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방문이 산산조각 나며 흩뿌려진 참나무 파편들이 대리석 바닥 위로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굴러다녔다.

여름날의 눅눅한 온기는 단 한순간에 소멸했다. 문틈을 타고 밀려온 것은 살죽을 도려낼 듯한 혹한, 그리고 그 중심에서 검은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불길하고 무거운 마기(魔氣)였다.

코끝을 찌르는 서늘한 동토의 냄새에 세바스티안이 신속하게 검을 뽑아 들고 엘리시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검신이 가늘게 떨렸다. 그것은 공포가 아닌, 눈앞에 나타난 존재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질량의 위압감에 육체가 본능적으로 반응한 결과였다.

“대공…… 카이엔 대공이십니까.”

세바스티안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도 암흑 속의 침입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은 검은 머리칼, 밤하늘을 그대로 오려 붙인 듯 짙은 감청색의 망토가 바닥에 무겁게 끌렸다. 그 위로 정교하게 새겨진 대공가의 은빛 늑대 문양이 어둠 속에서 차갑게 번뜩였다. 칼릭스 카이엔. 북부의 냉혹한 지배자이자, 제국에서 유일하게 마기를 부리는 사내가 그곳에 서 있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엘리시아를 꿰뚫고 있었다.

그 순간, 엘리시아의 시야에만 보이는 황금빛 장부가 격렬하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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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안쪽에서부터 온몸을 태워 버릴 듯한 뜨거운 열증이 치밀어 올랐다. 장부의 적자가 불러오는 전구 증상이었다. 뼈마디가 조금씩 뒤틀리는 환각적인 통증이 척추를 타고 흘렀지만, 엘리시아는 입술을 깨물며 도리어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고통은 곧 도파민이요, 이 지독한 열증을 잠재울 해독제가 바로 눈앞에 걸어 들어왔다.

“세바스티안, 검을 거둬.”

엘리시아는 깃털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카우치에서 일어났다. 부드러운 실크 슬립의 자락이 스치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창백한 뺨에는 열증으로 인한 붉은 홍조가 피어올라, 오히려 숨 막힐 듯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영애님, 이 자는…….”

“괜찮아. 손님을 그렇게 뾰족한 철붙이로 맞이하는 건 로렌의 예법이 아니잖아?”

엘리시아는 칼릭스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그가 내뿜는 한기가 피부에 닿자, 타들어 가던 심장이 기적처럼 진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차가운 얼음물 속에 달궈진 쇠붙이를 집어넣은 듯한 극도의 쾌감이었다.

칼릭스의 시선이 엘리시아의 입가에 머물렀다. 조금 전 토해낸 핏방울이 아직 허브티의 흔적과 섞여 붉은 입술 끝에 진득하게 남아 있었다. 사경을 헤매는 시한부라기에는, 그녀의 눈동자는 지나칠 정도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를 부른 목적이 무엇이지, 로렌의 영애.”

칼릭스의 목소리는 마치 얼어붙은 호수의 표면을 깨뜨리는 것처럼 낮고 거칠었다. 오랫동안 마기를 억누르느라 갈라진 목소리였으나, 그 안에는 거역할 수 없는 지배자의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말했을 텐데요. 대공의 그 지독한 냉기가 필요하다고.”

엘리시아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녀가 한 걸음 더 다가가려던 그때, 복도 저편에서 투박하고 요란한 구두 굽 소리가 고요한 별채의 공기를 난폭하게 찢어발겼다.

“엘리시아! 당장 문을 열어라!”

귀에 익은 오만하고 신경질적인 목소리. 황태자 유진 알베르트였다.

방문이 이미 박살 나 있는 것을 본 유진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침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의 뒤로는 화려한 금박 조끼를 입은 황실 시종들과 로렌 공작가의 사병들이 가득 기립해 있었다. 유진의 손에는 붉은 밀랍 봉인이 찍힌 두꺼운 양장 서류철이 쥐어져 있었다. 파혼장, 그리고 로렌 가문이 그녀에게 요구하는 터무니없는 위자료 청구서였다.

그러나 유진은 방 안의 광경을 목격한 순간, 걸음을 딱 멈추었다.

박살 난 문, 방 안을 가득 채운 불길한 검은 연기와 서리,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서 있는 북부의 괴물, 칼릭스 카이엔 대공.

“대, 대공……?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유진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황태자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려 애썼지만, 칼릭스가 흘려보내는 미미한 마기 자락만으로도 유진의 어깨는 눈에 띄게 움츠러들었다.

칼릭스는 유진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저 흥미롭다는 듯, 침대 옆에 우아하게 서 있는 엘리시아를 응시할 뿐이었다.

유진은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내 그는 엘리시아가 자신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 것에 모욕감을 느꼈는지, 핏대를 세우며 서류철을 흔들었다.

“엘리시아 로렌! 감히 황궁의 눈을 피해 북부의 부정한 자를 사저로 끌어들이다니, 기어이 미쳐버린 것이냐! 이자벨라의 말이 맞았군. 너는 이미 로렌의 수치이자, 황실을 모독하는 악녀다!”

유진의 목소리는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그는 엘리시아가 피를 토하며 누워, 자신의 자비만을 구걸하고 있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평생 자신만을 바라보며 가스라이팅을 당해오던 온순한 인형이 감히 파혼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을 때의 배신감. 그는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를 철저히 짓밟아 무릎 꿇릴 생각이었다.

“이것을 봐라. 황실의 명으로 작성된 파혼서다. 그리고 네가 그동안 로렌 가문과 황실의 품위를 더럽힌 대가로 청구된 위자료 명세서지. 자그마치 십만 골드다. 네가 평생을 모아도 갚지 못할 금액이지.”

유진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엘리시아의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무릎 꿇고 빌어라. 이자벨라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네 잘못을 뉘우친다면 황태자비의 자리 대신 내 은밀한 궁의 후궁 자리 정도는 고려해 주마. 시한부인 네 육신을 거두어 줄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더러운 욕망과 오만이 뒤섞인 눈빛.

엘리시아는 유진의 가증스러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이 모욕감에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쥐어뜯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엘리시아에게 유진은 그저 잘 익은 열매에 불과했다.

슬며시, 그녀의 눈앞에 있는 장부의 수치가 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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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그 정도인가, 황태자 전하?’

엘리시아는 유진이 내민 서류철을 아주 느릿하게, 마치 고귀한 보물을 다루듯 부드러운 손길로 받아 쥐었다. 금박으로 장식된 서류의 모서리가 그녀의 하얗고 고운 손가락 사이에서 빛났다.

유진은 그녀가 순순히 서류를 받자 승리감에 도취되어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야 분수를 아는군. 그래, 서명해라. 그리고 내 발밑에…….”

쫙-!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방 안을 강타했다.

유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엘리시아는 손에 쥔 두꺼운 파혼서 뭉치를 그대로 유진의 뺨을 향해 사정없이 휘둘렀다. 단단한 종이 모서리가 유진의 얼굴을 거칠게 때렸고, 붉은 밀랍 봉인이 깨지며 하얀 종이들이 사방으로 화려하게 흩날렸다.

“억……!”

유진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비틀거렸다. 그의 잘 정돈된 금발 머리칼 사이로 하얀 파혼장 종이들이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렸다. 뺨에는 붉은 종이 창상 자국이 선명하게 돋아나 있었다.

“무, 무슨 짓이냐!”

유진이 제 얼굴을 감싸 쥐며 경악에 찬 눈으로 소리쳤다. 뒤에 서 있던 시종들과 사병들이 일제히 무기에 손을 올렸으나, 칼릭스가 뿜어낸 차가운 살기에 짓눌려 그 누구도 한 걸음조차 움직이지 못했다.

엘리시아는 흩날리는 종이더미 사이에서, 마치 무도회의 여왕처럼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푼돈 몇 푼으로 내 남은 시간을 사려 하지 마, 유진.”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슬픔도, 미련도 없었다. 오직 차가운 조소만이 가득했다.

“십만 골드? 고작 그 정도의 장난감 같은 금액으로 나를 얽매려 들다니. 황태자라는 자의 그릇이 겨우 그것밖에 안 되는 줄은 몰랐네. 그 알량한 위자료 따위는 내 장부의 한 줄 낙서보다 가치 없어.”

“너, 너……!”

“파혼? 내가 먼저 버린 거야, 너 같은 쓰레기를.”

엘리시아가 생긋 웃으며 손가락으로 뺨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붉은 피가 손가락끝에 묻어나자, 그녀의 눈동자에는 기이할 정도의 희열이 서렸다. 피를 흘릴수록 자신의 생명력이 차오르고, 저 한심한 남자가 고통받을수록 자신이 강해진다는 비밀을 알고 있는 자만의 여유였다.

두 사람의 대치를 지켜보던 칼릭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사교계의 가녀린 인형인 줄 알았던 공작 영애가, 제국의 황태자를 온 천하의 낙오자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흥미롭고 퇴폐적인 광경인가.

유진은 수치심과 분노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만히 서 있는 칼릭스 대공의 존재도 그를 미치게 만들었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벌레 보듯 내려다보는 엘리시아의 눈빛이 그의 자존심을 갈갈이 찢어발겼다.

“감히 네가 나를 거절해? 로렌 가문에서 버림받은 시한부 주제에! 너는 내 자비가 없으면 사교계에서 매장당해 비참하게 피를 토하며 죽어갈 운명이다! 감히 누구에게 그 오만한 주둥이를 놀리는 거냐!”

유진이 소리를 지르며 엘리시아의 어깨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바로 그 순간, 엘리시아의 눈앞에서 황금빛 장부가 미친 듯이 회전하며 숫자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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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맛있다.’

엘리시아는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달콤한 도파민의 향연에 황홀경을 느꼈다. 유진이 분노하면 할수록, 자신을 증오하고 동시에 가질 수 없다는 절망에 휩싸일수록 그녀의 생명력은 더욱 단단해졌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원하던 극락의 순간이었다.

그녀는 유진의 손길이 닿기도 전에 가볍게 몸을 돌려 피했다.

그때, 묵묵히 서 있던 칼릭스 대공이 긴 다리로 우아하게 걸어와 엘리시아의 옆에 섰다.

스스슥-.

칼릭스의 단단한 어깨가 엘리시아의 가녀린 어깨를 아주 살짝 스치며 지나갔다.

아주 찰나의 접촉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칼릭스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던 검은 마기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의 심장 깊은 곳에 단단히 박혀 평생 동안 그를 고문하던 ‘마기의 핵’이, 엘리시아의 체온이 닿자마자 마치 미친 듯이 공명하며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칼릭스의 푸른 눈동자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묘한 감각에 크게 흔들렸다.

평생을 얼어붙은 지옥 속에서 살아가게 만들던 마기의 통증이, 그녀의 어깨가 스친 단 한 번의 접촉만으로 씻은 듯이 가라앉았다. 아니, 가라앉는 수준을 넘어 마기가 그녀의 존재를 갈구하며 요동치고 있었다. 마치 굶주린 맹수가 눈앞의 사냥감을 발견한 것처럼.

칼릭스는 멈춰 서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가죽 장갑 너머로 느껴지던 그녀의 온기가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 듯했다.

엘리시아 역시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장부의 적자로 인해 타들어 가던 내장이 칼릭스의 한기와 접촉하는 순간, 봄날의 얼음이 녹아내리듯 편안하게 안정을 되찾았다.

이 사내다.

자신의 시한부 인생을 영구적인 극락으로 바꾸어 줄 유일한 열쇠.

유진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하고도 치명적인 기류를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그의 눈이 질투와 패배감으로 뒤틀렸다. 자신이 버린 장난감이, 감히 제국 최고의 권력자이자 괴물이라 불리는 대공과 눈을 맞추고 있다니.

“엘리시아……! 네가 감히 이런 괴물과 몸을 섞으려는 거냐! 로렌의 이름을 더럽히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유진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방 안을 울렸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유진의 존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깊은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칼릭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입가에 잔인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대공.”

엘리시아는 하얗고 가녀린 손을 뻗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칼릭스의 단단하고 얼어붙을 듯 차가운 손목을 움켜쥐었다.

화아아악-!

방 안의 모든 서리꽃이 일제히 만개하듯, 두 사람의 접촉면을 시작으로 푸른빛과 황금빛의 마력이 스파크를 일으키며 폭발적으로 소용돌이쳤다.

칼릭스의 눈동자 속에서 억눌려 있던 마기의 핵이 격렬하게 공명하며 날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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