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쾅-.

금박을 입힌 육중한 참나무 문이 양옆으로 거칠게 열려 젖혀졌다.

황실 사교 무도회장의 화려한 대문이 열리는 순간, 쏟아져 나온 것은 눈이 멀 것 같은 샹들리에의 황금빛 조명과 정제되지 못한 귀족들의 숨소리였다. 경쾌하게 흐르던 오케스트라의 미뉴에트 선율이 찰나의 순간 불협화음을 내며 뚝 끊겼다. 수백 개의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 비단 부채가 펄럭이는 소리가 마법처럼 멈추었다.

그 침묵의 광장 한가운데로, 엘리시아 로렌이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어깨 위에는 북부의 차디찬 지배자, 칼릭스 카이엔 대공의 단단하고 거친 손이 얹혀 있었다. 그의 칠흑 같은 제복 소매 깃에 수놓아진 은실 문양이 샹들리에 빛을 받아 서늘하게 번뜩였다.

“……로렌 영애가 아닌가?” “아니, 대공 전하와 대체 무슨 관계기에 저토록 다정하게…….” “황태자 전하를 배신하고 북부의 괴물에게 머리를 숙인 건가?”

귓가를 찌르는 수군거림은 파도처럼 밀려왔으나 엘리시아의 걸음걸이에는 미세한 흔들림조차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입가에는 비틀린 호선이 매끄럽게 그려졌다.

그녀가 걸친 드레스는 제국에서 가장 값비싼 실크를 피처럼 붉게 염색한 뒤, 가느다란 금실로 장미 가시를 촘촘히 수놓은 수작업의 극치였다. 얇은 실크 자락이 그녀의 창백하고 가녀린 발목을 스칠 때마다 기분 좋은 사각거림이 복도를 메웠다. 시한부의 병색을 완벽히 감추기 위해 바른 붉은 립스틱은 마치 방금 사람의 심장을 베어 문 뱀처럼 요염하고도 위험한 빛을 발했다.

“다들 흥미로운 구경거리라도 본 표정이군요, 전하.”

엘리시아가 칼릭스를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속삭였다. 그녀의 가느다란 목덜미에 닿는 칼릭스의 숨결은 얼음처럼 차가웠으나, 오히려 그 냉기가 그녀의 폐부를 태우던 열증을 기분 좋게 식혀 주었다.

칼릭스는 푸른 눈동자를 차갑게 가라앉힌 채, 귀족들의 무례한 시선들을 단 한 번의 눈짓으로 짓밟아 버렸다. 그의 주위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보이지 않는 검은 마기가 무도회장의 공기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주제넘은 입술들이 너무 많군. 원한다면 전부 찢어 놓아도 상관없다, 엘리시아.”

“어머, 그렇게 야만적인 방법은 제 취향이 아니랍니다. 귀족들은 입을 찢는 것보다, 그들의 얄팍한 자존심을 짓밟아 줄 때 더 아름다운 비명을 지르니까요.”

엘리시아가 생긋 웃으며 손가락 끝으로 칼릭스의 제복 가슴팍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 순간, 장부의 투명한 금빛 페이지가 그녀의 시야 밑바닥에서 찬란하게 점멸했다.

[시스템: 주변 인물들의 경악과 질투 감지!] [수급 포인트: +1,200p] [현재 잔여 수명: 15일 4시간]

온몸의 세포가 도파민으로 짜릿하게 절여지는 감각에 엘리시아는 하마터면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남들의 동정과 배신 속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가던 과거는 끝났다. 이제 그녀에게 고통과 타인의 감정은 그저 장부를 채우는 현찰일 뿐이었다.

그때, 화려한 인파를 헤치고 순백의 레이스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다가왔다.

이자벨라 빌리에.

마치 순결한 백합을 온몸에 두른 듯 나풀거리는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로 엘리시아를 바라보며 손수건을 쥐어짰다. 이자벨라의 뒤편에는 황태자 유진의 분노 어린 시선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엘리시아……! 정말 살아 계셨군요. 몸이 무척 위중하시다고 들어 매일 밤 눈물로 기도했는데…… 어떻게 대공 전하의 팔을 잡고 계신 건가요? 황태자 전하께서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아시면서…….”

이자벨라의 목소리는 가냘프게 떨렸다. 주변의 귀족 부인들이 이자벨라의 가련한 연기에 감화되어 엘리시아를 향해 비난의 눈초리를 보냈다. '약혼자를 두고 다른 사내를 유혹한 부도덕한 악녀'라는 프레임을 씌우려는 뻔한 수작이었다.

엘리시아는 이자벨라의 떨리는 눈꺼풀과 교묘하게 틀어진 입꼬리를 놓치지 않았다. 저 가식적인 눈물 뒤에 도사린 탐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걱정이라니요, 이자벨라 영애.”

엘리시아가 우아하게 부채를 접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 붉은 드레스의 자락이 이자벨라의 순백색 치맛자락을 거칠게 쓸고 지나갔다.

“황태자 전하께서 제 침실에 다른 여인을 밀어 넣으실 만큼 바쁘신 줄 알았는데, 제 걱정까지 하실 여유가 있으셨군요. 참으로 눈물겨운 애정입니다.”

“그, 그게 무슨……!”

이자벨라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하얗게 질렸다. 황태자와의 밀회가 사교계 공식 석상에서 은유적으로 폭로되자, 주변 귀족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의 파도가 방향을 바꾸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엘리시아는 시선을 돌렸다. 무도회장 한편에서 황실 공식 보석상인 자크 상단주가 귀족 부인들에게 둘러싸여 오늘 가져온 최고급 보석들을 자랑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중심에는 이자벨라가 몇 달 전부터 침을 흘리며 가문을 압박해 손에 넣으려 했던, 밤하늘을 닮은 거대한 '베르사유의 블루 사파이어' 목걸이가 영롱한 빛을 뿜고 있었다.

엘리시아의 입꼬리가 퇴폐적으로 말려 올라갔다.

“자크 상단주.”

엘리시아의 맑은 목소리가 무도회장을 울렸다. 상단주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예, 로렌 영애. 무슨 부름이시옵니까?”

“그 진열대에 있는 보석들, 그리고 상단이 오늘 가져온 모든 나석과 장신구들. 전부 가격이 어떻게 되나요?”

“예? 그, 그것이…… 황실 납품용을 제외하고도 대략 오만 골드에 달하는 가치입니다만…….”

오만 골드. 쟁쟁한 백작가 한 해 예산에 버금가는 막대한 거금이었다. 이자벨라는 그 목걸이 하나를 사기 위해 황태자 유진에게 매달려 온갖 교태를 부리던 참이었다.

엘리시아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탁-.

그녀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세바스티안이 품 안에서 순금으로 테두리를 두른 로렌 공작가의 무기명 수표를 꺼내 자크 상단주에게 내밀었다.

“전량 매입하겠습니다. 지금 즉시 결제 처리하도록 하죠.”

“에, 엘리시아! 미쳤어요? 아무리 로렌 공작가의 영애라 해도 이 정도 사치는 가문의 재정에……!”

이자벨라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질투와 분노가 날것 그대로 섞여 있었다. 시한부 주제에 가문의 돈을 이토록 무자비하게 낭비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엘리시아는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

“내 돈을 내가 쓰겠다는데 가문의 재정을 걱정해 주다니, 이자벨라 영애는 참 오지랖도 넓군요. 아, 걱정 말아요. 이건 공작가의 돈이 아니라, 내 개인 금고에서 나오는 돈이니까.”

상단주가 떨리는 손으로 수표를 확인하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보석 상자가 엘리시아의 앞으로 배달되었다.

영롱하게 빛나는 사파이어와 다이아몬드, 붉은 루비들이 상자 안에서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사교계의 모든 여인이 숨을 죽이고 그 사치스러운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부러움과 시기, 그리고 경외감이 뒤섞여 있었다.

엘리시아는 보석 상자에 하얗고 가느다란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가장 값비싼 블루 사파이어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참 아름답군요.”

속삭임과 동시에, 엘리시아의 손이 기울어졌다.

스르륵-.

사파이어 목걸이가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정교하게 세공된 금속 체인이 바닥에 부딪히며 단단한 사파이어 알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귀족들의 비명에 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엘리시아의 기행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상자 자체를 통째로 들어 올려 바닥에 뒤엎어 버렸다.

콰르르릉-!

오만 골드 상당의 명품 보석들이 무도회장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굴러다녔다. 붉고 푸른 보석의 파편들이 샹들리에 빛을 받아 은하수처럼 흩어졌다.

“빛이 바랜 것들은 내 발밑에 깔리는 게 어울리죠.”

엘리시아는 보석들을 굽이 높은 구두로 가차 없이 짓밟으며 이자벨라를 향해 오만하게 미소 지었다.

“당신처럼 말이에요, 이자벨라.”

“……!!”

이자벨라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발밑 근처까지 굴러간 사파이어 알이 마치 그녀의 처지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엘리시아의 머릿속에서 날카로운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시스템: 특수 상황 발생!] [대상 '이자벨라 빌리에'가 느끼는 강렬한 굴욕감과 파멸적 분노가 감지되었습니다.] [수급 포인트: +4,500p!] [시스템: 격상 반격 성공! 사교계 내 인지도가 '미친 악녀'에서 '오만한 지배자'로 변화합니다.] [보상: 극락 포인트 +3,000p 보너스 지급!]

‘아아, 이 감각이야.’

엘리시아는 심장이 터질 듯한 희열에 몸을 떨었다. 각혈을 하며 죽어갈 때의 고통이 사그라지고, 전신을 타고 흐르는 생명력이 장부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장부의 하단에 붉은색 경고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삐- 삐- 삐-.

[시스템: 긴급 경보!] [인근 영역 내에서 계약자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칠 수 있는 잠재적 음모가 감지되었습니다.] [추적 경로 분석 중…….] [로렌 공작가 소속의 타락한 시녀 '클라라'가 외부 세력과 접촉한 흔적 발견.] [임시 부채 장부에 기입합니다: '이자벨라 빌리에의 지연성 독약 매수 건' (부채액: 50,000p 상당의 생명력 상실 위험)]

엘리시아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부채 장부의 기록을 훑어내리는 그녀의 눈가에 서늘한 한기가 서렸다. 이자벨라가 로렌 가문의 시녀를 매수하여 무언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이 장부의 감시망에 정확히 포착된 것이다.

‘지연성 독약이라.’

황실 다도회를 겨냥한 수작이 분명했다. 엘리시아는 입꼬리를 조용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 감히 대공의 계약자이자 장부의 주인인 자신을 상대로 독극물 자작극을 벌이려 하다니, 이 얼마나 가상하고도 멍청한 짓인가.

그녀는 가볍게 눈짓을 보내 무도회장 구석에 서 있던 세바스티안을 불렀다.

세바스티안은 소리 없이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그의 얼굴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프로페셔널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세바스티안, 쥐새끼 한 마리가 덫에 걸렸어요. 장부의 적자가 생기기 전에 미리 자산을 확보해 두어야겠군요.”

“이미 손을 써 두었습니다. 귀족 부인들 사이에서 아가씨의 오늘 기행이 '시한부의 마지막 불꽃 같은 사치'이자 '대공 전하의 절대적인 총애'로 포장되어 퍼져나가는 중입니다. 지금 저들의 눈에는 아가씨가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시한부가 아니라, 사교계를 통째로 집어삼킬 괴물로 보일 것입니다.”

세바스티안의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유쾌함이 깃들어 있었다. 과연 그의 말대로, 무도회장의 귀족 부인들은 깨진 보석 조각들을 훔쳐보며 침을 삼키고 있었다. 엘리시아의 사치와 오만함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그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력의 상징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훌륭해요, 세바스티안. 소문은 더 자극적일수록 좋죠. 이자벨라가 벌일 연극의 관객은 많을수록 재미있으니까요.”

엘리시아는 우아하게 크리스털 잔을 집어 들었다. 투명한 황금빛 샴페인이 잔 속에서 미세한 기포를 일으키며 솟아올랐다.

그녀의 시선이 무도회장의 가장 어두운 구석, 테라스로 이어지는 두꺼운 벨벳 커튼 뒤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자벨라 빌리에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로렌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제복을 입은 시녀, 클라라와 은밀하게 접촉하고 있었다.

이자벨라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품 안에서 보랏빛 자수정으로 장식된,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자그마한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빛을 받지 않아 어둡게 가라앉은 독약 병이 시녀의 소매 속으로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갔다.

완벽한 현장이었다.

엘리시아는 입술을 적시던 차가운 샴페인을 삼켰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탄산의 따끔함이 극상의 도파민과 섞여 그녀의 뇌리를 짜릿하게 자극했다.

그녀는 유리잔 너머로, 독약 병을 주고받는 이자벨라의 옆모습을 정면으로 조준하듯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부딪쳤다. 이자벨라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흔들리는 순간, 엘리시아는 잔을 들어 올리며 지독하리만치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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