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의 조소 섞인 비명이 방 안의 공기를 찢었으나, 엘리시아의 귀에는 그 어떤 소음도 닿지 않았다.
그녀의 손바닥이 칼릭스의 단단하고 차가운 목덜미와 손목 경계에 닿은 순간, 세상 모든 소음이 일시에 소거되었다.
화아아악-!
머릿속을 사정없이 짓누르던, 마치 붉게 달아오른 인두로 이마를 지지는 듯한 지독한 두통이 거짓말처럼 씻겨 내려갔다. 적자로 인해 온몸의 뼈마디가 바스러지는 환각에 시달리던 육체가, 칼릭스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독한 냉기를 빨아들이는 순간 봄날의 눈밭처럼 아늑하게 가라앉았다.
시야가 번쩍이며 눈앞에 오직 그녀에게만 보이는 반투명한 황금빛 장부가 펼쳐졌다.
[시스템: 특수 개체 '칼릭스 카이엔'과의 밀접 접촉 성공!] [경보: 장부의 치명적인 적자 상태가 일시적으로 유예됩니다.] [수급 완료: 칼릭스의 극독성 마기를 생명력으로 치환합니다. 극락 포인트 +5,000p 충전!] [현재 잔여 수명: 15일 12시간 (실시간 상승 중)]
“하아…….”
엘리시아의 가냘픈 입술 사이로 뜨거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극락이었다. 고통이 사라진 자리에 터질 듯이 차오르는 도파민의 단맛은, 그 어떤 명약보다도 자극적이고 황홀했다. 뺨 위로 화사한 핏기가 감돌았고, 몽롱하게 풀린 눈동자 끝에는 잔인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가 매달렸다.
그녀는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칼릭스의 손목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가죽 장갑의 단단한 질감 너머로 혈관을 타고 흐르는 그의 요동치는 마기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반면, 칼릭스 대공의 푸른 눈동자는 전례 없는 충격으로 물들어 있었다.
평생 동안 그의 영혼을 갉아먹고, 뼈를 태우며, 매일 밤 피비린내 나는 불면의 지옥으로 밀어 넣던 마기의 핵. 그 저주스러운 마기가 이 가녀린 여인의 손길이 닿자마자 갈증을 해결한 맹수처럼 얌전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아니, 얌전해지다 못해 그녀의 체온을 갈구하며 미친 듯이 공명하고 있었다.
칼릭스의 턱 끝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대, 정체가 뭐지?”
낮게 가라앉은, 마치 얼어붙은 호수 밑바닥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칼릭스는 제 손목을 쥔 엘리시아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눈처럼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끝이 제 검은 제복 소매 대비되어 기묘할 정도로 선명한 색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괴물이라니, 황태자 전하의 어휘력이 참으로 빈곤하군요.”
엘리시아는 칼릭스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유진을 응시했다.
그녀의 시선은 차가웠고, 동시에 지독하게 오만했다. 자신을 배신하고 이자벨라의 허리를 감싸 안았던 약혼자의 얼굴이 질투와 수치심으로 일그러지는 과정을 관조하는 것은 꽤 쏠쏠한 오락이었다.
“엘리시아! 당장 그 더러운 손 치우지 못해! 네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감히 내 눈앞에서 북부의 사냥개와 몸을 섞다니!”
유진이 성큼 걸어오려 했으나, 대공의 보좌관들이 일제히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며 가로막았다. 서슬 퍼런 살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자 유진의 발걸음이 굳어졌다.
[시스템: 적대 개체 '유진 알베르트'의 질투 및 소유욕 폭발!] [수급 완료: 후회 및 분노 수치 89% 감지. 극락 포인트 +1,500p 추가 적립!]
장부의 숫자가 경쾌하게 올라가는 소리가 엘리시아의 귓가에 맑은 종소리처럼 울렸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유진이 매달리고 절망할수록, 자신에게 품는 그 추악한 독점욕이 깊어질수록 자신의 수명이 늘어난다니. 이보다 더 완벽하고 사치스러운 비즈니스가 어디 있겠는가.
“더러운 손이라니요, 전하.”
엘리시아가 칼릭스의 손목을 잡은 채, 그의 넓은 가슴팍 쪽으로 한 보 더 다가섰다.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지자, 칼릭스의 제복에서 풍기는 쌉싸름한 시더우드 향과 얼음의 체취가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
“이분은 제 시한부 인생을 가장 화려하게 장식해 줄 귀한 ‘동반자’가 되실 분이랍니다. 전하처럼 쓸모없는 껍데기와는 비교조차 실례일 정도로요.”
“뭐라 고……?”
“세바스티안.”
엘리시아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부르자, 그림자처럼 대기하고 있던 세바스티안이 품에서 황금빛 문양이 정교하게 수놓인 가죽 서류첩을 꺼내 들었다.
“예, 아가씨. 준비해 두었습니다.”
“황태자 전하와 그 가여운 이자벨라 영애를 이 방에서 ‘청소’해 주세요. 공기가 너무 탁해서 제 고귀한 폐가 상할 것 같거든요.”
“미쳤어! 엘리시아 로렌! 내가 황태자다! 네까짓 게 감히 나를 쫓아내려 해?”
유진이 고함을 질렀으나, 칼릭스의 차가운 시선이 그에게 닿는 순간 그의 목소리는 뚝 끊겼다. 칼릭스의 푸른 눈동자에는 일말의 온기도 없었다. 그저 귀찮은 벌레를 보는 듯한 무감각한 살의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황태자 전하.”
칼릭스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 실린 묵직한 마력이 대기를 짓눌렀다.
“내 반려가 될지도 모르는 영애의 침실이다. 더 이상 소란을 피운다면, 황실과의 전면전도 불사하겠지.”
“대, 대공……! 지금 이 미친년의 장단에 놀아나겠다는 건가? 이 여자는 시한부다! 곧 피를 토하고 죽을 가치 없는 물건이란 말이다!”
“그 가치는 내가 결정한다.”
단호하고 자비 없는 축객령이었다.
결국 유진은 대공가의 기사들에게 반쯤 밀려나듯 방 밖으로 쫓겨났다. 문이 닫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유진의 눈동자는 배신감과 질투, 그리고 알 수 없는 후회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쿵-.
문이 닫히고 방 안에 고요가 찾아왔다.
엘리시아는 그제야 꽉 쥐고 있던 칼릭스의 손목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살결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 찌릿한 아쉬움과 함께 장부의 포인트 충전이 멈췄다. 하지만 이미 수급한 포인트만으로도 보름 이상의 수명을 확보한 상태였다. 가슴속을 가득 채우는 충만감에 그녀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자, 방해꾼들도 사라졌으니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대공 전하?”
엘리시아는 침대 가장자리에 우아하게 걸터앉았다. 겹겹이 흘러내린 실크 드레스 자락이 마치 피어나는 흑장미처럼 침상 위에 흐드러졌다.
칼릭스는 여전히 제 손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온기가 사라진 자리에 다시금 미세한 한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이전처럼 뼈를 찌르는 고통은 아니었다. 영혼의 갈증을 아주 잠깐 적셔준 그 짧은 접촉의 여운이 그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대는 나를 이용해 황실과 로렌 공작가를 기만하려는 건가.”
칼릭스가 차갑게 물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엘리시아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압도적인 위압감이었으나, 엘리시아는 단 한 치도 기죽지 않고 오히려 턱을 치켜들며 그를 독대했다.
“기만이라니요. 서로의 가장 치명적인 결핍을 채워주는 지극히 사치스럽고 우아한 거래를 제안하는 겁니다.”
엘리시아는 세바스티안이 건넨 서류첩을 펼쳐 칼릭스의 앞에 내밀었다.
종이 한 장마저 최고급 양피지에 순금 가루를 개어 테두리를 장식한, 극도로 사치스러운 계약서였다.
“거래 조건은 간단합니다. 대공 전하께서는 사교계에서 제 완벽한 방패이자, 저를 위해 아낌없이 돈을 쓰는 미친 연인 연기를 해 주시면 됩니다. 제국에서 가장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파티를 열 때마다 제 옆자리를 지키는 일 말이죠.”
“……그 대가로 내게 무엇을 줄 수 있지?”
“방금 느끼셨지 않습니까?”
엘리시아는 매혹적으로 눈꼬리를 접으며 미소 지었다.
“대공 전하의 전신을 좀먹는 마기의 핵. 그 저주스러운 고통을 완벽하게 억제하고 정화해 드릴 유일한 열쇠가 바로 저입니다. 제가 전하의 손을 잡고, 살을 맞대는 것만으로도 전하는 평생 느껴보지 못한 안식을 누리게 되실 겁니다.”
비즈니스적 스킨십 계약.
서로의 체온을 탐하되, 철저하게 이득과 손실만을 계산하는 완벽한 장부상의 거래.
칼릭스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는 북부의 지배자다. 수많은 정적과 암살자, 황실의 음모 속에서 살아남은 사내였다. 그런 그가 정체불명의 힘을 가진, 심지어 황태자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치스러운 영애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리 없었다.
실상 그의 사설 정보망은 이미 엘리시아 로렌에 대한 조사를 마친 상태였다. 가문에서 버림받고, 시한부 판정을 받아 매일 밤 피를 토하며 울부짖던 나약한 영애.
하지만 지금 제 눈앞에서 퇴폐적인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자는, 정보지 속의 그 가련한 영애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마치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기어 올라와 세상 모든 것을 비웃는 오만한 여왕과도 같았다.
“내가 그대의 제안을 거절하고, 그대를 납치해 강제로 내 마기를 정화하게 만든다면?”
칼릭스의 목소리에 짙은 살기가 실렸다. 보통의 영애라면 그 기세에 눌려 숨도 쉬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엘리시아는 오히려 소리 내어 가볍게 웃었다.
“해보시지요, 대공.”
그녀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칼릭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 몸은 유리잔보다 약해서, 아주 작은 충격에도 바스러집니다. 강제로 잡아두려 하신다면, 저는 전하의 품 안에서 기꺼이 피를 토하며 자결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전하는 영원히 그 고통 속에서 썩어가게 되겠지요.”
그녀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다. 오직 자신의 목숨마저 거래 테이블 위의 칩으로 던지는 광기 어린 도파민 중독자의 눈빛만이 빛나고 있었다.
칼릭스는 침을 삼켰다. 그의 목울대가 거칠게 일렁였다.
이 여자는 미쳤다. 그리고 지독하게 매혹적이다.
평생을 차가운 의무와 통증 속에서만 살아왔던 그에게, 엘리시아가 뿜어내는 이 이질적이고 뜨거운 자극은 거부할 수 없는 독약과도 같았다.
“……좋다.”
칼릭스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엘리시아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의 차가운 손가락이 엘리시아의 턱끝을 부드럽게,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악력으로 쥐어 올렸다.
두 사람의 숨결이 닿을 듯 가까워졌다.
“그 거래, 수락하지. 대신 내 몸에 닿을 때마다 그 대가를 확실히 치러야 할 거다, 엘리시아.”
“원하는 바입니다, 대공 전하.”
엘리시아가 턱끝을 쥔 그의 손가락을 향해 매끄러운 웃음을 흘렸다.
칼릭스는 세바스티안이 내민 깃펜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순금으로 장식된 양피지 계약서의 하단에 자신의 이름을 정갈하게 서명했다.
사각사각-.
서명이 완성되는 순간, 엘리시아의 장부가 다시 한 번 찬란한 금빛을 뿜어내며 요동쳤다.
[시스템: 북부의 지배자 '칼릭스 카이엔'과의 공식 계약 성립!] [특수 효과: '동맹의 계약' 활성화. 칼릭스와의 접촉 시 마기 흡수율이 200% 증가합니다.] [보상: 계약금 조로 극락 포인트 +10,000p 즉시 지급!]
완벽한 승리였다.
엘리시아는 칼릭스가 서명한 계약서를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자신을 버리고 기만했던 황태자 유진과 이자벨라, 그리고 로렌 공작가에게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잔혹한 복수를 선사할 시간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창밖, 멀리 보이는 황실 사교 무도회장의 방향을 향했다.
“세바스티안, 무도회 드레스는 준비되었나요?”
“물론입니다, 아가씨. 제국에서 가장 사치스럽고, 가장 피처럼 붉은 드레스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엘리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흐트러진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쓸며 기분 좋은 마찰음을 냈다.
사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을 준비를 마친 엘리시아가, 칼릭스의 단단한 팔에 자신의 하얀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녀는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사교 무도회장의 화려한 대문을 향해 나아갔다. 수많은 이들의 비명과 경악이 기다리고 있을 그곳을 향해, 문이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