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잔 안에서 속삭이듯 피어오르던 황금빛 기포가 차가운 입술 사이로 흘러들었다. 목구멍을 짜릿하게 긁고 내려가는 샴페인의 탄산은 지독하리만치 달콤한 마취제였다. 엘리시아는 잔을 비스듬히 기울인 채, 벨벳 커튼 너머의 어둠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이자벨라 빌리에가 서 있었다. 사교계의 가련한 꽃을 자처하는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끝이 꼴사납게 떨리고 있었다. 이자벨라가 품 안에서 꺼내 든 것은 보랏빛 자수정으로 마감된 작은 유리병이었다. 비정상적으로 어두운 보랏빛 액체가 담긴 독약 병이, 로렌 공작가의 은색 문장이 새겨진 제복을 입은 시녀 클라라의 소매 안으로 소리 없이 흘러 들어갔다.
완벽한 현장이었다.
엘리시아는 젖은 입술을 느리게 핥으며, 경악으로 얼어붙은 이자벨라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꿰뚫었다. 당황과 공포로 물드는 그 눈빛을 조준하듯, 엘리시아는 우아하게 크리스털 잔을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얽히는 순간, 엘리시아의 붉은 입술이 매혹적인 호선을 그렸다.
“어리석기도 해라.”
나지막한 혼잣말은 샴페인의 거품 속으로 흩어졌다.
엘리시아는 가볍게 눈짓을 보내 무도회장 구석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세바스티안을 불렀다. 상아색 실크 장갑을 낀 그의 손이 가슴께에 얹히며 부드럽게 숙여졌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고요한 움직임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세바스티안. 쥐새끼가 덫에 발을 들이밀었네요. 굳이 무도회장의 바닥을 더러운 피로 물들일 필요는 없겠죠.”
세바스티안은 엘리시아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단번에 포착했다. 이자벨라와 은밀한 거래를 마치고 군중 속으로 스며들려던 시녀 클라라의 뒷모습이었다. 세바스티안의 입꼬리에 서늘하고도 완벽한 집사의 미소가 걸렸다.
“염려 마십시오. 향기로운 꽃밭에 잡초가 돋아나기도 전에 뿌리째 솎아내는 것이 제 본분이니까요.”
그는 소리 없이 움직였다.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 아래에서 춤추는 귀족들의 틈새를 유령처럼 통과한 세바스티안은, 불안감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클라라의 곁에 어느새 바짝 다가섰다.
클라라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세바스티안의 단단한 손아귀가 그녀의 팔꿈치를 움켜쥐었다. 겉보기에는 다정한 연인들이 귓속말을 나누는 듯한 다정한 각도였으나, 클라라의 안색은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세바스티안의 손가락끝이 그녀의 손목 뼈를 부러뜨릴 듯이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라라. 아가씨께서 조용한 곳에서 차를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아, 저, 저는…….”
“소란을 피우면, 네가 품은 그 보랏빛 유리병이 네 목구멍으로 먼저 쏟아질 겁니다. 걸으시지요.”
세바스티안의 낮고 부드러운 음성은 거역할 수 없는 사형선고와 같았다. 그는 사교계의 이목을 완벽히 피한 채,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사시나무 떨듯 떠는 클라라를 무도회장 뒤편의 은밀한 지하 심문실로 빼돌렸다. 완벽하고도 단호한 처리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엘리시아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승리의 미소가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소름 끼치는 냉기가 솟구쳤다.
동시에 눈앞에 붉은색 경고등이 켜지듯 가상의 장부가 펼쳐졌다.
[경고: 장부의 일시적 적자 상태 감지.] [보유 포인트가 소진되었습니다. 즉시 계약 상대와의 체온 접촉을 통한 포인트 결산을 이행하지 않을 시, 영혼 소멸 패널티가 부과됩니다.]
“윽……!”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에 엘리시아의 무릎이 꺾일 뻔했다. 전신의 뼈마디가 잘게 쪼개져 고운 모래가 되는 듯한 극심한 환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찌릿한 고통은 단순한 물리적 아픔이 아니었다. 영혼의 밑바닥을 사정없이 긁어내는 듯한 치명적인 발작이었다.
지독한 열증이 뺨을 붉게 물들였다. 숨을 쉴 때마다 허파가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고통 속에서 오히려 기묘한 희열을 느꼈다. 턱 끝이 가늘게 떨리고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와중에도, 그녀의 눈동자는 도파민에 중독된 것처럼 번뜩였다.
그녀는 품 안에서 최고급 브뤼셀 레이스로 마감된 손수건을 꺼내 입을 막았다.
“콜록, 흑…….”
터져 나온 기침과 함께 순백의 레이스 위로 선명하고도 아름다운 적색의 꽃이 피어났다. 각혈이었다. 입가에 묻은 붉은 혈흔이 그녀의 창백한 피부와 대비되어 기괴할 정도로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주변의 몇몇 귀족들이 그 모습을 보고 경악 어린 숨을 들이쉬었지만, 엘리시아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피를 토해내며 장부에 찍히는 미세한 생명력의 반동을 온몸으로 만끽했다.
그러나 뼈가 바스러지는 듯한 발작은 가라앉지 않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박동했다. 포인트의 최종 결산을 위해서는 그 남자의 차가운 살결이 필요했다.
‘칼릭스…….’
엘리시아는 흐려지는 시야를 붙잡으며 테라스 쪽으로 비틀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뼈가 마찰하는 듯한 이명이 머릿속을 울렸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순간, 커튼 뒤의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단단하고 거친 손이 엘리시아의 가느다란 손목을 낚아챘다.
“앗……!”
반항할 틈도 없이, 그녀의 몸이 허공을 날아 두꺼운 벨벳 커튼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차갑고 무거운 공기가 가득한 테라스의 음지였다.
그녀를 끌어당긴 것은 북부의 지배자, 칼릭스 카이엔 대공이었다.
칼릭스는 단숨에 엘리시아를 벽으로 밀어붙이며 자신의 넓은 품 안으로 가두었다. 거칠게 닫힌 벨벳 커튼이 무도회장의 화려한 빛을 완벽하게 차단했다. 어둠 속에서 오직 서로의 숨결만이 가깝게 맞닿았다.
“이 무슨 무모한 짓이지, 엘리시아.”
칼릭스의 목소리는 낮고 가라앉아 있었으며, 지독하게 차가웠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북부 특유의 혹한의 마기가 엘리시아의 피부를 사정없이 자극했다.
그 차가운 마기가 닿는 순간, 엘리시아는 본능적으로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매달렸다.
두 사람의 육체가 밀착되자, 엘리시아의 영혼을 갉아먹던 적자 상태의 장부가 미친 듯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특수 계약 상대 '칼릭스 카이엔'과의 밀접 접촉 성공.] [체내 마기 핵과의 공명 개시.] [포인트 결산 진행 중…….]
웅웅거리는 진동이 두 사람의 심장 사이에서 발생했다. 칼릭스의 체내 깊숙한 곳에 도사리고 있던 차갑고 무거운 마기 핵이, 엘리시아의 단순한 접촉만으로도 격렬하게 반응하며 요동쳤다. 마치 오랫동안 굶주렸던 야수가 제 짝을 만난 것처럼, 그의 마기가 엘리시아의 열증을 흡수하고 그녀의 장부 안으로 가차 없이 흘러들었다.
“하아……, 아…….”
엘리시아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 온몸의 뼈를 으스러뜨릴 것 같던 고통이 얼음물에 녹아내리듯 순식간에 정화되어 갔다. 타오르던 열증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형언할 수 없는 극상의 도파민이 가득 차올랐다. 머릿속이 하얗게 멀어질 정도로 감미로운 쾌감이었다.
칼릭스의 호흡 역시 가빠졌다. 평소라면 자신을 좀먹고 미치게 만들었을 체내의 마기가, 엘리시아의 품 안에서 기적처럼 부드럽게 길들여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무방비하게 흔들리는 엘리시아의 허리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얇은 허리를 바스러뜨릴 듯이 쥐었다.
“이것이 그대의 목적이었나? 나를 갈구하는 것이 흘러넘치는 힘을 탐해서였나?”
칼릭스의 어두운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맹수처럼 빛났다. 그의 손가락이 엘리시아의 뺨을 타고 내려가, 피가 묻은 붉은 입술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그의 손가락끝에 묻어나는 붉은 혈흔이 두 사람 사이의 텐션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엘리시아는 여전히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칼릭스의 와이셔츠 깃을 꽉 움켜쥐었다. 고급 실크 셔츠가 그녀의 손아귀 안에서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공포나 나약함은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는, 오만하고 퇴폐적인 눈빛이었다.
“탐하는 것치고는 서로에게 꽤 괜찮은 거래 아닌가요, 대공 전하?”
그녀의 속삭임과 함께, 머릿속의 장부 수치가 폭발적으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계약 상대의 감정 변화 감지.] [칼릭스 카이엔의 소유욕: +1,800p] [칼릭스 카이엔의 집착도: +2,200p] [적자 상태 해제 완료. 현재 여유 포인트: 4,500p]
칼릭스가 느끼는 낯설고 격렬한 집착과 소유욕의 수치가 실시간으로 장부에 연동되어 에너지로 치환되고 있었다. 엘리시아는 그의 가슴팍에 귀를 대고, 폭주하듯 뛰는 그의 심장박동을 고스란히 느꼈다.
그의 마기 핵이 내뿜는 서늘한 파동이 그녀의 혈관을 타고 흐르며 수명을 연장해주고 있었다. 이 얼마나 완벽하고도 사치스러운 비즈니스인가.
“그대는 정말…… 미친 여자군.”
칼릭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의 손은 엘리시아의 등 뒤를 단단히 받친 채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이 닿을 듯이 고개를 숙이며, 지독하게 밀착된 체온을 탐닉했다. 무도회장의 화려한 음악 소리가 벨벳 커튼 너머로 아스라하게 들려왔지만, 이 좁고 어두운 야외 테라스는 오직 두 사람만의 퇴폐적인 극락의 공간이었다.
엘리시아는 그의 어깨에 뺨을 기댄 채 속삭였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 지루한 사교계에서 어떻게 버티겠어요? 전하께서도 제 광기가 마음에 드시는 모양이잖아요.”
그녀의 도발적인 어조에 칼릭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의 손이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치켜올렸다. 서로의 숨결이 엉키고, 입술이 닿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거리가 유지되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바스락―!
테라스를 가로막고 있던 두껍고 무거운 벨벳 커튼이 거칠게 젖혀졌다.
쏟아져 들어오는 무도회장의 화려한 불빛이 어둠에 적응했던 두 사람의 눈을 찔렀다.
그 눈부신 광명 속에서, 분노와 질투로 인해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황태자, 유진 알베르트였다.
유진은 칼릭스의 넓은 품에 안겨 있는 엘리시아를, 그리고 그녀의 입술에 묻은 붉은 피와 흐트러진 옷가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낀 듯 부르르 떨렸다.
“너희들…… 지금 여기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유진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와 집착이 벼려져 있었다.
그 일촉즉발의 대치 속에서, 엘리시아는 칼릭스의 와이셔츠 깃을 잡은 손을 풀지 않은 채, 유진을 향해 나른하고도 잔혹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