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황제의 허락조차 받지 않은 채 황실 금융의 인장을 마구 찍어대던 유진 알베르트의 비명은 어두운 황궁 지하를 피로 물들였다. 제국 신탁 가문들에 무차별적으로 날아든 영수증들은 황실 금고의 밑바닥을 긁어내다 못해, 그 자체로 거대한 부채의 사슬이 되어 그의 목을 조여 가고 있었다. 유진이 서명한 무제한 담보 계약서가 엘리시아의 영혼 장부와 동기화된 순간부터, 황실이 자랑하던 수백 년의 축적은 소리 없이 바스러지는 모래성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사흘 뒤.
황도의 중심에 위치한 에메랄드 홀은 제국의 기품과 사치를 대변하는 가장 화려한 무대였다. 천장 높이 매달린 대형 크리스탈 샹들리에는 수천 개의 촛불을 머금고 눈이 시릴 만큼 찬란한 빛을 사방으로 산란시켰다. 연회장 바닥은 최고급 대리석으로 닦여 거울처럼 반짝였고, 귀족들이 입은 비단과 공단 드레스의 자락이 스칠 때마다 사각거리는 마찰음이 음악처럼 흘러내렸다.
하지만 오늘 밤, 이 화려한 연회장에 감도는 공기는 유독 무겁고 축축했다. 황태자가 제국의 최고 전비마저 손대어 이 무도회를 강행했다는 은밀한 소문이 이미 사교계의 틈새를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들으셨습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최근 황실 보물고의 담보를 풀었다는 소문 말입니다." "신탁 가문들의 금고가 일제히 동결되었다더군요.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토록 막대한 자금을 움직이신 건지……."
부채 장식 뒤로 흘러나오는 귀부인들의 속삭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연회장의 육중한 활엽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시종의 목소리가 엄숙하게 울려 퍼졌다.
"카이엔 대공 전하, 그리고 로렌 공작 영애 엘리시아 님 입장하십니다."
순간, 연회장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가로 쏠렸다.
그곳에 서 있는 엘리시아는 이전보다 훨씬 더 관능적이고, 동시에 유리처럼 투명한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가 선택한 드레스는 칠흑처럼 어두운 밤하늘을 연상시키는 짙은 청색 실크였다. 섬세한 은사로 카이엔 대공가의 상징인 얼어붙은 장미 문양이 치마 밑단부터 허리춤까지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었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소량의 다이아몬드 가루가 빛의 궤적을 그리며 흩어졌다.
그녀의 목덜미를 장식한 것은 북부의 심해에서만 채굴된다는 청색 사파이어 목걸이였다. 차가운 보석의 결정이 그녀의 흰 살결 위에서 푸르스름한 광채를 내뿜었고, 핏기 없이 창백하던 뺨에는 붉은 생기가 매혹적으로 감돌고 있었다. 시한부의 병색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이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하고 퇴폐적인 아우라가 그녀의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북부의 지배자, 칼릭스 카이엔 대공이 서 있었다.
어깨를 가로지르는 검은 모피 코트와 은빛 훈장이 빛나는 제복은 그의 단단하고 거대한 체구를 더욱 위압적으로 돋보이게 했다. 매서운 눈매와 날카로운 턱선은 범접할 수 없는 냉기를 풍겼지만, 그의 커다란 손은 엘리시아의 가느다란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었다.
그들이 연회장 계단을 내려가기 직전, 엘리시아가 칼릭스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가락을 가볍게 겹쳤다.
*스스스슥.*
그 찰나의 접촉이었다. 칼릭스의 체내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마기의 핵이 엘리시아의 아주 작은 살결 닿음만으로도 격렬하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얼음 호수에 뜨거운 불꽃이 떨어진 것처럼, 그의 차가운 마력이 요동치며 엘리시아의 손끝을 타고 흘러들었다.
[알림: 계약 상대와의 극밀한 체온 접촉 감지.] [카이엔 대공의 마기 핵 공명율: 120%] [극락 포인트 100,000 P 획득 완료.] [현재 적자 상태 해소. 남은 수명이 90일 연장됩니다.]
머릿속에 울리는 반가운 알림과 함께, 온몸의 혈관을 타고 짜릿한 도파민이 폭발적으로 가속되었다. 뼈마디를 갉아먹던 잔인한 통증이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그 자리에 감미로운 극락의 온기가 가득 찼다. 엘리시아의 입술 끝이 호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갔다.
칼릭스는 미세하게 떨리는 그녀의 손가락을 단단히 맞잡으며, 오직 그녀만이 들을 수 있는 아주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대의 손은 언제나 내 심장을 가장 빠르게 뛰게 만드는군, 엘리시아." "대공 전하의 차가운 마력이야말로 제 영혼의 가장 달콤한 성찬이니까요."
그녀가 붉은 입술로 속삭이며 칼릭스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팽팽하고도 탐미적인 텐션은 연회장의 온도를 단숨에 얼려버릴 듯 강렬했다.
바로 그때, 구두 굽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대리석 바닥을 짓밟으며 다가왔다.
"엘리시아……!"
증오와 집착, 그리고 깊은 절망으로 얼룩진 목소리였다.
초췌하기 짝이 없는 몰골의 황태자 유진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불과 사흘 사이에 그의 뺨은 눈에 띄게 수척해졌고, 눈 밑에는 짙은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다. 늘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던 금발은 푸석하게 흐트러졌으며, 그가 걸친 황금빛 제복은 어딘지 모르게 그의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헐거워 보였다.
유진은 엘리시아의 허리를 감싸 쥔 칼릭스의 손을 바라보며 눈가를 잘게 떨었다. 그의 안구에 핏발이 벌겋게 섰다.
"어떻게…… 어떻게 네가 그자의 곁에서 그런 표정으로 웃을 수 있지? 나를 비참하게 내팽개치고 북부의 야만인 놈에게 매달린 이유가 고작 이것이었나!"
유진의 비정상적인 외침에 주변을 둘러싼 귀족들이 야금야금 걸음을 뒤로 물러서며 귀를 기울였다. 황태자의 이성을 잃은 모습은 그 자체로 사교계 역사상 가장 자극적인 구경거리였다.
"이 모든 것을 보아라, 엘리시아!"
유진이 거칠게 팔을 휘두르며 에메랄드 홀의 사치스러운 장식들을 가리켰다. 천장의 실크 커튼, 벽면에 장식된 금박의 화훼 문양, 그리고 귀한 남부산 백합으로 가득 채워진 화병들까지.
"이 화려함이, 이 연회장이 누구를 위해 준비된 것인지 정녕 모른단 말이냐! 네가 좋아하는 그 사치와 허영을 채워주기 위해 내가 제국의 금융 계약서에 서명하고, 빚을 지면서까지 만든 자리다! 나를 위해 울부짖으며 돌아와야 마땅할 네가, 어찌 감히 내 면전에서 다른 사내의 품에 안겨 나를 조롱하느냐!"
유진의 목소리에는 억울함과 뒤틀린 독점욕이 절절히 끓어 넘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무모한 금융 계약이 오직 엘리시아를 되찾기 위한 고결한 희생이라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엘리시아는 그의 궤변을 들으며 나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칼릭스의 단단한 가슴팍에 놓인 은빛 체인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칼릭스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유진을 마치 발밑의 벌레를 보듯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빚이라니요, 황태자 전하."
엘리시아의 목소리가 맑은 빙판 위를 구르는 구슬처럼 청아하게 울렸다. 그녀는 연회장 안의 모든 귀족이 들을 수 있도록, 한 자 한 자 정확하고 품위 있게 못을 박았다.
"전하께서 저지르신 그 어리석은 서명들이 오직 저를 위한 것이라 포장하시다니, 참으로 가소롭기 짝이 없습니다. 이 화려한 연회장의 장식들과 백합, 심지어 귀족들이 마시는 저 최고급 샴페인까지…… 단 한 닢의 황실 예산도 들어가지 않았음을 이 자리에 계신 현명한 귀족 영애들과 부인들께서 모르실 리가 없지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내가 직접 국고 담보 계약서에 서명하여 자금을 집출했다!"
유진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엘리시아는 우아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잘 정제된 비웃음의 극치였다.
"그 담보 계약서의 실체가 무엇인지 정말 밝히고 싶으신가요?"
엘리시아가 손짓을 하자, 대기하고 있던 집사 세바스티안이 소리 없이 다가왔다. 먼지 하나 없는 하얀 장갑을 낀 세바스티안의 손에는 가죽으로 장정된 두꺼운 장부와 몇 장의 서류 뭉치가 들려 있었다.
"전하께서 무차별적으로 발급하신 무기한 영수증과 신탁 가문의 금전 보증서들은, 황실의 공적 자금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하께서 개인적으로 진 사채이며, 그 보증금의 실질적 채권자는 바로 저, 엘리시아 로렌입니다."
"뭐…… 뭐라고?"
"전하께서 서명하신 그 담보 계약서는 제 장부와 연동되어 있었습니다. 전하가 탐욕스럽게 서명지를 채워갈 때마다, 황실 가문의 사유 금고와 영지 신탁 자산은 합법적으로 제 가문의 소유로 귀속되었지요. 즉, 이 무도회에 쓰인 모든 비용은 전하의 돈이 아니라, 제 돈으로 전하의 파산을 유예해 준 것에 불과합니다."
연회장 사방에서 경악 섞인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황태자가 사리분별을 못 하고 개인적인 집착 때문에 나라의 금고를 흔들고, 결국 자신의 전 재산을 전 약혼녀에게 합법적으로 저당 잡혔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귀족들의 눈빛이 동정과 경멸로 빠르게 변해갔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엘리시아의 눈동자가 잔혹한 광채를 띠며 깊어졌다.
"전하께서 저를 위해 이 자리를 마련하셨다고 하셨지요? 하지만 전하의 그 위선적인 사랑 뒤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을, 저는 이미 아주 오래전에 확인했습니다."
그녀가 세바스티안에게 눈짓을 보냈다. 세바스티안은 품에서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내어 대리석 바닥 위에 그대로 쏟아부었다.
*쨍그랑!*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것은 낡은 가죽 장부 조각과 붉은 낙인이 찍힌 약병들이었다.
"이것은 로렌 공작가의 타락한 시녀, 클라라의 자백이 담긴 조서와 그녀가 이자벨라 빌리에에게 전달받았던 독약 거래 장부의 잔해입니다. 이자벨라가 제게 먹였던 특수 지연성 독약의 구매 출처가, 바로 황태자 전하의 개인 비자금 금고에서 흘러나온 돈이라는 사실이 명백히 기록되어 있지요."
엘리시아가 바닥에 떨어진 장부 잔해를 구두 굽으로 가볍게 밟으며 덧붙였다.
"저를 독살하려 짜고 친 이자벨라의 음모를 묵인하고 지원하신 분이, 이제 와서 저를 위해 빚을 졌다고 울부짖으시다니요. 참으로 격이 떨어지는 연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 아니다……! 그건 이자벨라가 멋대로 한 짓이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유진은 다급하게 변명하려 했으나, 이미 판세는 완전히 뒤집어져 있었다.
그 순간, 세바스티안이 뒤에 대기하고 있던 황실 평의회의 부인들과 고위 귀족들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서류 사본들을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국가 최고 군사 전비를 개인적인 사치와 엘리시아 영애를 향한 기만적 집착을 위해 무단 유용하려 했던 상세 조서 원본입니다. 평의회와 신탁 가문의 연대 서명이 완료된 정식 공문이지요."
서류를 받아 든 백작 부인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이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세상에…… 군사 자금까지 손을 대려 하셨다니!" "황태자 전하께서 이토록 어리석고 도덕적으로 파탄 나신 분일 줄이야!" "이자벨라와 모의하여 영애를 독살하려 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가문의 재산까지 사채로 날려버리시다니. 황실의 수치입니다!"
귓가를 때리는 냉혹한 비난의 칼날들에 유진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자존심과 권위, 그리고 황태자로서의 모든 미래가 엘리시아가 던진 몇 장의 서류에 의해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파편화되고 있었다.
[알림: 적대 대상 '유진 알베르트'의 절망 및 후회 수치 극대화.] [감정 수급원 '유진'으로부터 150,000 P의 극락 포인트가 추가 적립됩니다.] [수명이 50일 연장됩니다. 현재 안정적인 생명력 유지 중.]
머릿속에서 경쾌하게 울리는 소리에 엘리시아는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형언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유진이 무너질 때마다 그녀의 생명은 더욱 단단해졌고, 그녀의 시간은 화려하게 흐르고 있었다. 슬퍼하는 대신, 이 지독한 복수의 도파민을 만끽하는 것이야말로 그녀가 선택한 완벽한 극락이었다.
"엘리시아…… 제발……."
유진이 무릎을 꿇을 듯 떨리는 다리로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허공에서 애처롭게 흔들렸다.
그러나 엘리시아는 단 한 걸음도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오히려 칼릭스의 팔짱을 더욱 단단히 끼며, 그를 향해 가장 우아하고 잔혹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끝났어요, 유진. 당신의 그 얄팍한 집착마저도, 제 장부의 아주 훌륭한 영양분이 되었을 뿐이니까요."
그 순간이었다.
궁지에 몰려 부들부들 떨리던 유진의 오른손 등 위로, 살을 찢는 듯한 기괴한 통증과 함께 붉은 낙인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엘리시아가 그의 영혼과 동기화해 두었던 장부 연동 담보의 영혼 각서였다.
*화아아악!*
붉은 마력의 불꽃이 유진의 가죽 장갑을 뚫고 나와 그의 피부를 태우듯 타오르기 시작했다. 유진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손등을 움켜쥐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아아악! 뜨거워! 내 손이…… 내 영혼이 타들어 간다! 엘리시아, 네가 내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바닥을 구르는 황태자의 비명 소리가 에메랄드 홀의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로 기괴하게 울려 퍼졌다. 귀족들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멀찍이 물러섰고, 엘리시아는 그 광경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칼릭스의 어깨에 기대어 섰다.
붉게 타오르는 영혼 각서의 불꽃 속에서, 제국 황실의 파멸이 비로소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