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쿠가강! 콰아아앙!

대지를 찢어발기는 굉음과 함께 카이엔령의 하늘을 뒤덮은 검은 해일이 붉은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중앙 기둥에 새겨져 있던 고대 차단벽의 파편들이 날카로운 얼음 송곳이 되어 사방으로 비산했다. 폭풍의 중심에서, 엘리시아의 은빛 모피 망토가 미친 듯이 펄럭였다. 찢겨 나간 드레스 자락 사이로 드러난 백옥 같은 살결 위로, 차가운 마기의 바람이 닿을 때마다 소름 끼치도록 선명한 붉은 낙인이 새겨지는 듯했다.

[경고: 제국 황실 보물고의 무제한 담보 계약서가 강제로 활성화됩니다!] [동기화 대상: 유진 알베르트의 영혼 수치 역류!]

눈앞의 허공이 붉은 경고창으로 가득 찼다. 징― 하는 고주파의 이음이 귓가를 찔렀고, 품속에 넣어두었던 가죽 수첩이 심장 고동처럼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것은 단순한 수첩이 아니었다. 이자벨라가 로렌 가문의 타락한 시녀 클라라를 매수하여 특수 지연성 독약을 구매했던 비밀 장부의 흘려진 잔해였다. 일찍이 사교계의 다도회에서 이자벨라의 가증스러운 목을 죄기 위해 확보해 두었던 그 추악한 거래의 증거가, 지금 유진의 미친 집착과 공명하여 붉은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엘리시아……! 감히 나를 버리고 그 북부의 잡종에게 가다니……! 너를 죽여서라도 내 발밑에 무릎 꿇릴 것이다!”

검은 안개가 한데 뭉쳐 나선형으로 솟구치더니, 이내 거대한 거인의 형상을 이루었다. 수도에 있을 황태자 유진의 집념이 투영된 마력의 환영이었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 일그러진 입술, 광기에 젖어 흐느끼는 목소리. 그의 환영은 마치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귀처럼 처참하고 오만했다.

“도망치십시오, 영애! 이 마기는 제국의 고대 황실 마법과 북부의 원시 마기가 기형적으로 융합된 폭주입니다! 더는 대공가의 결계로도 제어할 수 없습니다!”

심복 세바스티안이 평소의 이성적인 가면을 벗어던진 채 절박하게 외쳤다. 그의 은빛 모노클 너머로 비치는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수호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 엘리시아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몰려오는 붉은 마기의 기세는 검을 부러뜨리고 갑옷을 부식시킬 만큼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엘리시아는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입꼬리가 기묘하게 위를 향해 말려 올라갔다.

“도망치라고?”

엘리시아의 목소리는 폭풍 속에서도 고요하고 우아했다. 그녀는 품에서 붉은빛으로 타오르는 이자벨라의 비밀 독약 장부를 꺼내 들었다.

“비참하게 굴기는, 유진. 겨우 이런 조잡한 환영으로 나를 위협할 수 있을 거라 믿었나? 이것이 바로 네 입으로 사랑한다 속삭이던 이자벨라가 나를 죽이기 위해 사들인 독약의 명부다. 네가 방조하고, 네가 묵인했던 그 더러운 음모의 잔해가 지금 내 손에 있지.”

그녀가 차갑게 가죽 수첩을 쥐어짜자, 수첩에 깃들어 있던 이자벨라의 타락한 마력이 파지직 소리를 내며 바스러졌다. 그 순간, 유진의 환영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흔들렸다.

동시에 엘리시아의 전신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덮쳐왔다. 장부의 적자가 발동하려 하고 있었다. 뼈마디가 하나하나 부서져 모래가 되는 듯한 극심한 환각. 목구멍으로 뜨거운 핏물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쿨럭……!”

하얀 눈밭 위로 붉은 선혈이 꽃처럼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은빛 모피 칼라에 튀어 오른 붉은 혈흔은, 그녀의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잔혹한 장신구와도 같았다.

기사들은 그녀가 쓰러질 것이라 생각하며 경악했지만, 엘리시아는 오히려 붉은 피가 묻은 입술을 쓸어 올리며 매혹적으로 미소 지었다.

[시스템: 육체적 고통 및 각혈 감지!] [극락 포인트 충전: +80,000 Pt] [현재 누적 포인트: 460,000 Pt]

머릿속에서 울리는 쾌락의 종소리. 고통이 깊어질수록, 영혼을 채우는 도파민은 더욱 달콤하게 타올랐다. 엘리시아는 비틀거리는 대신, 오만한 걸음걸이로 붉은 폭풍을 향해 정면으로 걸어 나갔다.

“이까짓 고통이 나를 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내 수명을 채울 자양분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오는데, 내가 왜 도망쳐야 하지?”

그녀가 양손을 펼쳤다. 붉은 마기의 해일이 그녀의 가냘픈 손끝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장부의 거대한 수급력이 가동되며, 대지를 좀먹던 원시 마기가 엘리시아의 영혼 속 장부로 강제 흡수되는 광경은 기괴하면서도 숭고했다.

“엘리시아! 안 돼!”

그때, 얼어붙은 침묵을 깨고 대공 칼릭스가 그녀를 향해 도약했다.

평생 그 어떤 위기 앞에서도 감정을 보이지 않던 냉혹한 북부의 지배자.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지금껏 본 적 없는 맹목적인 집착과,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상실의 공포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는 폭풍을 가르며 엘리시아의 허리를 강하게 낚아챘다.

철갑을 두른 듯 단단하고 차가운 품이 그녀를 뒤덮었다. 칼릭스의 호흡은 거칠게 흐트러져 있었고, 그의 단단한 손아귀는 엘리시아의 가냘픈 어깨를 부술 듯이 꽉 쥐고 있었다.

“무슨 미친 짓을 하는 겁니까! 이 마기는 인간의 몸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놓으세요, 칼릭스. 이건 내 장부의……”

“놓지 않아.”

칼릭스의 목소리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눈가에 서린 푸른 정맥이 가볍게 떨렸다. 평생 마기의 저주 속에서 고독하게 죽어갈 운명이라 체념했던 그였다. 하지만 이 오만하고 화려한 악녀가 제 삶에 끼어든 순간부터, 그는 처음으로 삶에 대한 지독한 갈망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가 이 차가운 대지 위에서 한 줌의 재로 사라지는 것만큼은, 신의 이름으로도 허락할 수 없었다.

“내게서 벗어날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십시오. 당신의 영혼을 채우는 것이 고통이라면, 그 고통마저 내가 전부 빼앗을 테니.”

칼릭스가 그녀의 턱을 난폭할 정도로 거칠게 치켜올렸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엘리시아의 입술에 닿았다.

다음 순간, 그의 입술이 엘리시아의 입술을 거칠게 뭉개며 침범했다.

“읍……!”

숨이 막힐 듯한 격정적인 키스였다. 칼릭스의 입술은 차가웠지만,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갈망은 화산의 용암보다 뜨거웠다. 그는 엘리시아의 아랫입술을 집요하게 깨물며 그녀의 숨결을 통째로 갈취하듯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아 체온이 섞이는 그 찰나, 칼릭스의 체내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마기 핵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2화에서 스치듯 마주했던 그 기묘한 공명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폭발적인 진동이었다.

칼릭스의 몸을 평생 좀먹고 타오르게 만들었던 저주스러운 마기의 핵이, 엘리시아의 영혼과 닿자마자 부동의 친화 특성을 보이며 격렬하게 공명했다. 마기는 더 이상 파괴적인 독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완벽한 도파민의 원석이자, 엘리시아의 장부를 채울 수 있는 가장 순수하고 거대한 생명 에너지로 변모하고 있었다.

[시스템: '동토의 심장' 공명율 50% 돌입!] [특수 효과: 대공 칼릭스의 '마기 핵' 완전 공명!] [경고: 대량의 고농도 마기가 정제된 생명력으로 치환됩니다!]

칼릭스의 몸에서 흘러나온 푸르고 검은 마기가 엘리시아의 입술을 통해 그녀의 체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뜨겁고도 짜릿한 전류가 전신을 관통했다. 엘리시아는 칼릭스의 목을 강하게 감싸 안으며, 그의 입술을 더욱 깊숙이 빨아들였다.

그녀가 그의 마기를 흡수할 때마다, 칼릭스의 얼굴을 뒤덮고 있던 검은 핏줄들이 눈에 띄게 옅어지며 정화되었다. 평생 그를 괴롭히던 지옥 같은 열증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감미로운 해방감이 찾아왔다.

“하아……, 엘리시아……”

칼릭스는 몽환적인 신음을 흘리며 그녀의 허리를 더욱 강하게 끌어당겼다. 마치 그녀 없이는 숨조차 쉴 수 없는 탐닉자처럼, 그는 엘리시아의 입안 구석구석을 탐하며 그의 모든 마기를 기꺼이 바쳤다.

[누적 극락 포인트: 700,000 Pt…… 1,200,000 Pt…… 2,000,000 Pt 돌파!] [수명 연장: +800일!] [수명 연장: +1,500일!] [장부 상태: 적자 해소 및 초과 달성! 무한대(∞) 급 충전 돌입!]

머릿속에서 황금빛 종소리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수명이 늘어나는 감각은 온몸의 세포가 다시 태어나는 듯한 극상의 쾌락을 선사했다. 엘리시아는 황홀경에 젖어 눈물을 흘릴 뻔했으나, 이내 오만하게 눈을 뜨며 칼릭스의 입술을 밀어냈다.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지며 은밀한 타액의 실이 허공에서 끊어졌다. 칼릭스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오직 엘리시아만을 맹목적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이제 그녀 외에는 그 무엇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두 사람을 집어삼킬 듯 날뛰던 붉고 검은 원시 마기의 해일이 일순간에 얼어붙었다.

스스스스―.

흉포하게 소용돌이치던 마력의 폭풍이 거짓말처럼 정화되기 시작했다. 검붉은 안개는 순수한 황금빛 입자로 부서져 내렸고, 카이엔령의 삭막한 은빛 대지 위로 따스한 황금빛 눈꽃이 송이송이 흘러내렸다.

대지를 침식하던 검은 마수가 단 한 마리도 남지 않고 깨끗이 소멸한 현장이었다.

“이, 이것은……”

수호 기사 중 한 명이 들고 있던 검을 툭 떨어뜨렸다.

지옥 같던 전장이 단 한 번의 깊은 입맞춤으로 인해 신성한 신전의 정원처럼 변해버렸다. 얼어붙은 대지 위로 내리는 황금빛 눈꽃을 보며, 기사들의 눈에 경외심이 서렸다. 그들에게 마기란 평생을 싸워야 할 공포이자 저주였으나, 엘리시아는 그 공포의 근원을 비웃듯 자신의 생명력으로 흡수해 완벽한 정화를 이루어낸 것이다.

세바스티안이 가장 먼저 무릎을 꿇었다. 그의 은빛 모노클에 황금빛 눈꽃이 반사되어 찬란하게 빛났다.

“카이엔의 수호자이시며, 북부의 진정한 여신이시여.”

그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수십 명의 북부 기사들이 차례로 얼어붙은 대지 위에 무릎을 꿇었다. 철갑이 바닥에 부딪히며 내는 웅장한 소리가 설산에 메아리쳤다. 침입자이자 위태로운 악녀로만 여겨졌던 엘리시아 로렌은, 이제 그들에게 대공가를 구원한 단 하나의 절대적인 존재로 격상되었다.

엘리시아는 황금빛 눈꽃을 맞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허공을 보았다.

그곳에는 유진의 일그러진 환영이 형체를 잃고 비틀거리며 소멸해가고 있었다.

“아, 안 돼……! 엘리시아! 네가 감히 내 마력을……! 황실의 보물을……!”

“가엾기도 해라, 유진.”

엘리시아는 피가 묻은 입술을 우아하게 닦아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네가 내게 건넨 그 집착과 분노는, 내 장부의 아주 훌륭한 자산이 되었어. 그리고 이제…… 결산할 시간이지?”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붉은빛의 마력이 실타래처럼 피어올라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것은 유진이 서명했던 제국 보물고의 무제한 담보 계약서와 장부의 적자 수치를 몰래 동기화해 둔 연동 각서의 마력이었다.

유진의 환영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완전히 산산조각 나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 * *

같은 시각, 제국 수도의 황궁 지하 깊은 곳.

“커헉……! 끄아아악!”

어둡고 침침한 황실 보물고의 중앙 제단에서, 황태자 유진 알베르트가 한 줌의 피를 토하며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의 온몸을 감싸고 있던 황금빛 황실 마력이 순식간에 검게 변색하며 그의 가슴팍을 짓눌렀다.

“태자 전하! 전하, 정신 차리십시오!”

시종들이 혼비백산하여 달려왔으나, 유진은 그들을 거칠게 밀쳐냈다. 그의 눈은 광기와 공포로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엘리시아……! 엘리시아가 내 마력을 가져갔어! 내 영혼을 갉아먹고 있다고!”

유진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머릿속에서, 엘리시아가 심어둔 연동 각서의 붉은 낙인이 선명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장부의 적자 수치가 유진의 영혼과 동기화되면서, 유진이 느끼는 고통과 절망이 실시간으로 엘리시아의 장부 포인트로 치환되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그의 눈앞에 황실 보물고의 자동 결산서가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경고: 무제한 담보 계약서에 따른 적자 수치 청구 시작.] [청구 대상: 알베르트 황실 금융 자산 및 신탁 가문의 금고.] [현재 청구액: 5,000,000 골드 (실시간 누적 중)]

“이, 이게 무슨……! 내가 서명한 담보 계약서가 왜 이딴 식으로 청구되는 거지?!”

유진은 미친 사람처럼 제단 위에 놓인 양필지에 무작위로 서명하기 시작했다. 신탁 가문에 무기한 무단 영수증을 발행하여 어떻게든 이 기이한 적자 청구를 막아보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서명을 할 때마다, 제국의 국고와 황실 가문의 금고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엘리시아의 무한한 장부 자산으로 합법적으로 몰수되어 빨려 들어갔다.

“더 가져와! 신탁 가문의 영수증을 더 가져오란 말이다! 엘리시아를 다시 내 품으로 데려오려면 이 돈이 필요해! 나라의 금고를 다 털어서라도 그녀를 사들여야 해!”

황궁의 지하에서 광기에 질려 울부짖는 유진의 목소리가 어두운 통로를 타고 기괴하게 울려 퍼졌다. 제국 황실의 파멸을 알리는 서막이, 그렇게 조용히 연주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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