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유진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탁자 위로 툭 떨어진, 붉은 밀랍 인장이 선명한 서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이자벨라가 질질 끌려가며 내지르던 비명은 이미 두꺼운 참나무 문 너머로 사그라진 지 오래였으나, 심문실 내부를 지배하는 기괴한 침묵은 오히려 유진의 목을 더 단단히 죄어왔다.

자신이 그토록 가차 없이 버렸던 가냘픈 장미.

황실의 권위 아래 무력하게 시들어갈 줄 알았던 엘리시아는, 이제 그의 손이 닿지 않는 저 높은 곳의 신성이 되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흑단목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섬세한 손가락으로 매만지는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가 유진에게는 숨 막히는 압박으로 다가왔다.

“이것이…… 무엇이냐.”

유진이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물었다.

엘리시아는 대답 대신 찻잔을 들어 품위 있게 입술을 적셨다. 은은하게 퍼지는 베르가모트 향취 사이로, 그녀가 나른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뺨 위로 드리운 레이스 베일이 미풍에 흔들리며 다이아몬드처럼 차가운 안광을 얼핏 드러냈다.

“황태자 전하의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시는 것이 아니라면, 직접 읽어보시는 편이 빠르겠지요.”

매끄러운 목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공명했다. 유진은 떨리는 손으로 서신을 펼쳤다. 가죽 종이 위에는 로렌 공작가 내부의 인장이 찍힌 비밀 장부의 필사본이 적혀 있었다. 이자벨라 빌리에가 로렌 가문의 타락한 시녀를 매수하여, 제국 사법부에서도 엄격히 금지하는 특수 지연성 독약을 구매했던 구체적인 거래 내역과 흘려진 잔해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것은 이자벨라가 엘리시아를 완벽하게 독살하고 그 죄를 덮어씌우려 했던 명백한 증거였다.

“이, 이자벨라가…… 실제로 이런 짓을 꾸몄단 말인가?”

“어머, 아직도 그 가여운 척하는 얼굴에 속아 넘어가 계셨던 건가요?”

엘리시아가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녀의 가슴팍이 잘게 들썩일 때마다 드레스 깃에 촘촘히 박힌 흑진주들이 기괴하면서도 탐미적인 빛을 발했다.

“빌리에 자작 영애가 저를 독살하려 한 지연성 독약의 성분과, 그녀가 가문의 금고에서 빼돌린 자금의 흐름이 이 장부 잔해에 고스란히 담겨 있지요. 제가 쓰러졌던 그날 밤, 전하께서 제 침실을 난장판으로 만드시는 동안…… 저는 이미 이 장부의 꼬리를 쥐고 있었습니다.”

유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엘리시아는 이미 이자벨라의 모든 음모를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들이 벌인 기만극과 얄팍한 사법적 압박이 그녀에게는 한낱 어린아이의 재롱 잔치에 불과했던 것이다.

[시스템: ‘유진 알베르트’의 극심한 후회와 자괴감이 감지되었습니다.] [수급 포인트: 12,000 SP 획득!] [현재 보유 포인트: 62,000 SP]

눈앞에 떠오른 황금빛 장부의 숫자를 보며 엘리시아는 영혼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짜릿한 도파민에 전율했다. 유진이 절망할 때마다, 그의 오만한 자존심이 짓밟힐 때마다 그녀의 시한부 수명은 기적처럼 늘어나고 있었다.

뒤늦게 후회하며 매달리는 전 약혼자의 감정은, 그녀에게 있어 그 어떤 제국의 보물보다도 가치 있는 장부의 자산이었다.

“엘리시아…… 내가, 내가 오해했다. 이 모든 것은 저 사악한 여자의 계략에 내가 일시적으로 눈이 멀어…….”

유진이 황급히 탁자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에 서린 것은 집착과 갈망, 그리고 비참한 애원이었다. 그는 엘리시아의 하얀 손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스윽.

그러나 그의 손이 그녀의 옷자락에 닿기도 전에, 거대하고 차가운 그림자가 엘리시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칼릭스 대공이었다.

서리 맞은 강철처럼 푸르게 빛나는 대공의 눈동자가 유진을 꿰뚫었다. 단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심문실 내부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한 위압감이 가득 찼다. 칼릭스의 장갑 낀 손이 그의 검자루 위에 얹어졌다.

“황태자 전하, 사법적 심문은 이미 끝난 것으로 압니다. 대공비가 되실 분에게 함부로 손을 뻗는 무례는 참아주시지요.”

“칼릭스 카이엔……! 네놈이 감히 황태자인 내 앞을 가로막느냐!”

유진이 이빨을 악물었으나, 북부의 지배자가 뿜어내는 가공할 마기의 잔향 앞에서는 그저 초라하게 위축될 뿐이었다.

엘리시아는 칼릭스의 넓은 등 뒤에서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 위선적이고 케케묵은 수도의 사교계는 이제 지긋지긋했다. 황실의 가식적인 품위와 로렌 공작가의 추악한 암투 속에서 노니는 기만극은 충분히 즐겼다. 이제 그녀가 향할 곳은 이곳이 아니었다.

“전하, 저는 이제 이 지루한 수도를 떠나려 합니다.”

엘리시아의 폭탄선언에 유진의 눈이 크게 번뜩였다.

“떠나다니? 어디로 간다는 말이냐! 로렌 공작가가 네 가문이다! 네가 갈 곳은 이 황궁과 수도 사교계뿐이야!”

“틀렸습니다, 유진.”

엘리시아가 칼릭스의 단단한 팔뚝 위로 부드럽게 제 손을 얹었다. 그 순간, 그녀의 장부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시스템: 특수 체질 ‘칼릭스 카이엔’과의 직접 접촉이 확인되었습니다.] [경고: 대공의 체내 마기 핵이 엘리시아의 접촉에 격렬하게 공명하며 요동칩니다. 부동의 친화 특성이 발현됩니다!] [마기 정화 및 생명력 변환 가속화 시작!]

칼릭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서늘하면서도 지독한 마기가 엘리시아의 손끝을 타고 침투했다. 일반인이라면 즉사했을 마기였으나, ‘극락의 장부’를 소유한 엘리시아에게는 그 어떤 명약보다도 달콤한 극락의 자극이었다.

두 사람의 마기 공명은 기적적이었다. 칼릭스의 심장에 박힌 검은 마기의 핵이 그녀의 손길이 닿자마자 요동치며 정제된 에너지로 변환되었다. 칼릭스의 붉은 입술 사이로 나직한 더운 숨이 새어 나왔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엘리시아와 닿아 있는 것만으로도, 평생 자신을 좀먹던 마기의 고통이 씻겨 내려가는 듯한 해방감이 그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저는 대공 전하의 본거지, 검은 눈이 내리는 북부 카이엔령으로 갈 것입니다.”

엘리시아가 단호하게 선언했다.

“북부라고? 미쳤군! 그곳은 인간이 살 곳이 아니다! 일 년 내내 얼어붙지 않는 검은 눈이 내리고, 황실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마수들이 들끓는 불모지야! 네까짓 가냘픈 몸으로 그곳에 가겠다는 건 자살 행위다!”

유진이 미친 듯이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엘리시아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와 집착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엘리시아는 그를 무시한 채, 곁에 대기하고 있던 충신 세바스티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세바스티안, 출발 준비를 하세요. 수도의 그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할 만큼 화려하고 호사스러운 마차 군단을 꾸릴 것입니다.”

“예, 아가씨. 로렌 공작가와 황실이 통행을 제한하려 하겠으나, 이미 대비해 두었습니다.”

세바스티안이 안경테를 치켜올리며 이성적이고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

***

사흘 뒤, 제도(帝都)의 중앙 광장은 전대미문의 광경을 목격한 귀족들과 평민들로 가득 찼다.

황실과 로렌 공작가는 엘리시아의 북부행을 막기 위해 막대한 통행세와 제국 경계 관문 통과 비용이라는 사법적, 재정적 장벽을 들이밀었다. 그들이 요구한 금액은 일개 영지가 1년 동안 벌어들이는 세입에 맞먹는 상상을 초월하는 골드였다. 엘리시아를 수도에 묶어두고 고사시키려는 황실의 마지막 위선적인 압박이었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그들의 얄팍한 계산기를 비웃었다.

그녀는 장부에 쌓인 6만 포인트 중 일부를 즉시 가치 환산하여, 제국 보물고의 무제한 담보 계약서와 대공가의 특수 광산 지분을 담보로 막대한 골드를 인출해 냈다.

광장에 도열한 마차들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었다.

최고급 마호가니 원목으로 짜인 마차의 외벽에는 순금으로 정교한 장미 문양이 양각되어 있었고, 마차 바퀴는 마찰을 줄이기 위해 북부의 특수 마법 광석으로 코팅되어 있었다. 마차 내부의 시트는 동대륙에서 수입한 최고급 실크와 거위 털로 채워져 있었으며, 차창은 차가운 바람을 막으면서도 안에서는 밖이 투명하게 보이는 마법 유리로 장식되었다.

그 뒤를 따르는 것은 수도의 유서 깊은 요리사들과 악사들, 그리고 대공가의 정예 기사단이었다.

이것은 피난이나 이동이 아니었다. 공포의 요새이자 불모지라 불리는 카이엔령을 향해 떠나는, 전대미문의 호화로운 리조트 점령 행진이자 거대한 권력 과시였다.

“세상에…… 저 사치스러운 마차 군단 좀 봐.”

“통행세를 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를 줄 알았더니, 아예 황실 관문을 통째로 사버릴 기세군!”

모여든 귀족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황실이 놓은 덫을 비웃듯, 엘리시아는 가볍게 소풍을 가듯 수도의 모든 장벽을 초토화하며 나아갔다.

마차 안, 엘리시아는 비단 쿠션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수도를 벗어나 북쪽으로 향할수록, 창밖의 풍경은 점차 황량해졌다. 푸르던 초원은 빛을 잃고, 대기는 칼날처럼 차가워졌다.

“콜록, 록…….”

엘리시아의 얇은 입술 사이로 가벼운 기침이 새어 나왔다. 시한부인 그녀의 육체는 급격한 기온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뺨이 붉게 상기되며 미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맞은편에 앉아 있던 칼릭스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는 주저 없이 손을 뻗어 엘리시아의 가녀린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녀를 그대로 들어 올려 자신의 단단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전하……?”

엘리시아가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칼릭스는 대답 없이 그녀의 차가운 손을 제 뜨거운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그 순간, 칼릭스의 몸을 지탱하던 검은 마기 장벽이 요동치며 엘리시아의 온몸을 감싸 안았다.

웅웅웅―!

칼릭스의 체내에 잠재되어 있던 강력한 마기 핵이 엘리시아의 단순한 접촉만으로도 격렬하게 공명했다. 그것은 파괴적인 폭풍이 아니라, 오직 엘리시아만을 위해 정제된 따뜻하고 거대한 열기였다.

칼릭스는 평생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던 마기를 스스로 조절하여, 오직 엘리시아의 감기 기운과 한기를 완벽하게 방어하는 온화한 결계로 변환시켰다.

[시스템: 특수 체질 ‘칼릭스 카이엔’의 마기 공명으로 체온 결계가 활성화되었습니다.] [효과: 한기 면역 상태 돌입, 장부 적자 수치 실시간 결산 완료!] [수명 연장: +5일]

엘리시아는 칼릭스의 가슴팍에 이마를 기댔다. 그의 단단한 흉판에서 전해지는 규칙적인 심장박동과, 전신을 달구는 마기의 따뜻함이 그녀의 온몸을 노곤하게 녹여갔다.

더할 나위 없는 극락이었다. 고통이 사라지고, 영혼이 차오르는 감각에 그녀의 입술 끝이 호선을 그렸다.

“추운가.”

칼릭스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엘리시아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그의 손길에는 소유욕과, 그녀를 잃고 싶지 않다는 은밀한 집착이 묻어나고 있었다.

“아니요. 아주…… 따뜻해요, 칼릭스.”

엘리시아가 그의 목덜미에 숨을 불어넣으며 속삭였다. 칼릭스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기묘한 열기가 떠올랐다.

마차가 마침내 제국 최북단, 카이엔 대공령의 경계선에 다다랐을 때였다.

창밖의 풍경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하늘에서는 하얀 눈이 아닌, 얼지 않는 기괴한 ‘검은 눈’이 진흙처럼 흘러내리며 대지를 뒤덮고 있었다. 사방을 메운 검은 장벽 같은 안개 속에서, 스산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두두두두―!

대지가 거칠게 흔들렸다. 마차를 호위하던 대공가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마수 군대다! 경계를 강화하라!”

기사단장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검은 안개 속에서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수백 마리의 마수들이 마차 군단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일반적인 귀족 영애라면 비명을 지르며 기절했을 공포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엘리시아는 마차 창문을 열고 그 광경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마수 군대는 단순한 살육의 괴물들이 아니었다. 마수들이 뿜어내는 검고 무거운 마기의 파동은, 그녀의 ‘극락 장부’와 공명하며 거대한 노다지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저 마기들을 전부 흡수해 장부의 포인트로 치환한다면?

그녀의 수명은 수십 년, 아니 어쩌면 영원히 늘어날 수도 있었다.

엘리시아의 눈동자가 도파민에 중독된 포식자처럼 퇴폐적이고 아름답게 빛났다. 그녀는 칼릭스의 품에서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며, 폭풍 속의 마수들을 향해 황홀한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 순간, 마차 차창 밖으로 몰아치던 검은 눈발과 기괴한 마기 장벽이 귀를 찢는 듯한 울음소리를 지르며, 엘리시아 일행을 영토의 깊은 심장부로 강하게 잡아끌 당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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