다.
“보시다시피…… 전 아주 건강하답니다, 전하.”
그녀의 퇴폐적인 미소는 마치 파멸을 앞둔 마녀의 그것과도 같았다.
칼릭스는 붉게 물든 엘리시아의 입술을 응시하며,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맹목적인 갈망에 휩싸였다. 그는 유진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거칠게 내던지듯 놓아버렸다. 유진이 중심을 잃고 대리석 바닥으로 보기 좋게 자빠졌다.
칼릭스는 단숨에 마차 안으로 몸을 들이밀며 엘리시아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마차 문을 거칠게 닫아걸었다.
쿵―!
“출발해라.”
칼릭스의 낮고 가라앉은 명령과 함께 마차가 어둠 속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주저앉은 유진은 멀어져 가는 마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넋을 잃었다. 방금 전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엘리시아가 흘린 그 붉은 피와 그 뒤에 지은 황홀한 미소의 의미가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바로 그 순간, 유진의 발밑에 떨어져 있던 사파이어 목걸이의 잔해 틈새에서 조그만 양장본 장부의 형태를 한 허상의 그림자가 기묘한 황금빛을 내뿜으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오직 유진의 눈에만 보이는, 기이하고도 불길한 장부의 첫 페이지가 천천히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